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24
123화 만악의 근원 (1)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마친 우리들.
“어라? 용왕님.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바람이 안 불어서.”
“하하하. 바람이라는 게 딱딱 불어오진 않지요.
이런 일은 굉장히 흔하지만, 그래도 무척 뻘쭘하다.
뭐, 며칠 늦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용왕님. 이건 별거 아닌데…….”
“말린 과일입니다.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저 같은 이는 일일이 기억 못 하시겠지만, 지난번 폭동 때 용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건 육포입니다~ 제 딸을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두 번 구운 밀떡입니다. 무척 딱딱하지만, 물에 불려 먹으면 무척 맛있습니다.”
믈라카 사람들이 괜히 한 번씩 들러서 뭔가를 계속 주었다.
콜레라와 말라리아라는 전염병에서 많은 돈을 써서 그들을 구했으니까.
지난 믈라카 폭동 때, 그나마 유일하게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 덕분이기도 했다.
“마음은 고맙네만,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어.”
“아이고. 용왕님의 가호 덕에 제 아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정말 간소한 성의입니다.”
그러니까 성의 표시하지 말라고.
굳이 하고 싶으면 금괴나 땅문서 같은 걸 갖고 오라고.
먹을 걸 주면 처리하기 난감해서 하는 말이다.
먹자니 기생충이나 세균 감염 등이 걱정되고, 버리자니 마음을 짓밟는 것 같아서.
“전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슬슬 승선하셔야 합니다.”
“바로 가지.”
3일 만에 순풍이 왔다.
이때를 놓치면 또 며칠 기다려야 할 수도 있으니 빨리 움직여야겠다.
“나는 이만 가겠네. 다들 건강하고, 열심히 일해서 부자 되게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조선에서는 사치를 경계하기에 부자 되라는 말이 예의에 어긋날 수 있으니까.
보통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공부 열심히 하라.’, ‘부모님께 효도해라.’ 같은 말이 덕담이 되지.
현대의 배와는 달리 승선도 시간이 걸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다음에 또 와주십시오!”
“열심히 살고 있겠습니다!”
“가르침대로 자기계발에 힘쓰겠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나리를 향한 민심이 대단하군요.”
석피가 감동한 것처럼 말을 걸었다.
“민심이라기보다는 인기에 가깝지 않을까?”
“그게 그거지요.”
“그렇긴 해.”
“많은 사건이 있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과 끝이 좋으니 믈라카가 좋은 느낌으로 기억에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자주 오가다 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몰라.”
“개인적으로도 참 좋았습니다.”
“왜?”
“제 외모를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구수한 이름을 들으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석피는 중동 미남의 외모를 하고 있다.
눈동자도 파랗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믈라카에서는 그를 훔쳐보며 마음만 불태우는 처자들이 많았다.
반대로 조선에서는 알게 모르게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달단(타타르인)은 천한 도축업에 종사한다는 팩트에 기반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유럽이나 이슬람교에서는 도축업자가 꽤 고급 기술직으로 취급받는다고 한다.
고기를 자주 먹는 유럽 귀족에게는 고기의 질이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할랄 도축이라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연애 좀 했냐?”
“연애요? 말도 안 통하는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결혼 말고 연애.”
“맙소사.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가 많은 곳에서 연애만 했다가는 연인이 명예 살인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아니 이 시대이기에 명예 살인은 더욱 많다.
현대인의 윤리 관점에서는 당연히 미개한 풍습이지만,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해도 된다.
만약 딸 중 한 명이 혼전 임신을 해버리면, 그 집안의 딸들은 전부 순결을 의심받게 된다.
그러니까 이건 딸 한 명의 비행이 아니라, 자칫 그 집안 모든 딸들의 미래를 막아버리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쓸 말은 아니지만, 비유하자면 가문에서 발급하는 품질보증서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렇습니까?”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어떤 부인이 대놓고 불륜을 수도 없이 저질렀어.”
중추원 부사 조화의 아내.
시랑찬성사 김주의 딸 낙안 김씨 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불륜 대상 중에는 그 집안의 머슴도 있었다.
‘마님은 돌쇠에게 왜 쌀밥을 주었을까?’의 현실판이다.
“그게 방원이 형 귀에도 들어갈 정도로 조정이 뒤집혔어.”
현대의 관점에선 억울할 일인 게, 먼저 불륜을 한 건 그 남편인 중추원 부사 조화다.
그러니까 맞바람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처음엔 피장파장이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어서 어떻게든 묻혔는데, 용서받고 나서도 계속 불륜을 했다는 것.
