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3)
EP.13 종말의 한 조각
사냥과 채집은 인간의 오랜 본능이며, 그것을 통해 성과를 이뤘을 때 얻는 심리적인 보상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종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탐색으로 아주 귀중한 것을 얻은 나는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이 무저갱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가장 먼 심연이라는 사실도 내 즐거움을 잡아두지 못했다.
게다가 품도 얼마 안 들었다. 아침에 잠깐 산책 겸 갔다가 개가 물어온, 진짜 그 정도의 노력으로 이것들을 얻었으니.
그게 아직 남아있다니 운도 좋아. 3레벨 국가기밀이라 폐기대상 최우선순위인데 말야.
새삼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이번 수확의 일등공신, 아지를 붙잡고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유, 귀여워! 너는 어쩜 이렇게 귀엽니!”
“멍! 멍!”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갑자기 껴안고 귀엽다 그러면 무슨 수작을 부리나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아지는 의심이란 것을 못하는 개. 개의 왕인 아지는 아무런 맥락없는 칭찬에도 순수하게 기뻐했다.
즐거이 짖던 아지는 나를 휙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제, 산책 좋아?”
“오늘 한정으로는, 사랑스러울 정도야.”
“멍? 사랑?”
“엄청나게 좋다는 뜻이야.”
“멍! 나도! 나, 산책 사랑해!”
‘…사랑?’
곳간에서 인심이 나온다 했던가. 주머니가 두둑하니 한결 너그러워지는구나. 이 식충이가 오늘따라 귀엽게만 보인다.
둘이서 희희낙락거리며 잔해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착하게 굴란 말이야.”
“나, 원래 착해!”
“착하기는 무슨. 지금껏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으면 곧장 이나 드러냈으면서. 으르렁, 하고.”
“으르렁?”
한 번도 그런 적 없다는 듯, 아지는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니, 시치미를 뗀 게 아니라 불리한 기억을 삭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어딜. 인간님이 똑똑히 기억하고 계시는데.
나는 아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아지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꼬리를 세우고 나를 따라했다.
“으르르, 르?”
“그래. 으르르거리지 말고. 앞으로는 이 세우지 마. 물려고도 하지 말고. 불만이 있더라도 일단 혀만 쓰란 말이야. 알았어?”
“멍!”
“알았다는 걸로 알겠어.”
‘이 세우지 마…. 혀만…. 설마.’
그렇게 개와 진지한 대화를 하며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싸늘한 살기가 날아와 꽂혔다.
‘가벼운 옷차림. 설마, 벌써? 아니야, 내가 바로 따라내려왔으니 시간적 여유는 없었어.’
회귀자가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살기? 왜?
내가 당황해서 반응하지 못한 사이, 회귀자가 머리 뒤쪽으로 손을 올렸다. 톡 하고 그녀의 손가락에 보이지 않는 검이 잡혔다.
‘어쨌건, 이건 미수범이지? 좋아. 죽이자.’
“잠깐잠깐잠깐!”
나는 아지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아지는 내가 자기를 방패 삼았다는 것도 모르고 빤히 회귀자를 바라보았다.
아지의 뒤에 숨은 채로 다급히 외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전부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인데?”
“다! 일단 당신의 그 파렴치한 생각부터 끝까지 다!”
“파렴치? 내가? 너 말하는 게 아니고?”
“그래요! 이 머리에 외설만 가득한 사람아!”
스릉.
아, 기어코 천앵을 꺼내 들었다. 나는 아지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소리쳤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애초에 당신 생각이 제일 불순합니다! 저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회귀자가 차가운 눈으로 대답했다.
“짐승.”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지금 회귀자는 진정으로 엄한 망상을 하고 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억울하기는커녕 당혹스러울 정도로.
아니, 세상에. 내가 꽤 많은 누명을 써 봤지만, 수간 혐의는 오늘 처음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라면 경멸하거나 웃고 넘겼을 혐의를 보고 사형을 내리려고 하고 있어! 용의부터 판결까지 군국보다 더하잖아!
흉악한 얼굴로 다가오는 회귀자를 향해, 절절한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개하고? 웃기지 마십시오. 도대체 세상 어떤 사람이 개와 관계를 맺는다는 말입니까!”
