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9
008화 천하의 주인 (3)
항해사로 배를 타다 보면 의외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서 항해사는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게 힘든 인싸들에겐 무척 괴로운 직업이다.
그나마 스마트폰이 출시되면서 상당히 좋아졌긴 하지만, 이 역시도 큰 문제가 있었다.
배에서 이용하는 데이터는 전부 위성 통신.
육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데이터료가 비싸다는 것.
해운사에서 어느 정도 데이터를 지원해주긴 한다.
하지만 그 양이 상당히 제한적이라 알뜰하게 사용해야만 한다.
너튜브는 데이터를 너무 많이 먹고, 웹툰 역시도 상당히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다.
반면 웹소설은 상당히 가성비 좋은 콘텐츠였다.
혹은 종이책을 가져가면 데이터를 다른 취미에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웹소설과 수많은 책을 보았고, 당연히 여행 소설 하나 쓰는 것쯤은 무척 쉬우리라 여겼으나······.
그 자체가 함정이었다니.
“개처럼 일하겠다고 했지, 진짜로 개가 되겠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영락제도 참 못됐다.
마음에 들었으면 계속 예뻐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버리겠어.’라는 식의 함정을 파다니.
“어찌한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나는.
제3의 길을 선택한다.
내 미래를 포기하지도.
장전된 총을 상대에게 건네주고는 쏘지 않기만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
3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째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은 이렇게 빨리 다가오는 걸까.
“이것도 상대성 이론인가?”
“······.”
석피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냥 헛소리였어.”
괜히 무안해서 한마디 했다.
적어도 황궁에서는 네가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 같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을 훨씬 잘하니까.
“폐하께서 무슨 연유로 너까지 연회에 초대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
“하명하십시오.”
“여기서 너는 내 호위가 아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 목숨이 위험해지더라도 나서지 말라는 뜻이야.”
영락제가 날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석피가 날 보호한다고 해도 황궁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괘씸죄를 물어 조선까지 피해가 갈 터.
망했다 싶으면 얌전히 인생 3회차를 준비하는 게 낫다.
“명심해라. 네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
“······예.”
“가자.”
우리는 환관의 안내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양력으로 하자면 6월 초.
게다가 남경은 위도로 치면 제주도보다 남쪽이다.
무더운 시기인 만큼 연회는 해가 지고 나서 열렸다.
“······.”
석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의 궁궐 내부.
해가 진 시각임에도 넓은 내부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등불.
이 정도 크기의 연회장에 태양처럼 밝은 빛을 유지하려면 예산이 대체 얼마나 들까.
과연 대국다운 재력이었다.
다만 나는 그리 감탄하지 않았다.
현대에서는 이보다 큰 건물도 많이 봤고, 불야성이야 일상과도 같았으니까.
오히려 안타깝게 여겨졌다.
영락제 시기는 엄청난 세금과 끝없는 징병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민란과 폭동이 일어난 시기.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고, 처절하게 학살당했다.
반면 조선은 너무 청빈을 강조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임에도 상업을 천시하고, 관리에게 녹봉을 워낙 적게 주다 보니 부정부패가 쉽게 일어났다.
특히 양란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 난 이후에는······.
“내가 너무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나?”
“예?”
“아니야.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된다.
바꾸고 싶으면 실력과 권한을 키우면 된다.
바꿀 수 있다면 좋은 것이고.
바꿀 수 없다면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것뿐이다.
원망할 것도 없고.
혼자 깨달은 척 내려다볼 필요도 없다.
결과가 증명할 테니까.
“이곳에 앉으면 됩니다.”
환관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황제와 그 가족이 앉는 용이 새겨진 대리석 단상.
그 바로 아래의 왼쪽 자리였다.
각각의 자리에는 상당히 큰 직사각형 식탁이 있었는데,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든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원목을 깎아 만든 것.
정성스럽게 옻칠을 하였는지 고급스러운 검은 광택이 피아노처럼 반들거렸다.
