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76
175화 역사의 기로 (1)
치타공은 예로부터 아랍 상인들이 동쪽으로 향할 때 항상 이용하는 국제 무역항.
나로서도 어느 정도 익숙한 나라이긴 한데, 다름 아닌 게임 때문이다.
에서 자주 애용하는 항구니까.
정확히 말하면, 서브 퀘스트로 중국에서 차나무 종자를 얻어서 치타공 항구에 가져다 놓으면 아주 잘 자란다.
그럼 굳이 중국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서 차 무역을 하면 된다.
물론 명나라는 물론, 청나라도 차를 국가 기밀로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나라는 산업스파이를 보내서 몰래 훔쳐왔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벵골 술탄국에 역사에 대해서는 대략 아는데, 참 굴곡이 많은 나라다.
이름은 똑같이 벵골 술탄국이지만 왕조가 자주 바뀌니까.
심지어 환관에게 왕위를 빼앗긴 적도 있다.
게임 하는데, 갑자기 흑인이 벵골 술탄국의 왕이 되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벵골 술탄국은 에티오피아계 노예를 사용하고, 그들을 환관으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중국사에서 흔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야 하나.
다만, 상인들을 통해 알아본 내용으로는 현재 벵골 술탄국은 성세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100년 넘게 외세의 침략이 없었던 덕이다.
오른쪽엔 자기들끼리 통일 전쟁을 반복하는 잉와와 한타와디.
왼쪽은 곳곳에 반란과 독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델리 술탄국.
그 외엔 벵골 술탄국을 위협할 만한 나라가 없으니까.
덕분에 이 시대를 기준으로 동인도는 물론, 인도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힐 정도다.
그리고 벵골 술탄국 경제의 핵심은 바로 이 치타공 항구.
어느 정도냐 하면 이 항구를 아라칸 왕국에게 뺏기자, 곧바로 벵골 술탄국의 경제가 폭삭 망하여 경제 위기가 왔을 정도다.
반대로 아라칸 왕국은 치타공 항구를 이용해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고.
……근데 지금 아라칸 왕국은 라자다릿이 정복했는데.
걔네는 언제 독립하고, 언제 벵골 술탄국으로 오는 거지?
이게 문제다.
대충 흐름은 아는데, 정확히 언제 일어나는지를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원래 미래는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하는 것.
미리 대비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
……내가 그걸 못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세계 전생 트럭에 치여 환생했는데, 마왕성 옆 마을에서 환생한 꼴이다.
하필이면 그 마을은 마왕의 보호를 받기로 약속했고.
그 상황에서 마왕은 나를 눈여겨보고 있고.
진짜 개 같은 상황이다.
차라리 포르투갈의 엔리케, 혹은 엔히크 해상왕자로 태어났으면 진짜 내 능력을 마음껏 뽐냈을 텐데.
하다못해 20년 뒤에 태어났다면, 정화의 마지막 원정인 7차에 합류해서 자연스럽게 꿀꺽…… 은 어렵겠구나.
아마 다시 해금령이 내려지고,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못했겠지.
“예?”
나도 모르게 낸 소리에 석피가 살짝 놀랐다.
석피와 나는 단둘이 주변을 걷고 있었는데, 바로 먼저 보냈던 무함마드와 민예에 쪼쯔와를 찾기 위해서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재 상황에 감사하고 있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
앞으로는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며, 긍정적으로 명나라를 조질 생각을 하자.
솔직히 그렇게 큰 나라는 양심이 있으면 좀 갈라져야 해.
그래야 주변국도 숨 좀 쉬고 살지.
“그런데 전하. 혹시 이곳의 언어는 할 줄 아십니까?”
“아니. 하지만 여기는 아랍어도 잘 통할걸?”
예로부터 아랍 상인이 자주 오가는 국제 무역항이니까.
애초에 인도는 인도어라고 뭉뚱그릴 수 있을 정도로 표준어가 없다.
