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56
055화 지자요수 (1)
“공주님. 원정대는 팔렘방이 명 황실의 책봉을 받았기에 기꺼이 구원에 응했습니다.”
나와 참파의 해군이 구했기는 하지만, 내가 원정대 소속이다 보니 결국 그 공로는 원정대의 제독인 정화가 가져가게 된다.
물론 정화는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이기 때문에 굳이 공을 탐하지는 않는다.
아마 영락제에게 보고할 때 공적과 포상은 전부 넘겨주겠지.
하지만 이 공적은 꼭 명나라에서만 유용한 게 아니다.
잘 이용하면 동남아시아에서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책봉의 권한은 폐하께 있으며, 그 대상은 시이저 공주님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시이저의 왕위 책봉을 거부하고, 대신 시제손을 책봉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조공·책봉을 수락하는 순간, 명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왕이 될 수 없으니까.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독께서 결정할 일도 아니고요. 설마 폐하께서 그리 하시겠습니까.”
“이 넓은 천하에 절대적인 건 오직 하나, 황제 폐하뿐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제독께서 원정대를 끌고 머나먼 이곳까지 오신 까닭은 남해의 질서와 문화를 흐트러뜨리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본인이 함부로 휘두르지 않아서 그렇지, 정화의 권력은 대단하다.
해적에게 목숨줄을 위협받는 팔렘방 정도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원 역사에서 3차 원정 때는 스리랑카의 실론 왕국을 쓸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실론 왕국이 명나라 선발대를 몰살했다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같은 경우엔 어렵다.
함부로 왕위 계승에 간섭하여 방해했다간 참파, 아유타야는 물론 조선까지도 등을 돌릴 위험이 있으니까.
영락제는 정난의 변으로 황위를 찬탈했고, 대명전국지새도 없는 만큼 정통성이 매우 부족한 상태.
이 정통성을 채워줄 조공·책봉 시스템이 망가지면 아무리 영락제의 신뢰를 받는 정화라고 해도 무사하긴 힘들다.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시이저는 적당한 건수를 이용해 일부러 갈등을 유발한 것이다.
이는 명나라와 최대한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한 외교적 술책.
어떻게든 대등한 관계로 끌어올려 ‘형식적’으로만 숙이고, 명나라의 내정 간섭만큼은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외교 과제는 팔렘방뿐만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명나라의 모든 조공국이 공통으로 가진 숙원이기도 했다.
다만······.
그 적당한 건수로 이용된 게 ‘내 혼사’라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쁘다.
“아하하. 우리는 얼마 전까지 남해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진조의를 함께 쓰러뜨린 전우가 아닙니까.”
시이저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진조의를 격퇴한 공로로 왕위 계승 분쟁에서 시제손을 확실하게 따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대부분은 내가 했음을.
따라서 나만은 그녀의 공적을 부정하고, 필요하다면 오히려 시제손을 추켜세울 수 있다.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몇 마디 말로도 가능하다.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현재’ 팔렘방에서는 내 말이 신의 계시처럼 여겨지니까.
“전우라 할 수 있는 존경하는 제독님과 아름다운 시이저 공주님이 오늘처럼 기분 좋은 전승 축하연에서 얼굴 붉힐 이유가 있겠습니까.”
언뜻 중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감한 상황에서 대놓고 정화를 앞서 언급하고, 시이저를 뒤에 언급했다.
게다가 ‘용맹한’과 같은 장군의 수식어가 아닌,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말했다.
이는 내가 정화의 편에 서겠다는 뜻이며, 동시에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는 걸 시이저 공주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하하. 이런.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 탓에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모양이야. 공주님.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대세가 자신 쪽으로 기울었음을 감지한 정화는 먼저 사과를 건넸다.
그의 임무는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친선과 함께 조공·책봉을 유지하는 것이니까.
굳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제독. 저야말로 제독의 관대함에 기대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벌주 석 잔을 마시겠습니다.”
