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78
177화 역사의 기로 (3)
벵골 술탄국에 도착하자,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상황이 나를 반겼다.
나로서는 무척 어이가 없다.
벵골 술탄국은 100년 이상 전쟁다운 전쟁이 없었고, 기야스웃딘 아잠 샤라는 성군의 지도 아래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막상 와보니 평화는 개뿔.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처럼 심각한 궁중 피바람이 불 것 같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말 그대로 궁중 암투다.
정치적으로 혼란은 있겠지만, 군벌 간의 싸움이 아닌 순수한 궁중 암투는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호랑이가 정신 팔린 틈을 타 여우가 수탈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벵골 술탄국은 지방의 권한이 강한 만큼 중앙의 혼란이 큰 영향을 주진 않겠지.
문제는 나와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하필이면 그런 궁중 암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가 왔다.
명나라의 원정대.
그리고 창해 주식 상단.
어느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단체인 우리가.
더욱이 벵골 술탄국의 주요 세력들은 모두 명나라와의 무역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
이 점은 무함마드가 받은 장원의 방문객을 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그야말로 이름 좀 있다는 라자(영주)나 하킴(지사)이 죄다 몰려들었으니까.
개중에는 내가 거부하기 어려운 상대도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전하. 금방 오신다고 하시더니, 참 빨리 오셨군요.”
이븐 알 하쉬르.
믈라카 왕국에서 만난 기야스웃딘 아잠 샤의 사신이다.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말이네. 대만에서 쭉 달려 14일 만에 왔지.”
“그게 가능합니까? 기항하지 않고 항해하기도 어렵지만, 기항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 20일은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바람이 좋았네. 배의 성능이 좋기도 하고.”
지엽적인 해류를 이용하기도 했고.
“배의 성능이군요. 그러고 보면 보선은 매우 크고, 평저선인데도 상당히 빠르더군요.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평저선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배.
반대로 뾰족한 배는 첨저선이라고 한다.
평저선은 안정적이고, 첨저선은 빠르다.
“글쎄. 내가 조선 전문은 아니라서 그리 잘 알지는 못하네.”
알고 있지만, 알려주기 싫다.
내가 왜?
현재 대만에 건설된 조선소에서는 새로운 배를 만들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어설픈 유체역학의 원리를 넣고, 한선의 내구성과 가성비, 당선의 노하우를 집약한 새로운 배를.
그 배들이 찍어 나오기 시작하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그 짧은 해협을 넘어오진 못할 것이다.
“하하하. 그렇군요. 농담입니다. 그런 귀중한 기술과 비결을 알려주시기는 어렵겠지요.”
“이해해주니 고맙네.”
차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선원들에게도 신신당부하고 있는 내용인데, 인도에서는 함부로 물을 마시지 말라는 것.
자칫 전염병으로 훅 갈 수 있으니, 항상 팔팔 끓였던 차를 마시라는 것이었다.
이는 어디에서나 강조하는 내용이었지만, 인도에서는 특별히 더 강조했다.
다행히 고참 선원들은 믈라카에서 콜레라 사태를 봤던지라 딱히 감시하지 않아도 철저하게 따라주었다.
고참 선원들이 모범을 보이니, 신입 선원들도 바로 따라 하고.
“타국에 왔으면 먼저 왕을 알현하는 게 도리겠으나, 내가 벵골 술탄국의 수도를 착각했네. 그 탓에 이곳, 치타공에 먼저 왔으니 이곳 라자를 만난 후 판두아로 향할 걸세.”
“아아.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샤께서 직접 치타공으로 오신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차였거든요.”
다시 한번 차를 마시던 손이 그대로 굳어졌다.
“샤께서 오신다고? 여기로?”
“예.”
“치타공은 완전한 자치주라고 알고 있다만?”
“그렇다고 해도 확고한 벵골 술탄국의 영역이며, 치타공의 라자는 샤의 신하지요.”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해도 왕은 나라의 중심이다.
엉덩이가 가벼우면 안 된다.
그런데 왕이 사신을 만나러 수도를 떠난다?
그 나라 국민은 심각한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마치 속국처럼 비칠 수 있으니까.
한타와디의 라자다릿은 처음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물론 진심은 전하를 만나러 오는 것이지만, 표면적으로는 한타와디가 아라칸 정복한 것에 관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함이니까요.”
