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03)
EP.103 환상의 나라로
건물 바깥에서는 회귀자와 나비가 싸우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짐승의 울부짖음, 바람이 휘몰아치는 굉음. 그리고 그 여파에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나가는 주변 물건들.
탄탈로스가 갑자기 거칠게 진동했다. 회귀자가 쏘아낸 검기가 건물 외벽을 강타한 모양이었다.
흔들림을 느낀 에본 중장이 중얼거렸다.
“아직까지 고양이의 왕과 맞서고 있다고? 기량이 이 정도였나? 흠. 싸움을 직접 보았어야 했나.”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중장님.”
대령이 나섰으나 에본 중장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고양이의 왕이 우세하다면 장난을 치는 중일 테고, 불리하다면 알아서 달아날 테니까. 귀관은 귀관의 일만 제대로 하면 되네.”
“예! 중장님!”
대령은 맡은 임무에 충실했다. 그러니까, 나의 감시를 말이다.
그림자가 있는 곳을 지날 때면 대령은 나와 딱 붙어서는, 여차하면 내 머리를 날려버릴 기세로 사방을 쏘아보았다. 그러면 티르는 단념하고는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었다.
티르는 강하지만 무언가를 지키는 싸움에는 소질이 없다. 흡혈귀는 대부분 불사에 몸이 터져나가도 금방 재생하고는 한다. 또한, 혈조술의 근원인 시조가 곁에 있다면 그들은 사실상 불멸. 그러니 방어를 도외시할 수밖에.
그러나 톡 치면 죽는 내가 있으면 그런 방식을 택할 수 없다. 티르에게 있어선 갑갑한 상황일 것이다.
미안, 티르. 하지만 할 일이 있는걸요.
그렇게 탐색을 이어가던 에본 중장은, 마침 한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지를 발견했다. 잠시 중장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개의 왕, 어쩌면 우리의 비원에 가장 가까이 닿은 존재…. 드디어 온전히 손에 넣었다.’
묘한 흥분감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에본 중장은 아지를 향해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개의 왕!”
“멍?”
먼발치에서 인기척을 느낀 아지가 곧장 쪼르르 다가왔다. 갑자기 많아진 인간의 숫자에 의아해하며 아지는 모든 인간에게 한 번씩 시선을 던졌다.
“고양이 냄새, 인간! 반가워! 어?”
그 와중 아지는 밧줄에 묶인 나를 발견하고는 외쳤다.
“멍? 그건 뭐야? 무슨 놀이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SM 플레이라는 놀이야.”
“멍! 나도 할래!”
“어허. 착한 강아지는 따라 하면 안 돼.”
“멍멍! 치사해! 나도!”
대령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잡아당겼다. 아이고, 딱딱해라. 농담도 못 하겠네.
아, 회귀자가 있었다면 꽤 재미있는 반응이라도 해줬을 텐데. 있으면 귀찮지만 없으니까 좀 그립다.
에본 중장은 다른 사람을 물리고는 아지와 독대했다.
“개의 왕, 나는 요구한다. 나와 함께 지상으로 향하자.”
“…멍, 또? 또 요구야?”
아지는 김 빠진 풍선처럼 숨을 포옥 내쉬고는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안 가.”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에본 중장은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왜지?”
“멍. 나, 착해. 약속 지켜.”
“군국과 맺은 약속 말이냐? 이곳에서 기다린다면, 언젠가 맹약을 받들어 늑대의 왕과 함께 싸워주겠다는 약속?”
“멍!”
아지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본 중장은 아지를 꾸짖었다.
“아무리 짐승이라고 한들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그걸 믿나? 이름뿐인 약속. 과연 군국이 그런 약속을 지켜, 너와 함께 늑대의 왕과 싸울 거라고 진정으로 믿는 것인가?”
기약 없는 약속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짐승. 에본 중장이 그 어리석음을 한껏 비웃어주려고 할 때였다.
아지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에본을 올려다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믿을 거야! 멍! 계속 믿으면, 언젠가 믿어주니까!”
사실이나 거짓을 넘어, 그저 확고한 의지를 담은 말. 언제까지고 인간을 믿고 기대겠다는 약속이 개의 왕에게서 흘러나왔다.
비난을 준비하고 있던 에본 중장은 그 말을 듣고는 잠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하. 어리석은 질문이었군. 미안하네. 그래, 그게 개의 왕이지.”
