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277
276화 격변하는 정세 (1)
“그런데 말이다.”
진중한 이야기를 끝내자 킬방원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위엄차긴 하지만, 조금은 능글맞은 모습으로.
“너는 결국 폐제는 장강을 따라, 한왕 주고후는 관중 지역, 황태손 주첨기는 북경이 있는 화북 지방으로 나뉘리라 하였는데…….”
“예상대로 흘러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의외로 한쪽이 한순간에 천하를 휘어잡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겠지. 그때는 이전처럼 승자에게 빌붙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흐리멍덩하게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킬방원도 답답하긴 한가 보다.
바로 옆에 엄청나게 거대한 세력이 있다는 것이.
“만약 중원이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었다면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가?”
“대만이 불리합니다. 조선도 불리하고요.”
“농은 거기까지 하거라.”
“농담 아닙니다.”
미국과 소련이 싸우면 누가 불리한가?
한국이 불리하다.
미·중 무역 분쟁이 일어나면 누가 불리한가?
한국이 불리하다.
테란과 저그가…….
아니다.
“이쪽은 약점을 노려 물어뜯는 입장인데도?”
“동맹의 핵심은 같은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쪽이 너무 큰 이권을 챙기면 자칫 동맹이 흔들릴 위험이 있습니다.”
“동맹?”
“설마 제가 조선만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지도를 펼쳤다.
배에서 작성한, 최대한 정밀하게 그려진 세계지도다.
아메리카와 호주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할 나라는 두 곳입니다. 잉와와 대월이죠.”
원한이 크니까.
“대월은 이미 멸망했지 않은가.”
“독립을 바라는 세력이 암중에서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듣기론 벌써 독립을 위한 게릴라를 시작한 세력도 있다고 들었다.
레 리는 때를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왜국의 현 쇼군은 명나라를 매우 적대시합니다. 반대로 저와는 친교를 원하죠.”
다행이다.
선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친명중뽕이라 이쪽을 도와줄 가능성은 없었는데.
그는 2년 전에 죽었고, 덕분에 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매우 심각한 반명주의자다.
“그런가. 어쩐지 저번 달에는 나에게도 선물을 주더구나.”
“선물이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은데, 네 다리는 통나무와 같으며, 코는 누에처럼 생겼는데 무척 긴 동물이었다. 이름이…… 코길이였던가?”
“……감당 가능하십니까? 음식을 산처럼 먹을 텐데요.”
“처음엔 신기했다만, 네 말대로 워낙 많이 처먹어대는지라 영 좋지 않구나.”
“코끼리는 지능이 무척 높은 동물입니다. 말은 못 하지만 오래 함께하다 보면 사람 말도 알아듣고, 코끼리에 따라서는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
“오호…….”
“반대로 말하면 모욕도 느낀다는 뜻입니다. 함부로 했다간 밟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태종 때 조선 대신 중의 하나가 코끼리에게 침 뱉고 욕했다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언제 일어난 일인지는 모르겠다.
“대체 그 동물을 어디에 쓰는고?”
“잉와 쪽에서는 전투 병기로 씁니다. 힘이 말이나 소에 비교할 바가 아닌지라 보급을 운송할 때 쓰고, 전투 시에는 적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데 씁니다.”
“보급이라…… 그놈이 운반하는 보급품보다 처먹는 보급품이 더 많을 것 같다만.”
“그렇긴 하죠. 더욱이 더운 곳에 사는 짐승인지라, 추운 곳에 가면 맥을 못 출 겁니다.”
“왜왕은 그걸 왜 선물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엿 먹어보라고 선물해줬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말하면 안 그래도 느슨한 연합에 균열이 생길 것 같으니 적당히 돌려서 말하자.
“귀한 짐승이니 잘 지내보자고 선물한 것이겠지요.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흠. 알겠다. 중요한 건 아니니 넘기지.”
“그리고 다른 동맹을 말씀드리자면…….”
“되었네.”
“네?”
“굳이 여기서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 없어. 곧 알현이 있지 않은가.”
“……설마 저보고 조선의 대신들을 설득하란 말입니까?”
“그럼 누가 하는가.”
“하지만 이건 공개적으로 진행할 일이 아닙니다.”
나도 내 목숨 챙겨야지.
총대 멨다가 첫 빠따로 처맞을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럴 필요 없네. 단지 현재 상황이 어떠하고, 조선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이런 것만 강변하면 되네.”
“왜 그걸 제가…….”
“모르겠나?”
“모릅니다.”
“자네가 하려는 일은 단순히 명나라를 분열시키는 게 아니야. 사농공상. 그 근본을 뒤집어 놓는 일이지. 만약 여기서 사대부들의 동의를 얻어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나?”
조선이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조선 자체도 내분에 휩쓸릴 수 있다.
“명심하게. 명분과 미래만을 추구하다가는 발등에 떨어진 화마(火魔)가 자네를 홀라당 태워 먹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명심하지요.”
“그런데 말일세.”
킬방원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했다.
……내가 말실수했나?
“듣기론 그 여인이 그야말로 천하절색이라던데.”
“그 여인이 누굽니까?”
“자네가 구라파에서 데려왔다는 금발벽안의 미인 말일세. 돌궐의 왕에게 선물 받았다는.”
사샤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런데요?”
“내게 주게.”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이건 경고다.
‘나도 대만에 첩자를 풀어놓고 있으니, 배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라는 경고.
“농담 아닐세.”
“…….”
“주게.”
“저도 왕에게 받은 선물인지라…….”
사샤가 스스로 원한다면 모를까, 첩으로 넘길 생각은 없다.
