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08)
EP.108 짐승, 짐승의 왕, 인간 – 4
나는 바람을 읽는다.
가만히, 흘러가는 독심술로 누군가의 마음을 읽다 보면, 누군가의 바람은 내 안에 머물렀다가 잔향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대다수의 바람은 그렇게 지나가기만 하나.
가끔, 어떤 바람은 창문을 타고 흘러가기 전에 격렬하게 내 안에서 맴돌고 만다.
사악하든, 위험하든, 주제 넘든. 간절한 바람은 외면하고자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독심술사의 숙명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생각을 읽으니까.
바람이 책장을 들추면 그 아래 사각거리는 글이 여백을 채워나간다. 일견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나 아슬아슬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언제나 숙연해지는 마음뿐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벽돌보다도 촘촘하며,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보다도 정교한, 전체로써 완성되면서도 글자 하나하나에 사소한 의미가 담긴 아름다운 서사시가 눈앞에 있다면.
이 여백에 무엇이 적힐지 기대하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일 터.
그리고 언제나.
더 이어지고자 하는 문장이, 마침표 그 너머를 바라보는 책이 더욱 반짝이는 법이었다.
끝내고자, 끝맺고자. 가장 훌륭한 마침표를 찾아다니는 책은 역설적으로도 최악의 결말만을 준비한다.
세상에 완벽한 삶이란 없기에, 완벽을 가장하기 위해 거짓과 모순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거짓말이라면.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회귀자와 갑작스레 난입한 나비가 전투를 벌이는 소음이었다.
꽤 가까이서 싸우는 건지, 회귀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게! 잘린 오른손 안에 마력초를 쥐고는…!”
광기에 휩싸인 척 회귀자에게 달려든 에본 중장은, 공격하는 대신 그대로 오른팔을 희생했다. 회귀자의 반격에 허무하게 잘려 날아가는 오른팔.
회귀자가 당황한 틈을 타, 그는 맹렬한 속도로 도망쳤다. 뒤늦게 추격하는 회귀자의 앞에 그의 잘린 오른손이 펼쳐졌다.
손아귀 안에는 마력초가 있었다. 불티가 엉겨 붙은 채로, 거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마력초가 회귀자에게 흩뿌려졌다.
동시에 에본 중장은, 달아나면서 입가에 가득 머금은 마력초 연기를 내뿜었다. 종이에 싸인 마력초라면 또 모를까, 불태우며 강렬한 향을 내는 연기는 나비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본능만 남은 나비는 향을 따라 나오다가 회귀자와 마주쳤다.
둘은 물흐르듯 그대로 전투에 돌입했다.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자기가 수인이라는 치부를 밝히면서까지 승부를 이어가는 시늉을 한 것부터.
그냥 피워도 될 마력초를, 고통을 감수하면서 굳이 입안에 가둬놓고 불을 붙인 것까지.
밑바닥의 밑바닥부터 치밀하게 설계한, 한 편의 스릴러.
만일 이것이 삶을 향한 노력이었다면, 나는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자기 자신을 속이려 드는 이의 발버둥이라면, 내가 읽고 있는 게 거짓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면.
더욱 치열하게 쌓아올린 만큼, 그 무의미함에 맥이 빠지고 마는 것이다.
“고양이의 왕은 여기에 있어! 녀석이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게 막아!”
멀리서 회귀자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이미 그는 무슨 짓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한다.
칼리스의 복부를 등부터 배까지 종단한 클로는 말없이 핏물만 똑똑 떨어뜨렸다.
“개의 왕은… 흉성을 발하지 않는다. 왜냐면, 늑대가 모든 흉성을 가져갔기 때문이지.”
에본 중장은 클로를 놓았다. 그의 손에는 사슬이 들려있었다. 칼리스가 벗어던진 사슬이었다.
그는 고양이 수인이었고, 사냥감을 향해 은밀하게 다가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마침 불사자의 등장에 정신이 팔린 칼리스는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눈치챘더라도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상대는 군국의 별. 중령이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으니.
