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37
036화 평화로운 세계는 없다 (3)
“처음 뵙겠습니다. 조선의 사관 강해인이라고 합니다.”
“대인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명성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대월은 명나라의 소식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런데 제후국인 조선의 사관이 명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니 어찌 유명하지 않겠습니까.”
“총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총애의 뜻이 바뀌었나 보다.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한다는 뜻에서.
총으로 사랑해준다는 뜻으로.
영락제라면 언제든 방아쇠를 당겨 내 머리통에 구멍 내줄 것 같은데.
“소문과 현실은 다른 법이지요. 그보다 대월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대월과 참파는 적대국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참파에 도착했을 때, 대월 군이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습격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버님께서 삼보 태감께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억지로 졸라서 따라 나왔습니다. 대인을 꼭 만나 뵙고 싶었으니까요.”
“그럼 아버님께서는 제독께 가셨습니까?”
“예. 그렇지요.”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대인과 저는 닮은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잘생긴 것 같은데.
진짜로.
“실례가 됨을 알면서도 대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예?”
“다들 저에게 관심이 많더군요.”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왜죠?”
“대인께서는 열여덟에 조선의 대과에 합격하시고, 제후국 출신임에도 약관에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조실부모하시어 삶도 넉넉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자세히도 아네.
설마 내 개인정보가 동전 한 문에 팔려 다니나.
“저는 대인과 동갑인 스무 살에 제후국 출신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다만 호족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랐다는 점이 다르지요.”
자랑하는 건가?
넌 흙수저고, 난 금수저라고.
“제가 막 자라긴 했습니다.”
“터무니없습니다. 그 어려움을 딛고 이렇게 명성을 떨치시니 부럽기도 하고, 그 비결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습니다.”
호족 출신인 만큼 좋은 거래라도 가져온 줄 알았네.
영락제는 대월을 정벌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 비자야는 참파의 수도로, 대월 하면 치를 떠는 곳이고.
괜히 대월과 내통했다는 오해를 받기 전에 적당히 돌려보내야겠다.
“먼저 대인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일단 차를 준비하지요. 예비 처가에서 봉황단총이라는 차를 받았는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봉황단총입니까? 유명하지요.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장원에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일러 차를 우려낼 준비를 하라 시켰다.
내가 선물도 받아보는구나.
이건 뭐 시험 아니겠지?
“제가 드릴 선물은 이것입니다.”
그는 하인을 시켜 큰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일단 보겠습니다.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면 거절할 수 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뭐가 들었을까~
대월엔 황금과 비취옥이 많이 난다고 하던데.
금괴?
아니면 옥 장신구?
기대를 품고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서책이 가득 있었다.
‘기대를 하니까 실망도 있는 법이다.’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원정대는 남해 곳곳을 다닐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남해는 생각보다 다양한 왕조와 민족이 얽힌 곳으로, 언어 역시 매우 다양하지요. 이 서책이 대인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언어교재라는 뜻이다.
중심이 되는 문자는 한문으로, 한문만 안다면 쉽게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내게 상당히 필요한 물건이다.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꼭 필요한 보물이군요.”
“대인께서 그리 평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꼭 필요하긴 하지만 봉황단총을 대접할 정도는 아닌데.
이왕 대접한 거, 좋게좋게 가기로 했다.
레 리를 보면 뭔가 큰일을 할 인재 같으니까.
혹시 알아?
나중에 대단한 위인이 되어 보답해줄지.
잠시 기다리자 장원의 아주머니는 다기를 준비해왔고, 나는 능숙하게 차를 끓여 넘겨주었다.
섬세한 맛 구분은 못 하지만, 그래도 이론상으로는 차를 맛있게 끓일 줄 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대인께서 다도에도 일가견이 있었군요.”
“진짜 명인에 비하면 한참 모자랍니다.”
이건 겸양이 아니라 진짜다.
그래도 레 리는 만족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음미했다.
“대인께서는 대월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조심히 물어왔다.
이제부터 본론인 건가.
“친근한 나라입니다.”
“친근해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월 리 왕조의 후예가 조선에 있습니다. 리 왕조 인종의 셋째인 이양혼의 후손이라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레 리는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처음 들어보나?
“예. 몽골과 싸우면서 큰 공을 세워 화산군의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후예가 큰 권세까지는 아니어도, 지방의 유지로 잘 지내고 있다 들었습니다.”
“놀랍습니다. 대월에는 정반대의 풍문이 있습니다.”
“네?”