현대에 인도 영화에도 대사보다는 액션이 부각되는 이유가, 그 다양한 언어를 포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정도니까.
“전하께서는 아랍어를 하실 줄 아십니까?”
“기초적인 회화 정도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너 할 줄 몰라?”
“조선 토박이가 어찌 아랍어를 알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기대했는데 역시였다.
외모만으로 보면, 그쪽 언어를 유창하게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오히려 조선말을 능숙하게 쓰는 게 더 어색할 정도다.
“괜찮아.”
“역시 전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무계획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계획 아니겠냐. 틀릴 리가 없잖아.”
“맞을 리도 없겠지요.”
석피 이 녀석.
나랑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말발도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다.
“여기엔 딱히 화상도 안 보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동남아에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화상이 여기엔 보이지 않는다.
원 역사에서는 꽤 많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화의 원정대가 파견된 이후의 일인가?
“말이 안 통하는 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나름대로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냐.”
“그럼 왕궁에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선원 중에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
정화가 원정을 준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배우게 했던 언어가 아랍어다.
아랍 상인은 고려 벽란도까지 찾아왔을 정도로 곳곳을 돌아다녔고, 덕분에 이 시대 아랍어는 국제 공용어의 위상을 갖게 되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기초적인 회화라고 해도 꽤 수준이 있으니까.”
“예. 저는 전하의 안전만 신경 쓰겠습니다.”
“좋다.”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되는 거지.
그게 분업의 장점 아니겠나.
치타공의 건물 양식은 인도에서 많이 보던 그 양식들이다.
타지마할같이 천장은 둥글고, 아래는 직육면체의 네모반듯하고 단단한 형태.
다만 색깔은 흔한 벽돌에서 볼 수 있는 적갈색이었다.
바로 옆 나라임에도, 주로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한타와디 왕국과는 양식이 아예 달랐다.
“근데…… 저긴 대체 뭘까요?”
“가보자.”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불쇼라도 보여주는 건가 싶어서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윽.”
못 볼 걸 봤다.
한 남자가 가부좌를 튼 채로 한쪽 팔을 들고 있는데, 그 팔만 유독 비쩍 마른 채로 뼈가 뒤틀려 있었다.
만약 인터넷이었다면 분명 ‘약혐’ 태그가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그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 채 절을 하고 있었다.
마치 선지자라도 보는 듯한 모습이다.
“혹시 저분은 왜 저러고 계시는 겁니까?”
가장 아랍인처럼 생긴 것 같은 사람에게 슬쩍 물었다.
“고행자입니다.”
“고행자요?”
“오른팔을 내려본 적 없는 기적을 행하고 계시지요.”
“…….”
대단하다면 대단한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기도 한데.
아니, 그럴 필요가 없잖아.
왜 그러는 거야?
혹시라도 종교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까 봐 자세한 질문은 피했다.
대신 다른 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곳도 마찬가지였다.
고행자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기적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 기적이라는 게 하나같이 묘하다.
일평생 기둥 위에 사는 기적.
마늘을 먹고도 냄새가 안 나는 기적.
양파를 눈에 비비고도 눈물이 안 나는 기적.
쇠못 판 위를 걷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기적.
등등.
하나 같이 대단하다면 대단한데,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 기적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석피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나 보다.
“고행자라더라. 고행은 신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영혼을 향상하는 자기 수련이고.”
석가모니도 고행을 겪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고.
이런 곳이니까 힌두교와 불교라는 세계적인 종교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건가 싶었다.
“그럼 무예를 더욱 열심히 닦으면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너처럼 무예광이 아니야. 게다가 남들과 똑같은 걸 하면 별로 유명해지지 않을 거 아니야.”
“진짜 고행자들은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숙원을 세우고, 그걸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석피와 내가 조선말로 대화하는데 누군가가 껴들었다.
인도에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끼어든 사람은 당연히 내가 아는 사람이다.
