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50)
EP.150 길은 여행자와 함께 흐른다 – 6
인간은 잠을 자는 생물이다.
살아있다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잠. 그것은 미룰 수는 있어도 영영 거부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게 흐르는 길바닥 한복판이어도 마찬가지.
이동하면서 잘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인 동시에 저주. 인간은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잠의 의무를 진다.
전신에 느껴지는 거친 진동에 내가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십시오….”
급한 목소리에 내 어깨를 다급하게 건드리는 손. 그리고 귓가로 속삭이는 목소리.
아, 뭐야. 내 단잠을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부족한 수면의 질은 양으로밖에 메울 수 없는 법.
나는 몸을 뒤틀며 중얼거렸다.
“10분만 더….”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나조차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강도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엥? 강도?”
메타컨베이어 벨트와 노상강도.
그 두 단어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예전, 철로와 열차라는 헛된 발명품이 등장한 적 있다. 강철로 길을 만들고 그 위로 차량을 오가게 한다는, 의도만은 선량한 천국으로 향하는 두 줄기 선.
길 가던 짐승이 호기심에 철로를 물어뜯거나, 혹은 짐승으로 가장한 적국의 스파이가 테러를 한다던가, 혹은 시간 많고 돈 없는 노상강도가 습격한다던가 하는 일 때문에 금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딴 것에 비해, 이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를 품은 이도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손상시킬 수는 없다. 중간에 도로를 훼손해보았자 그대로 흘러가거나 메워질 뿐이니. 정녕 이 흐름을 멈추고 싶거든 땅을 다 퍼낼 각오를 해야 한다.
불가능의 이음동의어다.
벨트 위에 올라타기도 힘들다. 철로를 막으면 움직임을 멈추고 바퀴만 동동 구르는 열차와는 달리, 도도히 흐르는 땅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절벽을 무너뜨려도 길이 막히기는커녕 절벽을 얹은 채 그대로 흘러가니, 어떻게든 인간이 땅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
목표를 찾기도 어렵다.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려있는 건 군국 각지에서 오가는 수많은 물건들. 지나가는 열차가 곧 보물상자인 철로와 달리, 꿰뚫어 보는 눈이 없다면 어떤 컨테이너에 무슨 화물이 들어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심지어 이곳의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보통 군인.
어찌저찌 이 모든 난관을 헤쳐서 물건을 훔쳤다? 축하한다. 이제 지친 몸 이끌고 무거운 배낭마저 등에 매단 채 뛰어내리면 된다.
그때가 되면, 타고 왔던 말이나 마차는 한참 뒤로 밀려나고. 대신 군국의 병력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따라서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노상강도란, 국가 전복을 꿈꿀 정도로 강대한 조직력을 가진 단체나 벌이는 짓이 되었다….
예를 들어. 레지스탕스처럼.
어라?
“레지스탕스?”
“추정, 긍정! 지금, 막, 그들이 위에서 떨어지고 있습…!”
라고 대위가 말할 때.
“이야아아!”
머리 위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하늘이 다 밝아오지 않은 때였다. 하필 계곡을 지나던 도중이라 아침이 늦게 찾아왔고, 잠 덜 깬 사람들은 눈을 비비며 어둑한 안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침입자는 위쪽에서 찾아왔다.
저 멀리, 열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밧줄에 몸을 매단 채 쏟아져 내렸다.
미리 연습을 한 게 틀림없었다. 밧줄이 정밀하게 계산된 궤적을 그리며, 땅에 부딪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어 벨트와 함께 달린다. 벨트에 스치듯 내려앉은 그들은 일제히 밧줄을 놓고는 땅을 굴렀다.
그리고 일어선 그들의 손에는 총검이 하나씩 쥐여 있었다.
딱 한 사람만, 총 대신 기다란 창으로 땅을 긁으며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원숭이처럼 밧줄을 타고 가볍게 내려앉은 레지스탕스들은 사방으로 총구를 겨누며 외쳤다.
“다들 멈춰!”