왼편과 오른편 식탁 사이는 꽤 넓었는데, 바닥엔 붉은 비단을 깔아두었다.
이 역시 이어 붙인 게 아니라 비단 장인이 한 땀 한 땀 세심하게 만든 하나의 거대한 비단이다.
이 비단 위에서 가희(歌姬)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살짝 떨어진 곳에는 낮은 울타리로 둘러싼 단상이 하나 더 있다.
그 자리에는 궁중 악사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로, 자신들의 악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명상을 하고 있었다.
“······.”
연회의 참석자들이 속속 들어오는 데 분위기가 영 안 좋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적의를 담아 나를 힐끗 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위안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백안시하는 자들은 대부분 문신들.
무관과 환관은 기묘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호의적으로 날 보았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읊지도 않은 원정기 때문도 아니겠고······.
왜 저러는 거지?
“황제 폐하 납시오~”
노학사의 중저음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그대로 오체투지를 했다.
한 명.
그리고 여러 명이 붉은 비단길을 지나갔다.
“모두 고개를 들라.”
상석 중앙에 영락제.
그 오른쪽에 황후가 앉아 있었다.
영락제의 한 걸음 뒤, 왼쪽에는 황태자 주고치가 서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황궁이 걸어 다니기엔 굉장히 넓긴 하지.
그 옆에서 태자비가 비단 손수건으로 계속 땀을 닦아주었는데, 금슬이 상당히 좋은 모양이었다.
황후의 한 걸음 뒤, 오른편에는 한왕 주고후 부부가 서 있는데, 주고후는 언제나 그렇듯 화가 난 표정이었다.
특히 황태자를 곁눈질하며 적의를 불태웠다.
한왕 비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어쩐지 남편을 무척 우려하는 듯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황태자 부부 앞에 있는 어린 소년.
태어난 지 이제 6년 차인 황태손 주첨기다.
총기가 넘치고, 무재도 뛰어나서 영락제가 그렇게 애지중지한다고.
그 황태손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짐의 명령을 따라 남만을 너머 야만의 땅으로 향하는 충성스러운 원정대를 격려하기 위한 연회다.”
영락제가 축사를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황제에게 집중했다.
“대명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야만의 땅에 문물을 전해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주어라. 이것이 하늘의 뜻이니라.”
그리고는 잔을 들었다.
“원정단에 순풍만이 함께하기를! 잔을 높이 들어라!”
평소의 무게 잡는 모습과는 다르게 이번 연회에서는 호걸처럼 호방하면서도 시원한 태도를 보였다.
전쟁터에서 워낙 많은 시간을 보낸지라 습관이 절로 나온 것 같았다.
“잔을 비워라! 오늘 취하지 않는 자는 엄벌을 내릴 것이니!”
모두가 일제히 잔을 입에 대었다.
그리고 잔을 비웠다.
명나라에서는 꺾어 마시고 그런 거 없다.
무조건 원샷이다.
술을 남기는 자는 남자로 취급을 안 한다.
“좋구나! 풍악을 울려라!”
모두가 잔을 비우자 영락제는 연회의 시작을 알렸고, 곧 악사들이 연주하는 웅장한 곡이 울려 퍼졌다.
이어 붉은색과 하얀색, 혹은 푸른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옷을 입은 여인들이 연회장 가운데로 왔다.
그녀들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여인들의 외모가 하나 같이 무척 아름다웠다.
“하하하!”
“······.”
무관들은 무척 즐겁게 웃는데, 문관들은 어딘가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이 여인들은 모두 교방의 관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교방의 관기 중 상당수가 정난의 변 때 숙청당한 공신들.
건문제를 따랐던 충신의 아내, 딸, 누이들이다.
또한, 지금은 기녀의 용모와 자색을 매우 중시한다.
주로 외모와 몸매를 본다는 뜻.
송원 시대에는 기녀에게 예술적 감각, 그리고 대화가 통하는 지적 능력을 요구한 것과는 매우 상반된다.
