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21)
EP.121 한잔 했어요
“선생. 문제가 생겼소.”
불사자는 술 한 병을 들고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왔다.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잔에 술을 따르더니, 혼자 인생의 무게를 짊어진 듯 무겁게 말했다.
“뭔데요?”
“다음 햇빛이 비치는 날, 이곳을 탈출할 거라고 했잖소?”
“그랬죠.”
“흠. 선생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하실 거요?”
갑자기 인생 상담?
결정해둔 건 없다. 일단 살고 봐야 하는 일이라, 탈출한 이후까지 고려하기에는 여유가 없어서.
나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일단 제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겠죠.”
“군국 말이오? 그곳은 범죄자들에겐 관용이 없다고 하던데. 돌아가실 수 있겠소?”
“군국은 딱히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관용 없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나도 익히 아는 바요!”
“그리고 저는 원래도 범죄자였어요. 그러니까 걸릴 게 없다는 말씀.”
“오, 그건 나도 미처 몰랐군!”
호탕하게 웃어젖힌 불사자는, 술 한 잔을 들이켜고는 용건을 꺼냈다.
“선생.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소. 칼리스가 말하길, 자기는 이제 군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던데.”
“아마 그렇겠죠.”
“중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이오?”
“비밀결사에 소속되어 있었잖아요. 비밀결사에선 자기네들을 배신한 그녀를 살려두지 않겠죠. 돌아가자마자 암살당할걸요.”
“흠! 군국도 귀중한 장교인 그녀를 보호하지 않겠소?”
“비밀결사가 중령님을 가장 쉽게 암살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중령님이 군국 말고 다른 비밀결사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고 밀고하면 돼요. 그러면 바로 체포해서 사형당할걸요.”
3레벨 시민, 대체하기에는 아까운 이들.
하지만 아깝다뿐이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군국은 체제의 수호를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며, 그에 반하는 이들을 잔인하게 숙청한다.
4레벨 시민이라도 그들의 뜻에 반한다면 단호하게 쳐낼 수 있는 게 군국이다….
물론 4레벨쯤 되면 구태여 군국의 뜻에 반대할 이유 없지만.
“거 참 빡빡하군! 늘 느끼는 거지만, 군국은 그 잣대가 너무 엄격하다오!”
군국으로 돌아가면 죽는다고 확언을 받자, 결심한 불사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것이 고난이라도 죽음보다는 낫겠지. 이렇게 된 이상, 군국을 떠날 때 그녀를 데려가야겠소.”
“군국을 떠나시게요?”
“그래야겠지. 아니면 나는 몰라도 그녀는 죽을 테니. 나도 더는 환영받지 못할 테고.”
“더는? 라쉬 씨는 처음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하지 않았나요?”
“하하! 아픈 부분을 찌르는군! 어떻게 알았소?”
“군국은 규격 외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전쟁할 때 빼고는.”
“하하. 군국도 참, 일관된 나라요.”
불사자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한숨에서는 독한 술냄새와 함께 짙은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회귀자가 공급한 술은 정신이 맑은 채로 취한다는 귀중한 천라향주. 옛 제국의 재상들이 격무 도중 취하고 싶을 때 마셨다는 전설의 술이다.
이런 자리에서 뺄 수는 없지. 나도 내 앞에서 찰랑거리는 술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흘러가는 알코올이 깊숙이에서 타오른다. 몸 안에서 타오르고 남은 맑은 주향이 전신에 스며드는 것 같다.
“크으. 죽인다. 이게 술이지.”
역시, 회귀자의 간택을 받은 고급품. 나는 조금 꺾으려다 말고 잔에 든 액체를 전부 털어 넣었다.
탁, 하고 탁자 위에 내려놓자, 불사자도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에게 감사해야 하겠는걸! 군국의 독하고 쓴 맥주와는 차원이 다르오!”
“그딴 잡스러운 술과는 비교하지 마세요. 배급과 운송 효율을 늘린다고 잡스러운 맥주에다가 수분 압축 기술을 쓴 흉물이니까요.”
나는 아직도 제식 맥주라 불리는 것이 왜 2레벨 사치품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치란 사치스러울 때 붙여야 하는 거잖아.
“물에 섞어 먹지 않으면 이게 맥주인지, 아니면 보리죽을 먹는 도중 누가 머리를 세게 한 대 때리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끔찍한 액체가 왜 사치품인 거죠? 효율주의의 폐해에요. 결과가 같다고 다 같은 게 아니라고요.”
“하하하! 재미있는 표현이로군! 나도 놀라기는 했소. 어쩌다 술 한 잔마저 마음대로 못 마시는 나라가 되었는지!”
대작하며 오가는 술잔과 함께 이야기가 오갔다.