참나. 별 같잖은 것들이 다 습격하고 그러네.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하룻강아지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들고 무릎을 꿇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총에는 마음이 없지. 암.
그들의 시선이 닿자, 잔뜩 겁을 먹은 어머니가 아들을 꼭 껴안았다. 어머니는 어찌나 공포에 떨었는지 거의 흐느끼기까지 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창을 든 사내가 모자를 향해 안심시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레지스탕스다. 민중의 벗이지. 우리는 군인이 아닌 너희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
그러는 동안, 그의 뒤쪽에서는 다른 레지스탕스들이 커다란 도끼와 연장을 이용해 화물을 뜯었다. 단단히 밀봉되어있던 컨테이너가 부서지며 안쪽에 곱게 포장된 상자가 몇 개나 보였다. 대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레지스탕스가 램프를 들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대장은 창을 겨누면서 사람 숫자를 셌다.
“민간인 둘. 공병 하나. 여기는….”
“민간인입니다! 민간인! 우리는, 아미텐그라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대위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나와 아직 셔츠 바람인 대위는 완벽한 민간인처럼 보였다.
대장 레지스탕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군인은 없나? 하긴, 지금 이 방향으로 갈 군인이 없긴 하지.”
‘그래서 우리도 이 틈을 노린 거지만. 운이 좋았다.’
대장은 경계심을 조금 거두고는, 날카로운 시선을 사방으로 던지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우리는 레지스탕스. 왕국의 정당한 자산을 되찾는 중이다.”
봉변을 당한 늙은 공병이 되물었다.
“왕국?”
“그렇다. 본디 군국의 모든 것은 왕국의 자산. 군국이 부당하게 점유하고 있는 그것을 되돌려받고 있다.”
군국을 전복시키려는 레지스탕스에는 여러 인간 군상이 모여있다.
구 왕국 시절의 기사들, 의기 넘치는 젊은이들, 군국에 의해 내몰린 찌꺼기들.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 군국과 같은 하늘을 지고 살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세력을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건, 당연히 구시대의 기득권이었던 기사들이다.
왕의 창잡이.
재력과 권력, 세력과 무력을 모두 가졌던 기사들이 구심점이 된 건 당연한 일.
“군국은 비겁하게도 지방 기사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움직여 나라를 무너뜨렸지. 만일 지방의 기사들이 모두 왕성에 모여있었다면, 잡병들의 폭동은 단순 소요 사태로 끝났을 것이다. 나라를 도둑맞은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냐?”
기사는 나라의 지배계급이었으며, 동시에 영지의 영주이기도 했다.
쿠테타 당시 다른 지방에 있었던 기사들이 많았고, 군국이 정권을 차지하자 그들에게 저항하거나 돈과 가신을 데리고 몸을 숨겼다. 그 힘은 그대로 군국을 향하는 창날이 되어, 집권 초기 군국은 안팎으로 대단히 휘청거렸다.
지금이야 휘청거리는 건 레지스탕스뿐이지만.
어쨌건,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레지스탕스의 대장, 발츠로이 경은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무지몽매한 촌민에게 말해 봐야 무엇을 알겠나. 왕국이 무너질 때 그랬듯, 지금처럼 숨죽여 가만히 있어라. 명예도, 영광도 모르는 촌민….”
기사다운 오만함을 두른 발츠로이 경이 우리를 감시하며, 다른 레지스탕스가 컨테이너를 터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고귀한 자신은 그딴 잡일 따위는 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컨테이너 안쪽이 점차 소란스러워질 무렵이었다. 내 곁에 선 대위가 움찔거렸다.
‘비록 통신병이라 하지만, 본관은 군국의 대위입니다. 의무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어라? 갑자기 왜?
잠깐. 아니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지?
‘본관은 통신병이나, 그럼에도 대위. 반군이 군국의 자산을 빼돌리려는 것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내 바람이 무색하게, 굳게 결심을 한 대위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에서 의복 패킷을 생체단말에 끼워 넣으려고 했다.
낌새를 눈치 챈 발츠로이 경이 손을 움직이려고 하기 직전.
