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51)
EP.151 길은 여행자와 함께 흐른다 – 7
한 박자 늦게 그의 존재를 상기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어디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이.
파트락시온 장군은 컨테이너 위에서 걸터앉은 채 지루한 듯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원래 휴가라서 일 안 하려고 했다. 도대체 우편물이랑 키메라콩 씨앗이 가득 담긴 컨테이너는 왜 건드는 걸까 궁금해서 그냥 지켜보려고 했거든.”
장군이 훌쩍 내려앉았다. 소리 없이 땅을 디딘 그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쥐어져 있지 않았으나, 발츠로이 경은 전신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무기를 든 이와 들지 않은 이가 뒤바뀐 것 같았다.
“그래도 인마. 노인한테 결투가 뭐냐, 결투가. 그냥 내버려 둬도 얼마 안 있으면 죽는 사람한테.”
느닷없이 등장한 낯익은 얼굴을 향해, 발츠로이 경이 이를 악물고는 소리쳤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지? 그들이 내려오는 지금, 이쪽으로는 누구도 향해서는 안 될 텐데!”
“정보가 어딘가에서 새나가긴 새나가나 봐. 나온 지 얼마 안 된 작전지침서를 레지스탕스가 더 잘 알고 있네.”
머리를 긁적인 장군이 대답했다.
“내가 누구 명령을 듣는 거 봤냐? 그 명령서를 본 순간, 나는 바로 휴가를 내고 뛰어왔지. 휴가 안 내고 오면 명령불복종이니까.”
그야말로, 그와 여기서 마주친 건 변덕과 우연이 겹친 결과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달은 발츠로이 경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제길. 불운도 이런 불운이.”
“불운이라니? 오히려 좋지 않나.”
파트락시온 장군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내보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기, 내가 있다. 나는 무기도 없고, 나를 지키는 부하도 없다. 여기서 나를 상대로 결투하여 승리하면 군국은 휘청이고 너희 명성은 올라가겠지. 어때? 조촐하게 컨테이너 터는 것보다 훨씬 할 만하지 않나?”
그러나 그게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일인지는 발츠로이 경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군국의 육장성이라고 불리나, 한때 왕국의 촉망받던 기사.
그리고 당대 최강인 수호기사를 무찌르고, 왕국을 제 손으로 무너뜨린 기사.
반역의 기사, 절창 파트락시온.
그는 희열에 찬 눈으로 발츠로이 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의기를 보여라. 각오를 보여라. 이기지 못할 이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영광스러운 신의 품에 승패를 맡겨라. 자. 네 원수이자, 왕국을 무너뜨린 반역자가 여기 있다. 결투로서 당당하게 나를 심판해!”
발츠로이 경은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며 창을 굳세게 쥐었으나, 손아귀에 들어가는 힘과는 별개로 그의 마음속에서는 절망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소리쳤다.
“왕국을 멸망시킨 반역자가, 어디서 신성한 결투를 입에 담느냐…!”
“반역? 어처구니없는 소리.”
탕!
그때, 뒤쪽에서 경계하고 있던 레지스탕스가 냅다 총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장군이 손가락을 가볍게 옆으로 그었다.
바람이 멈췄다.
강함에 있어서, 새끼손가락은 엄지손가락을 이길 수 없다. 설사 아무리 단련하여 다른 누군가의 엄지보다 강력해진다고 한들, 그자의 다릿심을 이길 수 없다.
팔 뒤쪽으로는 손을 뻗을 수 없다. 유연성을 기른다고 해도 닿는 게 한계다. 몸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당연하디당연한 것. 강함이든 뭐든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약점은 강점을 압도하지 못한다. 기초적인 진리.
그러나, 기공이 경지를 이룬 순간. 어느 시점에서 일반적인 강함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순간이 온다. 힘이 크기 성질에서 세기 성질로 바뀌는 어떤 순간이.
장군의 손가락에는 총탄이 잡혀있었다. 반탄기공을 어떻게든 뚫을 작정으로 관통력만 높인 전용 총탄이나, 아직 멀다.
전신으로 기공을 내뿜는 장군은 이 공간 자체를 장악했다. 총알 따위가 감히 뚫어내지 못할 만큼.
장군이 손가락으로 잡은 총탄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내가 한 건 반역이 아니다.”
사적인 결투가 신의 이름을 빌려 횡행하던 때.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여 배를 불리는 게 당연시되던 때.
부패한 상인들이 무력을 가진 기사와 결탁하여, 부정하게 부를 축재하는 법을 깨닫고 세상에 그 해악을 널리 퍼뜨릴 무렵이었다.