공유할 만한 추억이 없는 이들은 술자리에서 같은 것을 욕하며 서로 친분을 확인하기 마련이다. 나는 군국 뒷골목 거주민답게 신랄하게 군국을 깠고, 불사자는 내 말에 동의하면서도 자꾸 군국에 미련을 보였다.
내가 물었다.
“이 나라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 뭔 정이 그리 들었어요?”
“정이 든 게 아니오. 정이 안 들어서 아쉬운 것이지.”
“정이 안 들었으면 훌훌 떠나면 되죠.”
“그게 아쉽다는 거요. 나는 군국을 떠나도 군국이 별로 안 그리울 것 같소.”
무슨 소리야. 당연한 말을. 지금 군국에 사는 사람들도 군국 그리워하는 사람 없을걸.
불사자는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군국이 엄청나게 대단한 나라인 줄 알았소. 군국은 도시를 짓고 댐을 쌓고 길을 닦았소. 심지어, 땅을 강처럼 흐르게 하여 온 나라를 이었지.”
“군국의 몇 안 되는 업적이죠.”
“그에 반해, 우리 부족은 군국이 만든 커다란 콩을 심으면서 즐거워했을 뿐이오. 죽지 않는 이들이나, 그래서인지 한 점의 치열함도 없지.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세우려는 군국을 흠모했소.”
잔이 부딪쳤다. 불사자는 잔을 쭉 들이키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의 시선이 조금 먼 곳을 향했다.
“우리 부족은 어릴 적부터 흙 섞인 물을 마시며 흙투성이 곡식과 고기를 먹으며 자라오. 그러다 성인식 날이 되면 그렇게 몸에 쌓인 기운을 어느 한구석으로 몰지. 그리고, 가장 흙과 가까운 부분을 잘라 대지모신에게 공양한다오.”
자기 부족의 전통을 말하는 불사자에게서는 약간의 회한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는 자기 오른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몸의 일부를 바쳐서 땅에 묻고 새로운 육신을 얻는다오. 나의 오른팔이 그것, 공양신이지.”
오른팔이 제멋대로 뛰어다닌다 했더니, 뭔 이상한 짓을 했던 거구나.
정말 인간은 미친 짓을 태연히 저지른다니까.
“덕분에 불사성을 얻기야 했으나…. 그 탓인가. 우리는 정체되어버렸소. 군국은 철로 된 나라를 세우고 있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심는 콩이 조금 달라진 것뿐이니. 나는 어릴 적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이 지긋지긋해서 군국을 보러 왔지. 그런데.”
불사자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군국을 상징하는 듯한 콘크리트의 빛깔이 그의 눈에 가득 담겼다.
“잘 모르겠소. 우리 부족을 떠올릴 때면 원망과 그리움을 느꼈으나. 이 나라에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소.”
“감옥에 갇힌 데다가 전신이 찢긴 채 방치되었다면 그럴 수도요.”
“하하. 아니오.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소.”
그게 어떻게 사소한데.
불사자다운 관점으로 웃어넘긴 그는 남은 술을 잔에 다 털었다.
“여기 더 있어보았자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아 그런 듯하오. 마침 죄를 지어서 더 있지도 못하겠다, 볼 건 다 보았으니 이만 떠나야겠지.”
그리고 단숨에 들이키고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렸다.
“나는 국경을 넘어 대모님에게로 갈 것이오. 칼리스에게도 따라오라고 권유는 해보겠지만, 과연 응할지는 모르겠군.”
당연히 응하겠지. 애초에 그걸 노리고 말을 꺼낸 것일 테니.
불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도 멀쩡히 걸었다. 그는 자기 모습에 놀라워했다.
“맛있는 술이라서 그런가! 이만큼 마셨는데도 취기만 올라올 뿐 정신이 말짱하군!”
“맑게 취하는 술, 천라향주잖아요. 마셔도 기분만 좋아지고 몸이 상하지 않는 술.”
“세상에는 별 술이 다 있구려!”
“무슨 술인지도 모르고 마시자고 한 거예요?”
“내가 무얼 알겠소! 칼리스가 마시자고 해서 꺼내온 거지!”
엥. 칼리스가?
그런데 왜 나한테 들고 왔던 거야. 어디, 기억이나 읽어볼까.
대충 기억을 읽으니, 칼리스가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한 모양이다. 자기는 이제 갈 곳이 없다며 아련한 표정을 한 채, 착잡하니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가능한 같이.
불사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술을 갖고 가다가.
“그런데 막상 꺼내오고 보니, 칼리스는 제 걸음도 못 가누는 부상자이지 않소! 들이키기 전에 잔을 뺏었지! 허, 큰일 날 뻔했소!”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구나. 밤에 몰래 음식을 빼먹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면서, 누가 그렇게 아픈 척하래.