“와아아악!”
나는 재빨리 대위를 껴안고 땅을 뒹굴었다. 혹여나 손을 펴지 못하도록 그 주먹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는 대위의 입을 틀어막은 채 체중으로 깔아뭉갰다.
내게 제압당한 대위가 몸을 뒤틀며 외쳤다.
“놓으십, 읍!”
“죄송합니다! 우리 삐가 불안장애가 있어서!”
아니, 진짜 미쳤냐고!
상대는 한때 왕국의 지배층이었던 기사다. 정상적으로 진급한 대위여도 패색이 짙은데, 대위 중에 물대위인 통신병 따위가 어떻게 상대하려고! 고막에다 대고 왜애애앵이라도 갈기게? 그건 그나마 승산이 있겠네!
나와 대위가 드잡이질을 하자, 발츠로이 경이 창을 이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무슨 짓이지?”
“신경 쓰지 마세요! 발작 증세가 있거든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제가 붙잡고 있어요! 악!”
제길, 물렸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는 대위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밑에 깔린 대위가 들리지 않는 외침을 토해냈다.
‘놓으십시오! 본관은 군국의 군인입니다! 의무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의무도 의무 나름이지. 개죽음이라고! 싸움도 못 하는 주제에 왜 나서려고 그래? 죽으려고?
‘본관은 발각된 즉시 자결하거나, 혹은 본관을 찾아내고 살려낸 귀하를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밀을 다루는 통신병의 의무입니다!’
잠깐. 여기서 그건 왜.
…아. 설마.
‘그러나 지금껏, 본관은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에 들떠서,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할 선택의 순간을 미뤄왔습니다. 의무에 눈을 돌린 셈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쯧.
빌어먹을 군국 같으니. 무엇을 했길래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진 거야?
‘만일. 레지스탕스에게 저항하다가 죽는다면. 그 또한 본관은 의무에 충실한 것일 터. 그렇다면, 이제 본관은 더 고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 귀하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그러니 놓으십시오!’
그렇게 결심한 대위가 나를 뿌리치고 일어나려던 때였다.
그보다 먼저 늙은 공병이 몸을 일으켰다. 공병은 세상 풍파에 지친 듯한 표정으로 컨테이너를 해체하는 레지스탕스와 발츠로이 경을 눈에 담았다.
“…무지몽매하다 하셨수?”
겨누어진 총구가 무색하게 움직이는 공병.
대위와 공병이 달랐던 점은, 대위의 곁에는 미친 짓을 말릴 내가 있었다는 것뿐이다. 레지스탕스를 앞에 둔 공병은 삶의 애환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내 형님은 메타컨베이어 벨트 공사 도중에 죽었수. 흐르는 땅에 빠져, 온몸이 짓이겨졌지. 사람이 산채로 갈려들어가는 꼴이라니… 아직도 그 광경이 내 눈에 선하우. 시간이 남는 날이면 벨트를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이 위를 거닐며 형님을 추억하고 있지. 나는 아직… 군국이 원망스럽수. 무리한 공사로 형님과 동료를 앗아간 군국이.”
“오호. 진흙 속에서도 잡초가 자란다더니. 드디어 깨달은 자가 있는 모양이군.”
군국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들리자 발츠로이 경이 크게 기꺼워했다. 역시,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는 같이 욕하는 것만한 일이 없지.
“혹 레지스탕스에 투신하겠나? 레지스탕스는 너 같은 기술자를 언제나 환영….”
“그래도. 군국이 아무리 원망스럽다고 해도.”
공병이 주름진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얼굴에 난 고난의 흔적 하나 하나에 시뻘건 분노를 새겼다.
다시 없을 증오와 경멸을 담아, 공병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호로 잡것들의 왕국보다는 백 배 낫수.”
“…뭐?”
발츠로이 경의 표정에 금이 갔다.
기사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를 마주하면서도, 공병은 한 맺힌 세월에 응축된 비명을 토해냈다. 시대가 바뀌기 전의 과거, 증오와 결투의 시대를 기억하는 이의, 점차 잊혀가는 외침이었다.
