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42)
EP.142 안녕, 탄탈로스
“…완벽한 계획이라. 그런 것치고는.”
술잔을 따른 지선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소이다만.”
“네?”
“어찌하여, 자기가 내쳐놓고도 아쉬워하고 있소이까. 미련이 남았소이까?”
조금 드러났나.
쳇, 지선. 독심술사의 표정을 읽지 말라고. 생각을 읽는 건 내 전문이라는 말이야.
“뭐, 조금요.”
사람은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는 인간을 경멸하는 척하면서도, 내심 그들을 부러워한다. 자기가 저지를 수 없는 행동을 태연히 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사치는 꼭 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에게 소중한 것일수록 그 사치의 가치가 올라가니.
특히,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라면… 부러움을 넘어, 매혹되기까지 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그들과는 달리 정말 쉽게 죽으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고요.”
“말로는 목숨이 아깝다 하나, 도리어 이해할 수가 없구려. 휴즈 님. 소인이 여쭙겠소이다.”
대종사를 향해 두 번 절을 마친 지선은, 고개를 퍼뜩 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잔잔히 가라앉은 그 눈에는 의도와 감정이 몰아치고 있었다.
“소인은 대종사께 선택받지 못하였으나, 휴즈 님은 대종사께 선택을 강요하였소이다. 덕분에, 소인은 팔 한 짝과 함께 명분마저도 잃었으니. 그동안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간 셈이외다.”
지선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런 소인이 왜 휴즈 님을 살려두어야 하오리까?”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살기와 함께 날아온 물음. 나는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지.
괜히 죽일 이유가 없기도 하고.
원래 목표는 무저갱의 소멸이었잖아?
나는 대종사의 넋을 달래준 사람이라고.
많은 이유가 떠올랐지만, 나는 그중에서 상대가 가장 좋아할 내용을 골랐다.
“저를 살려두시면, 언젠가는 성황청을 까발려드릴게요.”
“…허.”
잠시 힘이 풀렸는지, 잘린 어깻죽지로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그토록 의외의 제안이었다.
지선은 하나뿐인 팔로 자기 어깻죽지를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 큭큭 웃었다.
“…진심으로?”
“그럴 일이 일어날 거라고 장담은 못 해요. 예언자가 아닌 우리는 서로 눈앞의 일밖에 못 보잖아요. 하지만 언젠가, 성황청의 치부를 발견하면. 이 파멸의 조동아리를 써서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어드리죠.”
“혹하는구려. 그게 이뤄진다면 말이지만.”
“원한다면 새끼손가락 걸까요? 아, 팔 한 짝 없으신 분에겐 좀 곤란한가.”
구덩이 위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제압되었던 병사들이 병력을 추스르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선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도와드려야겠구려.”
“저 혼자 알아서 나갈게요. 밀고하지만 말아 주세요.”
직후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일제히 무저갱 언저리로 달려왔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시체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탐조등이 사라진 탓에 그들에겐 희미한 조명이 전부였다. 안쪽으로 조명을 내던진 그들은 무저갱이 숨겨두었던 시체들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아악! 시체다!”
“내가 안다. 이곳은 패왕의 매장지! 그들의 시체가 남아있던 게 틀림없다…!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어!”
지휘관이 외쳤다.
“사다리를 내려라!”
“저, 저 안쪽으로요?”
“그래! 탐조등이 없는 이상, 우리는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야 한다! 그나저나 방금 말대꾸 한 놈 누구냐? 언제부터 정당한 명령에도 말대꾸를 했지?”
병사들은 냅다 사다리를 내렸다. 지휘관은 얼빠진 병사를 향해 고함치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꼼꼼히 탐색해라! 시체 밟는 걸 두려워하지 마! 밟는 것도 두렵다면 시체 만드는 일은 더 못하겠군…! 그러니까 아까 그토록 무력하게 당했겠지만!”
‘자기도 무력하게 당했으면서….’
근처 병사가 지휘관을 흘긋 보면서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쳤다.
그렇게 랜턴의 빛으로 탐색을 계속하던 그들은 이윽고 시체 산 정상에 도달했다. 지선을 알아본 지휘관은 냅다 그쪽으로 달려갔다.
“충성! 황야 탐색대의 케이오신 소령입니다! 준장님을 뵙습…! 에구머니나! 세상에! 준장님, 팔이…!”
