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94
093화 성선설 (1)
군사 5천을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구 토벌 때 함께했던 그 병사들과 함께했고, 상인들이 재빠르게 움직여줬는지라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천주에서 배를 타고 대만섬으로 향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응?”
“한왕이라는 작자가 계속 나리를 괴롭히려 들 텐데, 언제까지고 도망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석피의 의문은 지당했다.
녀석이 마음먹고 갑질하려 들면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방법은 있는데, 그 방법을 쓰면 녀석은 완전히 걸레짝이 된다.
명나라와 다른 나라의 파워 밸런스를 맞추려면 주고후의 트롤링이 무조건 필요한 상황.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다.
“석피야. 나도 얼마 전까지는 참 순진했어.”
“순……진이요? 그…… 아닙니다. 아무튼,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나를 이유 없이 겁나게 싫어하면, 그 엿 같은 이유를 반드시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아…… 네…… 그래서 지금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엿 같은 녀석의 성격을 이용해서 내 이윤을 새로 마련할 방법을 생각한다.”
이렇게 돈 되는 재료를 감정이라는 하찮은 이유로 소모해버리다니.
그런 건 자본주의 세상에서 지양해야 할 태도다.
“한왕이라는 작자의 불같은 성격으로 어떻게 이윤을 냅니까?”
“석피야. 여기서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나와 너, 그리고 이소군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말은 조심하는 게 좋다.”
“예. 나리.”
“답해주자면 간단해. 녀석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틀어버리는 거지.”
“어떻게 틉니까?”
“네 앞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다고 쳐봐. 그 원수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어. 심지어 네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갔다고 하네.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차분히 칼을 갈며 기다리겠죠. 돌아올 때까지.”
“쯧쯧. 넌 아직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바라본다.”
내가 순진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긴.
이렇게 순진하니까 그 악덕 상인들이 이런 사람들을 등쳐 먹고 다니는 거겠지.
“분노를 주체 못 하는 녀석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분풀이를 한다. 분풀이가 끝나고 나면, 원수 다음으로 원망하는 상대를 목표로 잡지.”
“그게 누굽니까?”
“글쎄.”
황태자다.
녀석은 이제 막다른 길에 몰린 셈.
어떻게든 황태자를 몰아내려고 난리를 칠 것이다.
하지만 영락제에게 황태자는 대체 불가의 인재다.
유학을 공부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황태자를 명 사대부들이 지지하니까.
반면 명 사대부들은 힘 때문에, 혹은 명나라를 위해서 굽히기는 했어도,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를 무척 싫어한다.
그 영락제보다 한왕 주고후를 더 싫어하고.
“잘 봐둬라. 눈앞에서 먹음직스러운 이권을 뺏어갔으니 멋진 칼부림을 볼 수 있을 거다.”
권력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죽거나.
상대를 죽이거나.
이왕이면 그 칼이 영락제를 향해줬으면 좋겠지만…….
아마 어렵겠지.
분노 조절 장애도, 진짜 강자 앞에서는 분노 조절 잘하니까.
“천책상장이라.”
과연 녀석도 천책상장을 자칭한 당 태종 이세민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래. 우리가 열심히 세력을 키워 놓으면, 결국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되어 있다.”
황제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누가 황제가 될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되겠지.
“아니면 어떻게 합니까?”
“되게 만들어야겠지.”
대만섬이 시작이다.
명나라 본토에서 대만섬까지는 약 200km.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 해협의 최단 거리가 34km라고 했으니, 그보다 여섯 배는 길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절대 넘어오지 못할 4차원의 벽을 만들겠다.
일단 국명부터 바꾸고.
대두국이 뭐냐.
자리를 잡고 나면 오스만 조 로마 같은 멋진 이름으로 바꿔야지.
***
대만섬의 지형은 한반도와 비슷한 동고서저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남고 서북저 형태라고 할까.
중심지는 크게 세 곳.
현대의 지명을 기준으로 하자면 북부의 타이베이, 중서부의 타이중, 남부의 타이난, 가오슝이다.
이 중에서 가장 발전한 곳은 중서부의 타이중이다.
중국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남부는 네덜란드, 북부는 스페인이 온 이후에나 발전하고.
즉, 현재로서 제일 집중해야 할 곳은 중서부인 타이중이다.
그래서 영락제도 대두국왕으로 봉한 것이겠지.