시이저는 목이 탄다는 듯 연속으로 술을 들이켰다.
술을 다 마신 후 나를 섭섭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조공국 처지면서 왜 이쪽을 거부하냐는 뜻 같다.
왜긴 왜야.
날 이용했으니까 그렇지.
외교를 비롯해 인간관계라는 게 단순하지가 않다.
마냥 숙이면 호구 등신 취급하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
물론 팔렘방은 내게 우호적인 국가인 만큼 그 지배자가 될 시이저의 기분은 따로 풀어줘야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녀의 의도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만 했다.
안 그러면 끝도 없이 이용만 당할 수 있으니까.
“강 사관.”
“······.”
“강사관?”
“예?”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나?”
“아······ 피곤해서 잠시 머리가 멍해진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럴 법도 하지. 나도 처음 대규모 전투를 치렀을 땐, 3일간 아무것도 못 했다네.”
정화의 말에 시이저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전투가 강 사관의 첫 전투라고요?”
“아니요. 비자야에서 이미 초전은 치렀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놀랍군요. 저는 전투 준비나, 전투, 전후처리로 보았을 때 전쟁의 달인인 줄 알았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로 스물인데 어찌 전쟁의 달인이 되겠습니까. 조선은 변경을 제외하곤 전투가 그리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은 왜구와 수없이 싸운다고 들었습니다. 강 사관도 그에 관련된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조선이 왜구에 골머리를 썩이는 건 사실입니다만, 수도인 한양에서 나고 자란 저와는 조금 먼 이야기지요. 애초에 조선은 대명률에 따라 조운선을 제외하면 해금령이 내려진 나라이기도 합니다. 무역이 그리 활발히 이뤄지진 않지요.”
“그러니까······.”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거참 되게 따지네.
대체 뭐가 문제냐?
“처음 항해한 분이 기묘한 항해술을 구사하여 늦은 밤 해무가 가득 낀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팔렘방에 오고······ 심지어 아유타야에서 이곳까지 엿새밖에 걸리지 않았지요?”
듣고 보니 문제가 많네.
초보는커녕 이 시대의 항해 고인물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심지어 제대로 전투 경험도 없는 초심자가 바보의 진형이라는 학익진을 펼쳐서 세 배가 넘는 해적을 다 때려잡았죠. 그 와중에 전사자는 한 명도 없고, 적에게 붙들린 포로까지 구하기도 했고요.”
듣고 보니 문제가 심각하게 많네.
앞만 보고 뛰느라 개연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
“병법에 따르면······.”
“어느 병법서입니까? 저도 꼭 보고 싶습니다.”
“책 내용은 기억하는데, 어디서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목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그······ 난중일기라고······.”
“난중일기요?”
“아주 머나먼······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해군 제독이 전쟁 동안 쓴 일기인데, 그 안에는 전쟁 준비, 전투, 전후처리에 관한 내용이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거짓말은 안 했다.
이순신 장군은 200년 후라는 머나먼 시기의 해군 제독이니까.
“그 제독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제가 나름대로 견문이 넓습니다만, 오직 함포만을 이용한 해전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이름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함포가 효과적이라는 점과 시이저 공주님도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라는 점이 아닐까요?”
“그건······ 그렇군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이번에는 정화가 끼어들었다.
무슬림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술잔 대신 찻잔을 들었다.
“하하하. 공주님. 강 사관이 참 재주가 많습니다. 이 어린 나이에 이만한 식견을 갖출 정도면 얼마나 노력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조선이 무척 부럽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하.”
정화와 시이저의 대화에서 확실하게 느꼈다.
본의 아니게 능력을 드러낸 탓에 줄타기의 한계가 예정보다 빨리 다가왔다는 것을.
***
연회를 마치고 팔렘방에서 제공한 장원으로 향했다.
이전 참파에서의 장원도 크고 좋았는데, 팔렘방에서 제공한 장원은 더욱 좋았다.
게다가 대여가 아니라 하사다.