병사들이 도달하자, 대종사 앞에 경건하게 무릎 꿇고 있던 지선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신경 쓸 것 없소. 경미한 피해요.”
“그럴 리 없잖습니까…! 일단, 응급처치부터!”
좋아. 지금이다.
다들 시선이 그쪽에 팔린 틈에, 나는 그들이 내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후방에 남았던 이가 나를 향해 희미한 빛을 비추며 물었다.
“이봐, 무슨 일이야?”
나는 짐짓 급한 척 외쳤다.
“준장님께서 중상을 입으셨다! 의무병! 빨리 의무병을 불러!”
“의무병? 그들은 지금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데.”
“이 멍청한! 준장님의 오른팔이 없어졌다! 이대로면, 이 나라를 쌓아 올린 지선께서 실혈사하겠어! 너는 우리에게 그런 오명을 씌울 셈이냐! 빨리, 부상자를 돌보던 의무병을 싹 다 부르라고!”
내 기세에 눌린 장교는 궁시렁거리며 물러나서 의무병을 불렀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와서는 따져 물었다.
“야, 그런데 너는 누군데 반말이냐? 내가 부대장인데….”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부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빈 자동마차가 사방에 가득하다. 황야를 순찰하기 위한, 두꺼운 바퀴가 특징적인 차량이다. 나는 콧노래와 함께 바퀴를 하나하나 터뜨리며 걸어갔다.
바퀴 바깥쪽은 튼튼하지만, 안쪽은 비교적 말랑말랑하단 말이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자동마차가 한쪽으로 주저앉았다.
눈여겨본 자동마차에 올라탄 나는, 안쪽에다 내 배낭을 던진 뒤 시동을 걸었다. 드르륵. 바퀴와 운전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체가 거칠게 진동한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페달을 밟았다.
가면서 다른 바퀴는 다 터뜨려놨으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더라도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슬쩍 보니 그럴 정신도 없는 것 같지만.
“자자. 일단 한 건 했고.”
도로 없이도 굴러가는 좋은 차지만 군용이라는 게 흠. 이걸 타고 도로로 접어들면 온갖 의심을 사겠지. 적당히 가다가 버려야 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마침 시야에 땅 위로 올라온 탄탈로스가 보였다. 시야가 가려지도록, 탄탈로스를 끼고 돌며 속도를 만끽했다.
“자아. 이제는 뭘 할까….”
사실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 비정한 세상은 돈이 없으면 신분마저 얻지 못한다. 다른 나라를 가든, 아니면 신분을 세탁해서 몸을 숨기든. 그 과정에서 돈을 먹으려고 드는 것이다.
돈이야말로 요즘 세상의 산소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군국의 수도, 아미텐그라드 뒷골목으로 가서 내 숨겨둔 재산을 챙겨야지. 자산을 현금화도 해야 하고.
그리고 알아볼 것도 있고.
좋아. 결정은 났다. 목적지를 정했으니, 지금은 그저 경치를 즐기자.
지형지물과 비교될 정도로 커다란 구조물이 내 왼쪽 시야를 가득 메웠다. 층 하나 정도 되는 콘크리트 바닥과, 그 위에 처참히 부서진 감옥 건물이 을씨년스럽다.
나는 가까이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감상에 잠겼다.
저 건물에서 온갖 일이 있었지. 먹고, 자고, 아지랑 놀아주고, 가끔 싸우다가, 다시 늘어지게 자고.
음, 이렇게 생각하니 별일 없었네.
하지만 그 별일 없음의 집합이 곧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삶에 그토록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게 비로소 진정한 삶이 아닐까.
부서진 감옥은 이제 몸 대신 내 마음을 붙잡으려는 듯하다. 다시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내 추억 한 점을 영원히 가두고 있을 것이다.
안녕, 탄탈로스. 내 특별한 경험이 담긴 장소여….
쾅.
그러다가 무언가와 부딪혔다. 위아래로 크게 덜컥인 자동마차가 시동을 멈추었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은 나는 운전석 문을 열며 재빨리 외쳤다.
“아, 씨! 운전 똑바로 해!”
반사적으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근처에는 부딪힐 만한 다른 물건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뭐에 부딪힌 거지? 이상한 거라도 밟았나?
차량 뒤로 돌아간 나는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뭐야, 이 표지판.”