다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걸 그대로 저에게 갖고 온 거예요?”
“뚜껑을 땄으니 어쩔 수 없지 않소. 마셔야지!”
“왜 하필 저였죠?”
“어린 소년이나 맛도 못 느끼는 혈귀에게 갖다줄 수야 없지 않소! 짐승 아가씨들에게도 마찬가지니, 소거법으로 선생밖에 없지 않소! 마침 선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네가 그러면 칼리스의 원한을 내가 사게 되잖아.
에고, 이래서 술 가져온 사람은 기억부터 읽어야 하는데. 나도 오랜만이라서 경계심이 좀 풀어졌나 보다.
나쁜 의도는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칼리스의 바람도 있으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쉬 씨. 저기 찬장에 약주도 하나 있어요. 화기가 가득한 술인데 온갖 부정한 기운을 무찌르고 몸을 낫게 한다는 약술이에요.”
“오! 그런 신기한 술도 있소?”
“네. 그거면 환자가 마셔도 괜찮을 거예요.”
“조금 일찍 알려주시지! 더 빨리 나았을 거 아니오!”
이미 다 나았다는 것도 모르는 채, 불사자는 냉큼 다가가 약주를 꺼내 들었다. 다른 잔을 챙긴 그는 고기 몇 점을 안주 삼아 챙긴 채 자리를 떴다.
“그렇다면 나는 가보겠소!”
나는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했다.
문명의 잔혹함을 실감해라, 야만인. 너는 이미 함정에 빠졌으니.
그나저나, 여기서 나간 이후라.
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일단 아미텐그라드의 뒷골목으로 돌아가, 내 숨겨둔 재산과 물건을 챙겨야겠지.
그다음에는 잘 모르겠다.
창대한 미래계획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니까. 심지어 고립된 무저갱에서 한참 있던 사람이 세상의 흐름을 예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나가서 정보를 찾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술도 적당히 마셨겠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지랑 놀아줄 생각으로 마당으로 나섰다. 아지 줄 요량으로 닭고기 한 점 챙겨서.
그때 묘한 광경이 보였다.
“냐아-! 서라냐-!”
주간등이 비추는 공간 저 너머의 어둠.
그곳에서 나비가 지그재그로 도망치는 동그란 불빛을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냐아-! 제법 빠르다냐! 하지만 냐의 속도는 따라오지 못…? 냐?”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을 무언가 달려가나 싶더니, 나비가 탐조등의 불빛 위로 탁 내려앉았다. 의기양양한 외침을 내지르며 앞발로 빛을 짚는다.
그러나 실체 없는 빛은 발톱 사이로 새어나간 뒤 스르르 땅을 기어 도망갔다. 그러면 약이 바짝 오른 나비도 빛을 따라 뛰었다.
“냐! 냐! 제법 잽싸다냐!”
“멍멍!”
“냐앗! 멍청한 멍멍이! 비키라냐!”
이번에는 아지가 나타나 동그란 불빛을 밟았다. 물론 아지도 빛을 집지 못하고 지나친 사이, 동그란 빛은 다시 지그재그를 그리며 도망쳤다.
이상하네. 탐조등은 원래 물체를 쫓게 되어있는데. 왜 나비나 아지를 피해 다니는 거지?
뭔가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감옥 외벽에 붙은 탐조등 위. 회귀자가 거기 가볍게 선 채로 빛을 움직이고 있었다.
회귀자가 스스로 아지와 나비랑 놀아주다니. 그것도 이런 놀이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인간 모습이라서 짐승처럼 못 다루겠다며. 드디어 생각이 좀 바뀌었나?
한참 빛을 움직이는 데 열중하던 회귀자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허둥지둥했다.
“아, 앗. 이건.”
“웬일로 놀아주고 있어요?”
“아니, 그게.”
‘나비가 혼자 탐조등을 쫓고 있는데, 빛이 안 움직이길래….’
탐조등은 탈주자를 쫓기 위해 만든 것. 나비에게서 도망치기는커녕 나비를 따라잡으려고 든다. 나비가 불빛을 짚어도 불빛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이 지나면, 나비도 자기를 비추기만 하는 불빛에 질려서 되돌아오게 된다. 도망치지 않는 사냥감은 재미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실망한 모습이 안쓰러워서 자기가 직접 불빛을 움직여줬다? 그러다 보니 아지도 같이 놀게 되었고?”
“오해하지 마! 나는, 그냥, 맨날 마력초를 피우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죄를 지은 양 변명하는 회귀자.
누가 뭐래? 내가 뭔 오해를 한다고.
“셰이 씨, 잘했어요.”
“뭐?”
“이야. 드디어 철이 들었네요. 그래요. 동물을 키우면 같이 보살필 생각을 해야죠. 맨날 독박으로 돌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후우.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요.”
