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98
197화 빛을 갈망하는 자 (4)
“잠깐 정원을 거닐고 있었어요.”
술탄의 하렘에서는 들릴 일 없는 조선말을 하며 춘자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 이곳 사람들에게는 거의 외계어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남쪽에서 오신 분인가 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젊은 여인은 벵골어가 아닌 아랍어로 말을 걸었다.
그녀가 든 등불 덕에 그녀의 표정을 훤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벵골 술탄국은 인도 아대륙에서 손꼽히는 강국.
기야스웃딘은 분명 하렘을 구성할 때 곳곳에서 여인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 아대륙, 특히 데칸고원과 그 밑으로는 표준어와 제주 방언 이상으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생소한 언어를 듣더라도 크게 이상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길을 잃으셨나요? 저도 새로이 이곳에 왔을 때는 무척 헷갈렸답니다. 그런데 검을 찬 걸 보면 호위인가 봐요. 멋져요! 저도 무술을 익히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어서…….”
젊은 여인은 섀도복싱을 하듯 주먹을 휘둘렀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춘자는 아랍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녀는 전혀 의심 같은 걸 하지 않는 상대에게 다가가…….
휙!
가볍게 입을 틀어막고 제압하여 이쪽으로 데려왔다.
훈련된 정예에 비하면 밀리지만, 춘자는 어지간한 남자보다는 힘이 강하다.
젊은 여인 하나 납치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음?”
춘자가 납치했음에도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전혀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궁금하다는 듯,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풀어줘.”
춘자는 살짝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틀어막은 입에서 손을 치웠다.
“거친 행동을 해서 미안합니다.”
일단 사과했다.
상대가 전사라면 언제든 죽을 각오를 했을 테니 그나마 괜찮지만, 힘없는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정말 원치 않았던 행동이다.
“와. 목소리가 낮고 굵어요. 이런 목소리는 아버지만 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설마 기야스웃딘의 딸인가?
공주인지, 옹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존귀한 사람 확정이다.
“남자니까요.”
“와! 남자! 진짜 남자요? 진짜 남자는 아버지 말고 처음 봐요.”
환관은 진짜 남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그렇게 말하고는 젊은 여성은 내 가슴을 고양이처럼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와! 딱딱해! 신기하다. 나는 말랑말랑한데.”
많아야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사람이 이렇게 순진할 수가 있나?
“근데 남자가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진짜 남자는 여기에 출입 못 한다고 하던데.”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들어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온 김에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요즘 요리에 푹 빠져 있는데, 하면 할수록 재미있더라고요. 재료를 조합하면 새로운 무언가가 나온다는 게 참 신기해서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나가면 됩니까?”
“저쪽으로 가면, 정문이 있어요.”
이렇게 티 없이 맑은 애도 오래간만이네.
덕분에 긴장이 상당 부분 풀어졌다.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몰래 나갈 방법이 필요합니다.”
“저도 몰래 밖에 나가보려고 여러모로 고민해봤는데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
“들어오신 곳으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하렘은 왕궁 옆에 건설된 도시.
왕궁 쪽 방향은 담도 다른 부분에 비해 낮고, 얇다.
경비도 덜 삼엄하고.
문제는 왕궁 쪽으로 돌아가서야 답이 없다는 것이겠지.
“그건 좀 어렵습니다.”
“왜요?”
“쫓기고 있으니까요.”
“왜요?”
“모함을 받았습니다.”
모함을 받은 것도 문제지만, 이제는 현행범이 되었다.
이븐 알 하쉬르를 데려간 두 명.
그리고 마지막에 항복한 네 명을 제외하고, 나를 잡으러 온 친위대 네 명을 죽였으니까.
“가엾게도…….”
그녀는 내 말을 진심으로 믿는지 눈물이 글썽거렸다.
진짜 얘 뭐지?
“그럼 일단 제 방에서 몸을 숨기시겠어요?”