회귀자는 머릿속으로 몇몇 사람을 떠올렸다. 대충 읽어보건대, 아마 어떤 회차에서 개와의 사랑을 시도한 적 있는 녀석들이리라.
젠장, 종말이 가까운 미래에는 인간성마저 잃어버리는 건가. 인간의 수치들 같으니. 나는 이마를 짚고는 외쳤다.
“저도 압니다. 세상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인간도 존재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최소한 저는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취향을 지닌 사람이라고요!”
“…너, 자꾸 아지를 개 취급하는데.”
회귀자는 천앵으로 내가 붙잡고 있는 아지의 어깨를 가리켰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또 뭘요?”
“아지는 개가 아니야. 개의 왕,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의 왕이라고.”
아지는 맹한 표정으로 나와 회귀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큼직한 눈망울에 호기심 가득한 얼굴. 방금 전력질주라도 한 듯 가쁜 호흡. 부스스한 금발 머리털을 가지고 있는 소녀.
겉모양은 조금 활달한, 건강미 넘치는 여자애다. 어디까지나 겉모습은.
하지만.
“셰이 교육생.”
“이제 이해했어? 너, 계속 아지를 개 취급하고 있던데. 아지는….”
“제정신입니까?”
내 지엄한 일갈에 회귀자가 움찔거릴 때, 나는 아지를 한껏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아지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셰이 교육생이 말씀해보십시오! 아지가 사람입니까?”
“뭐? 그게 무슨.”
“대답해보십시오! 아지가 사람입니까? 아름답습니까?”
“어, 뭐.”
거침없는 질문에 회귀자는 조금 방어적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사, 사람의 모습을 했잖아?”
“내가 그걸 물었습니까? 그래서 보고 어떠냐고요! 아지를 보면 꼴리기라도 해요?”
“꼴리다니! 그, 그럴 리 없잖아!”
“자기도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야? 내 존엄성은 무시해?”
“그, 그야….”
‘너는 아지와 과할 정도로 친하고, 거기에 유일한 남자이니까….’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의심하기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아지는 암컷이기 이전에 개라고, 개!
잠깐. 생각해보니 너도 남장하고 있잖아!
너무 당혹스러워서 화가 날 정도다. 소극적이며 나약한 성정을 지닌 나는 평소에는 좀 당하더라도 가만히 있지만, 인간의 도덕성과 존엄성을 의심받는 건 참을 수가 없다.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난데, 그런 인간 말종과 비교하다니.
“셰이 교육생, 잘 들어요.”
분노가 극에 달하면, 어느 순간 머리가 차가워지고 이성이 되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 때였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친 날숨을 깊게 내쉬고는, 회귀자를 향해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사람한테 공을 던지고 물어오라고 하는 사람과 사람한테 아침 인사를 하며 맛있는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사람. 둘 중 누가 정상이죠?”
“그, 그야…. 아침 인사하는 사람.”
“잘 아는군요. 그러면 개한테 공을 던지고 물어오라고 하는 사람과 개한테 아침인사를 하며 맛있는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사람. 둘 중 누가 정상이죠?”
“그, 그건.”
‘개, 이긴 한데.’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자기도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뭐라고 해?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회귀자를 향해 호통쳤다.
“그래요! 개는 개처럼 대하는 게 정상이라고요! 안녕, 하고 어설프게 인사하면서 아침은 잘 먹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
“하, 하지만.”
“아지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오호. 그렇다면 당신은 아지를 사람으로 본다고 여겨도 되겠지? 그 파렴치하고 음탕한 눈으로, 아지를 하나의 인격체처럼 대우하는 척하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여겨도 되겠지!”
“아, 아니야! 나는!”
“댁도 남자잖아! 나랑 똑같은! 오히려 나보다 당신이 더 수상해. 왜 맨날 아지를 사람 대하듯 하고, 스토킹하고, 자꾸 어떤 관계가 아닐까 의심하는 건데! 혹시 질투라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말뿐이지! 댁의 행동을 되짚어 봐!”
‘윽, 남장만 아니었어도…!’
남장 중이었던 회귀자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한 발짝 걸어가며 따지고 들었다. 내게 어깨를 잡힌 아지는 재미있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해맑게 웃으며 내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알았어? 이상한 건 바로 당신이야!”
