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1)
EP.11 그대는 왜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가
나를 밀어내고 자리를 잡은 흡혈귀는 근엄하게 말했다.
[혈조술을 전수하기 전, 먼저 너의 실력을 보겠다.]회귀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뒤로 손을 뻗어서 천앵의 손잡이를 잡았다. 주인의 명을 따라 허공을 부유하던 천앵은, 힘을 발휘할 기회가 오자 기쁜 듯이 울며 날을 세웠다. 회귀자가 허공에 대고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어둠을 밝게 비추는 듯한 맑고 깨끗한 소리가 울렸다.
휘릭. 회귀자는 검을 좌우로 휘적이며 말했다.
“내 검은 좀 특별한데. 본래 실력을 알기 어려울 거야. 다른 검으로 해볼까?”
[상관없다. 네 손에 쥔 특별함 역시 너를 반짝이게 하는 것이니.]“그렇다면야. 실력은 어떻게 보여줄까?”
끼긱.
새카만 관의 뚜껑이 비스듬히 열렸다. 예의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손가락 끝을 아래로 향하고는 검은 방울을 떨어뜨렸다.
툭. 암흑보다도 한층 어두운 그림자는 묘목처럼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식물이 햇빛과 공기로 자신을 키우듯, 검은 구체도 주변에 가득한 암흑을 빨아들여 자신의 몸을 채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일렁이는 그림자는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어나가더니 이내 갑주를 입은 기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과거의 메아리다.]나나 회귀자가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흡혈귀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내가 이전에 만난 한 기사의 메아리…. 생전 흑기사로 불리며 수백 명을 참살한 자. 내가 취한 그자의 피에서 메아리를 부르고, 어둠으로 갑옷을 지었지. 이 기사를 상대해보아라.]“부숴도 돼?”
[너의 능력이 닿는다면.]흡혈귀는 조금 우쭐한 듯한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 수월치 않을 것이다. 비록 메아리일지언정, 그 몸을 이루는 피는 흑기사의 것. 또한 어둠으로 만든 갑주는 강철과도 같은 강도를 지녔지. 한때 이름 높았던 그 기사를 그대로 재현….]후웅.
어둠에 빗금이 새겨진다. 비스듬한 단층이 생겨나고, 그것을 분단선으로 위와 아래가 나누어진다. 공간째로 베어내는 하나의 선. 천앵은 세상을 재단하는 가위였다. 강철보다는 안개에 가까운 어둠도 회귀자의 일검에 둘로 나누어졌다.
빛을 잘라줄까, 라고 나한테 말했던가? 아마 가능할 것이다. 어둠도 자르는데, 뭐.
[…호오. 제법이구나.]묘기와도 같은 검술에 흡혈귀가 감탄을 표했다. 다만, 흡혈귀의 생각에 담긴 감정은 조금 달랐다.
‘…? 아무리 들고 있는 검이 특별하다 한들, 단 일수에? 성기사가 아니면 흠집조차 낼 수 없던 메아리였는데…?’
당황했구나, 흡혈귀.
방금 꺼낸 게 그녀의 전력은 아니었지만, 가느다란 체형을 가진 철부지에게 꺼내기에는 차고 넘치던 것. 한때 악명높은 흑기사를 그대로 재현했는데, 그걸 아주 간단하게 치워버린 것이다.
‘그것도 저 나이에? 내가 자는 사이, 인류사에 무언가 거대한 진전이 있었던 건가…?’
쟤를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저건 몇 번의 죽음을 거듭하며 온갖 기연을 빨아먹은 회귀자. 아직 힘을 다 회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힘의 일부는 남아있다. 거기에 뭔 말도 안 되는 보검까지 손에 든 상태.
인류사에 진전이 있던 게 아니라, 쟤가 인류사를 독식한 존재다.
흡혈귀가 감정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대단한 재주로구나. 너 정도 되는 아이라면 스스로 길을 찾으려고 들어도 이상하지 않건만.]“글쎄? 나는 그렇게 재능 있는 편은 아니야. 기연을 얻어서 미래에 얻을 힘을 약간 당겨왔을 뿐.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사람도, 재능있는 사람도 많아. 나는 그저 그들의 흔적을 쫓으며 흉내내는 덜떨어진 카피캣일 뿐.”
