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11
210화 이베리아의 운명 (5)
사략 면장은 한마디로 ‘국가 공인 해적 자격증’이다.
만화로 비유하자면 칠무해 임명장 같은 거라고 할까.
이유는 간단했다.
해적을 토벌하자니 귀찮고, 힘들고, 돈은 많이 드는 데 토벌해봐야 별 이득은 없으니까.
즉, 사략 면장은,
‘우리나라 배는 건들지 말고, 우리랑 전쟁 중인 저쪽 나라 배를 털어. 그리고 털어오면 수익은 나누자.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처벌 안 할게.’
라는 뜻이다.
굳이 의미를 더 부여하자면, 공짜로 해군을 부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사략 함대는 준군사조직으로서 전시에 소집 명령에 응해야 하는 의무도 생기니까.
유명한 사략 해적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 휘하 부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프랜시스 드레이크.
전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붉은 수염 바르바리 해적단도 오스만의 사략 함대고.
왜구도 시마즈나 쇼니 가문 같은 다이묘의 재정을 채우기 위한 사략 함대인 경우가 많다.
“혹시 연회 때 듣지 못했습니까? 나는 해적을 소탕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해적이 되라는 말은 심각한 모욕입니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야 더 잘 보이…… 는 게 아니라, 내 이미지를 확실하게 세우기 위함이다.
나는 그리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이미지만큼은 정의 그 자체가 되어야 하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하지만 사략 면장은 해적질만 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베아트리스는 태연하게 반박했다.
“예를 들어 어떤 해적에게 공격당한 상인도 사략 면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본인의 재산을 되찾기 위함이지요.”
“민간 상인이 해적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호호호. 아닙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해적에게 빼앗긴 만큼, 다른 배를 약탈할 권리’라고 할 수 있지요.”
“…….”
칼에 찔린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칼로 찌를 수 있는 권리를 준다니.
누가 영국 아니랄까 봐, 우리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참고로 나는 선상 백병전은 자신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배라는 배는 죄다 털고 다닐 수 있다.
보선 같은 큰 배가 대포를 왕창 달고 다니면서 위협 포격해주면 어지간한 배는 알아서 항복할 테니까.
실제로 대항해시대 때 해적에게 나포된 배 중 상당수는 해적의 함포가 무서워서 항복하거나, 아니면 연안에 정박해뒀다가 카누 같은 작은 배에 의해 탈취되는 경우였다.
“그래서 사략 면장을 제안하는 이유가 뭡니까?”
“위협입니다.”
“네?”
“신비의 나라, 극동의 대제국에서 온 엄청난 규모의 원정대.”
신비의 나라기는 하지.
예나 지금이나 여차하면 신비로워지는 곳이니까.
“그 원정대를 이끄는 바다의 왕은 항해 실력이 탁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엄청난 무장을 갖췄으며, 값비싼 교역품을 산처럼 보유하고 있다.”
베아트리스는 황홀경에 빠진 채, 노래하듯이 말했다.
레이디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해도 될까 모르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발정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능력과 세력을 갖췄음에도 당신께서는 이곳에서 그리 힘을 쓰지 못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모국은 멀리 있고, 이 대륙은 이교도를 거부하는 신의 영지니까요.”
내가 늘 느끼고 있는 불합리이기도 했다.
본진 근처에는 명나라라는 강대한 세력이 있어서.
배를 타고 새로운 땅으로 가면 내 세력의 일부만 이끌고 갈 수 있어서, 항상 불리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아시아 곳곳에 훌륭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신항로를 개척해야 하는 내 목표 특성상,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저주 같은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안하는 교황 성하의 거래 허가증과 잉글랜드 왕실의 사략 면장입니다. 당신의 능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지요.”
한마디로 해적질을 하건 말건 그건 내 자유.
사략 면장은 ‘나 건드리면 너희 나라 상선 다 조져버린다. 나 대포도 많고 사략 면장도 있어!’라는 합법적인 협박을 할 수 있는 도구라는 뜻이다.
동시에 잉글랜드와 잉글랜드의 우호국에 협력을 받을 수 있는.
예를 들면 그 나라 항구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리패스이기도 했다.
“어떠십니까? 귀인처럼 훌륭한 남성에게는 이 정도 조건만 생겨도 무엇이든 해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베아트리스는 잘못된 악신을 섬기는 광신도처럼 홀린 듯이 말했다.
