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39)
EP.139 다시 보이는 하늘
무저갱이 사라지고 땅이 뒤집혔다. 그날, 땅은 바닥을 되찾고 하늘은 무저갱 안쪽을 비추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의 하늘은 빛보단 어둠에 더 가까웠지만, 세상 만사는 상대적인 법.
무저갱의 끝없는 암흑에 비하면 조명이나 다를 바 없어,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을 되찾았음을 느꼈다.
지잔 하나로 천장을 들어 올린 셰이는 그대로 탈진해서 뒤로 넘어갔다. 힘을 다한 디딤구름이 사라지며 셰이의 몸이 거꾸로 떨어졌다.
티르칸쟈카가 어둠으로 그녀를 받았다. 힘없이 달싹이는 셰이를 보고는 급히 물었다.
“휴는?”
셰이는 조금 서러웠다. 땅을 밀어올렸는데, 그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에 대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끙끙거리며 어떻게든 대답했다.
“…찾아야지. 그 녀석이라면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엔 몸 상태가 너무 나빴다. 셰이는 상체를 들어 올리려다 말고 다시 풀썩 쓰러졌다. 무언가 말하려고 해도 끊어질 듯한 신음만이 입으로 새어 나왔다.
그제야 셰이의 상태를 확인한 티르칸쟈카는 조금 미안한지, 랄리온의 등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말했다.
“힘들었겠구나. 셰이, 너는 좀 쉬고 있거라. 내가 찾아보마….”
그때였다. 천장이 무너질까 봐 숨을 죽이고 있던 라쉬와 칼리스는 안전이 확보되자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티르칸쟈카는 그들에게 급히 물었다.
“마침 잘 왔다. 혹 휴가 어디로 갔는지 보았더냐?”
라쉬가 대답했다.
“선생 말이오? 먼저 올라간 것 아니오?”
“먼저 올라가? 하늘이 땅으로 막혀있었거늘… 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휴가 어찌 올라간다는 말이냐?”
“그야 모르지!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먼저 올라가 있겠다고 손짓했던걸!”
“손짓했다고?”
티르칸쟈카는 고개를 들어 무저갱 위쪽을 쳐다보았다.
천장이 사라진 무저갱은, 아니, 이제 무저갱이 아니게 된 구덩이는 하늘을 되찾았음에도 꽤 깊었다. 시체 산의 정상에 올라도 지상에 도달하려면 비행에 준하는 상승을 해야 할 것이었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티르칸쟈카에게 라쉬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렇소! 그 이후 사라져서 어떻게 올라갔는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선생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았겠소? 짐승 아가씨들처럼 천장에 매달려 올라갔을 수도!”
마침 지상에서 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비의 울음도 뒤따랐다. 두 짐승은 오랜만에 맞이한 지상에 기뻐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저 둘은 무저갱 반대편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천장에 붙어있다가, 날아가는 천장을 붙잡은 채 지상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짐승의 왕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휴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지. 한 가닥 실에 매달려 올라갔을 수도.”
“그러지 않겠소? 아니라면, 이곳에 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오? 선생이 장난을 좋아한다고 해도 설마.”
그래도 뭔가 하늘을 날아가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안 가서 티르칸쟈카는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다. 휴는 산 뒤편에 있을 수도 있다. 내 그곳으로 가서 찾아보마.”
“거, 가시는 김에 지선께 물어보시오. 그분이라면 더 잘 알 수도 있지 않소?”
라쉬가 시체 산 정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지선이 대종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아까 하지 못한 추모를 지금이라도 하려는 듯 몹시 경건한 자세였다.
한쪽 팔을 잃은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건 티르칸쟈카의 관심사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감히 시조를 적대했으면서 팔 하나로 끝났다면 거의 자비를 베푼 것과 다름없다.
“내 살펴보마.”
티르칸쟈카는 냉큼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방금 대지가 뒤집어지고 무저갱이 오랜 속박에서 풀려났음에도 그건 지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처럼 보였다. 머리와 어깨에 콘크리트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채, 지선은 한 손으로 힘겹게 술잔을 세우고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티르칸쟈카가 다가왔다.