회귀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매 회차 규격 외 존재들과 부대껴온 회귀자에겐, 회귀로 온갖 기연을 독식했음에도 한 발짝 부족한 자신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한 겸손, 혹은 기만에 가까운 말 같지만. 실제로 그녀가 상대했던 적들에 비하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겸양이 지나치구나.]“겸양이 아니야. 저기.”
회귀자의 검끝이 나를 향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들썩였다.
아, 씨. 깜짝이야. 저놈은 사람을 칼로 겨누고 그러냐. 사람을 가리킬 때는 최대한 부드럽게, 안 배웠어? 손가락질도 무례하다 하는 판에 뭔 칼을.
회귀자는 그런 나를 보고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저 녀석만 하더라도 내 일검을 튕겨냈으니까.”
[그 검을 말이냐?]“그래. 이 천앵을,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말이야.”
[저 녀석이?]아니, 맞기는 한데. 솔직히 두 번 하라면 못 할 텐데.
‘한 손가락으로 검격을 튕겨냈다면, 필시 이보다 몇 수 위에 있을 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취다. 요즘 것들은 저 정도가 평범한가? 강철 정도는 숨쉬듯 쉽게 벨 수 있나?’
회귀자와, 그 회귀자의 올려치기에 당한 나. 흡혈귀는 우리 둘을 보고 평균을 잘못 잡는 오류를 범하고야 말았다.
평범을 회귀자 수준으로 잡지 말라고. 이 시대를 사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야? 빨리 박탈당한 다른 평범한 이들에게 사과해!
거기다 나는 허위매물이야. 거품이 잔뜩 끼었다고!
‘내 권능을 낡았다고 한 건,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의 뜻? 정말로 시대가 흐르고 있다는 말인가?’
아주 자연스레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회귀자는,
“…그러니까 잘 부탁해. 나도 죽을힘을 다해서 배울 테니.”
[그렇다면.]‘나 역시, 최선을 다해 이 아이가 저 건방진 놈을 무찌를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지.’
흡혈귀의 ‘진심’을 꺼내게 했다.
흡혈귀는 회귀자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핏, 소리와 함께 흡혈귀의 손가락 끝이 갈라졌다. 손가락에 난 작은 균열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 피는 흡혈귀가 다루는 다른 핏물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권능으로써의 피. 혈액으로 마법을 부리고 권속을 사역하는 시조의 힘. 그 피는 불길한 마력으로 번들거리며, 세상 만물에 침식할 듯이 날름거리는 종류다.
그러나 지금 흡혈귀가 흘리는 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이라… 더욱 이질감이 들었다.
적당히 붉고, 빛나지도 않으며, 비릿한 향이 나는 혈액. 마치 흡혈귀에게도 인간과 똑같은 피가 흐른다고 주장하는 듯한 아이러니.
허나, 그 존재감은 탄탈로스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했다. 어둠조차 그것을 경배하듯 슬금슬금 물러난다.
그 핏방울은, 서서히 회귀자의 곁으로 날아가, 그 주위를 맴돌았다.
[큰 힘에는 커다란 대가가 따른다. 하나, 내가 보기에 너에게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듯하구나. 그 대가를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이건….”
[나의 진혈이다.]시조가 가진 첫 번째 피, 진혈.
성황청에 그것을 진상하면, 크나큰 축복과 함께 팔라딘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흡혈귀에게 건넨다면, 영원한 부와 권력을 약속할 것이다.
혹여나 조금의 시련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높은 위치를 노린다면, 직접 몸 안에 집어넣으면 된다. 피를 노리는 승냥이들을 다 거꾸러뜨리고 자기 자신을 공고히 한다면, 세상에 열둘 밖에 없던 엘더가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니.
어쨌건 누구 한 명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귀하고도 위험한 물건.
그런 보물을 앞두고, 회귀자는.