“고려인들이 고려에 표류한 대월의 황족을 약탈하고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어······.”
“물론 그런 전설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접점이 거의 없을뿐더러, 그 황족이 어느 왕조의 후예냐 하는 것부터 불분명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렇군요. 리 왕조의 후예가 고려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쩐 왕조에서 리 왕조의 부흥을 막기 위해 조작된 이야기를 퍼뜨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대월은 친근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보다는 전생의 기억이 더 크긴 하지만.
한국과 베트남은 월남전이라는 불운한 역사로 엮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까운 협력관계다.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베트남의 GDP를 높여주고, 베트남이 한국의 제품을 많이 수입하면서 한국 최대의 교역국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서로의 국뽕 너튜브나 이간질하는 몇몇 이들로 인해 나쁘게 인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로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그런 만큼 나 역시도 대월에 나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저 역시도 조선을 친근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요?”
“원나라의 침략에 처절하게 항전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원나라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저 거대한 중원 왕조에 계속 밀려 영토를 잃었다는 점도 같고요.”
“요동 지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대월도 본래 광동성까지 지배했었죠. 하지만 점점 밀려 광동성 일대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어······ 언제적 이야기죠?”
“약 1600년 전 일입니다.”
야이.
인간적으로 1600년은 너무 하잖아.
그때면 한 무제 치세로 고조선이 멸망하던 시기다.
우리는 그래도 만주를 잃은 지 500년밖에 안 됐어.
지금 시점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로 포함하면 말이다.
“그래서 레 리 공자는 그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겠지요. 대인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그렇습니까?”
“요동을 얻었다고 가정해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원에서 끊임없이 공격해올 테니까요.”
만~에 하나 위화도 회군 때나, 정도전의 북벌이 성공해서 요동을 되찾았다고 가정하자.
그랬다면 지금 영락제가 대월이 아니라 조선으로 쳐들어 왔겠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막았다고 해도 엄청난 피해가 생겼을 것이다.
그 땅이 조선 백성들의 피와 세금을 쏟아부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 뼘 영토를 차지하는데 국력을 다 쏟을 바에야, 차라리 내치에 힘쓰는 게 더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영토보다 백성이 먼저니까요.”
더 정확히 말하면, 내치에 힘쓰고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바다로 뻗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주에 묻힌 자원이 아깝지 않으냐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바다에 투자하다 보면 언젠가 아메리카 대륙까지 영향력을 뻗칠 수 있다.
심지어 지금은 호주 대륙도 거의 빈 땅이고.
만주 vs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호주.
게다가 잘하면 남극에도 깃발 꽂을 수 있는데?
다만 이것은 나만의 소중한 계획이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대인께서는 저와 생각이 같으시군요.”
“예?”
“저 역시도 영토보다는 백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레 리는 대월어로 뭔가를 말했고, 시종들은 허리를 숙인 후 빈객실을 떠났다.
둘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이다.
나 역시도 사람들을 다 내보냈다.
석피만 남겨두고.
혹시 모르잖아.
레 리는 딱 봐도 나보다 세 보이는데.
오우야. 저 팔뚝 봐라.
소도 때려잡겠어.
“이 자는 제 호위로 조선말밖에 모릅니다. 그러니 비밀이 새어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쪽에서 비밀이 유출되었을 경우 전부 제 책임으로 생각하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본론이 무엇입니까?”
“대월의 현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월은 이미 국운을 잃었습니다.”
“그래요?”
대월이 2년 뒤에 영락제의 침공으로 멸망한다는 건 안다.
망조가 들었다는 건 식견이 있다면 많이들 눈치챘겠지.
“쩐 왕조의 철제(예종) 폐하는 외척이자 권신인 호꾸이리를 너무 신임했어요. 뒤늦게 그의 권세가 황실을 뒤엎을 수준이라는 걸 깨달으셨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지요.”
참고로 호꾸이리, 조선식 발음으로 호계리는 현 대월의 왕.
아니, 상왕이다.
5년 전 왕위를 찬탈······.
잠깐만. 우리 킬방원 전하도 5년 전에 왕위에 올랐는데.
한국과 베트남은 평행 세계인가?
아무튼, 호꾸이리는 왕위를 찬탈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 만에 아들에게 양위했다.
내부적인 사정이 있는 듯하다.
“현재 대월의 상황은 말 그대로 참담합니다. 15년 전까지 참파의 침략에 국토가 피폐해졌고, 내부적으로는 쩐 왕조의 유신과 호 왕조 세력이 부딪히고 있는지라 내일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내일은 장담할 수 있고, 2년 뒤를 장담할 수 없지.