“멍! 괜찮아! 나, 착해! 사과, 받아!”
“그러면, 억지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군.”
“멍?”
뜬금없는 말을 들은 아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억지로? 나, 잡아당겨도 안 가? 안 갈 거야?”
“아니, 가게 될 것이다.”
“머엉?”
의아해하는 아지를 뒤로 한 채, 에본 중장은 대령을 향해 외쳤다.
“대령, 사슬을 준비해라.”
“예!”
대령이 가죽 가방을 내려놓고는 그 안에 똬리를 튼 쇠사슬을 찾아 꺼냈다.
검푸른 광택을 내는 4레벨 연금강 쇠사슬이었다. 탄탈로스의 지하 무기고, 그곳을 지키는 문보다도 강한 강도를 가진 군국 연금술의 정수. 가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게 그 연금강 사슬이었던 모양인지, 사슬을 꺼내자 가방이 단번에 헐렁해졌다.
그가 꼬인 사슬을 푸는 동안 중장이 칼리스를 보고 말했다.
“중령. 분명 내가 임무 전, 귀관에게 사슬을 사용해보라 전했을 터. 어때, 개의 왕을 다스리는 법은 터득했나?”
갑자기 지목당한 칼리스는, 잠시 옛 기억을 되짚다가 두어 박자 늦게 대꾸했다.
“아, 그, 저… 죄송합니다.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본관이 사슬로 개의 왕을 잡아당겼을 때도, 개의 왕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슬로 어떻게 잡아당겼지?”
“목줄처럼, 목에 감아서….”
“누구의 목에?”
“예?”
잠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반문한 칼리스는, 급히 마음을 다잡고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개의 왕, 개의 왕의 목에 감았습니다.”
“흠. 절반의 정답이로군. 아쉬워. 중령이라면 답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했는데….”
에본 중장이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아지를 가리켰다. 그러자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슬을 들고 아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동안 에본 중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방향이 잘못되었다. 중령. 쇠사슬을 개의 왕의 목에 걸면 어떻게 하나? 그런다고 자네의 힘이 개의 왕만큼 강해지나? 아니면, 개의 왕이 자네처럼 약골이 되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힌트는 충분히 주지 않았나. 그 반대로 해야지, 반대로.”
마침 대령이 아지에게 사슬을 감은 참이었다. 그가 사슬을 감은 곳은, 목도 허리도 아닌, 아지의 오른쪽 앞발이었다.
오른쪽 앞발. 양쪽을 묶은 것도 아니고, 겉보기로도 딱히 문제 될 것 없는 부분이다. 아지도 눈만 멀뚱거릴 뿐 별달리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이 사슬은 개의 왕의 ‘몸’을 구속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에본 중장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중령. 여전히 우리에게 충성하나?”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설사 지금 칼리스의 마음이 혼란스럽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긍정이어야 했다.
칼리스는 곧장 대답했다.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를 각오는 되었겠지.”
“그렇습니다! 본관은,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귀관의 의지를 높이 사겠다. 그렇다면.”
차갑게 미소 지은 에본 중장이, 아지와 이어진 쇠사슬을 든 대령을 향해 명령했다.
“대령. 중령의 목에 사슬을 감아라.”
“…잘, 못 들었습니다?”
칼리스는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짐승도 아닐진대 목에 사슬이라니. 그것도 개의 왕의 손에 묶여있는 것을…?
이것은 마치, 아지가 칼리스의 목줄을 잡는 것 같지 않은가.
‘설마. 반대라는 말뜻이…. 쓰는 대상이 반대라는 뜻…?’
인격적인 모독이었다. 목줄을 찬 채, 다른 누군가에게 이끌리다니. 칼리스는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중장이 지켜보고 대령이 다가오는 와중에 일개 중령인 그녀가 몸을 뺄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는, 대령이 그녀의 목에 사슬을 감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묵직한 사슬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에 얹힌다. 소름 끼치는 금속의 감촉이 목을 휘감았다. 아직 조이고 있지 않은데 칼리스는 호흡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칼리스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찰각,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목을 감은 사슬에는 묵직한 묵빛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칼리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제 그녀는 혼자서 사슬을 벗을 수 없다.
다른 동물처럼.
“이어서 명령하겠다, 중령. 그대로 걸어가라. 사슬이 네 목을 조를 때까지.”
