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19)
EP.119 모두의 식사
심장은 되찾았으나, 티르는 여전히 혈조술로 움직인다. 무언가를 먹을 필요가 없는 티르가 식당에 찾아올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휴? 역시 여기 있었구나.”
언제나처럼 나를 찾아온 티르가 자연스럽게 내 곁에 섰다. 나는 접시를 정리하며 물었다.
“뭐하다 오셨어요?”
“셰이가 나에게 부탁하더구나. 혈조술을 마저 가르쳐달라고.”
“아직도 혈조술을 가르치세요?”
“요즘 드물었는데, 최근 무언가 결심한 모양이더구나. 눈빛이 달라졌다. 한층 다급해졌다고 해야 할지, 절박하다고 해야 할지.”
곧이어 내려올 그녀와 싸우기 위함인가.
평소에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회귀자지만, 이제 결전이 다가오니 한층 급해진 모양이었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원래 회귀자의 계획에는 그녀와 싸워 이기는 게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상황이 바뀌었나 보지, 뭐.
회귀자가 아닌 이들에겐 잘된 일이다.
“혈조술이 약해지셨다면서요.”
“글쎄. 이것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달라진 것인지…. 어찌하였든, 누가 판단하겠느냐. 나보다 혈조술에 통달한 이는 없으니.”
“셰이 씨에게는 설명하셨나요?”
“내가 굳이 왜 그래야하느냐? 스승은 언제나 위엄이 있어야 한다. 제자가 불안함을 느낀다면 배움이 이루어지겠느냐?”
어차피 가르침을 받는 건 제자. 그러니까 스승은 자기를 조금 부풀려도 괜찮다고.
티르는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사고방식이 다른 이와 대화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지. 잔잔하게 흘러가는 대화 도중, 티르는 문득 고개를 돌려 식탁 쪽을 보았다.
칼리스와 불사자가 염장을 지르고 있었다.
음식을 먹여주는 불사자와 받아먹는 칼리스를 조금 부러운 듯 바라보던 티르는, 갑자기 내 손으로 시선을 향했다.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리는 것 같은데.
“…휴. 생각해보니 나도 조금 허기가 진 것 같구나.”
“네? 밥 안 먹어도 살 수 있으시잖아요.”
티르가 짐짓 위엄을 부리며 말했다.
“누가 음식을 말하였느냐? 나는 흡혈귀의 시조, 티르칸쟈카이다. 내가 취하는 것은 오직 피.”
“그러니까 피가 드시고 싶으시다고요? 왜 피 맛있는 셰이 씨에게 부탁 안 하시고.”
“시끄럽구나. 수련에 바쁜 제자의 피를 어찌 먹는다는 말이냐.”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내 경험상, 이렇게 까탈스럽게 굴 때는 높은 확률로 원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내 이리 티를 냈으니, 스스로 피를 바치겠지.’
맛없다며. 그런데 왜 굳이 먹으려고 해.
그리고 나는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게 싫다. 이곳이 무저갱이라도, 몸에 구멍이 나는 건 좀 거부감이 들어서.
내가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대응하지 않자, 티르는 안절부절못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것이냐! 치잇…!’
주저하던 티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내기로 얻은 소원이다!”
“네?”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되물었다. 티르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외쳤다.
“저번에 나와 내기하지 않았느냐. 네 마술을 간파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아. 그때.”
“그때 이긴 소원을 요구하겠다. 나에게 네 피를 조금 나누어다오!”
“아니, 뭐 이런 거로 소원 씩이나.”
하지만 내기로 얻은 소원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미적거리며 수돗가로 다가가 내 손을 깨끗이 씻었다.
몸을 돌려보니 티르가 조금 기대하는 눈으로 서 있었다. 나는 손을 탈탈 털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그 승리, 좀 억지로 이루어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작 피 몇 방울로 만족한다는 거 아니겠느냐. 그것이 아깝느냐? 약속을 어길 만큼?”
“또 그러니까 할 말이 없네.”
그래. 피 몇 방울 정도야.
깨끗하게 씻은 손을 내밀었다. 티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내 손가락을 보다가, 어둠을 불러내어 주위 시야를 가렸다.