“이건 왜 주는 거야? 설마 흡혈귀가 되라는 뜻이야? 별로, 흡혈귀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무관심을 넘어, 오히려 처치 곤란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흡혈귀는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나의 진혈인데? 한때 나타난 것만으로도 세상을 진동시켰던 그 피이거늘? 거들떠보지도 않다니?’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흡혈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나 역시 너를 흡혈귀로 만들 생각은 없다.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그러면?”
[진혈을 너의 심장 위에 새길 것이다. 포식자의 피. 그것이 있다면, 혈기에 대한 감각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서겠지.]“아아. 그런 식으로? 그거라면 받을게!”
회귀자가 냉큼 양팔을 벌렸다. 진혈 자체에는 별 관심 없지만, 교보재로는 잘 쓰겠다는 마음가짐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흡혈귀는 아무런 아쉬움도 안 보이는 회귀자의 태도를 보고는 크게 낙담했다.
‘시험이기는 했다. 혹여나 욕망을 못 이기고 흡혈귀가 되겠다고 하면, 자격이 없다며 내칠 생각이었다만…. 그래도 이토록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정말 흡혈귀는 더 이상 경외의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흡혈귀는 조금 우울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진혈이 회귀자의 가슴께로 향하더니, 심장 위쪽에 붉은 톱니바퀴 모양의 각인이 새겨졌다.
[…네가 혈조술을 끝까지 익힌다면, 나의 피를 떼어낼 수 있겠지. 그때 돌려받도록 하마.]“알았어. 그런데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이는데, 진혈을 꺼내느라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괜찮다. 걱정하지 말거라….]‘진혈…. 인데. 이제는 흡혈귀조차도 밀려난 존재가 된 것인가? 내가 잠든 지 벌써 300여 년. 그럴 수도 있겠지….’
세월이 무상하구나. 흡혈귀는 깊이 한탄하며 말했다.
[이제 가르침을 내리마.]흡혈귀가 회귀자에게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그들 주위를 기웃거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혈이래. 진혈. 천여 년 동안 전설로만 전해 내려왔던 피. 구매자만 잘 찾으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얻을 수 있는 보물. 그게 회귀자의 몸에 새겨졌다. 황금보다도 값비싼 문신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제자가 되기를 거절한 몸. 진혈을 달라고 요구하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거기다 흡혈귀의 생각을 읽어 보니 진혈도 온전히 줄 것 같지가 않다. 애초에 진혈을 꺼내게 된 계기도 나에 대한 경계심이니, 나에게는 오지 않겠지.
쳇, 흡혈귀는 생각의 방향이 틀렸다. 나를 굴복시키고 싶다면 그냥 진혈을 줬으면 된다. 진혈을 줄 테니 무릎 꿇으라 명령한다면, 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즉시 엎드려서 개처럼 발등을 핥았을 텐데.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흡혈귀는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되어 꽤 혼란스러워하는 상태. 생각을 읽어보니 아직 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어찌저찌 잘 구슬리면 나에게도 뭔가 떨어지는 게 있지 않을까?
[…? 뭐냐, 네 놈은. 가르침 받기를 거절한 녀석이 왜 자꾸 알짱거리고 있는 거냐?]적대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미운털이 완전 단단히 박힌 듯했다. 나는 양손을 내보이며 변명했다.
“저는 군국 교관입니다. 이 장소는 교육대고요. 여러분을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습니다.”
[관리, 감독? 네까짓 게 나를 관리하고 감독한다고?]“의무가 언제나 능력을 고려하여 주어지지는 않잖습니까. 저도 티르칸쟈카 교육생을 믿지만, 그와 별개로 여러분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와 능력의 불균형. 혹 기사도를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 말한다면,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흡혈귀는 순간 그런가, 하고 납득해버렸다.
휴, 다행이다. 교관이라고 사칭했던 것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그래도 흡혈귀는 불편함을 표했다.
