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4)
EP.14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차가운 눈으로 나와 아지를 번갈아보던 회귀자. 나는 온갖 말솜씨를 발휘한 끝에 그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나에게서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회귀자는 일단 지켜보기로 결정했는지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내심 한숨을 쉰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셰이 교육생.”
“왜.”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설마 저희를 미행한 겁니까?”
“미행이라니! 너를 찾다가 뒤따라왔을 뿐이야!”
천앵을 다시 머리 위에 띄워둔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티르칸쟈카가 궁금해하더라. 네가 말했던 수업. 몇 시에 어디서 하는지를.”
“네? 그거 진짜로 하는 거였어요?”
‘네가 한다고 말했잖아!’
회귀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찔끔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 알았어요. 준비하면 되잖아요.”
“열심히 준비해 봐. 기대하고 있을게.”
나에게서 등을 돌리며, 회귀자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나도 들을 테니 말이야.”
뒷골목을 전전하며 벌어먹던 내가 수업이라니? 나에게는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지식이 없는데.
내가 이곳에서 고학력자인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초등 시민학교 졸업과 중등 군사학교 중퇴가 끝이다.
중등 군사학교까지 진학한 시점에서 평범한 1레벨 시민보다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건 독심술로 전교 2등의 생각을 읽은 덕분이다. 만일 합법적인 독심술 컨닝이 아니었다면 내 학력도 시민학교 졸업에서 끝났겠지.
왜 전교 2등의 생각을 읽었냐면, 전교 1등이 나였거든.
순수 실력으로 1등을 차지한 건 아니었다. 시험장에서 나에게 생각을 보여주었던 전교생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모든 수험생들아, 나에게 지식을 빌려줘!
나 때문에 등수가 하나씩 밀리게 된 학생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회상을 계속 하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 과하게 높은 성적 덕분에 교관들이 군국을 빛낼 천재가 탄생했다 뭐다 떠받들었지만 실기에서 처참하게 조지는 바람에 고등 사관학교는 물 건너가 버렸지. 그래서 도망치듯 중퇴해버렸고. 결국 이 꼬라지.
잘못 나이 먹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학생 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읽는 능력만으로 날로 먹던 시절. 그립구나.
나이 먹으며 단물이 다 빠졌다고 생각한 옛 추억도 되새김질하니 씹는 맛이 난다. 정작 가르칠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뼉을 쳤다.
“아! 그게 있었지!”
이거면 되겠다.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탄탈로스의 1층부터 3층까지는 죄수를 가두는 수감실이다. 보통의 감옥이라면 억압된 질서가 불러일으키는 답답한 분위기가 떠오르나, 감독관 없이 죄수만 있는 감옥이었던 탄탈로스는 일반적인 감옥의 아키타입에서 미묘하게 비켜나가 있었다.
돌벽이 무너지고 철창들이 제멋대로 휘어져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 갇힌 죄수들에게 철창과 돌벽은 방해물도 안 되었던 모양이다. 돌벽은 부수어져 있고 강철 문은 얇게 편 수제비 같은 모양이 되어 있었으며, 죄수를 가두어야 할 철창살은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휘어져있었다. 어떤 벽에는 철창살 세 가닥을 꼬아 만든 창이 박혀 있었고, 어떤 수감실은 네모 반듯하게 잘려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철창살이 꼬이기도 하고 방 하나가 도려내지기도 하는구나.
미친.
아무래도 이곳의 죄수들에게 감옥이란 장난감과 다를 바 없었나 보다.
섬뜩하네. 이딴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평범한 노역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담.
아! 못 살아서 다 죽었구나!
비밀을 풀어낸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4층부터는 노역자들의 공간이었다. 현재 마땅히 머물 곳 없는 내가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잠글 수는 없지만 자유롭게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있고, 식당이나 세탁실 같은 편의시설도 구색이나마 갖춰놓은 곳.
나는 4층 복도 끝에 있는 노역자 교육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곳에는 ‘교육생’ 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관이 책걸상을 밀어낸 채 둥둥 떠 있다.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불량스럽게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아지는 교육실 한구석에서 배를 깔고 누워있다. 쟤는 그냥 놀러 온 눈치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교단에 섰다. 비록 사람 한 명 시체 한 구, 개 한 마리밖에 없는 조촐한 교실이지만 앞에 서니 묘하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말을 시작하기 전, 숨을 깊이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괜찮아. 이런 경험 많잖아. 호구한테 약을 판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하자.
실제로 별반 다를 것도 없고.
“자. 일단 교육 목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틀 동안 살펴본 바에 따르면, 비인간적인 힘을 지닌 여러분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합니다. 이대로 사회에 내보내봤자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만, 그랬다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죠? 그러니까.”
[잠깐.]관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혈귀는 언짢은 투로 말을 걸었다.
[…가르치러 왔다는 놈이, 복장이 그게 무어냐?]“네? 제 옷이 어때서요?”
군국 보급형 셔츠에 속옷 일체형 반바지. 가벼운 차림이지만 이 정도는 흔한데.
허나 천 년 묵은 꼰대 흡혈귀에게는 이런 가벼움조차 불만인 듯했다.