‘…지금껏 피를 취하기 위해 구태여 몸에 이빨을 박아넣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저 한참 아래의 권속이나 하는 저속한 짓. 그러나….’
혈조술이 온전치 않은 지금, 티르는 세상에 흐르는 모든 피를 끌어당기는 능력을 잃었다.
대신, 그녀 안의 피는 온전히 그녀의 것. 세상 바깥의 피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먹어서 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혈기(血氣)가 넘쳐 흐르는 티르는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낯부끄럽구나. 이런 저속하고 부끄러운 짓을…. 아니,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식사. 모두가 하는 것을,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티르는 그냥 저속한 짓을 하고자 했다.
12세기의 세월 다 어디 갔어. 사춘기가 1200번의 봄이 지난 다음에 찾아왔잖아.
“…그러면, 먹으마.”
“쩝. 짐승 요리를 해주는 것도 모자라 흡혈귀 식재료가 될 줄이야. 이왕 드시는 김에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티르의 이빨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세간의 속설과 달리, 흡혈귀에게 물린다고 흡혈귀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흡혈귀에게 흡혈이란 어디까지나 식사 행위일 뿐.
그러나 의미는 부여하면 그만이다. 티르는 아주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이빨로 물었다.
“음….”
‘아프지는, 않겠지….’
아프기는 무슨. 피도 안 나오고 있다. 이빨이 손가락 끝을 살짝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이다. 흡혈 맞아? 오히려 이빨보다는 혀가 더 많이 닿을 지경인데.
‘…생각해보니, 구태여 피를 마실 필요는 없겠구나. 상처 내는 것도, 피를 탐하는 것도 내키지 않으니.’
이러면 그냥 손가락을 빠는 거잖아.
흡혈은 흔적도 없다. 이건, 그 어떤 말로도 포장하기 힘든.
‘살짝, 깨물기만….’
애무잖아. 아무리 봐도.
살짝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앞니가 손가락 끝을 자극한다. 흡혈 아닌 흡혈을 하기에 여념이 없는 티르는 나를 보지도 않고 그에 열중했다.
무저갱 탄탈로스는 고립된 공간.
다시 뛰는 심장을 가진 티르는 나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아마, 이대로 조금만 더 같이 지내면 감정이 더 명확해지겠지.
그리고 나에게 무언가를 원할 것이다.
나는 독심술사이고.
타인의 바람을 읽는다.
누군가의 바람을 들을 때면, 마음속에서 맴도는 간절한 소망을 읽어낼 때면. 나는 마음을 건너 전해지는 바람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숙명이다.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이 목숨보다도 중요한 소원이라면, 그 열망이 나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열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 그 위대한 법칙은 마음에도 적용되며, 독심술로 직접 맞닿는 나에겐 훨씬 빠르게 전해진다.
그러면 달궈진 마음으로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바람을 끝맺어주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마술사.
원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진정으로 원하는 소원을 마주보게끔.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은 단 하나뿐이다.
나를 바꾸는 것.
나를 죽이는 것을 포함하여, 나를 살리는 것까지.
그러니까.
“왜 물고만 계세요? 피가 안 나고 있는데요.”
“으, 음?”
“생각해보면 손가락 엄청 좋아하셔. 매일매일 손가락을 입에 들이시고. 가슴 속에도 들이시고. 나보다는 손가락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
“아, 잠. 읍.”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살짝 오므렸다. 송곳니에 이빨이 긁히며 피가 흘러나왔다. 피는 방울지기도 전 티르의 혀에 닿아 녹아내렸다.
“이번만입니다. 내 귀한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주는 건.”
정작 피가 흘러나오자 티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와는 별개로, 이미 흐른 피는 티르의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그 순간.
티르가 내 손가락을 맹렬하게 뱉어냈다.
작게 콜록거린 티르는 드물게도 울상을 지었다.
“우으으… 맛없구나.”
“진짜 맛없는 거 맞았네!”
손가락을 보니 살짝 찢어진 살갗에서 피가 아주 조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작 이 정도 양으로도 맛없어서 뱉어버릴 지경이라는 거지? 그러면 거의 독 아니야?