목이 사슬에 감긴 채 걸어가라.
아지는 멈춰있고,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리고 사슬은 무저갱이 아니라서 유한한 길이를 가졌다.
그러니 만약 칼리스가 계속 걸어간다면 언젠가 사슬이 그녀의 목을 조를 때가 온다.
그런데 에본 중장은, 그것이 목표인 양 말하는 것이다.
“주, 중장님. 그 말씀은….”
“그래. 자네의 생각대로네. 질식하여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계속 사슬을 잡아당기게. 중령의 목으로, 말일세.”
혼란스러워하는 칼리스의 귀로, 에본 중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심하도록. 개의 왕은 인간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서든 말이다. 만일 중령이 질식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면,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한 개의 왕이 중령을 따라올 것이다. 자기 손에 이어진 사슬이 사람을 죽게 둘 수 없으니.”
개가 인간에게 가진 무한한 호의.
그것을 인질로 삼아, 개를 다스린다.
만물의 영장.
짐승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짐승의 왕을 다스리는 단체.
그들은 개의 왕을 다스리기 위해, 인간에게 목줄을 채우고는, 개의 왕이 가진 선의를 이용하여 인질극을 벌이고자 했다.
칼리스는 짐승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짐승에게 목숨을 잃었고,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이는 대부분 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짐승이고 누가 인간인지, 차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을 배신해놓고서… 또 목숨을 건지려고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나는…?’
생각은 깊어졌으나, 명령은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자네가 없었다면 대령이 했을 일이었다. 나는 자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최소한의 공적을 세울 기회를. 그러니 명령에 따라라, 중령.”
최후의 통첩이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명령 불족종이 되리라. 아마, 이들의 본모습을 생각한다면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다.
당장 죽기 싫다면, 칼리스는 그녀의 목줄을 붙잡은 명령을 따라야 했다.
“칼리스 크리츠. 임무를, 수행합니다.”
칼리스는 굳게 다짐하고는, 아지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처음에는 귀만 쫑긋거리던 아지는, 사슬이 철렁거리며 땅에서 떨어질 즈음 되자 다급히 일어섰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제야 이해한 것이다.
“멍. 하지 마!”
‘나는, 살아야 해.’
살기 위해서는 죽기 직전까지 나아가야 했다. 그게 명령이니까. 칼리스는 한걸음 더 걸었다.
“멍! 안 돼! 제발. 멍, 하지 마.”
‘이미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졌어. 그렇게 번 목숨, 여기서 잃을 수는 없어.’
철컥. 무언가가 그녀의 목을 잡아당겼다. 벌써 거리에 한계가 온 것이다. 칼리스는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또 한 걸음 걸었다.
“나, 나. 착한 강아지야. 말, 잘 들어! 인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멍, 제발. 멍.”
‘최소한, 여기서 명령을 따라, 권한을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어. 혹, 만물의 영장의 말처럼 4레벨이 될 수도 있겠지.’
조인다. 목과 사슬, 거기 있던 조그만 틈이 점점 줄어든다. 여유가 사라지며 칼리스의 호흡이 점점 얕아졌다.
“멍! 멍멍! 멈춰, 멍!”
‘나는, 살아야.’
본능이 경고를 울린다. 그래도 도망갈 수 없다. 군국의 별, 에본 중장이 여천히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숨이 막힌 지 오래. 칼리스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더욱 당겼다.
“아우우우우!”
잠깐, 칼리스의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보다 못한 아지는 냉큼 앞으로 뛰었다. 사슬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지고, 동시에 잊었던 호흡이 되돌아왔다. 칼리스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냉큼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곁에는, 아지가 더없이 슬픈 얼굴로 서 있었다.
“멍….”
‘목에 사슬을 건 채로, 내 목숨을 인질로 개의 왕을 이끌어, 지상으로 나가는 것이. 유일한…. 내가, 살아남을, 방법….’
이제 아지는 칼리스를 따라올 것이다. 그녀가 죽게 둘 수 없으니까.
에본 중장은 칼리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치하했다.
“잘했다, 중령. 개의 왕을 다스릴 능력은 있는 모양이군.”
이 역시, 대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칼리스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거짓말을 말했다.
“감사…합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중령은 정말 훌륭한 인재야! 좋아! 이대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겠군!”