용모가 떨어지는 기녀는 심하게 천대받았으며, 반대로 색이 뛰어난 기녀는 성(性)을 바쳐야 하는데······.
사대부들이 보기엔 이름 높은 학자와 충신의 가족이 무식한 무관이나 오랑캐인 조선 사신에게 능욕당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강 사관. 어떠한가? 내 오늘은 멀리서 온 자네를 위해 특별히 먼저 고를 기회를 주겠네.”
이 관기 중 한 명을 골라 품으라는 뜻이다.
영락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영락제와 무관들은,
‘네놈 취향 좀 볼까?’
‘감히 폐하의 호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분위기 파악해라. 갑자기 분위기 싸하게 만들면 가만 안 둔다.’
라는 느낌의 눈빛을.
황태자 주고치와 문관들은,
‘나는 문란한 행태를 용인하지 않는다.’
‘너도 선비라면 사대부의 여식을 욕보이진 않겠지.’
‘어디서 감히 오랑캐 따위가 대국 양가의 규수를 넘보느냐!’
라는 느낌의 눈빛이었다.
참 신기하다.
이렇듯 자부심 가득한 사대부들이 영락제 치하 20년을 겪은 후엔 180도 변하니까.
방탕하고 부패하기 이를 데 없고, 색을 밝히다 못해 남색(男色)까지 탐하게 된다나.
어쩌면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영락제의 3S 정책일지도 모르겠다.
사치, 색, 숙청 말이다.
이를 바로 세우느라 홍희제와 선덕제는 관영 기녀원을 죄다 폐쇄하고, 기녀원에 출입하는 관리는 관직을 박탈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했다.
덕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명나라는 음풍(淫風)에 의해 쇠퇴의 길로 빠지게 된다.
“······.”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영락제가 자꾸 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너무 쉽게 봤다.
내가 누구냐.
어느 쪽에도 끼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 포지션을 확실하게 정하지 않는 전략적 불투명성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소인은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탓에 부끄럽게도 여자를 보는 눈이 없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그럼 짐이 친히 골라주지. 어떤 여자가 좋은가?”
“지식이 풍부하고 경사(京師)의 물정을 잘 아는 여자가 좋습니다.”
“뭐라?”
“삼보 태감이 저를 높게 봐주셔서 한 가지 부탁을 하였사온데, 소인은 경사의 생리를 알지 못하여 그 부탁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무척 우려됩니다.”
“정화가 무슨 부탁을 했지?”
“소인이 기이한 지식과 독특한 안목을 지녔다며 원정에 필요하다 여겨지는 약재나 도구를 준비케 하였습니다.”
기이한 지식과 독특한 안목.
나를 수식하는 이 문장은 영락제가 처음 말한 것이다.
따라서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명분으로 ‘원정을 위해서’라고 했다.
원정은 영락제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
황제를 위해서 그러겠다는데, 역정을 내기엔 그림이 좋지 않다.
마지막으로 ‘남경의 물정과 생리를 잘 아는 여인.’
상당히 잘 배운 양가 규수 출신을 원한다는 뜻이며, 어디까지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지 음탕한 행동을 할 생각이 없음을 공언한 것이다.
참고로 지금 시대는 전란과 혁명, 숙청의 시대라 양갓집 규수도 세상 돌아가는 걸 잘 알아야 한다.
아니면 내조를 제대로 못 하니까.
“그러냐. 과연 충신이로다. 조선 왕이 부럽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이내 광폭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강 사관.”
“예. 폐하.”
“원정기는 준비되었나?”
이미 소문이 파다한지 모두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폐하의 명인데 어찌 지체하겠습니까. 준비되었습니다.”
“낭독하라.”
“예. 폐하.”
빳빳한 새 종이에 쓰인 자작 소설을 들고 관기들이 춤추던 자리로 나아갔다.
개구멍으로 도망칠 것인가.
개가 될 것인가.
아니.
정면돌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