무차별적인 결투가 이어졌다.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 굴복해야 했다. 강자는 부와 명예를 위해, 자기보다 약하면서 재산을 모은 이를 찾아다녔다.
신은 승자를 가호했고, 죽어가는 이들은 악으로 매도당했다.
“나는 왕국을 상대로 정당하게 결투를 신청한 거다. 단지, 승리해버렸을 뿐이지.”
지금은 전설로 회자되는 이야기.
절창은 수도의 외곽에 두 다리를 딛고 서서, 저 멀리 있는 왕성을 향해 결투의 문장을 외쳤다.
도전자는 자신. 대상은 왕국 그 자체.
가장 빛나는 기사는 반역의 기사가 되었다.
기사의 황혼이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샛별.
역사를 바꾼 그는 조금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나는 했는데, 너는 나 하나를 상대로도 결투하지 못하나? 기사라는 작자가 그 정도 용기도 없어?”
“도발이냐!”
발츠로이 경의 예고도 없이 창이 번쩍였다. 장군의 기공이 바람을 움켜잡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공으로 뿌리친 채 창을 내질렀다. 오직 한 점을 돌파하기 위한 강맹한 찌르기. 여력조차 계산하지 않은.
장군은 손가락 사이에 낀 총알로 가볍게 그 창을 받아냈다. 창끝과 총알 끝이 정확하게 부딪히고는, 절묘하게 균형을 이뤄 멈추었다.
장군이 중얼거렸다.
“기초는 제법이긴 한데, 애매하네. 너, 요즘 수련 좀 게을리했지? 하긴 결투가 없으니 뭐 연습할 필요도 없겠지.”
“이 자식이!”
저지당한 발츠로이 경이 창을 쥐고 빙글 돌렸다. 회전으로 총알을 떨쳐낼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창은 움직이지 않았다. 발츠로이 경이 신음을 흘리며 팔을 비틀었다. 붙잡아 돌리기도 하고, 한순간 힘을 집중해서 밀어 넣기도 했다.
그러나 총알은 꿈쩍하지 않았다. 장군은 짧고 뭉툭한 끝으로 묘기처럼 그 힘을 받아내고 있었다.
기사에게 허락된 건 뒤로 물러나는 것뿐.
“조금 더 노력해라. 힘을 꽉 줘야지. 양손으로 붙잡고.”
장군은 장난치듯 총알을 움직여 발츠로이 경의 창을 따라갔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아주 잠깐, 장군의 몸이 열렸다. 발츠로이 경의 표정이 희열로 물들었다.
“방심했구나, 절창!”
달칵. 발츠로이 경이 창끝에 걸린 무언가를 잡아당겼다. 직후 매캐한 연기와 함께 창 전체가 빨갛게 물들었다. 창대가 주변의 공기를 한껏 빨아들였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장군이 중얼거렸다.
“어라? 방심했나?”
발츠로이의 무기는 창이되 창이 아니었다. 속이 빈 창대에, 단 한 발을 쏠 수 있도록 무언가를 내장한 일회용 포신이기도 했다.
그걸 눈치챘을 땐, 이미 폭발이 일어난 직후였다.
“와.”
라는 말과 함께, 굉음이 터졌다. 창대는 빨아들인 공기를 터뜨리며 안쪽에서 포탄을 쏘아냈다.
명중률도 형편없고 내구성도 끔찍하지만 단 한 번. 단 한 번만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일격을 가한다. 창끝이 붉게 달아오르며 맹렬한 화염을 토해냈다.
일신의 무력을 갖춘 기사가 숨겨두었던 비장의 한 수.
“뭐야. 너도 총 쓰냐?”
그마저도. 경지에 이른 강함 앞에서 무력해진다.
장군의 손에는 창이 없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손가락에 쥔 조그만 총알마저도 창처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절기가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손가락만 한 총알이지만, 장군은 그것을 창처럼 휘둘러 던졌다. 세상에서 제일 짧은 창이 포신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쏘아진 총알은, 폭발의 정중앙을 관통했다.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를 몰고서.
총과 대포라고 해봐야, 강철로 된 포신으로 사방을 꽉 막고 폭발의 힘을 한쪽으로만 밀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기공이 강철보다 강하다면, 총과 대포 따위는 아주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다.
장군의 기공은 포신보다 강했다. 총탄이 몰고 온 폭풍에 가로막혀, 창대 속 폭발은 오합지졸처럼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힘을 버티다 못한 창대가 안쪽에서 폭발했다. 비장의 수마저 무위로 돌아간 발츠로이 경은 얼빠진 얼굴로 중간 부분이 꺾인 창대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도 결국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했나. 창을 버리고 총을 쓰다니… 하지만 내 창이 이겼으니 결국 창이 총보다 나은 게 아닐까?”