이성은 답을 알고 있다. 회귀자도 아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누구의 말이 맞는지, 누구의 태도가 더 합리적인지.
오직 정론만을 사용한 나의 공격에, 회귀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멍?”
물론 정론이고 뭐고 두 마디 이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회귀자만 번갈아 보고 있지만. 이게 바로 아지가 개라는 증거다.
개는 개. 이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과몰입한 회귀자 녀석에게는 준엄한 일침을 날려주었다.
“개 따위에게 하는 빈말.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당신이 이상한 거야! 알았어?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실제로는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순간 중요한 점을 놓치고 말았다.
아지는 개지만 동시에 짐승의 왕,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세계가 점지한 존재.
말뜻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내 말을 들을 수는 있다는 것을.
“멍?! 나, 안 좋아해?”
“앙?”
아지가 큼직한 눈에 의혹을 가득 담고는 나를 올려다본다. 언제나 빙글빙글 돌던 꼬리는 힘없이 늘어져 있고, 늘 쫑긋 서 있던 귀는 추욱 가라앉았다.
어라, 라고 당황할 틈도 없이. 아지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 싫어?”
“아, 그게. 아지야, 이게 할 말이 많은데.”
“멍?”
잠깐.
음, 잠깐만. 고민해보자.
개의 왕은 개다. 복잡한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서 나중에 말하자니 뭐니 해봤자 들어주지 않겠지.
즉, 여기서 회귀자를 몰아넣기 위해서 무슨 말을 해도, 아지는 그것을 진담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자, 선택의 문제다. 회귀자를 더욱 몰아붙이고 놀려대기 위해 아지의 호감도를 깎아 먹을 거냐. 아니면 호감도를 유지하고 회귀자를 놔 줄 거냐.
…어쩔 수 없지. 잠깐의 쾌락이냐, 훗날이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당장의 사소한 여흥으로 거사를 그르칠 수는 없으니.
결심을 내린 나는 양팔을 벌리고는, 아지를 향해 만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연히 거짓말이야. 나는 사실 아지를 엄청 좋아해.”
“엄청?”
“그래. 엄청. 여기서 너만큼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무서운 흡혈귀와 정신 나간 것 같은 회귀자에 비하면야 훨씬 도움이 되니까. 의지도 되고.
분위기만 조금 읽어주었으면, 조금만 더 참아주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 역시 개의 특징이겠지. 받아들이는 수밖에.
“나, 좋아?”
“좋다니까.”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한 마디 말로도 기분이 확확 바뀐다.
아, 어쩌면 둘 다인가.
하지만 인간은 그런 부족함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으니,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내가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멍! 나, 사랑해?”
‘…사랑?’
하필 누군가 보고 있을 때 이런 걸 묻는 거니? 누가 너를 자극하기라도 했니?
아니, 애초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누구한테 배웠는지. 개한테 쓸데없는 단어 가르친 사람 누구야?
아이쿠, 둘 다 나였네!
제기랄.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불러온 재앙이니 내가 치우는 수밖에.
평정을 되찾은 회귀자의 차가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개한테 사랑한다는 말은 백 번이라도 할 수 있다. 세상에는 같은 인간보다도 제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는 회귀자의 앞에서 하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왜인지 진지해져버린 분위기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말을 빚어냈다.
“사랑해….”
그러자 꼬리가 팔락인다. 말에는 무게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소한 감정조차 큼직하게 받아들이는 아지에게는 모든 것과 비슷했다.
아지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양팔을 내밀었다. 온 체중을 나에게 맡긴 채 몸을 비스듬이 기대어 섰다.
개가 친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온전히 몸을 맡긴다는 믿음의 표시였다.
순수한 호의가 얼굴에 가득 담긴다. 바보처럼 웃으며, 아지는 눈꼬리를 둥글게 늘어뜨렸다.
“멍! 나도, 너 좋아! 사랑해!”
“그래….”
내가 살면서 개와 사랑을 속삭일 줄은 몰랐는데. 하아.
아지는 펄쩍 뛰어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지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진짜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회귀자는 나를 한층 더 경계하고 있다.
아. 그만. 그딴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죽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면서 칼 손잡이를 만지작거리지도 마.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어디까지나 애완동물로서 좋아할 뿐이니까.
