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95
094화 성선설 (2)
대두국에 자리를 잡자, 명나라 상인들은 발 빠르게 물건을 싣고 대만섬 항구로 왔다.
주로 차나 술, 그리고 농기구를 가져왔는데, 대만섬은 워낙 기름진 땅이라 곡식의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많이 재배하면 내다 팔기 편해지겠지.
사탕수수 같은 상업용 작물을 대량 재배하기도 좋고.
“전하.”
“허 소저? 여긴 어인 일입니까?”
예고도 없이 허신애가 왔다.
아직 이 지역은 안정되지 않아서 불안한데, 이소군도 그렇고 왜 자꾸 오는 건지 모르겠다.
대만 원주민들이 나를 왕으로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전하께서 고생하시는데 아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아내 아닌데.
“부부는 일심동체. 기꺼이 고락을 나누겠습니다.”
“오셨습니까?”
어제 도착했던 이소군이 반갑게 허신애를 맞았다.
“네. 언니. 잘 지내셨어요?”
“저야 늘 건강하지요.”
둘이 하하호호 하는 걸 보면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혹시 모른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멋진 캣파이트를 할 수도.
“근데 낯익은 사람도 있군요?”
첫 항해를 떠날 때, 광주에서 사슬탄을 만들어준 솜씨 좋은 장인이다.
“전하께 도움이 되고자 괜찮은 장인을 추려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차 농사의 달인입니다. 저분은 제다 장인이지요.”
제다는 찻잎을 차로 만드는 걸 말한다.
대만도 차로 유명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복건성이 차로 유명한 걸 생각하면, 가까운 대만에도 자생하는 야생 차나무가 있을 법한데.
“무척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집조차 없습니다.”
항구 인근에 막사를 치고 생활하고 있다.
다행히 대만의 기후는 따뜻해서 살만했다.
다소 습하기는 하지만.
부족장은 집을 내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예의를 명분으로 사양했다.
실은 그들을 아직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럴 줄 알고 집 짓는 장인도 데려왔습니다.”
“…….”
“물론 자재도 가지고 왔고요.”
“자재요?”
“이곳에서 구하기 힘든 자재만 가지고 왔습니다. 배의 적재량에 한계가 있어서 그리 큰 집은 짓지 못할 것 같지만요.”
무섭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 나이인데, 집안 기둥을 뿌리째 뽑아서 가져오네.
“그걸 허가장에서 허락해 주셨습니까?”
“물론이지요. 기쁜 마음으로 지원해주셨습니다.”
허신애의 말에 그 뒤에 있던 시종들이 살짝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거…….”
이어 긴 목함을 내밀었다.
“이건?”
“전하께서 말씀하신 예의 그 물건입니다. 시제품이 나왔기에 가져왔습니다.”
안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머스킷이었다.
전장식 총포.
“장인들이 노력하였으나 말씀하신 후미장전식은 위력이 나오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총신은 무척 가늘었다.
그래도 개머리판까지 있어서 견착까지는 될 듯했다.
“또한, 쇠끼리 부딪쳐서 격발하게 만드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 총은 부싯돌을 이용한 방식으로, 비가 올 때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퍼커션 캡이 아니라 플린트락 방식을 이용했다는 뜻이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것이다.
해전 때 사용하는 쳇방을 개량한 후미장전식 대포는 포탄피에 구멍을 뚫어서 신관을 넣고 불을 붙여야 했으니까.
심지어는 신관의 신뢰성도 높지 않아서 도화선을 두 줄로 꼬아 넣는다.
대신 장영실이 개발한 압축점화기를 이용하기에 불씨를 관리할 필요가 없다.
본래라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불씨를 준비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참고로 압축점화기는 파이어 피스톤(Fire piston)으로, 순간적인 공기 압축으로 불똥을 만드는 기구다.
디젤 엔진의 압축 점화와 같은 원리다.
“사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허신애는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입구에 총탄을 넣고, 여기 꼬챙이로 밀어 넣은 다음…….”
허신애는 능숙하게 장전을 했다.
싱글 액션 리볼버처럼 공이를 당기고, 그 앞에 있는 뭔가를 당기고, 방아쇠 뒤쪽의 무언가를 당기고.
그다음 견착했다.
심지어 가늠자와 가늠쇠로 구성된 조준기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완벽한 자세였다.
군필 여고생…….
“방아쇠를 당기면 됩니다.”
팡!
머스킷 옆에 불꽃이 새어 나오며 탄환이 발사되었다.
“장인들은 이를 수석총(燧石銃)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수석이란 부싯돌이란 뜻이다.
“유효 사정거리는 50보(90m) 정도로 짧습니다만, 이는 명나라나 조선 활과 비교했을 경우고 남해에서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고생했어.”
