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15)
EP.115 무저갱에서 탈출하기
“아아. 그리운 감각이군요. 이곳에 서서 강의하는 게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티르가 폭주한 뒤로 처음인가. 잠깐 감상에 빠진 나는 분필로 칠판을 톡톡 두들기며 수업을 시작했다.
나 때문에 교탁에서 밀려나게 된 회귀자는 뭔가 불퉁한 표정이었다.
“90일? 그게 어떻게 돼?”
“자자, 너무 급해지지 마시고.”
오랜만에 일할 차례다. 분필 끄트머리에 연금광을 묻힌 뒤 칠판을 톡톡 두들겼다.
에본 중장에게서 읽어낸 무저갱 탈출법. 원래 꽁꽁 숨기고 나만 알려고 했는데, 나가려면 내 힘만으로는 안 되어서 특별히 공개한다.
미리 챙겨뒀던 종이갑을 꺼내며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무저갱에서 탱자탱자 놀 동안, 저는 무저갱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골렘을 아득바득 붙들고 늘어져 보급을 신청하고, 내려오는 모든 물품을 전수조사하고, 골렘과 심리전도 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나, 그 이면에서 나는 꾸준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냥 에본 중장의 기억을 읽어서 알아냈다.
…지금까지 한 게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내 노력이 가치 있기를.
“제가 군국에서 내려오는 모든 물품을 일일이 분해해본 결과, 기가 막힌 사실을 하나 알아냈습니다. 그건 바로.”
나는 그리 말하며 종이갑 안에 든 것을 교탁 위에 흩뿌렸다. 스르르, 고운 입자가 낯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회귀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흙?”
“그렇습니다. 흙입니다!”
대단한 사실을 발견해낸 양, 나는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군국에서 이곳으로 떨어뜨린 물건 전부! 낙하산이든, 몸에 지니고 있었든, 아니면 조그만 틈에 채워져 있었든! 하나같이 지상의 흙이 들어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꼼꼼하게 하나씩 조사한 결과 알아낸 사실이다.
너희가 그냥 놀고 있을 때 말이지.
“본래, 대지모신의 저주를 받은 이곳에는 흙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니라면 이토록 커다란 구멍 주위로 무너져내린 땅이 없을 리 없죠. 모래알을 무저갱에 내던져도, 알아서 벽에 들러붙어 다시 대지모의 품 안에 안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흙먼지는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마법적인 지식이 있었던 회귀자는 금방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촉매?”
“네! 무저갱은 무한히 떨어지는 땅. 하지만 세상에 무한한 공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땅은 둥그니, 영원히 떨어진다면 반대편에 도착해야겠죠!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
칠판에 두 줄의 선을 쭉 그었다. 무한히 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중간을 잘라낸 나는, 탄탈로스를 그리고는 커다란 물음표를 찍었다.
“이 무저갱에서는, 좌표와 공간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기에! 이곳에서는 모두가 무한히 떨어질 뿐인 미아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공간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도리어 그 안에 있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선.”
감을 잡은 회귀자가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탄탈로스에 커다란 별표를 쳤다.
“그렇습니다. 밤하늘, 깜깜한 망망대해에서는 등대 빛이 목표가 되고, 지표가 되고, 좌표가 되는 법. 이 탄탈로스도 무저갱의 지표가 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여기부터는 내 추측에다 에본에게서 읽어낸 기억을 더해 알아낸 사실. 나는 그것을 모두의 앞에서 외쳤다.
“왜냐면, 이 탄탈로스를 지을 때 지모신의 신관에게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이 땅 전체를 말이죠!”
“…용케도 그런 일에 찬성했네. 지모신의 신관에게 무저갱이란 결코 다가가서도 안 될 장소일 텐데.”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이 사실을 알아낸 데에는 회귀자의 공도 있다. 회귀자의 회상 속에 존재하던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대지모신의 신관이었으니까.
