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26)
EP.126 미래 계획을 세워봤자
한참 고민하면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옆구리에 끼인 채 매달려 가던 골렘이 기체의 손상이며 시야의 확보며 무언가 볼멘소리를 할 무렵.
마침 저편에서 커다란 관이 보이자 골렘이 말을 멈추었다. 동시에 관에 타고 있던 티르가 나를 발견하고는 냉큼 다가왔다. 티르의 권능으로 조종되는 관은 민첩하게 움직이다가 내 앞에서 매끄럽게 멈춰섰다.
티르가 관 위에서 뛰어내리며 말을 걸었다.
“휴! 채비는 다 하였느냐? 언제 나갈지 모르니, 어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야 하렷다.”
“공수래 공수거. 올 때도 맨몸으로 왔는데 갈 때 더 챙길 게 뭐가 있나요. 저는 식량만 조금 챙겼을 뿐이에요.”
거짓말이다.
어제 요리하면서 회귀자의 향신료를 슬쩍했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것들이다. 팔면 돈깨나 나올 것이다.
거기에 식량과 식수는 물론, 의복패킷마저도 챙겼으니. 가방과 함께하는 나는 그야말로 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밖에 나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느냐?”
현금화! 현물을 금으로 바꾸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강의 연금술!
이라고 할 수는 없어서 에둘러서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이 골렘이 자꾸 저보고 범죄자라고 윽박질러서 예정에 없네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요.”
죽은 듯이 있던 골렘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티르는 별로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갈 곳이 없어? 옳아. 어디 매이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하기 쉬울 터.’
아니,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티르는 기쁨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하구나….”
그러면서도 힐끔 내 표정을 살폈다.
‘피차 갈 곳이 없는 건 매한가지니, 같이 다녀도 아무런 문제는 없겠구나. 헌데….’
“흠흠. 나 역시, 당분간은 정처 없이 세상을 견식할 예정이란다.”
“에고야, 고생하시겠네요.”
‘…같이 다니기 위해서는, 무어라 권해야 좋을까? 어렵구나.’
티르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만 다른 생각에 접어들었다.
“무엇이 힘들겠느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필요치 아니하거늘.”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잖아요. 사기당하거나 돈을 뜯기거나 하는 거 아니에요?”
‘네가 알려주면 문제없을 터인데. 너는 사기를 쳤으면 쳤지, 당할 위인이 아니잖느냐.’
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눈치채주기를 바라며, 티르는 자꾸만 주제를 맴돌았다.
“나에게 수작을 부릴 만큼 간 큰 이가 과연 있을까 싶구나.”
“누가 사기를 그렇게 쳐요? 여관을 잡을 때 주인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1만 알케를 요구하면 어쩌려고요. 알케가 뭔지는 아세요?”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네가 가르쳐주면 되지 않느냐. 네 이야기는 나를 즐겁게 만드니, 나는 네가 설명해주는 걸 듣고 싶다.’
“기껏해야 한두 번 아니겠느냐. 처음 여행할 때는 그리 속아가며 배우기 마련이다. 그러다 좋은 동행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세상을 알아가는 게 여행이잖느냐.”
“그거 아세요? 좋은 동행이 가장 위험한 사기꾼인 거. 바가지 씌우는 상인은 돈이나 뜯지만, 동행을 자처하는 이들은 인생을 뜯어내려고 한다고요.”
‘네가 사기꾼이어도 괜찮다.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든, 전부 내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인생이거늘, 어떻게 인생을 뜯어낸다는 말이냐?”
“나쁜 동행은 사람을 꼬드겨서 다른 곳에 팔아넘기려고 하고요. 좋은 동행은 사람을 꼬드겨서 꿈을 좇게 하거든요. 그렇게 꼬드겨진 사람은 방랑자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죠. 둘 다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에요.”
‘그렇다면, 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좋은 동행이겠구나. 나의 꿈을 이루어줬으니까.’
“하는 행동은 낙천적인 주제에 바라보는 시선은 새삼 비관적이구나.”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늘을 나는 새는 땅을 내려다보고 땅에 붙박인 나무는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니까요. 세상이 요지경이니 저라도 낙천적이어야죠.”
‘온갖 일에 능숙한 너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알량한 힘뿐.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너를 지키는 것밖에 없겠지만.’
“…휴.”
“네?”
‘유쾌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세상에 해박한 너는 새로이 생겨난 것들을 설명해주거라. 그러면 나는, 밤하늘에 뜬 별을 헤아리며 지금은 잊힌 옛 일화를 말해주마. 서로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닥불이 다 타들어 희미한 연기를 뿜을 때면 꾸벅꾸벅 잠들고.’
“햇빛을 싫어하는 나는 동이 트기 전에 그늘로 숨어들 것이다. 그러면 아침 해가 떠오른 뒤 너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양산을 들추고 그늘 속에 웅크린 나를 찾아다오. 가끔은 다른 이와 도란거리고, 가끔은 짓궂게 나를 놀리고. 그러면서도, 이전과 다름없는 하루가… 계속된다면.”
중간부터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티르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혹은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련히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의 삶과 그다지 다를 게 없구나. 처음 네가 나를 깨우러 온 순간부터, 나가기 전인 지금까지…. 하나같이 즐거웠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티르는 여기 생활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가끔 떨어지는 표류물이 말썽을 부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빼고 본다면 이 무저갱만큼 안락하고 조용한 공간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하루하루를 견디며 다음 날 살아남기 위해 오늘을 노력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이 무저갱은 천국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원히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일에 끝이 있듯,
만일 밖으로 나간다면.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티르에게 물었다.