[가르침은 물과 같다. 높은 위치에서 흘러내려야 아래쪽에서 받아들이는 것. 따라서 교육자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럴 권위를 갖추어야 하거늘. 그런 품위 없는 차림이어서야 들을 마음이 생기겠느냐?]“어이가 없네. 내가 살다 살다 관에 들어간 사람한테 복장 지적을 받을 줄이야.”
[…이건.]“아, 알아요, 알아. 휠체어 비슷한 거잖아요. 저도 그것 가지고 너무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콜록! 콜록!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회귀자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격하게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훨체어 이야기를 듣고는 터져버린 모양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불량한 자세가 고쳐졌으니 만족하도록 하자.
‘…휠체어?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데 그게 무엇이지? 왠지 기분이 나쁜데.’
좋아. 앞으로는 절대 휠체어가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아야지.
나는 교탁을 세게 집고는 둥둥 떠 있는 관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티르칸쟈카 교육생, 제가 이 복장을 하고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거든요?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교관을 의심하지 마세요.”
[옳아. 보여보아라. 그 말이 단순히 면피를 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놀라 까무러치지만 마세요.”
이 구시대 흡혈귀에게 최신 기술의 대단함을 보여주지. 나는 왼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군국의 시민은 만 18세, 성장이 끝날 무렵 일괄적으로 생체등록을 실시합니다. 키, 체중, 체형, 골격, 팔다리의 두께와 길이까지. 전부 기록하여 몸에 새겨넣죠.”
휙, 하고 손목을 돌렸다. 내 왼쪽 손목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나 있었다. 피부를 파내 만든 홈에는 꼭 무언가를 끼워넣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군국은 가장 선진적인 개인식별 시스템을 지니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몇 가지 효용성을 가진 발명품을 만들어냈죠.”
관리실에서 아지와 찾은 물건을 꺼냈다. 검푸른 빛으로 빛나는 작은 구슬은 내 손목에 난 홈에 딱 들어맞을 크기였다.
이제 슬슬 대부분 눈치를 챘다. 이미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던 회귀자도, 내 몸에 난 구멍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흡혈귀도.
이 구슬을 어떻게 쓰는 건지 대강 유추했다.
“군국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 이게 연금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군국의 연금의복기술.”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손목에 난 구멍에 검푸른 구슬을 끼웠다. 찰칵, 하고 딱 들어맞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청색 실이 내 전신을 뒤덮었다.
피부를 따라 두껍고 단단한 섬유가 골격을 잡고 지시선을 그린다. 그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청색 실이 겹겹이 오간다. 연금 패턴에 따라 즉각적으로 옷이 지어진다. 실은 천이 되고, 천은 원단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제자리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한 세 바퀴 쯤 돌았을 때, 내 몸에 딱 맞는 교관복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순식간에 숙련된 교관의 모습이 된 나는, 제식에 맞춰 경례하며 말했다.
“의복 패킷입니다.”
빳빳한 교관복이 내 몸을 둘러싸기까지 걸린 시간, 단 10초. 생체 단말에 기록된 정보를 토대로 내 몸에 딱 맞는 옷으로 바뀌는 세기의 발명품.
찢어져도, 더려워져도. 패킷으로 바꾸어 닦아내면 그만.
군국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7가지 발명품 중 수위를 다투는 물건, 의복 패킷.
나는 어깨선을 내 손가락으로 집어올리며 한껏 으스대었다.
“의복 패킷의 발명으로 군국민들은 빨래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죠. 또한 피복 구입비도 극적으로 줄어들었고요. 일인당 의복 패킷 두세 개만 있으면 계속 번갈아가면서 쓸 수 있으니까.”
[호오.]“이제 아셨죠, 티르칸쟈카 교육생? 제가 왜 가벼운 차림으로 왔는지. 의복 패킷을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보급형 속옷만 입어두는 게 좋기 때문이죠.”
관에서는 흐음, 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흡혈귀의 생각이 똑똑히 들렸다.
‘신기하다…! 내가 잠든 사이 정말 많은 게 바뀌었구나!’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최신 문물을 어려워한다는 건 착각이다. 오히려 더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며 깊은 관심을 쏟는다. 원래 호기심이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더욱 탐구하는 법이니까.
다만 향수인지 익숙함인지 때문에 ‘그래도 예전의 그 맛이 있지.’ 이러면서 원점회귀를 하는 게 문제일뿐.
흡혈귀의 관심은 지금 생체 단말과 의복 패킷에 향해 있었다.
“교관복…. 흥.”
회귀자는 내 옷차림을 보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흡혈귀가 회귀자에게 물었다.
[아이야. 너의 손목에는 저런 것이 없지 않았느냐?]“나는 저딴 것 안 만들어.”
회귀자가 삐딱하게 대답했다.
“저건 감시용이야. 군국민 전부를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통제주의의 산물이라고.”
[통제주의?]“전국민을 지켜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뜻이야. 주요 도로나 기관에 출입하려면 생체 단말이 필요하니까. 혹 누군가 가서는 안 될 도로로 간다면 즉각 체포하기 위함이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미래를 보고 온 회귀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 흡혈귀 진짜 옛날 사람이다. 왕정도 제대로 안 돌아갈 무렵부터 살아왔다고. 그때 인권이란 게 있었겠니? 있었다면 그 나이에 죽어 흡혈귀가 되지는 않았겠지.
그 사실을 알아차린 회귀자는 작게 혀를 차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 생체 단말에는 이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