“땅 전체가 콘크리트라고 하더라도 그 본질은 땅에서 오는 것. 축복을 받은 모래와 자갈로 만든 콘크리트로 땅을 다지고, 건물을 세웠습니다. 다만, 어쨌건 이 콘크리트는 그 기원이 땅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구조물. 대지모신의 육신과 인간의 건물, 그 경계에 있는 탄탈로스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무한의 공간, 그 안에 있는 유일한 땅.
존재해서는 안 되나, 버젓이 실재하는 모순에다가 감옥을 만들었다.
“이곳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건 오직 하나뿐. 바로, 이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촉매… 흙입니다. 그것을 매달고 떨어지기만 하면, 빗물이 결국 바다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핀레이를 이곳으로 이끈 팔찌도, 보급 상자도. 다 흙을 안에 담고 있었다.
나비도 흙을 매달고 있었다. 단지, 나비는 안전한 착지를 약속받은 고양이의 왕이라 낙하산 따위를 필요치 않았을 뿐.
어쨌든 원리는 이해했다. 이제 남은 건 활용.
“자, 여기서 문제…. 우리는 무저갱 저 아래에 있는 탄탈로스에 도달하기 위해 흙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이 무저갱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려면, 무엇을 촉매로 삼아야 할까요?”
가장 먼저 손을 든 이는 불사자였으나,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불사자 사이에도 짬이 있는 법. 양산을 살짝 들어 올린 티르를 먼저 지목했다.
“네, 티르!”
“…그건.”
잠시 어물거리던 티르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곤 대답했다.
“태양의 빛, 이겠지.”
“오오. 정답입니다! 역시 성황청의 악몽이자 역천의 존재라고 불렸던 분답게 해박하시군요!”
첫 번째에 정답을 맞혀 버렸네. 아쉽다.
“오! 나뭇가지가 아니었던 거요? 하늘로 향하는 거잖소!”
‘천앵이 아닌가…? 이건 공간 그 자체라 촉매가 안 되려나…?’
이 둘의 오답을 꼭 들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귀찮으니 넘기자.
“네. 태양입니다! 무저갱의 흙이 등대라면, 하늘의 등대는 태양. 우리는 햇빛을 담으며 올라가야만 이 무저갱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정답을 맞힌 티르를 향해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티르는 박수가 멎기까지 기다린 뒤 차분하게 물었다.
“허나, 이 무저갱은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일 터. 이곳에서 어떻게 햇빛을 받고 올라갈 수 있겠느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나는 이 탄탈로스의 맹점을 알아버렸다.
탄탈로스는 의외로 밝다. 하늘을 흉내낸 듯, 밝은 주간등과 어두운 야간등이 번갈아가며 감옥을 비추니, 낮 시간이면 자연히 눈이 떠지고 밝은 빛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나도 에본이 하늘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저갱의 아득한 위쪽. 그곳이 언제나 깜깜하지는 않다는 것을.
“햇빛이 들지 않는 게 아니에요. 가끔 햇빛이 들지만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겁니다.”
골렘은 티르를 설득하라고 명령했다. 아직 올라갈 때가 아니라면서, 또 ‘그런 방식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라면서.
하지만, 만일 무저갱이 무슨 수를 써도 탈출하지 못하는 공간이라면, 그 경고는 상당히 의아하다. 저들이 올라가려고 하든 말든 가만히 두면 어차피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텐데, 굳이 막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에본의 등장으로 풀렸다.
에본은 지상으로 도망치기 위해 옥상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 말인즉, 문이 정해진 시간에 열린다는 뜻.
골렘이 둘을 막으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루함도 잘 느끼지 않는 흡혈귀가… 문이 열릴 때까지, 햇빛이 그들에게 비칠 때까지 계속 올라갈까 봐.
혹여나 티르가 우격다짐으로 탈출할까 봐 걱정하여 나보고 막으라 했던 것이다.
“정오의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위치하는 그 시기.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무한히 뻗어 나가는 빛무리가 닿을 수밖에 없을 때.”
퍼즐은 전부 맞춰졌다. 나는 자신 있게 장담했다.
