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97
97. 인턴 김준위의 시점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직 뜯지도 않은 명함 한 통이 그대로 있다.
—
마켓 프레시 가공식품 팀
사원 김준위
—
마켓 프레시라는 이곳에 입사한 지 벌써 5개월이 훌쩍 지났다.
근데 지금까지 뭘 한 것일까?
처음에 원지훈 부장님을 따라 한두 번 미팅을 나간 것이 전부다.
과장, 대리님들은 나에게 허드렛일만 줬고, 그나마 일다운 일을 주던 김태하 팀장님과 대화를 한 것도 몇 주가 지난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펼쳤다.
정성껏 손으로 쓴 원지훈 부장님의 메모.
드디어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4개월 만에.
이번 기회를 잡고 싶다.
꼭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
* * *
오후 4시.
눈앞에는 천우라는 대형 식품 공장의 간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누가 닦아 놨는지, 은색 간판에 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견과류와 육포, 버터 오징어 들이 주력인 천우식품.
대형 마트와 편의점 등에 이들의 제품이 상시 진열되어 있고, 우리 마켓 프레시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제품군이다.
사실, 나는 이곳의 제품들은 먹어만 봤지, 담당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천우식품을 담당하는 박지훈 대리가 소개해 준 적이 없다.
만약 원지훈 부장님이 미리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 주지 않았다면, 이 출입문을 열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출입문 옆의 벨을 누르고, 스피커에 가까이 다가갔다.
“전화 드린 마켓 프레시, 김준위라고 합니다.”
딸각!
공장의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나는 천천히 철문을 밀어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김준위 씨?”
낡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달려 나왔다.
요란한 문양이 새겨진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아마도 나와 통화했던 최동엽 대리로 보였다.
“최동엽 대리님?”
“네. 최동엽입니다.”
최동엽 대리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것인가?
내가 천우식품이라는 대기업의 대리와 만나다니…….
내 꿈이었다. 내가 먹고 좋아하는 식품 회사의 직원들을 만나는 것이.
그래서 마켓 프레시의 MD가 된 것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네. 가시죠. 부장님이 기다리십니다.”
부장? 지금 부장이라고 말한 것인가?
나 같은 인턴을 상대하기 위해 상장 회사의 부장이 직접 미팅에 나오다니.
어제까지 집구석에서 천우식품의 견과류를 씹어 먹던 나인데.
입가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그를 따라갔다.
유난히 큰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테이블 앞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50대의 남자가 일어났다.
“김명운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곧바로 명함을 내밀었다.
맞다. 오늘 원지훈 부장님이 주신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김명운 부장이 맞다.
나는 주머니로 손을 넣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명함을 셌다.
그리고 정확히 두 장을 꺼내 김명운 과장과 최동엽 대리에게 건넸다.
최대한 공손하게.
“김준위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명함 지갑이 없는 것이 아마추어같이 보일 뻔했었는데, 나름 잘 넘겼다.
내 자연스러운 행동을 본 이들은 아마도 고객사를 관리 잘하는 MD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사관 출신이세요? 하핫“
최동엽 대리의 웃기지도 않는 농담.
준위라는 이름 때문에 자주 듣던 말이다.
나는 그때마다 매번 지금과 같은 대응을 해 왔다.
“네. 기무사 준위였습니다.”
“…….”
보통은 피식 웃어야 정상인데…….
최동엽 대리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것 같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 위기를 빨리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하“
나 혼자 웃는다.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최동엽 대리.
아마 그는 내가 상당히 재미없는 놈이라서, 이번 미팅은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할 줄 모르자, 김명운 부장이 한 손을 펼쳐 보이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살았다. 이 분위기를 넘길 방법을 한참 동안 생각했는데, 그의 손짓 하나에 모든 상황이 변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 있던 제안서를 꺼내려 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하지만 손이 떨렸던 것인가?
가방에 대충 찔러 넣어 놨던 명함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지고 말았다.
“아…….”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왜 이리 바보 같은 것일까?
함께 미팅을 나갔던 원지훈 부장님은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것일까?
이들은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허겁지겁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떨어진 명함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의 탄력을 받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잠금을 풀지 않은 휴대전화의 액정에 발신자와 메시지 일부가 보였다.
—
원지훈 부장님
준위야. 천우의 김명운 부장은…….
—
나는 확신했다.
원지훈 부장님의 메시지라면, 분명히 이 상황을 만회할 힌트를 줬을 것이라고.
침착하자. 최대한 침착하자.
나는 휴대전화를 주우며 한 손으로 패턴을 풀고, 이들 모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
원지훈 부장님
준위야. 김명운 부장에게 개그 치려고 하지 마. 그 사람은 어떤 개그도 안 통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미팅은 최대한 담백하고 간결하게,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생각해 본다고 하면 거절이니까, 그때는 끝까지 매달려야 성공할 수 있을 거야.
—
역시 원지훈 부장님.
그는 부하 직원을 배려하실 줄 아는 분이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보내 주신 메일은 확인했습니다.”
차가운 목소리의 김명운 부장.