“아, 그렇군.”
아라칸 왕국은 치타공 영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한타와디의 라자다릿이 아라칸을 정복했다면, 응당 그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라칸 왕국의 왕, 민 소몬은 현재 아국에 망명한 상태입니다. 그를 도와 복위시키고, 아라칸 왕국을 다시 독립시키고자 합니다.”
“민 소몬이 여기로 망명했다고?”
잉와가 아라칸을 정복한 뒤, 민 소몬 왕은 한타와디로 망명했다.
라자다릿이 그를 도와 아라칸을 수복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한타와디에 갔을 때도 그를 볼 수 있었고.
하지만 약속이라는 건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
아라칸을 수복하긴 했지만, 민 소몬은 복위할 수 없었다.
라자다릿이 다른 허수아비를 왕으로 세웠으니까.
“하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멋쩍게 웃는 이븐 알 하쉬르를 보며, 보기보다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븐 알 하쉬르는 그러한 상황을 꿰뚫어 보고, 미리 민 소몬에게 접촉해서 여러 약속을 건넸겠지.
만약 라자다릿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벵골 술탄국으로 망명해라.
그리하면 샤께서 그대를 도와 아라칸을 수복해주겠다.
대충 이런 약속을.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대명의 번왕이자, 원정대의 제독으로 말하자면 그리 좋지는 않네. 한타와디 왕국은 이제 대명의 책봉국이니까.”
책봉국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으면, 천자국의 면이 서지 않게 된다.
직접 군대를 보내지 않더라도 외교적으로나마 압박을 줘야 한다.
“반면 창해 주식 상단의 상단주로서 말하자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해지겠지만, 전쟁이 터지면 그만큼 팔아먹을 게 많아지니까.
“용왕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나는 남해의 평화를 원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우선하지.”
“그렇군요. 사실 샤께서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북부 군벌들이 강력하게 원하고 있지요.”
“가네샤?”
“역시 용왕 전하. 소식이 빠르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븐 알 하쉬르는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한마디 했다.
“치타공 서쪽에 캘커타라 불리는 작은 어촌 마을이 있습니다.”
“…….”
“수도인 판두아와도 가깝고, 벵골 술탄국의 중심에 있는 만큼 외적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강 하구에 있어 항구로서의 입지도 매우 좋은 편이지요.”
“그래서?”
“샤께서는 용왕 전하를 그곳의 라자로 임명할 의향이 있습니다.”
나를 이용해 치타공의 영향력을 떨어뜨리고.
수도인 판두아를 부유하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동시에 북부 군벌이나 지방 세력들을 견제하겠다는 일석삼조의 계책.
“어떻습니까?”
나로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다.
‘그 나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은 매우 좋지 않지만.
“샤를 만나보고 대답하겠네.”
“하하하. 그러시지요.”
이븐 알 하쉬르는 흥미롭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번 치타공 회담으로 아국과 주변의 역사가 바뀌겠군요.”
마치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
배 타고 바다로 올 것이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기야스웃딘 아잠 샤는 육로로 온다고 한다.
수도인 판두아는 서쪽 끝.
경제 수도인 치타공은 동쪽 끝.
단순 거리로만 600km, 길 따라서 오면 거의 800km에 달하는 거리인데 이걸 주파하겠다니.
조선이었으면 상상 못 할 일이다.
지금은 법으로 명확히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비상상황을 제외하고 왕은 수도에서 100리(40km) 이상 나갈 수 없다는 게 불문율이니까.
나중 가면 이게 법으로 확정된다.
당연히 치타공 영주와의 만남도 뒤로 밀렸다.
왕이 오기로 되어 있는데, 먼저 영주와 만나는 건 큰 결례가 될 수도 있으니까.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치타공 항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치타공 항구의 문화와 양식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물론, 그 악명 높은 암살자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기에 혼자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오늘은 석피에게 휴가를 주고, 춘자와 다른 수석총병을 호위로 삼았는데, 춘자는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상을 팍 쓴 채로.
“좋지 않습니다.”
“뭐가?”
“이쪽을 계속 주시하는 사람이 셋. 개중에는 피 냄새가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력 자체는 석피가 높을 수도 있지만, 춘자의 감각은 석피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피 냄새가 난다고?”
