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35)
EP.135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7
아직 남아있는 백화홍주를 홀짝이며 심상을 관람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대종사가 죽기 직전에 쓴 최후의 대마법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와, 진짜로 특별했구나. 오만할 만하네.”
“아아.”
“무저갱은 지옥이 아니었구나? 천국이었지. 이 땅이 무저갱이 되어 사라지는 바람에, 누구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덕분에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와 30만을 매장했고.”
“아아아….”
“하지만 30만 포로의 원망을 전부 외면하긴 어려웠나 봐? 그래서 선택하지 못한 물음을 담아서 유품으로 만든 건가. 거 참.”
지잔은 아직 뽑히지 않았다. 검도, 지팡이도 아닌 그저 새까만 막대기였다.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지잔은 이 심상의 열쇠이자, 이 질문의 문제.
하지만 나는 독심술사, 동시에 중등학교 만년수석이었던 우등생.
문제를 풀지 않고 답을 읽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설문조사 치고는 배경이 참 거창하네.”
정답이랄 것도 없었지만 말이야. 따지고 보면 대종사가 땅의 검 지잔이라는 사은품을 내걸고 만든 설문조사인 셈이다.
질문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이라, 심상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않으면 지잔은 힘을 허락하지 않겠지.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의도를 읽고 지잔을 들어올렸다. 새까맣고 장식 없는, 검인지 지팡이인지 모를 막대기.
대지술의 권능을 지닌 동시에, 사람에게 휘두른다면 무엇보다도 흉악한 무기가 될 땅의 검.
“아아, 아아아.”
“지팡이인지, 검인지. 잘 모를 디자인이구나.”
“어째서, 어째서….”
치부를 들키기라도 한 듯 흐느끼는 대종사, 아니, 정확히는 대종사의 심상이라 해야겠지만.
심상은 애써 만든 설문조사 종이를 찢고 사은품을 멋대로 만지작거리며, 이 시험의 진의를 파악하는 나를 보고는 절망하고 있었다.
“비록 비겁한 예언자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자기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를 두고 산 사람을 시험하는 건 좀 선 넘지 않나? 아, 건방지다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생과 사의 선을 넘었잖아.”
여전히 고개를 처박고 오열하는 심상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품에 남겨둔 심상이라 하여도 죽은 자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내 말에 대답할 리 없는 것이다.
나는 지잔을 휘적휘적 저으며 말했다.
“이미 가신 몸이니, 인사는 필요 없겠네. 멀리 마중 안 나갈 테니까 안녕히.”
그렇게 의식을 돌리려던 때.
“시험당하는 것은…. 소인이었사옵니까.”
“아잇, 깜짝이야! 간 떨어질 뻔했네!”
대종사의 심상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요즘 시체는 정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왜 갑자기 깨어나서 말을 거는 거야? 설마 1300년 전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어?
“무저갱이라서 그런가? 시체고 사념이고 묘하게 이상하단 말이야. 너무 보존이 잘 되어있고, 사념이 읽힐 정도로 명확하기도 하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대종사의 배를 뚫고 나온 십자가를 노려보았다.
“아니면 저 십자가 때문인가….”
그 존재 자체가 오리무중인 성황청의 권능. 어쩌면, 저건 지연된 예언처럼 1300년의 시간을 넘어서 나에게 물음을 전해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십자가를 뚫어지게 노려보았으나,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나는 무익한 일에 신경을 끄기로 하고 대종사에게 집중했다.
“그러면 일단 산 사람으로 취급해야 하나.”
내가 깊은 고민을 하는 때. 절규하던 대종사의 심상이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투명한 눈과 거기서 흐르는 한 줄기 강이 덧없다. 표정에서는 시간을 뛰어넘은 슬픔과 고뇌가 엿보인다.
대종사의 심상은 슬피 울며 나에게 애걸했다.
“소인은, 결국 선택하지 못하고 미루다, 결국 내몰렸사옵니다. 소인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도망친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되었사옵니다. 소인은 그곳에서 도망치면서… 편해졌으나,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었사옵니다.”