“티르. 혹시 저 지켜줄 수 있겠어요?”
티르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 고개를 들고는 대답했다.
“물론이다.”
“어떤 위험이 와도?”
“무엇이 두렵겠느냐.”
“만일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의 존재가 저를 노리면요?”
“그러면, 내 목숨이 다해서라도 그를 막겠다.”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죽는 건 그리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을 잃는 게 더욱… 끔찍하였지.”
한 번 죽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의 말은 무게가 달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경력직을 찾는 것인가.
어쨌건 마음은 참 고마워서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고마워요, 티르. 든든하네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는 모양이구나. 지모신의 사도를 대할 때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믿을 것처럼 굴더니.’
내 가벼운 태도가 불만이었는지, 티르는 볼을 부풀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는 그 지모신의 도사를 대단히 떠받드는 모양이나.”
무시무시한 기세로 나에게로 다가온 티르는, 그 발걸음에 비해 소심하게 옷소매를 꾹꾹 당기며 말했다.
“기억하거라. 나는 그 도사보다도 훨씬 유명하며, 견주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었음을.”
그야 그렇지. 아무렴 지선이라도 하더라도, 흡혈귀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홀로 성황청을 견제해낸 티르만 하겠나.
뭐, 그와는 별개로.
“오래된 건 그다지 자랑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정말, 한 마디 지는 일이 없구나!”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죠. 제가 지선 님에게는 이런 소리 못하잖아요. 티르처럼 애칭으로 부르지도 않고.”
“……!”
티르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잠시였다.
한껏 들뜬 티르는 이내 놓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내 채비가 아직 부족한 듯싶구나. 잠시 있거라. 짐을 더 챙기도록 하겠다.”
‘나 홀로 떠난다면 음식도, 잘 곳도 필요치 않으나. 온전히 살아있는 휴는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하겠지. 잘 곳은… 흠, 정 안 되면 나의 관에서, 같이 자면 되니….’
거기까지 생각한 티르는 갑작스럽게 얼굴을 붉히더니, 머리가 다 흩날리도록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 내가 무슨 망측한 생각을! 휴를 관에서 재우고, 나는 밤을 지새우면 되지 않느냐!’
잠깐. 그러면 내가 꼭 어르신을 침대에서 몰아낸 것 같잖아.
그보다 왜 여관을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노숙은 힘들고 위험하다고.
티르는 관 안에 짐을 하나라도 더 챙겨넣기 위해 자리를 떴다. 티르가 충분히 멀어지고 난 뒤, 내 옆구리에서 죽은 척 늘어져있던 골렘이 고개를 들었다.
『…귀하는 도박으로 체포된 것 아니었습니까?』
생각해 보니 깨어 있었지? 생각이 읽히지 않아서 그런가, 다른 사람이랑 함께 있으면 깜빡깜빡한단 말이야.
그나저나 내 죄목은 왜? 나를 잡아온 주제에 날 놀리나?
“제 죄목은 에이비 대위가 더 잘 알지 않아요? 아시는 대로에요.”
『혹시 본직은 호스트였습니까?』
“참나. 군국에 호스트바가 얼마나 있다고.”
호스트바는 대타로밖에 안 뛰어봤다. 별로 인기 있지는 않았지. 거기는 외모로 모든 것을 다 해먹는 비정한 동네라서.
“자자. 이제 바깥나들이는 충분히 했죠?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군국이 무저갱과 그 안의 죄수를 이용할 계획이라는 건 대충 알았다. 뭘 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높은 확률로 전쟁이겠지. 나라 이름부터 군국이잖아.
만일 그렇다면, 전쟁까지 남은 시간은 대강 1년 남짓인가? 대충 회귀자가 예상한 시기인가 보네.
뭔 일이 나겠구나.
“후. 빨리 나라를 뜨든가 해야지. 해안선을 따라서 쭉 올라갈까? 저 멀리 연방까지 도망가면.”
『…조금 전, 범죄자의 출국계획을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아아, 맞다. 아직 골렘 있었지. 진짜로 가만히 있으면 깜빡깜빡한다니깐.
“오해예요, 오해….”
내가 뱉은 말을 주워담는 도중이었다.
“…이봐. 잠깐만.”
어둠속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회귀자였다.
지선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회귀자는 이제야 결심을 끝마친 것으로 보였다. 긴 속눈썹 사이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할 말이 있어. 잠시.”
지금껏 누군가의 앞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존재한다는 사실만 힐끗힐끗 드러내던 그녀가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나서는.
내 겨드랑이에 낀 골렘과 그걸 소중히 껴안은 나를 보고는 김이 샜는지 인상을 썼다.
“그나저나 그 골렘은 애착인형이라도 돼? 왜 자꾸 들고 다니는 거야?”
응, 이라고 대답하려는데 골렘이 먼저 말을 끊었다.
『애착인형이라니? 본관은 귀하의 폭언에 반박을….』
그러나 세상에서 군국에 대한 인내심이 가장 부족한 회귀자였다. 회귀자는 골렘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를 쏘아보냈다.
“됐고. 골렘. 연결 끊을래, 아니면 끊어줄까?”
『…끊겠습니다.』
“그럼 가. 지금 당장.”
추욱.
골렘이 힘있게 늘어졌다. 뻣뻣한 팔다리가 흔들거렸다. 슬쩍 보니, 눈 부분에 해당하는 수정구가 데굴데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