어차피 5천의 대군 앞에서 대두국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마음이 편했다.
우리가 항구에 내리자, 부족장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전사들을 이끌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막연하게 남방 중국인 같은 생김새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하와이 원주민, 마오리족, 사모아인 같은 폴리네시아인 계열에 가깝다고 할까.
“네가 우리들의 왕이냐.”
오우야. 가슴 큰 것 보소.
고기 한두 근 먹어서 나올 갑빠가 아닌데?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살집 속에 숨겨진 근육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인간 자체가 강함.
“그래. 내가 너희의 왕이다.”
하지만 쫄아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자극적인 것에 끌리는 법.
부드러운 말에 끌리지 않는다.
특히 이런 상남자들에게는 더더욱.
“너희뿐만 아니라 이 섬 전체의 왕이지.”
“우리가 인정할 것 같으냐?”
“나는 폭력을 싫어한다. 하지만 그대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손을 들자 명나라군이 일제히 전방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원주민 전사들도 전의를 일으키며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향해갔다.
“다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폭력을 싫어한다. 이왕이면 대화를 먼저 하고 싶다만.”
“네 녀석의 목을 부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만, 여기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몰아내봤자, 또 우르르 몰려오겠지.”
“다행이군. 상황을 판단할 지성이 있어서. 그런데 부족장들은 전부 명나라 말을 할 줄 아나?”
“아니. 부족장 중에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지.”
“그건 아쉽군. 이쪽에서도 역관을 데려왔으니 동행하지.”
대만섬으로 향할 준비를 하면서 먼저 상인들을 보냈다.
부족장들에게 모두 모여 있으라고.
과연 전부 다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뒤에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근데 어떻게 된 게 부족장과 전사들이 하나같이 드웨인 존슨급의 피지컬이냐.
저들 중 하나가 쿠키를 들고 웃으면, ‘과자로 사람 못 죽일 것 같지?’와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
우리는 부족장이 안내해 주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장병들과 함께했고, 배 안에도 언제든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부족장은 우리를 큰 공터로 데려갔는데, 지붕은 있지만, 사방은 트인 연회장 같은 곳이었다.
대놓고 가장 상석 같은 곳으로 가서 앉았다.
“그대들이 강력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용맹이 뛰어나다고 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격투기 세계 챔피언으로 이루어진 1000명과 군사 훈련만 죽어라 받은 1000명의 정예병이 싸우면 대부분 후자가 이긴다.
난전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집단의 강함은 무장과 연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무기 역시 이쪽이 훨씬 위지.”
화약 무기를 제외해도 그렇다.
이쪽 철검과 저쪽 철검이 부딪치면, 저쪽 철검은 조잡해서 금방 박살 난다.
그 정도의 기술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제안이다.”
이쪽 군대가 훨씬 강하다는 건, 저쪽도 잘 안다.
그러니 저쪽도 대화에 응한 거고.
채찍을 보여줬으니, 이젠 당근도 보여줄 시간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너희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겠다.”
“소유권?”
“너희의 재산을 함부로 강탈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재산만 가져가지 않는다고 그대의 지배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가?”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이 말이 통역되자, 부족장 중 발끈하는 이도 있었으나 명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부족장이 그를 제지했다.
표정을 보건대 간신의 상은 아니고, 국제 정세를 파악할 줄 아는 인물인 듯했다.
나로서는 무척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멋대로 타국에 함포를 쏴 갈기며 무력시위를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대신 열심히 하면 잘 먹고 잘살게 해주지.”
“한족이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 가족을 개돼지처럼 취급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우선 나는 한족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파포라족이든, 바부자족이든, 타오카스족이든 관심 없다. 오직 능력만 보지.”
“그럼 어떻게 지배할 것이냐?”
“대두국을 포함, 이 섬에 있는 모든 이를 고용하겠다.”
대만섬은 부족 동맹은 있어도 아직 왕이라고 할 만한 이가 없다.
게다가 바다에 관심이 없는 중국의 옆에 있었기 때문인지, 문명의 발전이 심하게 늦다.
반대로 말하면 처음부터 원하는 대로 쌓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든 부족장이 온 것은 아니다. 마카타오족을 비롯해 남부 부족은 거의 오지 않았지.”
“흠…….”
Divide & Rule을 적용하면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웬만하면 전투는 벌이고 싶지 않단 말이지.