“아니요. 됐습니다.”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지만, 더 가길 원하지는 않는다.
“제 방에 부르카가 여러 벌 있어요. 그걸로 몸을 가리면 나중에 몰래 나가기 편하지 않을까요?”
부르카는 이슬람 여성의 옷 중 하나로, 전신을 가리는 옷이다.
심지어 눈마저도 망사로 처리하기 때문에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건조한 중동과는 달리, 벵골 술탄국은 습도가 높아서 잘 입지 않는 옷이기도 하다.
“저희를 도와주시면 나중에 곤란한 일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방향만 알려주시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희는 못 본 거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럴 수야 없죠! 아버지께서는 항상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아버지가 지금 내 적인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안 괜찮아요. 뭔가 오해가 있었을 테니, 저도 문제없어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니까요.”
계속 거절하기엔 우리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양심에는 찔리지만, 나는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그녀의 안내와 조력 덕분에 무사히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방이 굉장히 넓고 화려한 장식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식 공주거나 총애받는 첩의 딸로 추정되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군요.”
“아니카 카비르의 딸 비디아 신하에요. 비디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녀는 살짝 붉은 빛을 띠는 갈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고, 피부색은 밝은 연갈색이었다.
눈동자 역시도 갈색이었는데, 중동인과 남아시아인의 혼혈 같은 외모였다.
딱히 특출난 미녀는 아니었지만, 무척 밝고 생글생글한 미소가 자연스러워서 누구나 호감을 느낄법한 인상으로 보였다.
“저는…….”
“강해인이죠? 나가 라자.”
순간 굳어졌다.
그야말로 순진무구 그 자체인 줄 알았는데, 그걸 파악하고 있었어?
“알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모르겠어요. 현재 벵골 술탄국에 온 동방의 귀인은 나가 라자 밖에 없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한쪽에 있던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책의 저자시지요? 나가 라자께서 쓰신 책이라면 한 권도 빠짐없이 전부 모으고 있어요. 무척 재밌거든요.”
“딱히 재미를 위해 쓴 글은 아닙니다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책이야말로 지혜의 정수다. 다른 사람의 수년, 수십 년 걸친 경험을, 읽는 것만으로도 습득할 수 있으니까요.”
기야스웃딘은 정의 그 자체라는 평가 외에도, 문학과 시의 수호자이자 후원자라는 별명도 있다.
실제로 즉위 초기에 여러 전쟁을 벌인 이후에는, 문화와 법의 발전에만 투자하고 있었다.
“특히 알기 쉽도록 배경과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주신 게 좋았어요. 덕분에 이곳에만 있어도 넓은 세상을 여행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이런 좋은 글을 써주셔서 무척 감사드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조선이나 대만국에 가보는 게 꿈이에요.”
“왜죠?”
지금 시점에서는 딱히 볼 거 없는 동네인데.
“조선에 장영실이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서요.”
“음?”
“그 구절이 마음에 들었어요.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인문학이고,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신학이지만, 현실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기술이다.”
내가 그런 문장을 썼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 기술에 있어 최고의 인재라고 평가한 사람이 장영실과 무함마드잖아요. 그래서 꼭 조선과 대만국에 가서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기회가 닿는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정말이죠? 약속한 거예요?”
“네. 약속합니다.”
이번 일이 잘 무마되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현재까지 상황으로 봤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마도 전쟁까지 치닫고, 둘 중 하나가 고꾸라져야 다툼이 없어지겠지.
그리고 마지막에 승리하는 사람은 당연히 나일 것이다.
나는 벵골 술탄국을 공격할 수 있지만, 벵골 술탄국은 대만까지 올 수 없을 테니까.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몰락시킨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지.
“그럼 지금 가죠.”
“……네?”
비디아는 장롱의 문을 열고 부르카를 몇 벌 꺼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디아의 키가 큰 편이라 나나 수석총병이 입는 것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괜찮아요. 아버지한테 딸은 많으니까요. 저 하나 없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풀자니…… 아니에요.”