“오. 무함마드. 혹시나 해서 둘러봤는데 여기 있었네?”
“왕궁까지 갔다가 기야스웃딘 아잠 샤의 허락을 맡고 이곳에 있어요.”
고향과 가까워서 그러할까.
오래간만에 보는 무함마드의 안색은 무척 좋아 보였다.
“그래? 샤는 어떻디?”
벵골 술탄국인데 술탄이라고 해야 할지, 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한타와디에서는 라자를 왕으로 쓰지만, 인도에서는 영주를 라자라고 쓰니까 이건 아니고.
일단 끝에 샤를 붙였으니, 샤라고 하자.
“직접 알현하지는 못했습니다. 창해 주식 상단의 이름이 높다고 해도, 용왕 본인도 아닌 수상한 사람이 알현할 수는 없다고 하네요.”
“의외로 철저하네.”
그가 보낸 사신, 이븐 알 하쉬르의 말이나 다른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기야스웃딘은 정의의 화신.
정의 그 자체.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성군이라고 한다.
게다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고 들었다.
내게 사신을 보낸 것 자체가 그 증명이지 않은가.
그래서 창해 주식 상단의 이름을 대면 알현 정도는 쉽게 받아주리라 생각했건만,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한 모양이다.
“근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니?”
“왕궁에서 보내준 분입니다. 잘랄 웃딘이라고 하는데, 벵골 술탄국에서 유명한 지주의 아들이랍니다.”
잘랄 웃딘의 외모는 신기했다.
수염은 덥수룩한데, 피부는 매우 좋았으니까.
나이가 많은데 동안인 건지.
나이가 어린데 수염이 많이 나는 체질인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랄 웃딘이라고 합니다. 바투리아의 하킴(지사) 가네샤의 아들입니다.”
그는 마인어, 그러니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마자파힛 제국에서 쓰는 언어로 말했다.
내가 이 언어를 익혔다는 걸 무함마드가 귀띔해준 모양이다.
“반갑습니다. 그러면 잘랄웃딘 빈 가네샤라고 부르면 될까요?”
“하하하. 아닙니다. 명성 높은 용왕 전하에 비하면 딱히 관직도 없는 한미한 청년이니, 편하게 알루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러지요. 반갑습니다. 알루딘.”
관직도 없는 청년을 인맥 쌓기용으로 보낼 정도니까 아버지인 가네샤는 꽤 권력이 있는 인물인 모양이었…….
어라?
가네샤.
힌두교의 세 주신 중 하나인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의 자식으로 코끼리의 머리를 한 지혜와 행운의 신.
그 밖에도 내가 아는 가네샤가 딱 한 명 있다.
에서 인도는 엄청난 사기 문명으로 나온다.
제작사가 인도 성애자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노골적인 편파 시스템이 가득하다.
그리고 벵골 지역은 인도에서도 가장 부유한 곳이고.
그런 만큼 나도 이곳을 스타팅 포인트로 해서 게임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치명적인 함정이 있었다.
내정에서 궁정 암투가 매우 중요한 이 게임에서, 벵골 술탄국을 플레이 못 하게 만드는 흑막이.
기야스웃딘부터 시작해서 무려 4명의 왕을 연속으로 암살해버리고 왕위를 찬탈한 궁정 암투의 달인.
가네샤 왕조의 시조.
라자 가네샤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빌런처럼 보이겠지만, 의외로 벵골 술탄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들이 벵골의 중흥을 이끈 개혁 군주이자 성군이니까.
그의 이름이 잘랄웃딘 무하마드 샤…… 응?
그럼 이 녀석이 그 성군이라는 뜻?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천진난만하게 묻는 모습에 나는 역사의 기로에 섰음을 느꼈다.
이 녀석을 왕으로 세우는 데 보조하느냐.
아니면 그의 아버지 가네샤를 치우고 벵골 술탄국의 내정을 안정시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