“그럼 교환하지.”
“네?”
“나도 왜왕에게 받은 코끼리를 주겠네.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전하께서는 이미 비빈이 아홉이지 않습니까.”
“궁인으로 받으면 되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현 때 뵙지요.”
되도 않는 소리 하고 있어.
***
며칠이 지나 알현을 허가받고 조선의 궁궐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궁궐을 걷자니, 퇴사했던 옛 직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옷은 평범한 선비 복장으로 입었다.
내 정식 관복은 곤룡포에다 익선관인데, 이걸 입자니 킬방원이랑 싸우자고 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의상을 입자니 ‘바다에 나가면 저렇게 오랑캐가 됩니다.’ 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궁인들은 나를 흘끗 볼 뿐, 신기하게 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창덕궁…….”
본래 조선의 본궁은 경복궁이나, 태종은 경복궁을 상당히 싫어했다.
이유를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사관 시절에는 본인이 피바람을 일으킨 곳이라 싫어했다는 썰을 들은 적 있다.
“꽤 커졌네.”
증축 공사를 계속하는 모양이다.
원래는 상당히 조촐했는데.
물론 지금도 다른 나라 궁전에 비하면 조촐한 편이다.
공사를 크게 하려고 하면 신하들로부터 상소가 빗발칠 테니까.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는 킬방원조차도 이런 신세다.
나도 조심해야겠지.
“내 시작과 끝.”
모두 창덕궁에서 마무리 짓겠다.
각오를 다진 나는 창덕궁의 중심건물 인정전으로 들어갔다.
“어…… 음…….”
좁다.
매우 좁다.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다.
삼 칸 크기의 초가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에서도 매우 가난한 집을 가리키는 용어다.
1칸은 1평이고.
근데 인정전이 3칸 규모다.
이래서야 몇 명 들어오지도 못할 것 같다.
“왔는가.”
킬방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부러 내 의견에 반대하는 척을 하려고 그런 것인지, 어제 사샤를 달라는 부탁을 거절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라고 생각한다.
킬방원은 성군이지만, 여색에는 진심이니까.
“예. 왔습니다.”
“들어왔으면 문을 닫지.”
그의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아이용 작은 방 같은 크기에 다 큰 남정네 여덟 명이나 들어앉아 있으니까 숨 막힌다.
다들 그렇게 느끼는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다들 답답해하는 것 같으니, 할 말만 빠르게 하고 끝내지.”
“음?”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그러네.
중요 회의라는 명분으로 소수의 사람만 불러오고, 그다음 좁은 곳에서 회의하여 길게 이어지지 못하게 한다.
괜찮은 수법이다.
현대에서도 회의할 때, 퇴근 직전에 하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끝난다고 하지 않은가.
“우선 대만국왕. 그대가 하고 싶은 말부터 하시게.”
그래도 공적인 자리라고 나름대로 예우를 갖춰주었다.
물론 ‘큰 나라의 군주가 작은 나라의 군주에게 예의를 갖춘다.’라는 느낌이지, 대등한 상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실리만 챙기면 그만이다.
“아실만한 분은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명나라에 큰 변고가 터졌습니다.”
여섯 대신이 예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군지 잘 모르겠다.
황희는 알아보겠는데.
“그 변고란 다름 아닌…….”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멋진 웅변을 하려고 기를 끌어모았는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여라.”
문이 열리자 푸른 관복을 입은 관리가 안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내가 있어서 놀란 건지, 이 좁은 방에 남정네 여덟이나 있어서 놀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그…….”
“무슨 일인가?”
“송구하옵니다만, 그게…… 조심스레 말씀드려야 할 일인지라…….”
“국내의 일인가? 아니면 국외의 일인가?”
“그…… 대국의 일이옵니다.”
킬방원은 나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말하거라.”
“하오나…….”
“괜찮대도.”
“남경에 역모…… 아니, 큰 변고가 일어났다 하옵니다.”
“역모?”
“그게 역모라고 하기에는 조금…….”
푸른 관복의 관리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모습에서 바로 눈치챘다.
“폐제가 돌아와 황궁을 차지했나 봅니다.”
“헙!”
관리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진실임을 눈치챈 대신들도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조용!”
킬방원이 카리스마로 단번에 조용히 시켰다.
“그래서?”
“폐제가 조선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진정한 천자를 섬기라면서…… 현재 제물포항에 있다고 합니다. 제물포 관리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감한 일이다.
거부했는데 만약 건문제가 패권을 잡는다면.
반대로 승낙했는데 다른 누군가가 건문제를 몰아낸다면.
조선에게는 매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말한 것이다.
누가 싸우든 조선과 대만에 불리할 것이라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라 전하라.”
“그게…… 이번에는 빠르게 확답을 들어야겠다고 합니다. 만약 답을 미루면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알겠다고 합니다.”
건문제는 정난의 변 때 우유부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정난의 변의 원인이 되는 삭번 정책조차 매우 어중간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학습능력이 있는 만큼, 과거의 엄청난 실패에서 확실히 배운 모양이었다.
어설픈 관용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보겠다.”
“하오면…….”
“사신을 궁으로 모셔오라는 뜻이다. 최대한 천천히. 후한 대접을 해주면서.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예. 전하.”
푸른 관복의 사내가 사라지고.
다시 문이 닫혔다.
침묵이 내리앉았다.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묻겠소. 대만국왕.”
침묵을 깬 건 역시나 킬방원.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하였으니까.
“대만은 어찌할 생각이오?”
답은 정해졌다.
나는 대답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역시.
루비콘 강 앞에서 주사위를 던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천자를 모실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천자는.
자유와 평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