먼저 티르칸쟈카는 시체의 산 반대편을 확인했다. 뒤쪽에는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 두리번거린 티르칸쟈카는 이젠 지선에게 물었다.
“여기 보아라. 휴가 어디 갔는지 아느냐?”
지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의 행방을 어찌하여 소인에게 묻소이까.”
“네가 가장 마지막에 그를 본 이가 아니더냐. 묻는 말에나 답하거라.”
“조금 전까지, 우리는 서로 다투었소이다.”
“승패가 명확하게 갈렸을진대, 패자는 승자의 뜻에 따라야 하는 법. 너는 더욱 성실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큭큭. 촌극이로군….”
짧게 헛웃음을 지은 지선은, 힘겹게 술잔을 놓고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올라갔소이다.”
“어떻게?”
“밧줄이 있었소이다. 탄탈로스에 밧줄을 박아넣은 뒤, 천장이 뒤집힐 때 그것을 잡고 올라갔소이다.”
“사실이렷다?”
“소인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소이까?”
말을 끝낸 지선은 평온하게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모든 것을 다 놓고 초연해진 그 모습에 티르칸쟈카도 더 묻지 않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도 없이 어디를 갔다는 말이냐?”
“말없이 나섰다면, 떠난 것이 아니겠소이까?”
“떠나?”
“이곳에 계속 있다간, 군국의 추격을 받게 될 터이니. 그것을 피하여.”
그때였다.
사방이 요란스러워졌다. 동시에, 낯익은 빛무리가 동그랗게 사방에서 비쳐왔다. 혼란에 빠져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땅이! 땅이 솟아났습니다!”
“지진이…!”
“사방에 시체가 가득…!”
“하늘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떨어집니다! 소령님, 대피해야 합니다!”
“진정해라!”
성난 목소리에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그 가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목소리 하나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상 사태가 발생하면 자리를 사수한 채, 최소한의 인원을 돌려서 보고한다! 이게 우리 탐색부대의 철칙 아닌가!”
“예!”
“알았다면 다들 자리를 지켜! 무저갱에서 그때 그 악마 같은 녀석들이 또 나오지 않게 막아야 한다!”
지휘관의 목소리에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발소리. 이윽고, 그들은 무저갱 테두리에서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동그랗게 잘린 하늘에 사람 그림자가 들썩이는 모습은 꽤 위압감이 있었다.
“칫, 안쪽이 안 보인다! 탐조등을 가져와!”
병사들은 어두컴컴한 구덩이 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들이 탐조등을 찾을 때였다.
“오! 군인들이구려!”
“…칫. 라쉬, 잠시 몸을 숨기겠습니다.”
“어? 아, 그렇군! 몸을 숨겨야 한다고 했지!”
칼리스가 모습을 숨기는 사이, 티르칸쟈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진한 채 골골대는 셰이, 짐승의 왕은 이미 밖으로 나간 데다 인간의 싸움에 끼어들 것 같지 않고, 불사자는 죽지만 않을 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는다.
‘휴를 찾아야 하건만.’
하지만 무저갱 안에는 보이지 않으니. 아마 밖에 나갔을 것이다.
군국에 발각당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먼저 모습을 숨긴 것일까. 칼리스처럼.
‘그렇다면, 머지않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활로를 뚫는 것.
깊게 숨을 내쉰 티르칸쟈카는 어둠으로 계단을 만들고는 터벅터벅 걸어 올랐다.
마침 다가온 동그란 탐조등이 그녀를 비추려고 했다. 빛이 닿기 직전, 티르칸쟈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 끝을 꾹 누른 뒤 튕겼다.
쨍그랑, 쨍그랑.
동그란 빛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조명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탐조등을 움직이던 군인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지휘관이 외쳤다.
“뭔가! 뭔가 접근하고 있다! 다들, 사격태세!”
그렇게 어둠을 두르고 지상으로 걸어오른 티르칸쟈카가 마주한 것은, 물경 삼백에 이르는 군세.
그들은 수십 대의 차량을 몰고 온갖 장비를 대동한 채, 티르칸쟈카와 대치하고 있었다.
무저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긴 은발에 새빨간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 군국의 군인들 모두 한순간 얼이 빠졌으나 잠시.