[하나, 나는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도중이다. 아이가 배움을 사사하는 과정은 필시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터인데.]“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요즘은 한 선생이 오십에 이르는 학생을 가르칩니다. 무술, 마법, 전략, 전술마다 각각 다른 선생들이 배정되고, 학생들은 그들의 수업을 골라듣죠. 심지어 대부분의 강의는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됩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어느 바보가 그토록 비밀스러운 지식을 나눈다는 말이냐?]“국가가요. 나라에서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통제합니다. 그리고 모은 지식을 분류하여,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줍니다.”
무술이나 마법, 전략과 전술은 지식 그 자체로 힘이자 권력이다. 최소한 흡혈귀의 시대에는 그랬다. 괜히 사승관계와 도제가 존재했던 게 아니다. 스승은 지식을 전수하는 갑의 입장이었고, 제자는 그 토막만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예처럼 부려먹혔다. 그 지식이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며.
그런데 이것을 아낌없이 전수한다니. 흡혈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심지어 학생들도 선생님을 여럿 둡니다. 사관학교 말고도 사설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생들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몽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지식은 비밀스럽게 전수되지 않습니다. 세상 앞에 모두 공개되어 평가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안 믿겼는지, 흡혈귀는 회귀자에게 내용을 재차 확인했다.
[셰이. 저 말이 사실이냐?]“응. 맞아. 군국이 유일하게 잘한 정책이지.”
[그렇구나….]새삼스레 세월의 흐름을 상기하는 흡혈귀. 회귀자는 못마땅한 듯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저 녀석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어. 우리가 무슨 일을 꾸밀까 불안해서 감시하는 거야.”
[아니, 아니다. 세상이 결국 그러한 방법을 택했다면, 나 홀로 부정해보아야 의미는 없겠지. 지켜보는 것까지 막지는 않겠다.]회귀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그녀를 놀리듯이 한 번 쳐다보곤, 뭐 떨어지면 냉큼 주워먹을 심산으로 그 곁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흡혈귀는 나를 방치하고는 하던 수업을 마저 이어갔다.
[…그리하여. 피란 생명이다. 네 몸을 타고 흐르는 삶의 근원이고, 힘을 이끌어내는 원천이기도 하다. 너는 필히 네 몸에 있는 피를 한 방울까지 느껴야 한다. 피가 어디로 흐르는지 일목요연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느긋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수업. 밥 먹고 왔으면 자기 딱 좋은 내용이었으나, 회귀자는 놀랄 정도의 집중력으로 흡혈귀의 말을 새겨듣고 있었다.
이거 들어서 도움 되는 게 있나? 내용 자체는 약장수랑 비슷해보이는데. 나도 한 번 들어볼까?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흡혈귀의 말을, 그 말을 빚어내는 생각을 읽어들였다.
[네 안에는 수많은 힘이 담겨있다. 네 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그 힘을 다루는 첫걸음. 천 갈래의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는 힘 중, 뜨겁게 맥동하는 피를 온전히 느껴라.]나는 생각을 읽는 자. 말뜻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리 못 가르치는 사람도 나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 좋은 선생이 될 자질 중 ‘전달력’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필요한 건 오직 지식과 이해의 깊이뿐.
흡혈귀의 생각을 읽어들이며,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의 고동소리와 불끈거리는 동맥을 느꼈다.
오, 느껴진다. 두근거리며 뛰는 핏줄이! 손목과 경동맥 부근에서 힘이 불끈거린다. 이게 피의 힘인가!
[피는 강물이다. 무리지은 강은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흙 틈에 난 조그마한 구멍으로 파고든다. 스며든 강물은 온 대지를 적시며, 지독히 느리게 바다로 향한다. 네가 느껴야 할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핏줄이 아니다. 전신에 스며든 피. 너를 채우는 그 힘을 느껴야 한다.]아, 이게 아니네.
뭐, 생각을 읽을 수는 있어도, 재능이나 상성 같은 게 있으니까. 책을 읽는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내 머리가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혈조술이라는 기술 자체가 나랑 안 맞는 탓이다.
역시 안 배우기를 잘했어. 배웠어도 뭐 피나 멎게 했겠지.