언제 봤다고?
“부족하지만 제가, 귀인께서 원하시는 걸 얻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저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서요.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시다시피 현재 유럽은 극심한 혼란기입니다. 잉글랜드는 얼마 전까지 내전을 겪었고, 프랑스는 현재 내전이 진행 중이지요. 두 왕국은 서로 전쟁 중이기도 하고요.”
참고로 잉글랜드는 10년 전에 내전이 끝나고, 랭커스터 왕조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조 초기에는 왕권이 약하고, 혼란이 심각하다.
잉글랜드가 딱 그 상황이지.
프랑스는 현재 친애왕 샤를 6세의 재위 기간인데, 정신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하다.
한마디로 미쳤다.
그래서 섭정 자리를 두고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 박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예. 이를 중재해야 할 교회도 분열된 상태지요.”
“이런 극심한 혼란기에는 언제나 영웅이 탄생하고, 추락이냐 승천이냐의 갈림길이 나타나지요.”
즉, 베아트리스는 난세의 영웅으로 나를 택하고, 나를 보좌하는 대신 권세를 원한다는 말이다.
힘 있는 이방인은 이용하기 좋지.
여차하면 버리면 되니까.
“레이디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금발의 여인이 광기가 깃든 벽안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저를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아버지. 사람 취급도 안 한 형제들. 그리고 나를 사생아라 모욕한 이들. 그들 모두를 내 앞에 무릎 꿇리고 싶습니다.”
복수.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이다.
“그리하여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는 어렵습니까?”
“이방인을 도울 동기로는 충분하군요. 하지만 당신에게 정말 교황의 허가와 잉글랜드 왕의 사략 면장을 받아낼 정치력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아룬델 백작 부인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권력이 강합니까?”
“아니요. 별거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아트리스는 므흣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썼던 미인계를 떠올려 보았을 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잉글랜드 왕실에서 꽤 큰 힘을 쓰는 누군가와 그…… 방가방가하는 관계라는 뜻이겠지.
‘백작 부인인데 그게 말이 되냐?’라고 묻는다면, ‘공작 부인도 그런 역사가 많다.’라고 답하겠다.
실제로 현대에서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발견했을 때, 이게 진짜 리처드 3세의 유골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후손들과 DNA검사를 했다.
모계 혈통 후손은 다수 찾아냈지만, 부계 혈통은 아무도 못 찾았다.
일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왕족조차도 뻐꾸기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의 불륜 시스템은 훌륭한 현실 고증이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독점 계약은 아닙니다. 한 국가가 소유하기엔 너무 큰 이권이니까요.”
“아쉽군요.”
“그래도 먼저 파격적인 제안을 해주신 만큼, 그만한 보상은 분명히 해드리겠습니다.”
“저도 귀인께서 목표를 이루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계약을 상세하게 조정하는데,
“실례합니다. 귀인을 찾아온 손님이 있습니다.”
여관의 지배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객을 상대하는 중이다. 기다리라고 해라.”
“그것이…… 포르투갈 왕가에서 오신 분이라…….”
귀족을 수없이 상대해 본 이런 고급 여관의 지배인이라도, 조국의 왕족은 상대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다시 말하지. 기다리라고 해라.”
하지만 그건 지배인 사정이고.
내 알 바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기 싸움을 하는 중.
너무 쉽게 만남을 허용해 주면 얕잡아 보일 우려가 있다.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것도 다 정치의 일환이다.
나 역시 왕이니까.
“만약 기다리기 싫다면, 나도 만날 생각이 없다고 전하라.”
“예.”
지배인은 까탈스러운 귀족을 많이 상대해 본 경험 덕인지, 재차 권하지 않고 담백하게 물러났다.
나와 베아트리스는 이 상황을 즐기며 느긋하게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그나저나 베아트리스의 내연남이 누구일까.
이왕이면 그 대상이 다음 대 잉글랜드 왕이자, 아쟁쿠르 전투의 영웅인 헨리 5세면 나한테도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헨리 5세 코인을 타서 잉글랜드 편을 들며 꿀을 빨다가, 성녀 잔 다르크가 나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때 프랑스로 갈아타서 다시 꿀을 빨면 되니까.
아직은 먼 이야기다.
잔 다르크가 나올 때까지는 20년.
아쟁쿠르 전투까지는 5년 남았으니까.