‘저 녀석이 내 가정대로 군국의 교관이라면, 그리고 이 탄탈로스에 자청해서 왔다면. 그가 가진 힘도 설명할 수 있어.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 해.’
아, 그리고 솔직히. 나도 네 심정 이해는 하는데 말이야. 나도 누가 자랑스레 짐승과 관계를 맺었다 이러면 경멸할 테니까.
나는 그럴 마음도 능력도 없지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안 되지. 짐승을 사랑한다고 사형이라니. 형량부터 이상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과잉대응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군국 특무대 소속 조직. 짐승의 왕들을 군국의 뜻대로 조종하여 적국의 멸망을 꾀했던 비밀결사.’
어, 잠깐.
뭐?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 짐승을 다루는 전문가이자, 누구보다도 수인을 증오하는 차별주의자들의 모임. 그 소속일 가능성이 높아.’
회귀자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가 스쳐지나간다.
기록되지 않은 과거에서 그녀는 평원 위에 서있었다. 바람보다도 가벼운 검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종말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녀 혼자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무력감. 이번 생애에서도 그녀는 실패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모두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죽음을 거스르고 눈을 떠, 다른 미래를 찾으러 나아가리라.
회귀자의 곁에는 잔뜩 겁을 먹은 사람들이 일렬로 시립하여 있었다. 손아귀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눈동자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으나, 그들은 감히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일 상대가 같은 인간이라면 자비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죽어도, 그들의 가족만은 살려달라 빌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을 죽이러 오는 상대는,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지평선이 요동친다. 지축이 흔들린다. 광란의 질주, 몇 개의 점을 필두로 장막이 끌려오듯 수천 수백 마리의 짐승이 달려든다.
면면은 다르다. 네발짐승도 있고 두발짐승도 있다. 몇몇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짐승의 귀가 달렸거나 기다란 꼬리가 허리춤에서 흔들리고 있다. 수인, 과거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아들딸들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짐승의 핏줄은, 인간에게서 얻은 것들을 이용하여 인간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는 인간들이 있었다.
짐승의 왕.
한 종족을 대언하는 이들.
짐승의 왕은 강하지만 힘을 투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종족의 대언자. 종족의 대표로 인간에게 뜻을 전달하는 이들.
하나, 종족의 뜻이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라면. 종(種)의 전의가 확고하다면.
짐승의 왕은, 백성의 뜻을 대행한다.
그리고 백성 가운데는,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증오를 품은 수인들이 앞장선다.
피, 불꽃, 연기.
짐승이 철과 불꽃을 두르고 인간을 공격한다…. 야성을 발휘하며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인류를 배신한 수인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지닌 이들은.
절대 다수의 반군을 이끌며, 그들 앞에 선 짐승의 왕은.
덜컥거리는 과거가 멀어지고, 현실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내가 방금 읽었던 내용은 너무 생생해서, 망막에 아직까지 광경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인 동시에 미래. 회귀자가 겪었으며,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나 역시 겪게 될 종말의 한 측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품안에서 얼굴을 비비는 아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책상 위에서 나풀거리는 종이처럼 넓적한 귀가 살짝 솟았다가 가라앉는다.
입을 꾹 다물고 나에게 체중을 싣고 있는 개의 왕.
인간에게 충성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의 총아는.
언젠가 찾아올 미래에서,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로 웃고 있었다.
‘짐승의 왕은 세계가 점지한 존재야. 이 자리에서 죽여보았자 세상 어딘가에서 다음 대의 왕이 태어나겠지.’
왜 간과하고 있었을까.
회귀자의 걱정이, 단순히 기우일 리는 없을 텐데 말이야.
‘아지가 저렇게 의지하고 있는 이상, 저 남자를 섣불리 처리할 수는 없어. 저 남자가 만물의 영장 소속이라고 확신하기도 힘들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남자는 폭주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제일 커. 지켜보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그건 그렇네.
아지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발톱이 보이지 않도록 살짝 말아쥔 손에서는 나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배려가 엿보였다. 그걸 생각하고 했을 리는 없으니, 본능적으로 누군가 다칠 일을 피한 거겠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 말아쥔 손에 피를 잔뜩 묻히게 된 건지.
아무래도 미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가혹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