그녀를 안아주었다.
청초한 난초 향……이 아니라 화약 냄새가 났다.
“그리 좋으십니까?”
“당연히 좋지.”
아직은 머스킷에 불과하지만, 연구를 계속하다 보면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강선을 넣으면 사정거리와 정확도가 올라간다.
확실하게 밀폐하여 가스가 새는 걸 막으면 사정거리와 위력이 올라간다.
잘은 모르겠지만 화학이 발전하여 퍼커션 캡을 만들면 비 오는 날에도 총을 쓸 수 있다.
등등.
총기가 가야 할 이정표를 알고 있으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께 총기란 어떤 의미입니까?”
“자유.”
거지 같은 갑질에서 나를 해방해줄 도구.
“평등.”
총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이것만 있으면 성선설을 믿을 수도 있어.”
총과 돈 앞에서는 누구나 착해질 테니까.
심지어 분노 조절 장애와 사이코패스도 다른 의미에서 착해질 수 있다.
“그래도 저보다 수석총을 더 반기시는 건 좀 복잡한 기분입니다.”
허신애가 살짝 질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그런가. 그래도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할게.”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내와 가정에 충실하는 거지.”
내 말에 허신애는 환하게 웃었다.
“예. 전하를 믿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나는 화약의 냄새가 나를 안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나도 착해질 수 있겠네.
***
허신애가 온 뒤로 기반을 닦는 일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허가장에서 엄선하여 빼 온 장인들은 명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빠르게 우물을 파고 저택과 대장간을 짓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농지 개혁에 착수했다.
“조금만 더 일찍 올걸.”
농지를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 정비해야 하는데.
이미 씨를 뿌린 상태라 올해에는 어려울 듯싶었다.
“아. 맞다. 총리.”
“예.”
“혹시 대두국의 기온은 어떻게 되나?”
“기온?”
“전에 봤던 책에서는 1년에 두 번 쌀을 수확한다고 들어서.”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하게 경작할 경우 지신(地神)이 분노하니, 한 번씩 쉬어줘야 한다.”
이기작을 할 정도로 지력이 충분하진 않다는 거네.
휴경이 필요한 걸 보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굶어 죽을 일은 어지간해선 없소.”
“혹시 그거 알아? 조선 같은 나라는 쌀을 일 년에 한 번만 수확할 수 있어.”
“그렇소?”
“만약 여기서 쌀을 넘쳐나게 재배한 후 가져다 팔면 상당한 부를 얻을 수 있겠지.”
대만 쌀은 장립종.
그러니까 찰기가 없는 쌀이다.
하지만 현대에 대만의 쌀 중 단립종이 많은 거로 보아 농사는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특히 대만 쌀 중 고급은 의외로 한국 쌀보다 밥맛이 좋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한국 쌀은 미곡처리장에서 다 섞어서 도정하지만, 대만에서는 성분에 따라 아주 정교하게 구분한다나.
“흠…….”
“왜?”
“왕께서 말한 바쁘게 일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소. 하지만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우려되오.”
“뭘 우선해야지?”
“남부 부족들은 왕을 거부하지 않았소? 몰래 습격할 위험이 너무 크오.”
“…….”
엄밀히 말하면 너도 배신할지 몰라서 위험한데.
솔직히 정면에서 쳐들어오는 건 차라리 괜찮다.
대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와 상대와 호응한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병사들은 배신자와 협력자의 외모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부족끼리의 갈등은 어떠한가? 가까운 부족끼리는 괜찮나?”
“가까운 부족끼리는 그래도 ‘적당한 거리감’을 익히고 있소. 반면 먼 거리에 있는 부족과는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지.”
역시 선제공격을 해야 하나.
하지만 이쪽이 선빵을 때리면 상황을 지켜보는 중립적인 부족들이 일제히 등을 돌릴 텐데.
“총리.”
“말씀하시오.”
“혹시 각 부족과 접촉할 수 있을까?”
“부족장과 말이오?”
“이왕이면 젊고 개방적인 부족원으로. 그리고…….”
이쪽에서 손대기 어렵다면.
“귀족 말고 평민으로.”
쿠데타를 유도하면 되지.
미국 스타일이다.
괜찮다.
나는 정말 잘 먹고 잘살게 해주려고 하는 거니까.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식민지를 개화하고 개발시켜줬다.’ 같은 개소리가 아니라, 정말 잘해줄 자신이 있다.
***
“어라?”
일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보였다.
“전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허신애와 이소군이 반갑게 맞이했다.
“이 집은 어떻게 된 거야?”
“계속 막사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지어질 수 있는 건가?”