“거짓말하네. 눈가도 다 말라있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죠.”
회귀자는 피식 웃으면서 빛의 방향을 조종했다. 나비와 아지가 쉽게 잡지 못하도록 탐조등을 움직이다가, 갑작스레 툭 내뱉었다.
“네가 준 통조림. 잘 쓰고 있어.”
“간식이요?”
“그래. 좋아하더라. 비리기만 하고 맛도 없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걸 왜 댁이 처먹어.”
“맛만 본 거야! 짐승의 왕이든 뭐든, 일단 몸은 인간이잖아! 혹시나 못 먹을까 봐!”
“인간 먹으라고 만든 게 아닌데 먹으니까 비리지. 사람 먹는 밥 잘 먹는 건 개밥 먹는 아지밖에 없어요. 애초에 인간이 먹는 음식 먹이려는 게 이상한 거야.”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쿵.
땅이 진동함과 동시에, 탐조등이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귀자는 이미 탐조등에서 손을 뗀 채였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조금 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탐조등은 새로운 침입자를 감지하고는 그 흔적을 쫓았다. 사방팔방 흩어졌던 빛이 직선으로 움직이며 한곳으로 모인다.
그리고 선이 교차하는 지점, 그 끝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살구색 피부를 가진 장신의 여성이었다.
한 가닥으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로 흘러내렸다. 귀에서 사람 인형 모양 귀걸이가 흔들렸다. 도사나 입을 법한 펑퍼짐한 옷을 입은 몸 아래로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이 흘긋 보인다. 다섯 개에 달하는 팔찌가 한 박자 늦게 찰랑거렸다.
“멍! 위험해!”
“냐냣! 냐가 먼저다냐!”
마침 빛을 쫓아온 두 짐승의 왕이 도착했다. 아지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방향을 비틀었으나, 놀이에 여념이 없던 나비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휘둘러지는 앞발. 그 궤적에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 짐승의 왕의 돌격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재난과도 같은 공격.
그러나.
쿵.
나비의 앞발은, 그녀의 팔에 틀어막혔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팔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그녀는 나비의 일격을 견뎠다.
아니, 이것을 견뎌냈다고 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거목에다 발톱을 긁는다고, 고목이 공격을 견뎌낸 것인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터다. 애초에 거목은 고양이의 발톱에 부러질 것이 아니니. 그냥 거기 있었을 뿐 고양이가 와서 긁은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거목과 같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피하느라 균형을 잃고 땅을 뒹굴었어야 하는 아지.
그러나, 아지는 지금 그녀의 옆구리에 잡혀있었다.
“멍멍?”
대롱대롱 매달린 아지가 의아해할 때.
“개의 왕, 고양이의 왕. 아무래도, 잘 찾아온 것 같군. 어머니 지모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어머니의 은혜 덕분에 이 지옥 속에서도 길을 찾았나이다.”
나직한 기도문이 들려왔다.
나비도, 아지도. 그 강건한 육신에 붙잡힌 채로 얌전해졌다. 단신으로, 그것도 순수하게 신체능력으로 두 짐승의 왕을 받아낸,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위업이었다.
회귀자가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 벌써 이곳에 온 거야? 분명 예정은 한참 뒤였을 터인데!’
겨드랑이에 끼인 아지가 몸부림을 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지를 내려놓았다. 아지는 폴짝폴짝 뛰어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멍! 안녕! 반가워!”
“반갑소이다, 개의 왕이여. 존재의 대표자에게, 지모신을 따르는 이가 인사드리겠소이다.”
그녀는 아지의 앞에 꾸벅 고개를 숙였고, 아지도 그녀를 따라서 머리를 까닥였다.
“고양이의 왕이여….”
그러나 경계심이 강한 나비는 저 멀리 도망친 채로 낯선 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나비를 보며 작게 미소 지은 뒤, 감옥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아, 눈 마주쳤다.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지나가는 나그네이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구름.
쿵.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그 작지만 거대한 몸짓은 탄탈로스 전역을 흔들었다.
“이 만남 또한 지모신의 인도로 이루어진 터. 길손이 하루 대접받기를 바라오!”
온누리는 지모신의 품 안이며, 서로 발을 댄 이상 모두 이어져 있으니.
주인은 길손을 마다하지 말 것이며, 길손은 주인의 손발처럼 부지런해야 한다.
지모신의 독실한 신도가 옛 규율을 꺼냈다.
하지만, 애초에.
세상과의 모든 흐름이 끊긴 이곳, 그들의 지옥인 무저갱에 찾아올 이라면.
당연히 보통 신도는 아닐 터.
다행히, 저 지모신도의 기억을 읽기 전. 회귀자에게서 생각이 들려왔다.
‘지모신의 대행자. 지선(地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