팔렘방에서 어떻게든 나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길 원한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나리. 발을 조심하십시오.”
“응? 어······ 고마워.”
“왜 가마를 거부하셨습니까?”
“그냥······ 술 좀 깨고 싶어서.”
팔렘방 왕궁과 인근 저택, 장원 일대는 높으신 분들이 몰려 사는 곳인 만큼 치안이 매우 좋다.
밤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해도 될 만큼.
“근심이 많아 보이십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혼사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제가 무지하여 잘 모르겠습니다만, 명 황실의 부마가 되는 건 영광이 아닙니까?”
석피도 당연히 연회에 참여했다.
다만 남경의 연회 때와는 달리 술을 마시지는 않았는데, 그의 임무가 내 호위이기 때문이다.
남경에서야 영락제가 강권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마신 거고.
“맛있어 보인다고 덜컥 달려들면 낚시대에 걸린 물고기 꼴을 못 벗어난다.”
“함정입니까?”
“함정······ 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음······ 여기서 우리 석피가 얼마나 똑똑한지 시험 좀 해볼까?”
‘무관이 무예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아니다.
석피가 나중에 승승장구하고 싶다면 지혜를 익혀야 한다.
무예만 뛰어난 장군은 절대 중간 이상을 못 가니까.
그런 건 고려 무신정권 때나 가능한 일이다.
“나를 명 황실의 부마로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황제 폐하께서 점찍은 진짜 사윗감은 따로 있어.”
“그렇습니까? 그게 누굽니까?”
“우리 왕세자 저하시지.”
“아······.”
양녕대군을 말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 이후에 붙여진 봉호이므로 지금은 없는 칭호다.
“여기서 질문. 황제 폐하는 왜 우리 왕세자 저하를 사윗감으로 원하셨을까?”
“왕세자 저하께서는 올해로 11살이신데도 무척 총명하시며, 전하의 사랑이 각별하다 들었습니다.”
사실 양녕대군은 장자가 아니다.
위로 세 명이 더 있으니까.
근데 줄줄이 요절하는 바람에 장자가 된 것이다.
아들 셋을 잃었던 킬방원이 봤을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이겠지.
“실마리를 주자면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된다.”
“제가 고려사를 몰라서······.”
“원나라는 고려왕의 시호 앞에 충자를 붙이고, 부마로 만들어서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
한국사에서는 ‘원 간섭기’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지만, 솔직히 점령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닌 게 고려 왕족은 칭기즈칸의 씨족인 황금 씨족의 사위로서, 대칸을 선출하거나 법을 제정하는 쿠릴타이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으니까.
이는 사위도 자식으로 취급하는 유목민의 관습 덕분이다.
그래서 고려 왕족은 시끄럽고 힘들기만 한 고려보다 원나라로 넘어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이 많았다.
“만약 우리 왕세자 저하께서 명 황실의 부마가 되면 차차기 왕은 현 황제 폐하의 외손자가 되겠지.”
이렇게 되면 조선은 명나라의 ‘혈연으로 이어진 속국’이 된다.
나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게, 양녕대군을 부마로 삼으면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일도, 세종대왕이 즉위하는 일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를 꿰뚫어 본 조선에서는 갖은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흐지부지되었지.”
“그래서 세자 저하 대신 나리를 부마로 삼고 싶어 하는 겁니까?”
“몇 단계 건너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어.”
“그 몇 단계는 무엇입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된다.”
다음 단계는 공녀 요구다.
대월을 정벌하여 명나라 주변국이 공포에 떨게 만들고,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지.
그리하여 그 공녀를 후궁으로 삼고 이를 명분으로 조선 왕실을 견제할 세력을 키운다.
그 대상이 바로 조선 출신 후궁의 오빠나 남동생.
대표적으로 공헌현비 권씨의 오빠인 권영균.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동생이자, 공신태비 한씨의 오빠인 한확이 있다.
