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worker listening to memories RAW novel - Chapter 99
99.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 * *
“그럼, 잔금은 20일 후에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상익 사외이사.
체인마켓의 대표였으며, 4%의 지분을 가진 남자.
김재열 사외이사 덕분에 그가 마음을 열었다.
나는 주식 양도 계약서에 마지막 서명을 했다.
장상익 사외이사는 계약서를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군요.”
“네?”
“기영이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최 이사에게 넘겼을 겁니다.”
차기영 부장.
리베이트 건으로 내쳐진 사람으로, 그것을 밝혀 낸 것이 바로 나다.
근데 그는 왜 원수 같은 나를 지목한 것일까?
“차기영 부장님이요?”
“네, 기영이가 이왕 같은 값에 판다면 원 부장님에게 내주라고 합디다.”
“…….”
“미운 정도 정인가 보네요.”
“차 부장님은 잘 계신가요?”
“아니요. 얼마 전에 바론에서 나와서 치킨집을 오픈한다고 하더군요.”
바론에서 쫓겨난 것도 바로 내가 팝업스토어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의 잘못된 선택에서 시작됐지만, 미안한 마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조만간 찾아뵌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요.”
장상익 사외이사는 나와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김재열 사외이사와 뭔가를 얘기하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장삭익 사외이사를 배웅한 김재열 사외이사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 졸부! 이제 좋냐?”
“졸부가 뭡니까? 졸부가.”
“졸부를 졸부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네, 맘대로 하세요. 좋아 죽겠으니까.”
김재열 사외이사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씩 웃으며 물었다.
“너 이정우 주식 6%도 먹으려고 한다면서?”
“어떻게 아셨어요?”
“촉새 같은 이정우가 나한테 한참 떠들다 갔어.”
“흠…….”
“그래서 방법은 있고?”
이정우 이사가 미국으로 간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하지만 집에서 머리만 굴릴 뿐, 그가 제시한 120억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요. 욕심만 내는 겁니다.”
“더 꼬불쳐 둔 돈은 없나 보지?”
“네. 아쉽게도 없네요. 원스몰 때 쥐꼬리만 한 월급을 준 대표 때문예요.”
“야! 너 말에 뼈가 있다?”
“제가 틀린 말했습니까?”
김재열 사외이사는 내 표정을 살피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천하의 원지훈이가 빌빌거리고, 이거 재미있는데?”
“참 재미있는 거 많아서 좋으시겠네요.”
나는 그를 무시하고, 서명한 주식 양수도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계약서를 봉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거 먼저 올리렵니다. 회사로 들어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싫어, 나 약속 있어.”
“뭐 그럼 혼자 가죠. 재미있게 노세요.”
“응, 수고.”
나는 계속해서 히죽거리는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 * *
“부장님! 부장님!”
마성근 팀장이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얼마나 불렀는지 아세요?”
“아……. 그랬어요?”
몰랐다.
머릿속에는 120억이라는 돈과 이정우 이사의 6%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마성근 팀장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요?”
“청년고기 고재익 대표가 근처 미팅 왔다가, 잠깐 들린다고 해서요.”
“아. 그렇군요.”
내가 알았다는 답을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부장님을 뵈러 온답니다.”
“저를요?”
“부장님이 전화 안 받으셔서 저한테 했다고 하네요.”
나한테 딱히 볼일이 없을 텐데…….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모니터를 바라봤다.
잠시 후, 고재익 대표가 찾아와, 나는 그와 함께 꼭대기 층의 카페로 향했다.
“여기 빵이 참 맛있네요.”
고재익 대표는 내가 가져다준 베이커리와 커피를 마시며, 환하게 웃었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나요?”
“아뇨, 그냥 부장님 얼굴 뵈러 왔습니다.”
“네, 그렇군요.”
별 이유도 없었나 보구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요새 청년고기 잘 나간다는 소문 들었습니다.”
“다 부장님 덕분이죠.”
“아닙니다. 대표님이 워낙 잘하시니까 그렇죠.”
“과찬이십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별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고재익 대표는 어리지만 차분하고 침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친구처럼 지내기엔 참 힘든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말없이 커피를 마시자,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얼굴에 뭐가 뭍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한 손으로 입 주위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아닙니다.”
고재익 대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전 제 얼굴에 뭐라도 묻은 줄 알았네요.”
“부장님.”
형식적이던 미소를 짓던, 고재익 대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마켓 프레시의 주식을 좀 살 수 있을까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혹시…….
“김재열 이사님한테 들으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재열이 형님이 오셨었습니다.”
“형님이요?”
가끔 보면 김재열 사외이사는 참 놀라운 사람이다.
이 딱딱하고 FM에 가까운 청년과는 언제 또 가까워진 것인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분 꽤 친해지셨나 보네요. 언제부터 형님이 된 겁니까?”
“방금요.”
“하…….”
“그것보다 부장님. 제가 돈이 조금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마켓 프레시의 주식을 조금 살 수 있을까요? 물론 원 부장님을 통해서요.”
나를 통해서 사고 싶다는 것은 내게 투자를 하겠다는 말이다.
이정우 이사가 모아 온 돈도 부동산을 하는 아줌마들 돈이었고, 최구열 이사의 지분 중 절반도 미국 사업가들의 돈이다.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 때문이라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니요. 꼭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나서요.”