“나는 벌을 내리는 것보다는 상을 주는 걸 더 좋아한다. 그러니 나를 따르기로 한 자에게 포상을 내리고, 거부한 자는 가만히 둘 것이다.”
“호오. 내가 거부해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래. 대신 나중에 합류하면 포상은 그만큼 줄어들겠지. 먼저 합류한 대가는 있어야 하니까.”
경제적 유인.
경제 주체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바꾸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제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단, 만약 내 지배 아래 들어온 부족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잠시 시간을 주게.”
“그러지.”
명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부족장은 다른 부족장들에게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역관이 통역했지만, 자신이 통역하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 생각도 말해야 할 테고.
잠시의 시간이 지났다.
결정했는지, 명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부족장이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창과 칼, 그리고 갑옷으로 무장한 수만의 병사를 데려오겠지.”
아닌데.
총과 대포를 가져올 건데.
“몇 번의 승리를 거두든, 결국 지는 것은 우리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양반다리를 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난 그대를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겠다.”
“그대의 이름은?”
“마이상 가오궈이.”
“좋아. 그대를 총리로 임명하지.”
“총리?”
“내가 자리를 비울 때 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직위다. 내가 있을 땐 이인자가 되겠지.”
“……그래도 되는가?”
“안 될 이유는 없지.”
다른 부족장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눈도 나쁘지 않아 보이니까.
“고맙다. 그리고 그대들의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해주겠다.”
***
그날 바로 축제가 열렸다.
천주에 미리 준비해 둔 배에 축제를 위한 음식과 술이 가득 실려있었으므로 그걸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황주구나. 좋군! 내 할아버지가 이 맛을 무척 그리워했소.”
중국어에는 존댓말이라는 개념이 없긴 하다.
하지만 엄연히 예법과 정중한 표현이 존재하고, 행동과 태도를 통해 존칭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마이상 가오궈이는 정중하게 말했지만, 그 언행이 군인처럼 절도 있어서 극존칭이라기보다 군인 직속상관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명나라 건국 후에 아무도 거래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인가?”
“있긴 있었소. 하지만 이 섬에 딱히 탐나는 물건이 없었던 모양인지 자주 찾아오진 않았소.”
내가 거래해보진 않아서 기억은 안 나지만, 대만도 꽤 천연자원이 풍부하다고 알고 있는데.
다 집어치워도 일단 땅이 굉장히 기름지다고 알고 있다.
“아무래도 좋겠지. 이제부턴 자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한다면 말이지.”
“대체 열심히 일한다는 게 무슨 말이오. 우리는 언제나 열심히 살고 있소.”
“내 밑에서 일하다 보면 진짜 열심히 일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단순히 많이 일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일하는 건 다를 테니까.
“그것참 겁나는군. 노예로 만들 생각인가.”
“노예 따윈 생각하지도 않아.”
“어째서지?”
“노예는 세금을 안 내잖아.”
오히려 신분제를 완전히 없애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도 현 대만은 계급이 느슨하다.
기껏해야 족장가를 포함한 귀족과 평민 계급 정도?
부족에 따라서는 귀족 계급이 없는 곳도 있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부족 간의 불화다.
섬으로 건너오기 전, 대만섬의 풍습에 관한 책을 읽었다.
거기에는 적대 부족의 머리를 베어 해골을 전시해놓는 부족도 있다고 할 정도로 평화롭지는 않다고 했다.
“근데 정말 다른 부족을 그대로 둘 생각인가?”
“일단은.”
“일단?”
“나로서는 싸우지 않고 끝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가끔은 대화도, 돈도 통하지 않는 인간이 있으니까.”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싶지는 않지만, 정 필요하다면 악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겠지.
“전에 왔던 어떤 상인은 인간의 천성은 선하다고 말하더니만, 왕의 생각은 다른가 보오.”
“나는 성악설을 믿지. 하지만 성선설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평화로운 이론이 아니야.”
“그렇소?”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환경이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 따라서 세상을 이 꼬라지로 만든 자를 처단하고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바로 성선설이다.”
즉, 맹자의 성선설은 역성혁명의 명분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해석도 있다.
인간의 천성은 선하다.
본성이 선한 인간이 저런 짓을 저지를 리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니니 죽여도 된다.
“나는 그들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아마도.
반드시.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오겠지.
내 존재 자체가 그들에겐 심각한 생존 위협을 불러올 테니까.
“내 영역을 침범한다면 분명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