“더욱이 원정대가 왔습니다. 참파와 함께 대월을 치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잘 모르겠군요. 원정대의 목적은 친선입니다. 군사적인 목적은 띠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대월은 지나치셨지요.”
“안타깝지만 목적지는 제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튼, 나는 관계없다.
괜히 원한 갖지 마라.
원망하려면 영락제를 원망해.
“이유가 어찌 됐든 대월의 명운은 풍전등화입니다. 그러나 호 왕조는 자신의 권력에만 집착하여 명나라와 전쟁도 불사할 각오입니다.”
“대월은 강인한 나라가 아닙니까. 쩐흥다오 같은 명장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고요.”
“쩐흥다오께서 부활하신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렵습니다.”
“왜죠?”
“원나라는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대월과 참파를 동시에 공략했습니다. 그 덕에 대월과 참파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기도 했지요.”
반면 명나라는 철저하게 약점을 공략하고 있다.
“또한, 호 왕조는 이미 민심을 잃었습니다.”
“민심을요? 왜죠?”
“호꾸이리는 황위를 찬탈하기 전, 쩐 왕조의 남자 황족 수백 명을 죄다 죽였고, 여자 황족은 모두 관비로 만들었습니다.”
잔인하다는 생각보다 ‘평범하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도 미쳐가는 건가.
“심지어 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예외 없이 전부 강에 던져 익사시켰습니다.”
“아, 그건 좀······.”
“그러자 쩐 왕조의 유신들이 곳곳에서 봉기했고, 호꾸이리는 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백성들마저 철저하게 탄압했지요. 심지어 조세 개혁도 강압적으로 실시하면서 민심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며칠 전 비자야를 습격하던 대월의 장군이 그런 말을 했지.
‘영락제는 쩐 왕조의 유신과 진첨평의 말을 듣고 대월의 호왕을 무시했다.’라고.
‘진’씨가 대월어로 ‘쩐’이니, 아마 진첨평이 쩐 왕조의 후예일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락제가 대월의 내분을 더욱 심화하려고 일부러 농간을 부린 게 아닐까.
안 그래도 국력 차이가 어마어마한데, 참파라는 적국도 포섭하고, 내분도 유도하고.
‘아. 진짜 전쟁 엿 같이 하네.’라는 극찬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조선은 그 영락제랑 전쟁을 안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떤 영웅이 나타나더라도 대월의 명운을 살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어서 더욱 안타깝군요.”
나한테 뭐 바라지 말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게다가 한족은 잔인무도한 족속들. 대월을 정복하고 나면 결코 온화한 통치를 하지 않을 겁니다.”
동의하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괜히 말이 새어나가면 나만 엿 될 수 있으니까.
“그러시군요. 하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공자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호꾸이리가 권력을 잡은 데에는 외척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 무서운 포 비나수오르 왕을 처음으로 패배시킨 장수이며, 15년 전에는 그를 죽이면서 완전한 승기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호꾸이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요약하자면 이랬다.
문무에 능한 간웅.
능력은 있지만, 수법이 좋지 않아 인기가 없다고 할까.
더욱이 민심까지 잃었으니 사실상 끝난 셈이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비자야 해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인께서는 한 척의 배를 지휘하여 다섯 척의 전함을 격침했다지요? 그 위용에 대월 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고요.”
“그······.”
“이번 비자야 습격은 호꾸이리가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고, 참파를 복속시켜 사전에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기사회생의 한 수였습니다. 그런 만큼 정벌군은 호꾸이리 직속 정예로 채워졌지요.”
와. 호꾸이리도 영끌 족이었어?
“그러나 대인의 전공으로, 호 왕조는 이제 끝났습니다. 어떠한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니. 왜 나한테 그래.
배 다섯 척밖에 격침 안 했어.
전함 다섯 척 잃었다고 망할 나라면, 뭘 해도 망할 나라지.
“앞날을 꿰뚫어 보시고, 영웅적인 능력을 지닌 대인께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대월의 운명은 어찌 되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레 리는 진심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너무나도 간절한 모습에 내 마음도 조금 움직였다.
“대월의 백성을 죽이고, 대월을 살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반대로 대월을 죽이고, 대월의 백성을 살리는 방법이 있지요. 어떤 가르침을 원하십니까?”
레 리는 나를 똑바로 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대월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