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16)
EP.116 무저갱에서 자기소개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다. 그것만으로도 교육실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주목한다.
티르의 타고난 카리스마와는 다르다.
상대의 시선과 몸짓, 관심사와 흥미. 심지어는 지금 하고 있는 생각까지.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읽고 계산하여,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술. 일종의 미스디렉션.
“어쩔 수 없군요. 여러분을 위해서라도, 저의 진정한 정체를 알려드리도록 하죠.”
한껏 무게를 잡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가라앉은 눈이 드러난다.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필요한 부분만. 나머지는 알아서 메우도록.
어디, 이쯤에서 생각을 한번 읽어볼까.
‘이제야 밝힐 생각이 들었어? 그래, 빨리 고백해! 무저갱은 이만 졸업하고 싶으니까!’
회귀자는 기대.
‘정체? 뭐, 나와 비슷하게 끌려온 몸이겠지! 어차피 갇힌 몸, 정체 따져서 무엇을 할까! 소년, 지닌 힘에 비해서 대범하지 못하군!’
불사자는 무관심.
‘…큰일이구나. 나는 아직도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늘. 휴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티르는… 이건 뭐야. 뭐라고 불러야 해. 세대차이?
“멍….”
너는 언제부터 와 있었냐?
어쨌건, 이것으로 들을 사람은 다 모였으니, 슬슬 말하도록 할까.
“자, 저는.”
탓.
말을 하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자연스레 내민 손에는 카드 뭉치 한 벌이 들려있었다. 나는 그것을 순식간에 다섯 개로 나눈 뒤, 잠깐 용수철처럼 길게 늘였다가, 단숨에 다시 합쳤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으며, 진심을 담아 애절하게 말했다.
“카드 도박하다가 잡혀 온 잡범이에요…. 진짜로.”
“야, 너! 끝까지!”
“천신 지모신 자기 자신에게 맹세해요. 정 부족하다면 얼굴도 못 본 어머니까지 걸게요. 어때, 이거면 증거가 될까요?”
“될 리가 없잖아! 카드 도박꾼이라고?”
“아니, 보세요. 이 손놀림, 심상치 않잖아요?”
나는 회귀자의 앞에 다이아몬드를 1, 2, 3, 4, 5 순서대로 내밀어 보여주었다. 그 뒤, 손을 휘젓고 흔들자, 그것은 어느새 같은 숫자의 스페이드로 바뀌어 있었다.
‘뭐? 카드 문양을 바꿨어?’
회귀자조차 순간적으로 내 움직임을 놓쳤다. 나를 향한 의구심이 한순간 방향을 바꿔 카드로 향했다.
‘칠색안 중 이색, 내려다 보는 주안!’
회귀자의 눈이 잠깐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마술을 멈추었다.
아니, 트릭 간파하려고 칠색안 쓰는 건 반칙이잖아.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마술을 보여줬지만, 앞으로는 얘 앞에서 마술 쓰지 말아야겠다. 밑천 다 털릴라.
‘바뀐 게 아니야. 처음부터 두 장씩 뒷면을 맞대고 붙어있었어! 잠깐이나마 내 눈도 속일 정도라니!’
인정해줘서 뿌듯하긴 한데, 그래도 마술은 안 할 거야. 마술사에게 트릭은 생명이라고.
나는 두 장씩 겹친 카드를 스윽 밀어서 펼치면서 설명을 이었다.
“단, 평범한 잡범은 아니에요.”
그렇게 펼친 카드를 다시 뒤집었을 때, 스페이드는 이번엔 클로버로 바뀌었다. 뒤집으며 손안에 숨긴 카드를 하나씩 바꿔치기 했을 뿐이지만, 이번 트릭에는 앉아있는 모두가 자세를 고쳐앉을 정도로 놀랐다.
‘잠깐, 무슨 속임수지? 칠색안 중 사색, 꿰뚫어 보는 녹안!’