에본은 사슬을 클로 손잡이에 감고는 단단히 묶었다. 클로는 닻이오, 사슬은 밧줄.
그것으로 칼리스를 파헤친 에본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개의 왕도 흉성을 발할 때가 있다. 그건, 자기가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가 아니다. 바로… 사람을 죽였을 때. 개의 왕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목숨을 잃었을 때. 개의 왕은 흉성을 발한다.”
에본의 시선이 사슬을 따라갔다. 그 반대쪽 끝에는 아지가 있었다.
아지의 앞발에는 여전히 사슬이 묶인 채였다.
칼리스는 목에 감긴 사슬을 풀었지만, 나비와 싸우던 아지에겐 그럴 틈이 없었으니까.
“그게 비록 자의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면, 개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개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되면, 인간이 개의 왕으로 하여금 인간을 죽이게 만든다면.
오래전, 개와 인간이 나누었던 약속이 흔들리며 늑대와 개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렇기에 아지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와중에도 끼어들 수 없다.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누군가 죽어서는 안 되기에.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저 구석에 틀어박힌다.
“제 편을 공격하다니. 무슨 짓을 하려는…? 휴?”
급작스런 사태를 따라가지 못한 티르가 경악하는 사이, 에본은 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을 상대로는 호의만을 가진 아지다. 무저항인 아지를 향해 다가가,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그 머리털을 움켜쥐고는.
에본 중장은 그대로 내달렸다.
“깽! 멍멍!”
머리털이 잡힌 채 끌려나가는 아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파서가 아니다. 이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앞발에 걸린 사슬의 반대쪽 끝에는 칼리스의 몸에 박힌 클로가 있다. 만일 아지가 이대로 끌려가면 사슬이 당겨지며, 갈고리처럼 휜 날을 가진 클로가 칼리스의 근육과 장기를 전부 뜯어낼 것이다.
이미 치명상인데, 잡아 당겨지기까지 한다면…. 칼리스는 즉사다.
아지의 힘이 아니더라도, 아지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는 것이다.
아지가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사람을 죽인 건 아니니 약속의 근간이 흔들리지는 않지만, 지금은 흉성을 지니고 난동부리는 것도 위험하다. 이곳은 고립된 무저갱이니까.
땅이라도 부순다면, 다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멍! 멍멍멍! 놔! 왈!”
아지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발톱을 세우고 땅과 벽을 긁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아지의 체중 자체는 그리 무겁지 않고, 중장은 나름대로 기공을 쓰는 강자. 무엇보다 콘크리트 벽과 바닥이 저 힘을 온전히 견뎌내기에는 약했다.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나.
“날뛰어봐라, 개의 왕! 다만, 네 힘으로도 나를 막으려면, 나를 죽여야 할 터! 그것도 나름 좋겠지!”
“끼이이잉…!”
그것은 더욱 불가능한 방법.
죽음까지 남은 길이는 약 15m. 아지가 발톱을 땅에 박아넣고 필사적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그렇게 번 시간은 기껏해야 초 단위.
이대로 가면 칼리스는 죽고, 아지는 폭주한다. 인간을 죽이려 들지 않아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지를 제압해야 하리라.
대단한 집념이며, 소름 끼칠 정도의 악의가 뭉게뭉게 흘러나온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심계를 읽지 못했다. 하긴,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자기 목숨을 인질로 누군가에게 죽음의 굴레를 씌우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읽었다.
그리고 읽은 순간 달려나갔다.
칼리스는 죽어가고 있으며, 곧 죽을 것이다. 이 사슬이 다하는 순간.
복부에 클로가 꽃힌 순간 그녀는 죽음을 직감했다.
‘살고… 싶었는데. 무리였나 봐. 하긴, 지금껏 잘못된 선택이 너무 많았지. 늦기도 했고.’
발버둥을 친 끝에 다다른 결말. 그 끝에서 칼리스가 느낀 감정은 후련함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미력한 힘이나마 발휘하여 조그만 성과라도 이루었다. 조금 더 일찍 했다면, 하는 후회는 있으나 그거야 모두가 으레 느끼는 사소한 것이다.