풀자니가 뭐지?
사람 이름 같은데.
“가요.”
“이 시간에요?”
이미 해가 졌다.
“용변을 보러 간다고 하고 가요.”
“이곳에는 화장실이 없습니까?”
“있어요. 하지만 힌두교 여인 중에는 꼭 밖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힌두교 여인은 부르카를 안 입지 않습니까?”
“원래 같이 살다 보면 문화는 섞이기 마련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게다가 비디아도 그냥 믿기에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고.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보지요.”
춘자가 옆에서 거들었다.
“어쩐지 저 여자의 말대로 하는 게 살길이라는 감이 듭니다.”
“감이라…….”
상황이 영 좋지 않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비는 잘하는 편이라 생각하지만, 대응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만, 경비가 공주를 쉽게 의심하지도 않을 테고, 다짜고짜 부르카를 벗기려고 하지도 않을 터.
시도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우리는 다섯이서 부르카를 입고 하렘 정문으로 당당히 향했다.
가다가 몇몇 여인을 마주치기도 했으나, 아무 일 없이 지나쳤다.
“의외로 서로에게는 별 관심이 없군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과만 친해요. 할마마마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는 전부 경쟁자인 데다, 소통도 안 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1만 5천으로 구성된 하렘이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긴.
현대에는 한아파트에 살아도, 심지어 옆집에 살아도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때가 많으니 크게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들은 각기 자기 파벌이 있어요. 다른 파벌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싫어해요.”
걷다 보니 어느새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 안쪽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바깥쪽에는 꽤 많은 수의 경비가 있었다.
심지어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안쪽은 절대 보지 않았다.
무척 긴장되었지만, 일단은 비디아를 믿고 최대한 당당하게 걸었다.
“Hyālō. Śubha rātri.”
“Āpani ē‘i samaẏē ki karachēna? Rājakumārī bhidiẏā.”
“Āmi āmāra bābāra gōpana nirdēśa pālana karachi. Ē‘i ādēśa.”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비디아는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경비대장은 우리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Satarka hōna.”
“Dhan‘yabāda.”
경비들이 길을 비키자, 우리는 태연하게 하렘을 빠져 나왔다.
“후우. 성공했네요! 엄청 스릴 있었어요.”
“경비에게 준 종이는 무엇입니까?”
“출입증이에요. 아버지께서는 딸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혼례를 올리기 전, 딱 한 번밖에 나갈 수 있는 출입증을 주시거든요.”
“그걸 이 시간에 써도 받아주는 겁니까?”
“받아주시네요. 헤헤.”
그렇게 말하며 비디아는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워낙 웃는 상이라 부르카를 입었음에도 그 얼굴이 상상되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죠?”
“서남쪽으로 가면 나루터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나룻배를 빌려 강 하구로 가겠습니다.”
“예!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뛰네요!”
“숨바꼭질이긴 하죠.”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오징어 게임 같은 숨바꼭질이지만.
***
우리는 밤새 걸어 판두아 남쪽의 강에 도착했다.
춘자나 수석총병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외로 비디아도 멀쩡해 보였다.
생각보다 체력이 좋은 모양이다.
우리는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적당한 나룻배 하나를 빌렸고, 그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쭉 내려갔다.
해가 뜨고.
중천에 오르고.
목적지인 강 하구에 도착했다.
이제 캘커타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전하!”
강 하구에는 이미 배 여러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배의 형태로 보아 절대 아군이 아니다.
게다가 동쪽에는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건 채 이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이제 선택지는 두 개다.
선의를 기대하며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결사 항전을 할 것인가.
“피 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결코 제대로 된 병사는 아닙니다.”
상대의 복장을 보았다.
갑옷도 입지 않고, 병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허름한 복장으로 보아 정규군은 아니다.
아사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