이제 개의 왕도, 개의 왕을 움직일 수단도 얻었다. 이제 남은 건 지상으로 복귀하는 것뿐.
에본 중장이 크게 기뻐하며 손뼉을 칠 때였다.
“냐-!”
그때, 나비가 건물 안쪽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불에 덴 듯 폴짝거리는 나비는 곧 에본 중장에게 매달려서 칭얼거렸다.
“냐냐냥! 냐냐! 아프다냐! 따끔하다냐!”
그렇게 울먹이는 나비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몇 가닥 잘렸는지 길이가 들쭉날쭉이었고, 팔과 다리에는 생채기가 수북했다. 양이 대단치는 않지만 피도 흐르고 있었다.
나비는 손에 난 상처를 연신 핥으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나비. 무슨 일입니까?”
“냐, 저것이 싫다냐! 보이지도 않고 막 따끔따끔하다냐! ”
저것, 이라고 하면 조금 전까지 싸우던 회귀자를 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고양이의 왕이 학을 떼며 도망쳐온 걸까?
에본 중장은 나비의 상처를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치명타를 노리기보다는 고통을 주기 위한 공격이군. 아픈 것을 싫어하는 고양이이니, 아픈 부분만 공격해서 달아나게 만들겠다…?’
짐승의 왕은 강력하나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짐승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짐승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법이다.
먼 옛날부터, 짐승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겁주기였다. 늑대의 왕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생존본능이 사냥본능보다 높았으므로, 인간들은 날카로운 가시 함정을 준비하거나 불을 피우는 방식으로 짐승의 왕을 쫓아내곤 했다.
‘짐승의 왕과 상대해본 경험이 있나? 능숙하군. 고양이의 왕이 적의를 잃었으니, 내가 나서야 한다.’
결론을 내린 에본이 그의 무기인 클로를 집어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프겠군요. 나비.”
“냐냐! 싫다냐. 따끔따끔한 가시덩굴 같다냐!”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신 제가 그를 해치우겠습니다.”
“냐냣! 혼쭐을 내주어라냐! 냐가 이길 수는 있었지만! 거의 해치울 뻔했지만! 냐가 너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냐!”
그 말이 허풍은 아닌지, 나비를 따라 들어온 회귀자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입가에는 피가 한줄기 흐르고 얼굴에는 세가닥 상처가 나 있었다. 넝마가 된 옷소매는 피로 붉게 젖어있었다.
‘다 죽어가는군. 하긴 짐승의 왕이 쉽지는 않은 상대지.’
아무래도 그는 마무리만 하면 되는 모양이었다.
에본 중장은 클로를 들고 양손에 끼었다.
오른손에 하나, 그리고 왼손에 하나. 철컥, 하고 장치가 그의 몸에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태세를 끝마친 중장이 명령을 하달했다.
“나비, 대령과 함께 이들을 옥상까지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대령. 나비가 있다면 시조도 두려울 게 없다. 인질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옥상으로 향해라.”
“알겠습니다!”
대령에게서 씩씩한 대답이 들려왔다. 에본 중장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철의 감촉을 즐기며 회귀자를 마주했다.
그동안 회귀자는.
“야! 남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데, 왜 지금까지 탱자탱자 놀고 있는 거야?!”
내 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얼굴도 시뻘게진 채였다.
탱자탱자 놀다니. 내 손 묶여있는 거 안 보이나.
내가 양손을 슬쩍 들어보이자 회귀자는 눈이 돌아가서 소리쳤다.
“장난하지 말고, 빨리 뭐라도 해봐! 이대로 놓치면…!”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위험분자?”
순간적으로 회귀자를 향해 접근한 에본. 회귀자는 한 박자 늦게 그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천앵으로 방어했다.
“흡!”
채챙. 클로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회귀자의 사방을 덮쳐왔다. 회귀자는 이를 악물고는 천앵을 놀려 그 참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을 흘려내는 동시에 공수를 전환하여 천앵을 가로로 그었다.
무게 없는 검, 천앵의 최대 장점은 속도. 자세에 구애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공수전환을 이룰 수 있다. 수비에서 딜레이 없이 공격으로 이어지는 초고속 참격.
그러나 에본에겐 맞지 않았다.
놀라운 유연함으로 가로베기를 피해낸 에본 중장이 클로로 땅을 긁으며 돌진했다. 마치 네발짐승과도 같은 도약이었다. 순식간에 접근을 허용한 회귀자. 에본 중장은 어깨로 그녀의 몸을 들이받았다. 그의 귀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 여기는 번잡하니, 더 넓은 곳에서 싸우지.”