‘…나는 짐승이 싫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짐승이 싫었어. 더럽고, 불결한 것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팔자 좋게 살아가는 것들. 죽는 건… 똑같은데….’
만물의 영장 소속으로 개의 왕에 대한 지식이 있던 그녀는,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에본이 무슨 짓을 할지 대강 알아챘다.
그녀가 개의 왕 폭주의 제물이 된다는 사실도.
‘…죽어도, 개 따위에게는 죽지 않아.’
칼리스는 떨리는 손을 뒤로 뻗어 클로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줘서 뽑아내려고 했다.
저 멀리, 달려오는 라쉬가 보인다. 칼리스는 마지막 순간 그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실수투성이인 그녀가 죽기 전 할 수 있는 마지막 고상함이 될 것이다….
“나는 이쪽 이야기를 더 좋아해요. 서로 필사적이더라도, 한쪽이 가진 필사의 각오가 유치한 거짓말로 이루어졌다면…. 좀 허무하거든요.”
나는 바람을 듣는 자.
끝맺음을 원하는 이에게는, 완벽한 마무리를.
이어감을 원하는 이에게는, 더 써 내려갈 여백을.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것이라면, 가능하게끔.
‘저 노역자! 언제 저기까지!’
에본 중장의 생각이 들렸다. 언제긴, 네 생각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네가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말이야.
나는 칼리스의 등 뒤에 서서는, 손가락을 차례로 오므렸다가 펴며 사슬 매듭에 갖다 대었다.
역시, 탈출 마술에는 조수가 필요한 법이지.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풀어드릴게요! 왕년에 자물쇠 같은 거 좀 딴 사람이거든요!”
자신만만하게 외친 내가 사슬 매듭을 잡아당길 때였다.
철컥철컥.
사슬이 헛되이 철컥인다. 매듭에서는 쇳소리만 날 뿐이다. 한참 사슬 매듭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당황한 소리를 냈다.
“어? 어? 이, 이게 왜 안 풀리지? 이상한데?”
‘멍청한! 4레벨 연금강 사슬을 힘으로 비틀어 만든 매듭이다. 그걸 단시간에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나!’
에본 중장이 나를 비웃으며 사슬의 한계 거리까지 도달했다. 아지의 발톱이 콘크리트에 길게 자국을 새기며, 힘없던 사슬이 점차 당겨진다.
‘이대로, 개의 왕을 당기기만 하면! 개의 왕으로 말미암아, 중령이 죽는다!’
“아! 이, 이게! 잠깐만! 되어야 하는데!”
철컥, 철컥. 무언가 맞물리지 않는 듯한 쇳소리는 여전하다. 중장은 성공을 직감하고는 전신에 힘을 주었다.
‘다, 무저갱 아래로 가라앉아라! 내가 그 시체를 주우러 돌아올 때까지!’
그가 아지의 머리카락을 홱 잡아당기고, 아지가 끔찍한 비명을 토하려고 할 때였다.
사슬이 팽팽히 당겨졌다. 중장의 힘이 그대로 아지를 타고, 쇠사슬로 전해지며, 클로의 손잡이에 닿고는.
쑥, 하고.
클로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니까, 칼날 같은 부분을 빼고 오직 손잡이만.
팅, 팅.
사슬에 묶인 손잡이가 헛되이 땅에 튕긴다.
몸이 파헤쳐지는 소리도 없다. 끔찍한 비명도 없다. 클로는 여전히 칼리스의 복부에 박힌 채로 새어나오는 피를 막고 있다.
오직 사슬에 묶인 클로의 ‘손잡이’만이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갔다.
순간, 모두의 예상이 빗나가고,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이들의 생각이 하얗게 표백된다.
역시.
나는 이 침묵이, 마술이 끝난 뒤 이어지는 새하얀 공백이 너무 좋다. 솟구치는 즐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양손을 펼치며 외쳤다.
“서~프라이즈! 짜잔! 탈출,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