오히려 더 대담해져서, 사대부 부인들과 계모임 비슷한 걸 만들어서 단체 불륜을 주도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 부인은 한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향후 그 부인의 집안 딸과 결혼한 남자는 주요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버렸어.”
사대부들은 유배 보낼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킬방원은 유배 보낼 정도는 아니라며 그냥 한양에 들어오지 못하는 정도로 끝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환생한 나비 효과라고 생각하는 게, 원래라면 김씨 부인의 엽기 불륜 행각은 수십 년간 더 이어진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기억 안 나는데, 왕실 종친과 재혼하고 나서도 어떤 스님하고 불륜을 했다나.
불륜을 하다가 발각되자, 몸싸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운 나쁘게 왕실 종친의 거시기를 잡아 뜯었고, 그 결과 왕실 종친은 죽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큰 사고가 된 것이다.
근데 하필이면 저 사건이 벌어질 때가 킬방원이 한참 나를 부마로 만들려고 하면서 ‘조선 여자가 제일이니라.’라고 강변하던 시기였다.
나는 ‘이 사건을 알고 있는데요?’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피했고.
“생각해보면 남자도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고, 첩을 두기도 하는데 여자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동감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해도 돼.”
“그렇습니까?”
“생각해봐. 내 자식이라 생각해서 집안의 자원을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 자식이 아니야. 그때 충격은 말도 못 한다.”
“그렇긴 하겠네요…… 어? 나리께서 그 충격을 어떻게 아십니까?”
“옛날에 간접적으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지.”
에서 당했던 뻐꾸기를 말하는 것이다.
“조숙하셨군요.”
“조숙했지.”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나리의 부인분들은 원하시는 걸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습니까?”
“나는 모든 일에 의심부터 하는 사람이지만, 가족과 내 사람 만큼은 의심하고 싶지 않다.”
인생이 너무 퍽퍽해지니까.
“의심 가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결혼하지도 않았을 테고.”
“멋진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한 말이 아니라, 명심보감이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야. ”
사람이 의심스럽거든 쓰지 말고, 일을 맡겼으면 의심을 하지 마라.
“고려 말기에 지어진 책인데, 기회가 되면 봐봐. 쉽고 유익하다.”
“귀국하면 꼭 보겠습니다.”
미루는 걸 보니 안 보겠구먼.
대화하는 사이,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순풍이다.
이대로면 2일 정도 후엔 다음 목적지인 파사이 술탄국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어떤 것 말씀입니까?”
“내 생각보다 우리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그렇긴 하죠?”
“이 정도 기술력을 갖고도 왜 멀리 뻗어 나가지 못했을까?”
“지금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안 갔으니까.”
조선도 마찬가지다.
조선술도 괜찮고.
항해술도 나쁘지 않고.
그런데 동남아시아와도 교역을 안 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왜구라든가 여러 문제가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뻗어 나가면 되지요.”
“우문현답일세.”
***
2일 정도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3일 걸려서 겨우 파사이 술탄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금 느끼는데 양놈들은 양심이 없다.
이렇게 큰 땅을 아시아라는 카테고리로 묶어버렸으니까.
아프리카도 마찬가지긴 한데, 특히 아시아는 분류가 필요하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시베리아로 4분할은 해야 하지 않을까.
“전하…….”
생각해보니까 이 시대에는 아직 그런 분류가 없잖아.
먼저 하는 사람이 임자니까, 내 멋대로 분류해도 되는 거 아닐까?
“전하?”
“응?”
“말씀을 드렸는데도 반응이 없으셔서 향후의 일을 고심하시는가 생각했습니다.”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긴 했지.”
이소군이 생각하는 것만큼 유익한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불렀어?”
“잠시 후면 목적지에 도착하니 미리 준비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보니까 항구도 잘 정비되어 있고, 특별히 신경 쓸 건 없어 보이는데.”
베테랑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이제 선원들도 상당히 능숙하다.
애초에 재능 있어 보이는 사람들로만 뽑았고, 1년 넘게 항해를 지속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하던 대로 하라고 전달하겠습니다.”
이소군이 부선장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소통을 도와주는 때가 있다.
가끔 내가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면 다른 이들은 말을 걸기 꺼린다고나 할까.
원래부터 있었던 현상은 아니고, 내가 왕 위에 오른 이후에 발생한 현상.
그리고 믈라카 사태를 겪은 후에는 더욱 심각해진 느낌이 있다.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여러 일을 겪으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다.