“기, 기다려 보거라. 나는 이런 식으로 피를 취하는 게 처음이라….”
“에잇.”
“으읏.”
피 나는 손가락을 내밀자 움찔거리는 티르. 나는 지혈을 위해 손가락을 꾹 누르며 말했다.
“내 피가 이런 효능이 있을지는 몰랐네요. 흡혈귀 식량이 아니라 흡혈귀 회피 부적일 줄이야.”
“저, 휴. 나는 아직 만족을….”
“받아라. 성스러운 피.”
“우웃.”
“이래놓고 만족은 무슨 만족! 됐어요. 못 먹는 거 알았으니까 이제 끝났잖아요?”
티르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어둠을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쉬운 듯 나를 뒤따르는 티르와 함께 어둠을 젖히고 나오니, 아지와 나비가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냐아아! 냐의 공물을 내놓거라냐-!”
“멍멍! 내 통조림이야! 멍멍!”
통조림을 빼앗으려고 난동을 부리는 나비. 아지는 나비를 깨물지도 못하고 제압하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말하자 아지가 통조림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로 외쳤다.
“멍! 얘, 내 거 뺏으려고 해!”
미쳤나. 저번에 그 꼴 나서 반죽음 된 지가 언젠데.
“약을 안 먹다 보니까 뵈는 눈이 없어졌네.”
“물어도 돼?”
“안 아프게 물 수 있다면.”
아지는 단념하고는 자기 통조림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얼마나 세게 물 생각이었던 거냐.
불사자와 칼리스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집요하게 아지를 파고들며 아직 안 깐 통조림을 노리는 나비만이 부산스러웠다.
아직 발톱은 안 꺼내고 있지만, 혹 폭주한다면 또 피를 보겠지. 나는 급히 회귀자를 찾았다.
“약 담당 어디 갔어! 빨리 와요!”
약이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조금 아슬아슬할 때 줘야 하지만, 그렇다고 난동을 부릴 때 주는 버릇을 들이면 나중에 그런 성향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짐승이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뭐.
“마력초 가져 와–!”
“멍! 내 통조림–!”
“냐하아악! 공물! 공물을 내놓거라냐–!”
그렇게 요란스러우면서도 단란한 한 때.
벽 너머에서 쓸쓸한 생각이 들려왔다.
‘…평화롭네. 여유롭고. 보기 좋아.’
이게 뭐가 평화롭고, 이게 뭐가 여유로워! 안 좋거든! 당장 마력초 안 가져와?
‘다들, 다음번 해가 무저갱에 비치면 떠나겠지?’
당연하지.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나는 여기 계속 있어야 해. 땅의 검, 지잔(地潺)을 그녀가 손에 넣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씁쓸한 웃음이 회귀자의 입가에 맴돈다. 회귀자는 기다란 마력초 궐련을 만지작거리며 벽에서 등을 뗐다.
‘이번 회차가 끝이었으면 좋겠지만. 아마 안 되겠지. 나는… 아마도, 이번에도 실패할 거야. 무저갱에서 9개월이나 낭비하면 더더욱.’
회귀자는 굳은 결심을 하며, 화기애애한 식당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니, 나는 이번 회차에 안주하지 않겠어. 더 나은 가능성을 찾을 거야…. 지금 이 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벌컥. 문이 열렸다. 회귀자가 마력초 궐련을 허공에 던졌다 잡으며 나비를 불렀다.
“나비. 오늘 자 공물이야.”
“냐하아! 공물! 공물이다냐! 빨리 냐에게!”
번개처럼 달려가 낚아채려는 걸, 회귀자는 그보다 한박자 빠르게 다잡고는 손아귀 안에 숨겼다.
회귀자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냄새를 최대한 아끼면서 조금씩 풀었다.
“가만히 있어. 천천히 들이마셔야 해.”
“냐아-. 냐아아–.”
나비가 약에 취한 동안, 통조림을 사수한 아지는 뿌듯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만든 나비 사료 통조림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알려줘야 할 게 많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