“그래, 이 호로 잡것들. 그래도 형님은 목수로 일하다가 돌아가셨수. 끔찍하게 죽었지만, 최소한 비참하지는 않았수! 그런데 기사랍시고 거들먹대는 너희 개잡것들이! 사람을 장난감처럼 죽여댄 것보다는 낫다고!”
돌려까기를 당한 발츠로이 경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는 창대가 부서져라 움켜쥔 채 공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죽고 싶은 모양이로군.”
살의를 품은 기사를 마주하면서도 공병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래! 나를 죽여! 잡놈과 붙어먹은 왕국 개새끼들아!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던 것처럼. 나도 죽여봐라!”
“소원이라면.”
발츠로이 경은 장갑을 벗어서 공병의 앞에다 던졌다. 철퍽, 하고 가죽 장갑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왕국 시절, 기사들의 시대. 힘이 곧 국력이며 권력이었던 시기.
그 시절에도 법은 있었으나,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 대신 결투라는 이름의 재판이 성행했다.
서로 힘을 겨루고,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승리한 이가 진실이자 정의이며, 이것은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장갑을 던진 발츠로이 경이 맨손으로 창을 다잡고는 공병을 겨누었다.
“결투다. 버러지. 무기를 들어라.”
군국은 개인적인 결투를 금한다. 따라서 군정 이후 태어난 시민들은 결투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왕국이던 시절부터 살아온 이들은, 왕국에서 가장 많은 목숨을 거두어갔던 제도를 보고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겁을 먹은 듯 움찔거리는 공병을 향해 발츠로이 경은 약식으로 결투의 문장을 읊었다.
“도전하라. 승리야말로 곧 정의이니, 승자는 필시 천신께서 보우하시리라.”
“신성은 무슨 신성! 깡패새끼들이 날뛰는 게 신의 뜻이면! 저 신은 깡패신이 아니고 뭐겠냐!”
공병이 마음을 다잡고 외쳤다.
“…결투의 예법도 모르는 무지렁이로군. 최소한, 이에 응했다면 곱게 죽여줬을 텐데.”
붕. 창이 바람을 갈랐다. 발츠로이 경은 한 마리 맹수처럼 자세를 다잡은 채로 공병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사지를 하나씩 끊어주지. 벌레처럼 땅을 뒹굴며, 자비를 구걸하다 죽어라.”
창이 점차 가까워진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공병은 떨리는 눈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공병은 후회하지 않았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왕국을 무너뜨려 준 군국. 따라서 공병은 군국에 의해 커다란 비극을 겪었음에도 군국을 증오하지 못했다. 그저, 울분만 쌓아둔 채 20년 가까이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를 거닐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공병은 기어코 이 증오와 한을 드디어 풀어냈다. 대상이 사라지는 방향에 갈 곳 잃고, 그의 속을 맴돌던 불길을 이제야 다 뿜어낸 것이다.
늙은 공병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죽지 않겠지만 말이다.
‘안 됩니다. 장군이 자리를 비운 지금, 반군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 그리고 대위. 너도 마찬가지. 네가 나섰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야.
도대체 왜 장군이 자리를 비웠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일단 오른팔부터다.”
발츠로이 경의 창이 움직였다. 끄트머리가 살짝 진동한다고 생각했더니, 어느 순간 뱀처럼 솟구친 창날이 벌써 공병의 몸에 닿아있었다.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은밀하고 신속한 찌르기.
“하암.”
그리고. 창이 크게 튕겨 나갔다.
손아귀가 찢어진 발츠로이 경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부릅뜨고 공격이 다가온 방향을 향해 창을 겨눴다.
“누구냐!”
“나다. 새끼야.”
기척이 생겨났다. 존재감을 뒤덮고 있던 기막이 사라지며, 커튼을 걷어낸 것처럼 그가 나타났다.
군국의 최고 전력, 육장성.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사를 죽인 반역의 기사, 파트락시온이 레지스탕스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