동네 바보형인 줄 알았는데, 점점 다른 면모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위계질서를 잡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감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래서야 조직의 소통이 막혀버리는 악영향이 나타날 것 같다.
대책이 필요하다.
“전하.”
“응?”
전달을 마친 이소군이 돌아왔다.
“믈라카에서도 느꼈는데,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 국가에서는 녹색을 무척 좋아하는 경향이 있군요. 왜 그럴까요?”
“초록색은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징해.”
그래서 이슬람교는 상대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지하드로 대표되는 무장 투쟁을 망설이지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 국기에는 초록색이 없어서 쉽게 항복한다.
농담이다.
사실 프랑스가 항복하거나 쉽게 도망간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사실이다.
오예하면 된다.
프랑스가 엘랑하지 않는 때는 없는가?
있다.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상대할 때는 그 누구보다 용맹해진다.
개인적으로는 자국 왕의 목을 베어버린 경험과 냉전 시기 나토를 탈퇴하며 핵무기를 개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대명에서 녹색은 조화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집니다만.”
“진짜야. 그래서 이슬람교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고 하지.”
“그렇군요. 예로부터 중화에서는 대월 등지에서 주로 산출되는 비취옥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회회교인들도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상인 다 됐네.”
이야기를 듣자마자 돈 벌 생각부터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충분히 장난쳤으니까, 이제 진실을 알려줘야겠다.
이러다 진짜로 믿을라.
“농담이고 이슬람교의 발원지는 황량한 땅이야. 이 일대를 제외하면 주요 이슬람 국가들은 대부분 황무지나 사막이지.”
중동도 그렇고, 사하라 사막을 끼고 있는 북아프리카 국가도 그렇다.
“그렇다 보니 녹지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녹색을 무척 좋아하지.”
그래서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이슬람국가의 국기에는 녹색이 많다.
옛날 리비아 국기의 경우 전부 녹색으로 칠하기만 하면 돼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기 쉬운 국기로 선정될 정도였다.
“파사이 술탄국은 녹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만.”
“남해의 국가는 예외야. 여기서 창시한 게 아니라,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개종한 거니까.”
나는 이소군과 대화를 나누며 평화롭게 있었지만, 갑판 위는 분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돛을 올리고 천천히 움직여라. 혹시라도 암초가 있는지 바다의 색을 잘 봐! 만약 배에 구멍이라도 내면 휴가도, 성과금도 없다!”
부선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선원 대부분이 항해 경력이 미미한 데 반해, 부선장은 무려 30년 동안 배를 탄 항해 고인물이다.
정말 보기 드문 인재다.
정화의 원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해금령이 내려졌었는데, 30년 항해 고인물이라니.
허가장에서 소개해 주었다.
“예!”
휴가가 없어진다는 말에 선원들은 긴장의 고삐를 바로 움켜쥐었다.
며칠 동안 육지를 밟아보지 못한 선원들에게 휴가 박탈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근데 정말 걱정되는 게.
선원들이 휴가를 받으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유흥가란 말이지.
항생제도 없는 시기에 성병이 퍼지지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된다.
“파사이 술탄국에서는 얼마나 머무르실 예정입니까?”
“바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길어야 7일이 아닐까?”
목적지가 아니라 거쳐 가는 기항지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적당한 숙소를 섭외해 두겠습니다.”
“부탁해.”
나는 파사이 술탄국의 술타나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
입궁은 믈라카 왕국을 방문할 때보다 훨씬 편했다.
벵골 술탄국의 사신인 이븐 알 하쉬르와 한타와디 왕국의 사신인 나이 쉐 키인이 안내했으니까.
“어서 오세요. 타국의 왕을 보게 되는 건 처음이군요.”
술타나는 능숙한 조왜어로 나를 맞았다.
내가 조왜어를 할 수 있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한 듯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양국의 우호와 바다의 평안이 쭉 지속하기를 바랍니다.”
술타나의 이름은 라투 나흐라시야 말리쿨 자히르.
선대 술탄이자 5대 술탄인 자이날 아비딘의 딸이다.
미인상은 아니다.
턱은 각졌고, 코는 두꺼운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피부가 맑고 밝았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지라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위엄있고, 현명한 여인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종갓집 맏며느리 상.
나이는…… 잘 모르겠다.
“용왕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하. 악명이 아니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특히 모두를 차별 없이 대한다는 점에서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처음 보는 귀한 손님께 할 말은 아닙니다만…….”
어쩐지 불안을 느끼게 하는 붙임말이다.
“혹시 여성의 존엄성이나 고귀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