[혈조술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심장이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은 너의 영혼을 이 세상에 붙들어두는 삶의 증거지만, 동시에 네 피를 멋대로 움직이는 무능한 방해꾼이기도 하지. 그렇기에… 오직 죽은 이들만이 혈조술을 대성할 수 있는 거고.]회귀자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손뼉을 쳤다.
“그래서 흡혈귀들을 시귀라고 부르는 거구나.”
[그러하다. 혈조술로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흡혈귀와 시귀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흡혈귀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 죽어야 할 필요가 있지. 네가 흡혈귀가 되지 않겠다 고른 건 옳은 선택이었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이야말로 삶의 증거이며, 더 나아갈 수 있는 자질이니. 그것을 지키는 게 우선이리라. 심장은, 산 자만의 특권이니….]무언가를 추억하듯, 혹은 후회하듯 아련하게 중얼거리던 흡혈귀는 말을 이었다.
[잠깐 감상에 젖었구나. 어쨌건, 혈조술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네 심장부터 다스려야 한다. 잠시간 멈추거나, 아니면 더욱 빠르게 뛰도록 억지로 잡아끌어야 한다. 알겠느냐?]“대충은. 피를 다스리는 힘을 어느 정도 익히면, 심장을 붙잡고 움직여보라는 말이지?”
[이해가 빠르구나. 좋다. 어쨌건 기억하거라. 심장은 네 몸의 근원. 피를 움직이고, 정화하며, 마력을 짜낸다. 심장이야말로 몸의 중심이니, 언제나 상기하며 움직이도록….]피를 움직이고, 정화, 마력…? 어라.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잠깐만요, 티르칸쟈카 교육생.”
내가 나섰다. 흡혈귀는 대단히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또 무엇이냐?]“저, 심장은 마력기관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옛날 사람인 탓일까. 내가 아는 내용과 괴리가 있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고는 설명했다.
“대부분의 흡혈귀들은 멈춘 심장을 마력기관으로 만들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심장을 마력기관으로 바꾸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짓이거든요. 심장을 마력기관으로 삼으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필요까지 있다 보니. 그래서 요즘은 억지로라도 마력기관을 다른 곳에 만들고는 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라도 마력을 뽑아내기 위해 심장을 썼지만, 4세기 전 마법 혁명 이후로는 그런 빈도가 좀 줄었죠. 굳이 신체에 링크하지 않아도 마력을 잘 이끌어내는 방법이 발견되었으니까요. 이건 중등사관학교에서 마법 수업을 들으면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이니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아, 제가 너무 끼어들었나요? 계속하세요.”
후우. 대단히 중대한 오류를 지적해줬다. 이것으로 호감도를 좀 쌓았을….
‘진짜 미친놈인가?’
싸늘하다. 칼날 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내가 꼭 죽을죄라도 진 것 같다.
어? 왜? 나는 틀린 게 있어서 지적했을 뿐인데.
‘나도 아는 내용인데. 누구는 몰라서 가만히 있었는지 알아?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도 되는 걸 굳이 따지고 들다니.’
정상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회귀자가 가당찮다. 잘못된 건 지적해야지. 노인이라고 하는 말에 다 맞장구쳐주면 그건 예의가 아니라 기만이야, 기만. 너야말로 흡혈귀를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어쨌건.]흡혈귀는 애써 나를 외면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하나, 심장이 멈추어도 피는 계속 돌아야 한다. 멈춘 피는 고여서 썩어버린다. 몸을 흐르고 난 피에는 마력이 고갈되고…, 아니, 심장이 마력기관일 경우 말이다…. 크흠. 또 더러운 피는 심장을 지나면서 정화되니, 몸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라도.]“아. 잠깐만요. 정확히는 심장을 지나면서가 아니라, 폐를 지나면서예요.”
과거의 지식이라 그런가, 허점이 좀 많네.
고전문학으로 읽는다면 상관없는데 기술적으로 설명하면 문제가 생기지. 친절하게 지적해주자.