“…….”
“20억 정도는 따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왜요? 혼자만 많이 버실 생각이셨습니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고재익 대표.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혹시나 잘못되면…….”
“잘못될 게 있나요?”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
고재익 대표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20억 큰돈이긴 합니다. 그리고 부장님이 안 계셨다면 만져 보지도 못했을 돈이기도 합니다.”
“…….”
“돈을 그냥 드리거나 빌려 드리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투자를 해 보고 싶은 겁니다.”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테이블 위의 내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주세요.”
생각도 못했다.
고재익 대표가 나를 찾아와서 직접 투자해 주겠다는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고재익 대표를 설득한 김재열 이사.
그도 참, 성질이 급한 사람이다.
나는 고재익 대표의 손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지이잉! 지이잉!
퇴근을 준비하던 내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사장님 왜요?”
– 넌 맨날 왜냐고 묻더라.
양지푸드의 함중식 사장.
원스몰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람으로, 나와 가장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 퇴근하는 거지?
“네.”
– 나 강남에 볼일 좀 있어서 나왔거든. 끝났으면 소주나 한잔할까?
“저 약속 있는데요?”
– 뻥 치지 마.
맞다. 거짓말이다.
며칠 전에 그와 술을 마시고 집에 데려다줬을 때, 형수님의 걱정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귀신이네.”
– 잔말 말고 당장 이쪽으로 튀어 와. 미래의 장인께서 오랜만에 강남 구경 나왔는데 말이야.
“그래서요?”
– 요즘 이 동네 클럽이 그렇게 핫하다면서?
“자꾸 그러시면 형수님께 이릅니다.”
– 어쭈?
“어쭈고 뭐고, 빨리 집에 들어가세요. 형수님 저번에도 화내셨잖아요.”
– 여기 삼성역이거든?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내 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그가 있는 삼성역으로 향했다.
삼성역 3번 출구 앞의 커피숍.
옅은 베이지색 코르덴 재킷에 검은 정장 바지.
어울리지 않는 빨간 목도리를 한 함중식 사장이 스타벅스의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패션 테러리스트인 그는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인물이다.
“지훈아!”
또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지.
그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카페의 사람들이 내 이름을 모두 알 정도였다.
“여기 사람들이 다 내 이름을 알겠네.”
“왜? 창피해?”
“아닙니다. 뭐 한두 번 아니고……. 그나저나 요새 돈도 잘 버시면서 옷이 이게 뭡니까?”
“왜? 이거 명품이야.”
재킷을 벌려, 안에 상표를 보여 주는 함중식 사장.
정말 100만 원이 넘는 명품 재킷이다.
“후……. 어쩜 이렇게 안 어울리십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해.”
“내가 좀 그렇긴 하지. 하하하.”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는 함중식 사장.
하마터면 높은 의자가 뒤로 넘어져 버릴 뻔했다.
내가 바로 옆에 앉자, 그는 창문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섭섭해서 말이야.”
“뭐가요?”
“조금 전에 재열이 전화 받았는데, 넌 어떻게 그런 얘기를 재열이한테 듣게 만느냐?”
설마…….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장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공장 새로 올려서 돈도 없으시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부담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왜 부담이야?”
“네?”
“왜 배 아프냐? 내가 돈 벌 거 같으니까?”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이번에 새로 지은 공장에다가 모두 넣으셨잖아요.”
함중식 사장은 흘러내린 목도리를 뒤로 젖히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뻥 치지 마요. 내가 사장님 주머니 사정 다 아는데.”
“기보에서 자금 받을 수 있어. 그 돈으로 메우면 돼.”
“그래서 얼마나 있으신데요?”
“40억 정도는 땅길 수 있어.”
“하……. 그러다 깡통 차십니다.”
함중식 사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그럼 미래의 사위한테 얹혀서 살지 뭐.”
“그러다 형수님 아시면 어떡하시려고요?”
“너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
“사장님! 40억이 무슨 장난입니까?”
“장난 아니지. 그래서 너한테 투자하는 거야.”
“…….”
“지훈아, 난 말이지. 가능성 없는 사람에게는 1원도 안 써. 너도 알잖아. 내가 직원 한 명 한 명 얼마나 공들여서 뽑는 거.”
“후회 안 하실 자신 있습니까?”
“후회할 거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돈은 이틀 안에 마련할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주식이나 확보해.”
함중식 사장은 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내 등을 토닥이고, 씩 웃어 보였다.
“커피 더럽게 쓰네.”
“어디 가세요?”
“집에?”
“소주는요?”
“오늘은 그냥 마누라랑 해야겠다. 넌 빨리 들어가.”
그는 내게 손을 흔들고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이틀 안에 40억을 마련해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나를 대신해서 사람들을 만나 준 김재열 사외이사.
마장동에서 바로 달려온 고재익 대표.
언제나 든든한 큰 형님 같은 함중식 사장.
이번엔 내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왜? 너무 좋아 죽겠지?
“저한테 상의는 좀 하고 가셨어야죠.”
–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내가 네 이름 팔아서 절반은 마련했는데, 나머지 절반은 네가 직접 해. 할 수 있지?
“그 정도는, 당연하죠.”
나는 그와 전화를 끊고,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