그가 먼저 이 판의 주도권을 쥐려 하고 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원지훈 부장님의 조언대로 행동하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해 보셨나요?”
“글쎄요.”
“그럼 다시 말씀드리죠. 매일 견과에 들어가는 건 크랜베리를 정식으로 수입하고 싶습니다.”
“마켓 프레시에서 직접 판매하시려고요?”
“네.”
“건 크랜베리는 수입 식품이라, 마켓 프레시랑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현재 수입 제품들도 늘려 가고 있습니다. 마카다미아나 피스타치오 같은 경우도 꾸준히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알려진 브랜드들이잖아요.”
“건 크랜베리도 판매를 시작하면 브랜드의 가치를 올릴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좀 잘한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은 조금 전까지 버벅대던 내가 180도 달라져서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흠……. 개별 포장 제품이 아닌데 괜찮으시겠어요?”
개별 포장이라…….
너무 아마추어같이 생각했구나.
천우처럼 견과류 믹스를 판매하는 회사가 통짜로 된 제품을 쓸 거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등에서 땀이 흐르고 입술이 마른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주머니의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야 한다.
원지훈 부장님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나는 상대방을 마주 보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능수능란한 손짓으로 패턴을 풀고, 눈을 아래로 깔아 내용을 읽었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
원지훈 부장님
제품 포장은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해. PB로 들어가면 되니까. 그리고 500g 이상씩 건 크랜베리만 판매해서 매일 견과랑은 중복되지 않는다고 하고. 아 참 표정 안 좋으면, 다음 달에 사입수량을 늘리거나, 메인에 배너 노출 혹은 특판 걸어 준다는 미끼를 던져.
—
미쳤다. 이게 짬밥이라는 것인가?
원지훈 부장님은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다.
아니, 몇 수 앞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깍지를 꼈다.
그들에게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MD로 보이고 싶었다.
“저희도 충분히 포장할 수 있습니다. 마프 PB 제품들 잘나가는 거 아시죠?”
“아……. PB로 나가면 되겠군요. 근데…….”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안다.
그리고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려면 지금이 기회다.
나는 한 손을 살짝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물론 매일 견과와 중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최소 500g 이상의 팩으로 건 크랜베리만 판매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괜히 걱정했군요.”
자신들이 얻어가는 것이 없다는 말인가?
김명운 부장은 그렇다고 말했지만, 표정은 좋지 못했다.
원지훈 부장님은 참 귀신같다.
지금의 상황까지 예측하고 내가 던질 무기를 주다니.
“요즘 온라인에서 매일 견과 판매량이 좀 떨어지는 거 같던데. 괜찮나요?”
“맞아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데일리 견과 때문이죠?”
“네.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니까 도저히 당하질 못하겠네요.”
“그럼 제가 하나 제안을 드려도 될까요?”
“네?”
“이번에 마켓 프레시에서 특판을 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특판이요?”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하얀 이를 보이는 김명운 부장.
관심이 있다는 시그널이다.
그래 이게 MD지.
내 가는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우유랑 매일 견과를 번들로 묶으면 어떨까요?”
“우유요?”
“네, 저희 우유 잘나가는 거 아시죠?”
“그럼 저희야 좋죠. 근데 그게 가능할까요?”
마켓 프레시의 자랑 PB 제품들은 아직 다른 제품과 번들로 판매한 적이 없다.
하지만 3주 전 팀 회의에서 김태하 팀장님이 제안을 했었다.
잘나가는 PB와 다른 제품을 섞어 보자는 제안을 말이다.
“당연히 가능하죠. 저만 믿으세요.”
“고맙습니다. 대표님이 많이 좋아하시겠네요.”
“네, 그럼 건 크랜베리의 농장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미국의 농장에 의사를 물어보고, 오케이 떨어지면 바로 미팅을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겨우 30분 만에 원지훈 부장님의 미션을 끝냈다.
나는 손에 흐르던 땀을 바지에 대충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났다.
김명운 부장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내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하하하 준위 씨 성격이 시원시원하시네요. 원 부장님처럼요.”
존경하는 그분과 비슷하다니…….
나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다.
이 기분 좋은 칭찬에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최고의 칭찬이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원 부장님이 마프에서 그 정도의 존재인가요?”
“네. 그런 분이십니다.”
당당한 걸음으로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김명운 부장과 최준엽 대리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 장수가 부하 둘을 뒤에 달고 오는 것처럼.
“특판 일정이랑 프로모션 내용은 메일로 보내 드리죠.”
내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것이 사람을 믿게 만드는 마력인가?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 혼자 감동하고 말았다.
“저희 특판은 준위 씨가 기획해 주시는 거죠?”
날 믿는구나.
겨우 30분 미팅 만에 내가 이들에게 믿음 줬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유난히 맑은 하늘이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 줬다.
나는 이마를 가리고 있는 답답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원지훈 부장님께 승리의 메시지를 보냈다.
—
미션 클리어!
—
기다렸던 것처럼 곧바로 도착한 답장.
—
그럼 빨리 튀어 와!
—
나는 가방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앞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