땅속에서 솟아난 표지판이 중간부터 힘없이 꺾여있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은 있는데, 막 떠오르지 않네. 나는 한참 끙끙거리다가 기억을 상기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나를 호송하던 경관. 그들이 이 표지판을 보고는 멈췄지? 길의 끝을 알렸던 표지판이다.
분명 여기서 통신병 목소리가 들려왔고, 경비병들이 그 명령에 따라 나를 아래로 내던졌지.
“흠. 그러고 보니 에델파이트의 에비앙 경위였던가. 깜빡하고 있었네.”
감히 나에게 강철봉을 휘둘러? 그때를 떠올리니 뼈가 시린다. 억눌러둔 원한이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좋아. 아미텐그라드로 돌아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생겼다. 일단 에델파이트에 들러서 경위를 조지자.
내가 다시 차에 타려는 때였다. 표지판 근처, 땅이 격자 모양으로 갈라진 모습이 보였다. 탄탈로스가 뒤집혔을 때 지반이 갈라졌나, 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인위적이었다.
혹시?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격자 모양으로 갈라진 땅을 잡고 뜯어냈다. 땅은 한 겹 피부처럼 손쉽게 들렸다.
역시, 가짜 땅이었군. 탄탈로스가 무너지면서 그 충격에 드러난 건가.
그렇게 벗겨낸 곳에는 흉하게 찌그러진 네모난 금속 구조물이 있었다.
건물보다는 상자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땅속에 숨겨둔 상자가, 기울어진 탄탈로스가 땅에 충돌할 때 그 충격에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뭐야? 보물이라도 숨겨놨나?”
크기만 보면 커다란 방 같아 보이는데, 사람이 이런 데 살 리 없지. 누가 땅속에서 묻혀있는 금속 상자에서 살아? 분명 안에 뭔가를 숨겨뒀을 거야.
오랜만에 수렵과 채집 본능이 발동했다. 나는 꼬챙이를 뽑아 들고 상자 위에 올라섰다. 텅, 하고 속 빈 금속의 소리가 들렸다.
“선물상자를 확인하는 건 언제나 즐겁지.”
뭐가 있으려나. 나는 휘파람을 불며 찌그러진 틈으로 꼬챙이를 찔러넣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들쑤셔도 상자를 열 수가 없었다. 자물쇠는 아무리 들쑤셔도 반응이 없었으며, 찌그러진 틈으로 꼬챙이를 찔러넣었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꼬챙이를 집어 던졌다.
“칫. 사람 마음을 읽으면 뭐해. 자물쇠의 마음을 못 읽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자물쇠를 맨땅으로 딴 적이 없구나. 열쇠를 훔치거나 비밀번호를 알아내거나 했지.
쳇. 이대로 가기엔 뭔가 아쉬운데…. 어떻게 할까.
거대한 충격에 찌그러진 강철. 비틀린 이음새로 안쪽이 들여다보인다.
흠. 나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거나, 내가 더 무거웠으면 이걸 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한 번만 시험해볼까.”
나는 강철 상자에 양손을 올렸다.
본래 심상이 지모신에게 닿아야만 쓸 수 있었던 지모신교의 대지술이다. 그렇기에 오직 지모신도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종사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지금이라면 아마 나도 쓸 수 있을 거다. 제식마법이나 기초적인 기공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지선과 대종사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있어, 땅은 흐른다. 그 안에 사는 생명부터 시작하여 자연의 위대한 흐름에 의해 천변만화로 움직이는 존재다. 본래 수십 년, 수천 년 동안 이루어져야 할 대지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기술이 대지술.
강철이라지만 그건 대지에서 비롯된 것. 나는 미약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움켜잡으며, 강철 문을 향해 대지술을 시전했다.
“흐읍!”
와장창.
문짝이 주저앉았다. 내 몸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으로 떨어졌다. 봉변을 당한 나는 딱딱한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아야야.”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난 내 눈에 보인 건 생활감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니, 이걸 생활감이 있다고 봐야할까, 없다고 봐야할까.
“진짜 방이었네.”
누군가 이 상자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좁은 상자 안 가득한 가구는 하나같이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좁은 공간에서 갇힌 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넘치는 생활감은 도리어 한 편의 부조리극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세트, 럭스.”
어쨌든 여기서도 주워갈 수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제식마법으로 어두운 내부를 비추며 나아갔다.
“어라.”
그렇게 탐색을 계속하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