시간을 끌 의도가 다분한 발언.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회귀자는 이를 악물었다.
“치…잇!”
‘이 중요한 순간에… 저 녀석을… 믿을 수밖에 없다니…!’
그렇게, 군국의 별과 회귀자가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의도가 교차한다.
소원이, 소망이, 바람이, 의지가. 사람을 타고 전해진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이제, 공연만 하면 된다.
나는 손가락을 빼냈다. 아까 불사자가 산산조각 날 때 몰래 챙긴, 그의 오른팔이 가졌던 조각 중 가장 커다란 엄지손가락. 그게 슬쩍 들이밀어진다.
이 순간, 나는 오른손에 여섯 개의 손가락을 지니고 있었다.
자아, 생각해보자. 조금 전, 대령은 내 손목을 밧줄로 묶었다.
그런데 내 손에는 불사자의 오른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엄지손가락이 들어있었다. 묶일 때 보여준 손가락은 내 것이 아니었던 거다.
이게 무슨 의미냐.
그야, 너무나도 즐거운 마술이 시작된다는 거지!
“우리는 간다! 중령, 출발하라…!”
중장의 명령을 이어받은 대령이 급히 가죽 가방을 들어 올릴 때였다.
툭.
가죽 가방에 난 틈으로 네모난 종이갑이 떨어졌다. 땅에 부딪힌 종이갑이 활짝 열리며, 개박하로 만든 마력초가 사방에 흩어졌다.
“앗!”
대령이 당황했다. 마력초가 중요한 물건이기 이전, 그게 떨어지면서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예견한 탓이다,
그 순간 아픔에 신음하던 나비가 눈을 빛냈다.
“냐-!”
그건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마력초를 향해 몸을 던진 나비는 앞발로 그것들을 한껏 쓸어모았다.
마력초 열 개비로 만든 돗자리가 생겨났다. 그 위에 자리를 잡은 나비는 온몸으로 뒹굴기 시작했다.
대령이 당황해서 외쳤다.
“잠시만 참으십쇼, 나비!”
“냐아-! 냐, 냐하, 핫….”
“크윽! 이게 왜 떨어졌지?”
왜냐니.
가죽 가방을 써서 그렇지. 나는 말이야, 발로도 가죽 가방의 배를 가를 수 있다고.
쓰지 말라고 그렇게 배를 갈라줬건만, 결국 써버리고는. 쯧쯧. 뉴스도 안 읽었나.
아무리 세계수를 재배한다고 한들, 고양이의 왕을 다스리는 마력초는 대단히 귀중한 물건. 대령은 급히 몸을 굽혀 귀중한 마력초를 회수하려고 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의식 속에는 내가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대령의 머리 위쪽에서, 마술사의 미소를 지으며.
“짠.”
왼손부터.
“짜잔.”
그리고 이어 오른손을.
“짜라잔.”
밧줄에서 미끄러뜨리며. 우아하고도 자연스럽게 빼냈다.
단단해 보이던 매듭이 물처럼 녹아든다. 설계 자체가 어긋난, 정확히는 어긋나게 한 매듭이라 한순간 풀려버린 것이다.
탈출 마술은 마술사의 기본 소양. 자랑거리도 못 되지만.
장교를 대상으로 했으면 또 다르겠지, 아마?
이래서 사람 손목을 묶을 때는, 그 손가락이 다 그의 것인지 확인해야지.
아니면, 가짜 손가락으로 시선을 속여두고는, 안쪽 매듭 틈으로 엄지를 끼워 넣은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
마침 칼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다행이네. 이 역사적인 순간 관객이 있는 편이 즐겁잖아? 나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는, 내친 김에 불사자의 오른팔 손가락을 던져주었다.
좋아. 탈출에 성공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볼까.
나는 탈출했어, 대령. 네가 탈출해 볼 시간이야.
나는 풀어낸 밧줄을 양손으로 들었다. 군국 특제 밧줄, 고온에도 칼날에도 강한 특제품. 어지간하면 끊어질 일 없지.
밧줄의 양 끝을 단단히 잡고는.
땅바닥에서 마력초를 줍는 대령의 뒤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밧줄을 걸어 졸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