“사실 오염된 피라는 게 산소가 부족하다는 뜻이거든요. 산소는 저희 몸속으로 들어가, 우리가 가진 에너지를 태워 몸을 움직이죠. 이 과정은 더러움이나 깨끗함 문제가 아니라, 장작이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원리에요. 불타는 장작을 천으로 덮으면 불이 꺼지듯, 공기의 통로인 허파를 닫으면 우리 몸속의 불꽃이 꺼지죠. 그걸 죽는다고 표현하고요.”
‘이, 이건 나도 몰랐는데?’
흡혈귀야 천 년 전부터 자다 깨다 반복했으니까 그렇다고 치지만 너까지 모르면 어떡하니. 중등학교만 나와도 배우는 건데.
아, 미안. 너 중학교 안 나왔구나. 고아라서.
어라, 설마 혹시 내가 이 감옥에서 제일 고학력자? 새삼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네. 역시 사람은 배우고 볼 일이라니까.
“어쨌건. 아셨으면 이제 참고해서 설명을. 끄아아아아아악!”
머리가 쭈뼛 섰다. 살의를 감지한 나는 즉각 옆으로 몸을 뛰었다. 직후, 혈마의 말발굽이 내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공간이 찢어지고, 콘크리트가 두부처럼 박살난다. 등 뒤로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틀어박혔다.
푸르릉. 혈마는 빗나간 것이 아쉬운 듯 투레질을 했다. 발굽으로 땅을 긁을 때마다 콘크리트가 모래처럼 갈려나갔다. 나는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진짜!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엄살은!]“엄살 아니거든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짜 한 줌의 핏물이 될 뻔한 공격이라고요!”
[평범하지 않으니까 괜찮겠구나!]독심술 아니었으면 당신은 살인자야! 뒷배 없는 살인은 총살형감이라고! 내 독심술에 감사하라고, 당신!
[그래! 나는 뒤쳐졌다. 옛날부터 시대에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야! 네가 무어라도 보태준 게 있더냐!]“네? 제가 언제 당신한테 뒤쳐졌다고 한 적 있나요?”
[지금 그런 태도다! 나를 아주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한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잖아요!”
[생각한 적은 있다는 뜻이지?!]앗. 들켰다.
그리고 들켰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들킨 듯했다.
핏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흡혈귀의 마음속에서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어, 잠깐만. 지금 느껴지는 이 생각은 혹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삐지셨, 끄아아아아!”
피싯. 핏빛 구체가 나한테 날아든다. 나는 꼴사납게 땅을 굴러 혈구를 피했다.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혈구는, 땅에 떨어지자 폭발하며 콘크리트를 갈아버렸다.
[너라고는 다를 것 같아? 너도 단지 이 시대에 태어나서 운 좋게 섞여들었을 뿐이야! 너도 흡혈귀로 만들어주랴? 영원히 세상에 박리되어, 스스로 죽고 싶은 자 말고는 찾아오지 않는 삶으로 만들어줄까!]공격이 계속된다. 핏빛 구체가 내게로 날아온다. 살의가 담긴 공격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불만을 표시하는 듯한 투정이다. 아이가 장난감을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던지는 게 장난감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장난감도 맞으면 아픈데, 저 혈구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죽겠다. 어떻게든 주의를 끌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가르치던가!]“알았어요!”
내가 소리치자 공격이 멎었다.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얻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저는 보았습니다. 당신 마음속에 깊숙이에 존재하는 사회성을.”
[유언은 그게 끝이냐?]여기에서 쫄면 진짜 죽는다. 나는 흡혈귀의 말을 무시하고는 올곧게 내 말을 계속했다.
“사회성이란 타인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당신에게서는 그것이 보였습니다. 이 시대에 섞여, 같은 강물에서 흘러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일단 살고 봐야 하는 일이다. 흡혈귀의 마음에서 읽은 것 중 대충 아무 말이나 골라서 던졌다. 하나 정도는 얻어걸리라는 마음으로.
[시대에, 섞여?]다행스럽게도, 흡혈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내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적절한 교육을 통해 충분히 사회에 섞여 들을 수 있다고요.”