“후련하게 가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어요. 편하게 갔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래도… 되는 것이옵니까? 소인이 죄로부터 도망쳐도 되는 것이었사옵니까?”
대종사의 단말마와 같은 외침에, 나는 그 눈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느껴지는 사념을 향해 말을 걸었다.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앞두고 도망치는 건 보장된 하나의 길이에요. 저는 도망치려는 자를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지.”
“그렇사옵니까….”
“단, 죽음을 도피처 삼는 이들은 빼고요.”
심상이 입을 텁 다물었다. 나는 대종사의 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죽음이 좋은 도피처 같죠? 아무도 찾으러 오지 못하는, 그 잘못을 추궁하지 못하는, 가장 완벽한 면죄부라도 되는 것 같죠?”
심상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시간 너머의 벽은 내 독심술로도 뛰어넘지 못하니. 젠장, 빌어먹을 권능 같으니.
그래도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나는 적당한 공감능력을 발휘하여 읊조렸다.
“네, 맞아요. 세상에는 저승이 없는데 어떻게 죄를 추궁하러 오겠어요? 당신이야 편하죠.”
실제로 존재하는 무저갱조차도 이 고생 이 난리를 해서 간신히 찾아왔다. 그럴진대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는다면? 그야말로 채무 불이행의 극한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 입장도 좀 생각해주세요. 웬걸, 채권을 받으려고 했더니 죽지 않으면 도착할 수 없는 곳에 있대! 채권자들 속이 어쩌겠어요? 받아내지 못한 것은 누구한테 청구하고요?”
가장 높은 산의 심상에서, 나는 손으로 저 아래를 가리켰다. 이곳과는 달리 가장 먼 낮은 땅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회귀자와 지선.
존재하나, 이 심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들.
“그러니까 지옥까지 따라왔잖아요. 당신이 미뤄둔 채무를 줍기 위해.”
“아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한 대종사는 깊게 한탄했다. 차라리 미련을 갖지 못하고 소멸했으면 또 몰라도, 그 미련을 풀고 싶어서 심상을 남겼다면.
이렇게 될 건 예상했어야지.
설문지를 돌려서 그녀에게 내민다. 역으로 시험을 당한 대종사는 무겁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대종사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회귀자의 눈에서 반짝거리던 빛무리가 힘없이 점멸했다. 그 직후.
“크읏…!”
전륜천안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거센 탈력감. 잠깐 힘이 풀린 회귀자의 위로 무너진 콘크리트와 시체들이 쌓인다. 회귀자를 봉인하기 위한 작은 무덤이 생겼다.
싸움 자체는 회귀자의 우세였다. 회귀자는 연이은 공격으로 지선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지선은 더욱 강했다. 특히, 머리 위에 마음껏 끌어 쓸 수 있는 콘크리트가 한가득 있다는 점이 컸다. 차라리 하늘이 비어있는 지상이었다면 좀 더 대등하거나 우세한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위기에 몰리려고 하면 탄탈로스의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끌어와서 내다 꽂았고, 그 충격에 시체들의 산이 들썩거리며 쏟아졌다.
시체의 산사태였다.
아무리 산처럼 쌓였다고 한들, 그것을 이루는 원소는 단단한 흙이 아닌 죽어간 병사들의 시체. 이토록 거대한 충격에는 견딜 수 없다.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한 회귀자는 그에 휩쓸리고 피하느라 기력을 소모했고.
그러다 결국 지선에게 닿지 못하고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차라리, 시체의 산째 폭풍으로 날려버렸다면. 지선의 발판을 무너뜨렸다면…!’
왜, 그 생각이 힘이 다 떨어진 지금 떠오른 것일까.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해도 늦은 법. 지금 회귀자는 기분 나쁜 시체의 감촉 속에서 끙끙거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대종사의 유해 앞에서 몸을 일으키는 나의 모습. 그걸 지켜보는 것.
현실로 돌아온 내 코끝에 알싸한 백화홍주의 향을 느껴졌다. 시체의 산에서 나오는 혈향조차 우습게 가리는 최고가의 독주는 잠시 감각을 마비시키고 내 감정을 고조시켰다.
아아, 좋다. 이게 술이지.