그들을 부마로 삼아 조선 왕을 견제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권영균과 한확은 고려말 공민왕이 병신정변으로 기황후의 가족들을 다 쓸어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고 줄타기를 한 게 아닐까 싶다.
끈 떨어지는 순간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부마도위를 거절하게 했달까.
영락제와 선덕제는 부마 대신 정3품 광록시경의 벼슬과 함께 막대한 보물을 하사했다.
이 역시도 조선 내부에 명나라의 입김이 닿은 친명파 정치인을 키워서, 조선이 딴 마음 먹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평화로워 보였던 조선 전기에는 이런 치열한 외교 암투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대단해서 부마 후보로 오른 게 아니라, 지금 가장 그럴듯한 녀석이 나뿐인 거다.”
조선을 견제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조선 관리에게나 명나라 공주를 줄 수는 없는 법.
반면 나는 튀어나온 돌이고, 이번 일로 용왕으로 칭송받는 만큼 여러모로 쓰기 좋은 장기 말이니까.
“팔렘방의 공주님이 혈연을 맺고 싶어 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까?”
“그건 다르지. 팔렘방에서 뭐 하러 조선을 견제하겠냐.”
“그럼요?”
“이름값이 필요한 거지.”
양도명은 팔렘방의 왕으로 책봉 받고 돌아오지 않았다.
시진경은 해적도 못 잡아서 원군을 요청한 만큼 무능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위로 두 명이 이렇다 보니 현 팔렘방 왕가를 바라보는 민심이 그리 좋지 않다.
이는 여왕으로서 멋지게 활약하고 싶은 시이저에게는 크나큰 장애물이며, 용왕의 이름값은 그 장애물을 매우 쉽게 넘게 해줄 치트키다.
“장차 조선과 우호 관계를 쌓을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시이저가 하는 걸 보면, 다른 조공국들과 연합해서 명나라의 간섭을 원천봉쇄하고 싶은 것 같으니까.
이럴 때는 혈연만 한 게 없지.
특히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간 화교들은 혈연에 굉장히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 기류는 600년 뒤에도 쭉 이어져, 동남아 화교 기업 임원이 전부 혈연으로 채워져 있을 정도다.
“저는 혼례에 막연한 환상 같은 게 있었는데, 다 깨진 것 같습니다. 엄청 무섭군요.”
“하하하.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나리께서는 이런 일을 예상하신 겁니까?”
“응?”
“광주에서 허가장과의 혼례를 약조할 때 나리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크게 생각하진 않았어.”
“그러면 왜 갑자기 허 소저와 혼례를 약조하신 겁니까?”
“그냥.”
이유는 있다.
예비 장인이 나를 원한 게 아니라, 예비 아내가 직접 고백했으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여자를 못 만날 것 같았다.
이 여자다 싶을 때를 잘 참아야 한다는 격언을 잊은 실수였다.
딱히 후회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대단하십니다. 저는 나리를 볼 때마다, 대체 어떻게 다 대응하시는 건지 의문이 듭니다.”
“대응은 무슨.”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 상황인데.
“게다가 대응은 하는 게 아니야. 대응이 아니라 대비를 해야지.”
“예?”
“대비를 해놓으면 위기가 와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 대응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나 하고.”
“그렇군요.”
갑자기 석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대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손으로 날 제지하더니 옆구리에 찬 검을 뽑았다.
“나와라.”
석피가 한마디 하자, 장원 근처 큰 나무 뒤에 숨어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해적왕을 소탕하고도 살아남았으니, 저 역시도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이제는 내 휘하의 선원이 되어버린 해적왕의 첩자였다.
촐싹대는 놈 말고.
묵직한 놈.
“약속을 지키는 건 좋은데, 굳이 이렇게 나올 필요가 있나?”
마치 날 암살하려는 것 같잖아.
“시선이 많아서 좋을 일은 아니니까요.”
그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하얀 종이를 꺼냈다.
“이 안에 모든 답이 적혀 있습니다. 반드시 선장님 혼자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