[…네가 뭔데. 어떤 자격이 있길래 그것을 정하느냐?]“여러분이 계신 이곳. 이곳의 이름은 정신교육대 탄탈로스입니다. 여러분은 교육생이고, 저는 교관. 이 사회에서 여러분을 이끄는 존재죠.”
흡혈귀는 이곳의 이름도 모르고 있겠지만, 뭐 그게 중요한가. 그렇게 불릴 수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나 자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제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교육생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똑바로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을. 여러분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죽이지 마.
나는 그런 소망을 담아, 최대한 당당하게 말했다.
[…하.]흡혈귀가 손을 내렸다. 그러자 허공을 수놓았던 수많은 핏빛 구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지금껏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를 갈아버린 그 붉은 공은, 핏물이 되어 땅속으로 녹아내렸다.
살았다. 내가 내심 안심할 무렵.
흩뿌려놓은 피를 거두며, 흡혈귀는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나 했건만. 책임질 수 없는 소리나 지껄이는구나.]어떻게 알았지?
관 속에서 목소리가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몇 번이고, 몇 년이고 기대와 단념을 반복해온 이만할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흡혈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포식자라는 말이다. 인간은 나를 두려워하여 피하거나, 부러워하여 되기를 바라거나. 섞이고자 한들, 나라는 존재는 그들과 섞일 수 없다. 늑대가 양 떼와 함께 지낼 수 있겠느냐?]말을 할 때마다 비유를 하는 것을 보니 옛날 사람 느낌이 물씬 나네. 하필이면 늑대와 양이라니.
지가 늑대면 뭐 어쩔건데. 요새 늑대가 얼마나 있다고.
하지만 그걸 지적해주면 또 화내겠지. 그러면 나도 조금 다르게, 비유법으로 설명해볼까.
“네.”
[말로는 무엇이든 못하겠느냐.]“증거, 보여드릴까요?”
어디 보일 테면 보여라. 흡혈귀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읽은 나는 곧장 주머니에서 차임벨을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이제는 익숙한 울부짖음과 함께 2층 식당 쪽 창문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깨부수고는 밖으로 튀어나왔다. 와장창. 강철로 된 창살을 단숨에 잡아끊고 땅에 착륙한 아지는, 고개를 퍼뜩 들고는 달려왔다.
“저기, 지금 달려오는 게 양 떼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늑대입니다.”
끼이익. 한달음에 달려온 아지가 땅을 갈아엎으며 멈춰섰다. 아지는 입에 침을 가득 담은 채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멍, 하는 만족스러운 울음과 함께 아지는 눈을 감고 내 손을 즐겼다.
“개는 원래 늑대였으니까요. 늑대와 맞서는 양치기 개도,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늑대예요. 하지만 양은 개를 무서워해도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지는 않죠. 개 역시 양을 잡아먹지 않고요. 뭐, 양치기가 던져주는 양뼈 정도는 씹을지도 모르지만요.”
포식자든 피식자든 변할 수 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맹수도 많고, 개 같은 경우 한 종 자체가 인간에게 길들여져버렸지.
흡혈귀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당분간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지금이다.
“멍? 밥은?”
“가서 줄게. 주방으로 가자.”
“멍멍! 좋아!”
“그나저나 너는 아까 밥 먹지 않았니? 그런데 또 먹어? 이거 개가 아니라 돼지 아니야?”
“왕! 아냐! 돼지, 아냐!”
개나 돼지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지만 아지의 반응이 워낙 격렬했으므로, 일단 항복의 태세를 취했다.
“아, 알았어! 물지 마!”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한 나는 아지를 데리고 건물로 향했다. 회귀자와 흡혈귀를 뒤에 남기고서.
‘저 자식….’
어느 정도 걸어갔을 때, 먼발치에서 회귀자의 생각이 들려왔다.
‘그 난리를 쳐놓고 혼자만 자연스럽게 빠져나갔어!’
이런. 들켰네. 도망가자.
“아지야. 뛰어!”
“멍!”
나는 냅다 건물을 향해 달렸다. 신이 난 아지를 뒤에 데리고서.
그동안 새카만 관은 미동도 없이 둥둥 떠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