끝없는 땅속에서 솟아난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존재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는 각자의 무기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티르칸쟈카 역시 내심 긴장했다.
저들의 무기가 어떤지, 기량은 어떠한지.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가 없던 예전이었다면 일단 격퇴하고 보았겠으나, 지금 그녀의 심장은 뛰고 있었으며 뒤에는 탈출하지 못한 이가 남아있다. 잃을 것이 있다.
‘대화를 먼저 시도할까.’
타협을 모르던 시조는, 심장을 얻은 뒤 조금이지만 상실의 두려움을 느끼고는 한 걸음 다가갔다.
물론 티르칸쟈카의 긴장감은 군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통신병! 상황을 보고하라! 통신병!! 제길, 저 땅이 뒤집힌 뒤로 연락이…!”
실 끊어진 연처럼 쓰러진 골렘을 붙잡고 소리치던 지휘관은 골렘을 내던지고는 이를 악물었다.
“대령님!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원칙대로 처리한다!”
이럴 때 있는 게 원칙이라며, 지휘관은 확성기를 빼앗아 들고는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군대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일개 개인이 군대를 이길 수는 없다!”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 외침.
그 외침을 들은 티르칸쟈카가 한층 긴장했다.
그녀가 아는 군대는 두 종류였다. 한 명 한 명이 평범한 농사꾼에게 무기나 쥐여줘서 머릿수나 채운, 힘 빼기 위한 용도의 떨거지 군대와.
한 명 한 명이 정예로 이루어져,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잘 드는 칼 같은 군대.
당연히, 티르칸쟈카가 연상한 것도 후자였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는 탄탈로스에 들어왔던 이들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지선, 중장, 대령. 강함이 어느 정도 수위에 이른 이들. 그들만 보다 보니, 약한 이들은 얼마나 약한지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평균의 함정이었다.
“대화를 나누자.”
드물게도, 세상을 공포로 물들였던 시조는 저자세로 나왔다. 역사 속의 시조 티르칸쟈카가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다만 불운하게도, 이건 잠깐 겁에 질렸던 부대에게 쓸데없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이 불운은 군부대의 것이었다.
지휘관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항복하라, 교육생! 네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려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명령에 따라라! 따르지 않으면 발포할 것이다!”
타다당.
경고성 사격이 티르칸쟈카의 발치에 꽂혔다. 충분한 위협을 담은 공격에, 자연히 그녀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자신이 있나 보구나. 이 나를 상대로….”
생전 처음 보는 무기들. 티르칸쟈카를 감싼 수많은 총구들. 그리고 똑같은 옷을 입은 군국의 군인들을 보고.
진심으로 임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마.”
지금은 해가 지고 난 다음 밤. 그림자가 가득한 대지는 흡혈귀의 공간이다. 붉은 눈이 어둠을 시야에 넣으며 권능을 발휘했다.
사방팔방에서 흑기사가 몸을 일으킨다. 그림자는 그들의 기지요, 병참이니. 그 숫자는 물경 천.
느닷없이 전세가 역전되자 병사들이 당황했다. 지휘관도 혼비백산한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쏴! 쏴라!”
투두두두두.
명령에 따라 포화가 불을 뿜었다. 총탄의 비가 흑기사를 찢었다.
그러나 어둠에서 솟아난 흑기사는 총탄을 견뎌내거나, 혹은 흘려내고는 전진했다. 어둠을 치우기에 총탄은 너무 작았다.
인간을 상대로는 어느 정도 유효했을 총탄은 흑기사에겐 농민들이 휘두르는 도리깨보다도 나약했다.
“쓰, 쓰러지지 않습니다!”
“적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지휘관이 다급히 외쳤다.
“아, 알겠다! 이건 환각이다. 실체가 없는 거다! 다들 자리를 지켜! 총탄을 낭비하지 말고…!”
그때, 접근하던 흑기사 하나가 병사를 덮쳤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지휘관이 급히 말을 번복했다.
“다들 뭉쳐! 서로 등을 맞대고 화망을 좁혀라! 그리고 장비! 빨리 조명을 가져와서 비춰!”
병사들은 지휘관을 원망하며 그 명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