“근처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만…… 피 냄새라는 건 본래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살생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결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어제 석피와 밖에 나왔을 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오늘 새로 붙은 건가.
아니면 석피조차 탐지 못 했던 걸 춘자가 감별해 낸 건가.
“위험해서 좋을 건 없지. 이만 돌아가자.”
“제 말씀을 믿으십니까?”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설사 그녀의 착각이라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역사에서 보면 대범하게 행동하다 골로 간 위인이 한둘이 아니니까.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돌아가려는데,
“음?”
“또 뭐?”
“저기 저 사람 있지 않습니까.”
평범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딱히 미남은 아니었지만, 호감형 인상이었는데 생기발랄한 미소가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으로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는 소리다.
그는 동네 아이들과 실뭉치로 만든 공을 차고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무척 그를 따르는 것 같았다.
다만 놀아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것 같다.
중년인이 초딩을 상대로 진심이라…….
매우 훌륭하네.
아이들이라고 봐주고 그러면 버릇 나빠지지.
아재의 위대함을 보여줘라.
“젊게 사는 양반이네. 그래서, 저 사람이 뭐?”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피부가 곱다는 점.
그리고 인도 대륙에서는 상류층으로 취급받는 밝은 피부를 갖고 있다는 점.
이 점을 제외하면 여느 동네 아저씨와 다를 바 없었다.
“밝은 기를 갖고 있으며,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그를 호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밝은 기?”
잊고 있었던 너튜브 영상이 떠오르네.
“기란 무엇이지?”
“사람이 풍기는 느낌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기란 어떤 감각기관에서 느끼는 거지?”
“……네? 그, 그…… 전하. 그렇게 맑은 눈으로 보시면서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면 괜히 더 무섭습니다만…….”
아쉽다.
전생에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꼭 해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였는데.
내가 육지에 머무는 일 자체가 드물고, 당시 꽤 큰 체격과 험상궂은 얼굴, 그리고 새까맣게 탄 피부 때문인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이 용어를 받아줄 사람이 없네.
“그래서 위험한 사람이야?”
“위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물어보면 되지.”
벵골 술탄국의 지배층은 무슬림, 피지배층은 힌두교도다.
그리고 코란은 어떠한 이유로 전부 아랍 문자로 쓰여있는데, 그 덕에 무슬림 지배층은 대부분 아랍어를 익히고 있다.
나 역시도 아랍어의 기초는 알고 있고.
말이 기초지, 일상 회화는 문제없다는 뜻이다.
“저기요.”
“나 말인가?”
내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주변에서 이유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춘자의 말이 사실이었네?
“보니까 얼굴이 무척 좋으셔서요.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얼굴이 좋다? 그게 무슨 말이지?”
“무척 선한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조상님들께서 덕을 많이 쌓은 모양입니다.”
“……푸훗.”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알고 왔으면서 그렇게 연기할 필요는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이 사람이…… 뭐 좋네. 나도 당신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뭐 하자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생의 습관 때문인지 반사적으로 그 오른손을 잡았다.
악수였다.
“그렇게 보기를 고대했건만,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반갑네. 나가 라자.”
그 말을 듣고, 빠르게 머리가 굴러갔다.
“육로로 오시기에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항구 길거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벵골 술탄국의 영원한 지배자, 기야스웃딘 아잠 샤.”
“이래 봬도 내 목을 노리는 이가 많아서 말이야. 지금도 그렇고.”
“그 녀석들이 제 목숨도 노리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듭니다만.”
“자네가 죽으면 내 책임이 될 테고, 용왕의 죽음이라면 날 끌어내릴 명분으론 충분하겠지.”
우리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눌수록, 둔한 나조차도 느낄 정도로 살기가 짙어졌다.
그리고 주변 상인으로.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한 이들이 딴짓을 하면서 은근슬쩍 가까워졌다.
“칼은 좀 쓰나?”
“아니요.”
대신 소매에 있던 총을 꺼내 들었다.
“저는 평등을 좋아해서요.”
“오. 그것이 용왕의 분노인가?”
“그건 따로 있습니다.”
“좋군.”
춘자와 수석총병이 내 주변을 감쌌고, 기야스웃딘의 주위로 위장했던 그의 친위대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친위대 중 한 명이 기야스웃딘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