신바람이 난 나는 지잔을 뽑아 들고는 무저갱이 떠나가라 외쳤다.
“다들 꼼짝 마! 이제부터 이 상황은 내가 집도한다!”
우뚝. 여기 있는 모두, 내 행동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왕이 된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이 압도적인 전능감. 모두가 나를 주목하며, 내 일거수일투족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쾌감.
내가 의기양양하게 지잔을 들자, 회귀자를 저 아래 묻어버린 지선이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평범한 이가 대종사의 유품을…?”
“왜 이런 거로 놀라고 그러세요? 산에 기어 올라가서 거기 있는 막대기 줍는 게 눈 색깔을 바꿔대는 것보다 덜 놀랍지 않아요?”
나는 먼저 오른 등산객이 꽂아 놓은 막대기를 회수한 거랑 다를 게 없다. 이게 30만 구의 시체가 쌓인 시체 산이라는 것과, 그 꼭대기에 있는 게 대종사의 유품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등산객인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이까. 휴즈 님.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외까?”
“수렵과 채집이요! 주인 없는 물건을 줍는 유서 깊은 행동이죠!”
지잔을 휘둘렀다. 묵직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움직이기 어렵지 않다.
좋아. 이 정도면 선언할 수 있겠군.
“지잔은 이제 제 겁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죠.”
“장난이 지나치시외다.”
“제가 가끔 장난을 치기는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도 장난을 치지 않아요! 때와 장소는 구분한다고요!”
어이가 없네. 볼멘소리로 불만을 표한 뒤, 나는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기로 했다.
나는 대지와 동등한 자격을 갖춘 검을 받쳐들고는 외쳤다.
“자, 이 무대를 만들어주신 모든 매장자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펑퍼짐한 옷의 시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이제 몇 남지 않은 그들을 보며 나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역사에 기록된 매장자들. 패왕의 손에 죽은 분들. 사명감을 지닌 채 원혼이 되어, 1300년 동안 그저 시체를 쌓았던 분들.”
30만의 시체와 함께 대종사가 사라지고 그 대신 무저갱이 나타나자, 그녀가 시체를 숨기고 도망쳤다 여긴 패왕은 나머지 매장자들을 무저갱 안으로 던져넣었다.
이게 역사에 알려진 패왕의 매장자 학살.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은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 이 무저갱 밑바닥에 도달했다.
매장자들을 맞이하는 건, 배를 관통당한 채 꺼져가는 목숨으로 넋을 기리는 대종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평소에 대종사를 흠모했던 이도, 그저 매장자라는 지위를 가장했던 이들도. 무저갱에 갇힌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는 30만 장병의 넋을 기렸다.
죽기 전에는 몸으로, 죽은 이후에는 원혼으로.
“여러분이 이행한 의무는 전부 제가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중은 제 머리를 못 깎고, 매장자는 자기 시체를 묻지 못하는 법! 자격을 지닌 탓에 산 자의 배웅을 받지 못한 여러분 대신, 평범한 인간인 제가 당신들의 넋을 기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외친 나는 대종사의 유품을 높이 들었다. 원혼만이 남은 시체는 시선으로 지잔을 쫓았다.
죽은 뒤에도 사명을 잊지 않았던 모든 이들을 향해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아직 살아있는 제가, 길을 가다 오래된 무덤을 발견하고는, 산 자의 의무에 따라 조촐하게나마 차례를 지내고 갑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 편히 쉬세요.”
지잔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직후.
시체들은 일제히, 실 끊어진 연처럼 쓰러졌다.
내가 아니라, 다른 평범한 이들이 추모했어도 안식을 찾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오직 그들을 위한 예식뿐.
30만의 시체를 일일이 매장했던 그들은 지모신의 뜻을 따르는 매장자이기에, 누군가에 의해 매장되지 않고서야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것이니.
내가 그들의 눈을 감기고 다시 허리를 폈을 때.
나의 앞에는 지선이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뻣뻣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소인 대신, 대종사와 그분을 따른 이들의 넋을 기려주셨구려.”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게 이 지잔을 가진 자의 의무이니까요.”
상쾌한 미소와 함께 건넨 대답에 지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