안 해!
트릭이 들키기 전, 나는 교탁을 뒤엎고 카드를 사방에 흩뿌렸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구르는 교탁. 깜짝 놀란 아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나는 사방에 내던지는 척 주워 모은 카드 뭉치를 톡톡 뭉쳤다.
“나름 군국 뒷골목에서는 전설로 전해지는 유명한 승부사. 진 적은 있어도 잃은 적은 없는 갬블러. 판돈의 일방통행로. 카드판 위의 마술사. 그게 제 진정한 정체예요.”
나름 거창하게 자신을 포장했으나, 결국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도박꾼?”
“단순히 그렇게 요약하면 조금 뼈아프긴 한데. 그것도 제 일부죠! 심리를 읽고, 의표를 찌르며, 유려한 손기술로 적을 현혹하는 뒷골목 마술사. 휴즈입니다!”
한 발을 뒤로 빼고 없는 모자를 손으로 잡는 시늉을 하며, 다른 손을 부드럽게 벌려 인사했다. 그것만이었으면 평범한 인사였다.
만일 내 왼손에서부터 오른손까지, 하얀 카드뭉치가 미끄럼틀처럼 펼쳐져서 그대로 멈춰있지 않았다면.
내 손 안에서 카드는 하나이자 52장, 객체이자 단체, 하모니를 이루면서도 한 장 한 장이 비둘기처럼 흩날리는 오케스트라.
관객은 고작 셋일 뿐이지만, 나는 손재주를 뽐내며 모두의 넋을 쏙 빼놓았다.
간이 공연을 끝마친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어때요? 이제 좀 믿겠어요?”
그렇게 내 전력을 다한 공연을 보면서도, 회귀자는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도박꾼이라고? 암살자나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니까요.”
“거짓말! 대령을 처리한 솜씨는 암살자라고 봐도 될 정도로 깔끔했어. 그런데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고?”
“어….”
어, 그에 대해서는 조금 정정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애매하게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기. 착각하고 계신 게 있는데. 저는 사기도박 죄로 잡혀왔거든요? 그러니 일단 잡스러운 범죄로 잡혀온 거예요.”
“그렇게 들었어.”
“그리고 혹시 이런 말 아세요? 걸리지 않으면 죄가 아니다?”
“알긴 아는데…. 잠깐. 설마….”
뒤늦게 이해한 회귀자는, 경악에 찬 얼굴로 나를 가리켰다.
“살인은 했는데, 걸리지 않았으니 살인범은 아니라고…?”
“정답! 아하하. 너무 쉽게 맞추니 부끄럽네요.”
어설프게 미소짓는 나를 향해, 회귀자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니, 부끄러워할 게 아니지! 살인은 했잖아! 그게 어떻게 잡범이야!”
“중죄로 잡혀 오지 않았으니 잡범이죠. 아, 그리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보통은 죽여도 제 손으로는 안 죽여요.”
“더 악질이잖아!”
끙, 하고 머리를 짚은 회귀자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의문이 조금 풀린 상태로 중얼거렸다.
“한마디로 군국은, 사기 도박꾼을 잡으려다가 우연히 너 같은 거물을 잡아들였다는 말이야?”
“거물은 아니에요. 저는 일개 도박사에 불과하니까요. 단지, 가끔 액수가 커지면 카드보다 칼날로 승부를 보려는 사람이 많아서…. 호신술을 조금 익혔을 뿐.”
“호신술은 무슨, 암살술이겠지.”
“저를 악당처럼 묘사하는데, 나름 선량한 사람이에요! 평소에는 뒷골목을 거닐며, 우울한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어나게 해준다고요!”
“아이들이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멍하니 중얼거리는 회귀자를 보며,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걸로 커다란 산을 넘었네.
“그렇다면, 처음에 교관을 사칭한 건.”
“자기 정체를 처음부터 밝히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래도 칼날이 날아온 건 예상 못했지만.”