“그때가 바로 3개월 뒤입니다. 3개월 뒤 정오, 태양이 잠깐 무저갱 위로 지나가는 그 순간. 오직 그 순간만이 탈출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대단한 발견이었지만, 생각보다 반응은 작았다.
어차피 회귀자가 9개월 뒤에도 나갈 수 있다 선언한 직후다. 그게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별다른 반향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대단하구나, 휴. 무저갱의 비밀마저도 파악한 것이냐?”
단, 내 이야기 자체에 흥미를 갖고 있던 티르만이 순수하게 기뻐했다.
어쨌건 90일 뒤에 나갈 수 있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 이 무저갱의 구조도 알았으니, 다음 기회를 놓쳐도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 구태여 찾아올지 아닐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목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 혼자였다면 중력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에 불가능하지만, 티르와 회귀자와 함께라면 가능할 것이다….
“어? 그러게?”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회귀자가 질문해왔다.
“너는 어떻게 알았어? 중장에게서 캐낸 거야?”
정확히는, 중장의 생각을 읽었다.
에본 중장은 어디까지나 몇 시에 ‘문’이 열리는지만 알았을 뿐, 정확한 원리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햇빛이 비쳤을 때 올라가면 된다는 사실만 알았다.
하기야. 장군이 암호만 알면 되지 암호학의 원리까지 통달할 필요는 없지.
나는 단지 그들이 가진 정보를 줍고 이어다가 결론을 냈을 뿐이다.
하지만 설명하긴 귀찮으니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마 아닐 것이오! 내 주먹에 맞았을 때, 그는 거의 죽은 상태였으니! 말도 못 꺼내는 상태였소!”
불사자가 나보다 먼저 대답했다.
점차 의심을 더해가는 회귀자의 표정.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불사자를 노려보았다.
이 눈치 없는! 내가 왜 귀를 막아달라고 했는데!
불사자도 내 표정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나? 허, 참, 비밀도 많군. 알았소. 대충 둘러대지.’
부탁한다. 이 이상 내가 수상해지면 곤란해.
어디까지나 무저갱에서 스쳐 지나가다 만난 의문의 존재.
딱 그 정도로 기억되는 편이 좋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최대한 빨리 무저갱에서 나가려고 하는 거고.
“그러면? 말도 못 꺼내는 사람 상대로 무엇을 했는데?”
회귀자가 캐묻자, 불사자는 잠깐 머리를 굴리더니, 곧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다.
“선생은 대부분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렸소! 내가 귀를 막았던 터라 확답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선생은 스스로 무저갱에 대한 답을 찾고는, 중장에게 확인한 거겠지!”
‘자, 됐소! 이것으로 선생은 더 대단한 존재가 되었겠지!’
…더 수상해졌잖아!
중장에게서 정보를 빼냈다고 해줘. 그게 사실에 가깝단 말이야!
“무저갱 탈출 방법을, 스스로 알아냈다고? 거 참, 대단하네.”
회귀자는 무심한 척, 하지만 그에 반해 감각을 온전히 나에게로 집중하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알겠어. 확실히, 너는 장교는 아니겠네.”
“하하. 맞아요. 저는 노역자….”
“일개 노역자는 대령을 죽일 수 없어. 천앵을 튕길 수도 없고. 평범한 노역자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데, 언제까지 숨기려는 건지.”
느릿하게 캐묻는 듯한 움직임. 회귀자는 별로 기대는 하지 않은 채로, 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아 물었다.
“정말, 정체를 밝히지 않을 셈이야?”
‘나에게… 확신만 주면. 믿어도 될지, 아니면 믿어선 안 될지… 판단할 수 있게만 되면….’
의심병 말기 회귀자에겐, 나란 존재가 너무나도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믿고 싶은 마음과, 영 믿을 수 없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회귀자 자신도 갈피를 못 잡을 만큼.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나는 살아남았으니, 슬슬 다음 회차의 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겨야겠지.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