***
일부러 최대한 느긋하게 베아트리스와 이야기를 나눈 후, 포르투갈 왕실에서 왔다는 그 손님을 만나보았다.
왕실의 체면 어쩌고 하면서 시종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두아르테 왕태자가 직접 왔다.
왕태자는 나와의 거래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 베아트리스를 보고도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베아트리스가 그를 지나치면서 묘한 미소를 짓자,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내 앞으로 왔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1층 홀은 내가 전세 낸 상태라 시끄러운 소리 없이 고즈넉했다.
“왕태자께서 직접 오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겠지요.”
어제 연회 때 부드럽고 편하게 웃던 모습과는 달리 오늘은 대단히 진지했다.
“공식적으로 사과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례가 아니라 저를 속이려고 하셨지요. 제가 유럽의 역사와 정세를 잘 모르리라 여겼기 때문에요. 아닙니까?”
“믿지 않으시겠지만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무슬림에 대한 증오가 크고, 오스만이 그만큼 위협적이기에 그리 말씀드린 것입니다.”
심정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긍정도 하지 않았다.
속마음이야 본인만 알 테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포르투갈 항해사들에게는 미신이 있습니다. 저 남쪽에는 펄펄 끓는 암흑의 바다가 있고, 그리로 가면 악마의 유혹을 받아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미신이지요.”
“암흑의 바다도 없고, 악마도 없습니다. 그쪽에서 온 제가 보장하지요.”
“예. 귀인께서 바다를 통해 아국에 오심으로써 미신은 헛소리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덕분에 항구에는 엄청난 열기가 들끓고 있습니다.”
무슨 열기인지 뻔히 보인다.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향하고자 하는 열기겠지.
순수하게 탐험의 목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이윤 때문이다.
내가 엄청난 양의 사치품을 싣고 온 것을 똑똑히 보았을 테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아국과 인도를 잇는 항로에 포르투갈 상인도 합류시켜 주십시오.”
양심 어디?
“설마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시는 않았겠지요?”
내가 가져온 교역품을 포르투갈에 많이 팔아달라는 제안도 생각해볼까 말까인데.
어디서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하고 있어.
“만에 하나 스스로 인도에 오시더라도, 제대로 물건을 받지는 못하실 겁니다. 이래 봬도 그쪽 해상 무역은 제가 꽉 잡고 있거든요.”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은 물론.
인도에서도 벵골 술탄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어쩌면 나로 인해 뒤틀린 역사에서는 무굴 제국이 탄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버님은 모르시지만, 사실 저는 1년 전에 베네치아 상인으로부터 ‘창해’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동방에서 무서울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는 엄청난 상단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말씀해보시지요. 그럼 ‘내’가 누구입니까?”
“레이 드라고(Rei Dragão)”
용왕이라는 뜻이다.
발음 괜찮네.
‘드래곤 킹’이라고 했으면 중2병 같아서 별로였을 텐데.
이래서 영어가 품격 없는 언어로 여겨지는 건가?
……드래곤 로드는 의외로 괜찮을지도.
“그럼 알면서 모른 척했던 것이었습니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얕은수를 부렸습니다. 이 역시 사과드립니다.”
왕태자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다른 귀족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유럽에서 왕이나 그 후계자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동북아에서는 자주 보지만 말이다.
“사과는 되었고 본론만 말씀해주세요. 곧 떠날 예정이라서요.”
“혹시 제 동생 엔히크를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합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왕자분이셨지요.”
그를 보냈으면 내 화난 연기도 쉽게 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태자로서 동생에게 이 거래를 넘길 수 없었겠지.
차기 왕으로서 업적을 세워야 하는 만큼,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나’는 쉽게 넘겨줄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특히 왕위 계승권을 가진 혈육에게는 더더욱 안 된다.
“엔히크는 이미 정치 대신 바다에 뜻을 두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안목 또한 대단하지요.”
“그래서요?”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항로의 독점권을 엔히크가 받을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원 역사에서 포르투갈이 그러한 권리를 받은 적 있으니 딱히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만약 귀인께서 엔히크나 포르투갈 항해사를 도와주신다면, 귀인께는 엔히크의 후견인 자리와 함께…….”
이번에는 어떠한 속임수도 없는 순수한 사실이라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포르투갈의 국운을 걸고, 귀인께서 유럽에서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모든 분야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