“천앵은 어떻게 쳐낸 거야?”
“이런 기습에는 익숙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옆면을 쳐낸 건 반쯤 우연이었지만요. 카드 튕겨내던 솜씨가 빛을 발했네요.”
“내 은신술을 파악한 건.”
“솔직히 은신술을 파악한 건 아니에요. 셰이 씨 성격을 파악한 거죠. 셰이 씨. 속내가 빤히 보이거든요?”
“큭!”
회귀자가 잠깐 정곡에 찔린 틈을 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후. 그래도 사람 담근 게 자랑은 아니라서 숨기고 있었는데…. 이리 밝히게 되네요. 어쩔 수 없죠. 과거는 잊으려고 노력할 뿐, 지울 수는 없으니.”
겉으로는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범죄자를 연기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던 일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했다.
내가 그렇게 한탄하고 있자, 티르는 나를 조심스레 위로했다.
“자책하지 말거라, 휴. 살아남은 모든 이들은 전부 시체 위에 서 있다. 나는 네가 몇을 죽였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고맙기는 한데, 다섯 자릿수 넘게 죽인 사람에게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더 대단한 범죄자에게 인정받는 느낌.
“뭘 그 정도 가지고! 나도 자랑은 아니오나, 두 명을 찢어 죽인 경력이 있소! 궁시렁거리지 말고 편하게 지냅시다!”
불사자 같은 경우는 그냥 무섭다. 어떻게 사람을 종이처럼 찢어죽일 수가 있어? 나도 잘못 건들면 찢기는 거 아니야?
그동안 대강 납득을 마친 회귀자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 무저갱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안 거야?”
“그냥, 이곳저곳 주워들은 거에다가, 여기서 찾은 정보를 더해 알아낸 거예요. 저희 같은 잡범들은 심심할 때 그런 상상을 하거든요. 탄탈로스는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지.”
“…자기가 탄탈로스에 끌려갈 정도의 거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네.”
“어허! 아니라니까 그러네! 자꾸 거물 거물 거리면 부정 타!”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분위기. 회귀자는 내 대답에 충분히 만족했다.
‘운 나쁘게 덜미가 잡혀 온 거물이라. 이 정도면 설명이 돼.’
경계심이란 연비가 나쁜 감정이다. 에너지를 한껏 쏟아야만 날카로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껏 촉각을 곤두세웠던 회귀자는. 이번 습격을 끝으로 경계심을 놓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에게 설명을 요구했고, 완벽하지 않은 해명이나마 억지로 만족했다.
‘다만,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건, 티르칸쟈카를….’
여기서 더 이상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는 셰이 씨가 더 궁금한데요.”
“어? 나?”
“그래요. 저야 정말로 잡혀 온 거지만, 셰이 씨는 일부러 잠입한 거잖아요? 온갖 보물도 가지고, 나중에 구해줄 사람도 오고.”
나는 쓰러진 교탁 위에 앉아 은근히 말했다.
“셰이 씨야말로 진짜 거물 아니에요? 나는 아직도 셰이 씨처럼 어리고 강한 검사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거물? 쿡.”
피식 웃은 회귀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거물, 그래. 거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심지어 대지모신의 신관이 구하러 온다면서요.”
“딱히 동료는 아니야. 그냥 지인일 뿐. 그런데 그녀가 지모신의 신관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제는 반문에도 별다른 의심이 안 묻어나온다.
최소한 남은 시간 동안은 안심하고 지내겠네.
잘 됐다, 잘 됐어.
나도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대꾸했다.
“무저갱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이라면서요? 무저갱의 연원을 따져보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무저갱의 연원…? 대지모신이 저주한 땅이잖아?”
“그거야 누구나 알죠. 대지모신이 왜 저주했는지 말이에요.”
아직도 아리송한 표정을 하는 회귀자.
설마, 이곳에 왔으면서 그것도 몰라? 나는 회귀자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