“주춧돌과 기둥, 대들보, 기와 등을 허가장에서 미리 가공해서 가져왔어요. 궁궐이 지어질 때까지 임시 가옥으로 삼으려고요.”
“어…….”
“이게 모두 전하의 덕입니다. 분업을 철저하게 적용했더니 빠르게 되더군요.”
부실 공사는 아니겠지?
“자,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들어오세요. 전하.”
그렇게 말하며 허신애는 내 오른손을 잡고 이끌었다.
은근슬쩍 이소군이 내 왼손을 잡았다.
달달하네.
당뇨병 보험을 안 들었는데 큰일이다.
“음?”
“왜 그러시나요?”
“저거…….”
내 속옷이다.
팬티.
팬티라고 해도 현대인의 관점에선 반바지 같은 느낌이다.
“아, 빨래를 걷어둔다는 걸 깜빡했군요.”
허신애가 품위 있는 걸음으로 그곳으로 가는데…….
“잠깐만.”
“예?”
“저 속곳 말이야. 내가 전에 잃어버렸던 건데?”
“네? 호호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소문이 있었다.
용왕은 정을 준 여인에게 그 증표로 자신의 속곳을 맡긴다고.
웃기지도 않은 헛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속곳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해에서부터 조선, 일본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늘 내 속곳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만이 알 수 있게 표시를 해두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 자꾸 내 팬티를 훔쳐가나 보게.
“이거 말이야. 이거. 이 부분. 보이지?”
속곳의 허리띠 부분에 색실로 표시를 해두었다.
그 색상은 시기별로 다르다.
“이거 홍실이잖아. 홍실을 넣은 속곳은 전부 분실했어.”
“…….”
아내를 내칠 수 있는 7가지 상황, 칠거지악.
1.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난 시부모가 없으니 패스.
2.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그게 왜 아내 잘못이냐. 패스.
3. 질투.
할 수도 있지. 패스.
4. 유전병.
이건 서로 살펴보는 거니 괜찮다.
탈모도 유전병이긴 한데…… 병이 아닌가?
5. 구설.
자주 구설에 오르거나, 혹은 남을 험담하는 것.
조금 그렇긴 하지만 쫓아낼 정도는 아니지.
6. 간통.
이건 무조건이지.
내가 웬만하면 첩을 안 들이려는 이유기도 하다.
첩을 들이는 게 간통은 아니지만, 아내로선 간통처럼 느껴질 테니까.
7. 도벽.
절도죄에 해당한다.
문제는 남편의 팬티를 훔치는 것이 도벽에 포함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
“죄, 죄송해요.”
허신애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소악마 같은 모습을 보여줬던지라 이런 모습은 의외로 두근거렸다.
“전하와 항상 멀리 떨어져 있으니 외로운 마음에 그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남의 것을 훔친 것도 아니고.
내 팬티인데.
“정말이요?”
“괜찮아. 자.”
용서라고도 할 것 없지만, 안심하라는 뜻에서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허신애가 쪼르르 다가와 안겼다.
“……근데.”
“예.”
“화약 냄새가 많이 나는 것 같은데…… 혹시 총 쐈니?”
“아. 네. 장인들이 만들 때마다 제가 시험해 봤는데요. 총을 쏘면 기분이 참 개운해지더라고요.”
“…….”
어쩐지 총 쏘는 폼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나는 충분히 착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내 앞에서는 좀 더 착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이방원은 대낮에 예를 갖춰 하얀 옷을 입은 후 경복궁 앞에 돗자리를 깔고 무릎을 꿇었다.
“전하. 3년 전 강해인이 책문에서 쓴 대답은 어린아이의 터무니없는 헛소리입니다.”
“오늘 일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물며 시간까지 계산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옆에서 서운관 관리 박염은 물론, 대신들까지 만류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일식이 일어난다면…….”
“전하.”
“그대들의 생각과 말보다 강해인의 생각과 말이 더 옳다고 하늘이 인정하는 것인가?”
“…….”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심지어 수많은 잡학을 수준급으로 익힌 하륜조차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강해인이 예의 없고 광인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기이한 능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향후 강해인이라는 광인과 관계를 끊으면 되니까.”
조선의 정책은 기존의 방식대로 유지될 것이다.
“허나 만에 하나라도 강해인의 이론 그대로 일식이 일어난다면…….”
하늘이 대신들보다 강해인을 선택한 것이겠지.
“과인은 강해인의 이론대로 부국강병을 시행할 것이다.”
작은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세상은 점점 어두워졌다.
구름 한 점 없는데 말이다.
일식의 시작이다.
모든 대신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하고 있을 때, 오직 이방원만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확실한 명분을 갖췄다.
개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