방금 자기가 쏘아낸 게 창이 아니라 총알이라는 의식은 없었다. 주춤주춤 물러난 발츠로이 경은 컨테이너를 등지고 섰다.
‘…격이 다르다. 이길 수 없어. 도망가지도 못하겠지. 빌어먹을.’
격차를 실감한 발츠로이 경은 악에 받쳐 파트락시온 장군을 노려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패배자의 부끄러움이나 분노가 아닌, 오직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외쳤다.
“제기랄. 어째서, 왕국이었다면 왕과 다름없이 살 수 있었던 네놈이. 아니, 가히 신처럼 군림할 수 있었을 터인데! 왜! 왜 네가 왕국을 저버린 거냐!”
기득권에서 쫓겨난 이의 절규에, 정작 파트락시온 장군은 태연하게 귀를 후볐다.
“신 노릇 하고 싶으면 우물 안에 들어가서 개구리들의 신이나 되면 되지. 뭘 아득바득 기어 나오고 그러냐. 싸울 거면 강한 상대랑. 그게 결투의 참맛 아니겠냐?”
너는 고작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고, 그런 속뜻을 담은 말.
모욕을 당한 발츠로이 경은 이를 악물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전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컨테이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 그들이 컨테이너 안에서 발츠로이 경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들을 부른 발츠로이 경은 불길하게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흩어져. 도망쳐라! 인질을 잡든, 튀든! 알아서 살아남아!”
그 순간, 쥐굴 속에서 튀어나오는 쥐 떼처럼 레지스탕스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쳐나왔다. 장군이 잠깐 그쪽으로 시선을 향한 사이 발츠로이 경도 땅을 박찼다.
‘인질! 인질을 잡아야!’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린 발츠로이 경의 눈에, 아들을 꼭 껴안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창을 휘두르며 즉시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파트락시온 장군의 제자, 간드 대령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투박한 디자인의 제식 창이 발츠로이 경의 창을 가볍게 걷어냈다.
또 한번 저지당한 발츠로이 경이 대령의 창을 보고는 눈을 부라렸다.
“너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창을 써!”
절창이라면 몰라도, 고작 그 부하 따위에게 질 수는 없다.
반쯤은 오기로, 반쯤은 냉철한 계산으로 발츠로이 경은 부러진 창대를 길게 뻗었다. 짧아진 창이 바람을 가르며 간드 대령의 급소를 연달아 노렸다.
그러나 간드 대령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흘리며 발츠로이 경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기사라는 게 멸종된 뒤, 기사와 창을 겨루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챙.
제식 창을 길게 휘둘러 발츠로이 경을 떨쳐낸 간드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정작 한 번 붙어보니, 실망스럽군요. 이게 다입니까?”
“기사의 앞에서 창을 논하다니! 그 오만함의 대가는 죽음으로 갚아라…!”
격분한 발츠로이 경이 전신의 기공을 끌어올렸다. 온몸을 한 자루의 창처럼 만들고는, 몸을 낮추고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찔렀다. 기공을 머금은 창끝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의 전력을 다한 필살기, 도깨비 창. 도깨비불이 번쩍일 때마다 목숨을 하나씩 앗아간다는, 낯부끄러운 이명을 지녔던 기술.
순식간에 턱밑까지 짓쳐들어오는 창을 보며 간드는 마주 뻗었다. 창대가 교차하고, 창날이 방어를 도외시한 채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키긱. 창대가 서로 긁히고. 핏방울이 창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승패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결정되었다.
간드 대령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야말로. 제 스승이 누구인데 감히 창으로 도전합니까?”
“컥…!”
목소리는 목에서 나온다. 따라서 목에 창날이 꽂혀있다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발츠로이 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피거품을 물다가, 그대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간드는 창을 회수해서 빙글 돌렸다.
간드를 향해 파트락시온 장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너 실력 좀 늘었다? 이제 별 달아도 되겠는데?”
“별이 달라고 하면 달리는 그런 겁니까? 전공이 쌓여야 달죠.”
“경력도 좀 쌓은 녀석이 전공은 무슨. 전공 쌓고 싶으면 좀 혼자 다녀라. 맨날 나랑 같이 다니니까 네 전공 깎아먹히는 거잖아.”
“아직 스승님께 절기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혼자 다니겠습니까?”
“너 나한테 뭐 맡겨놨냐? 네 절기를 왜 나한테서 찾아.”
간드 대령은 다른 레지스탕스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던 레지스탕스들은 이미 다 시체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은 건 나와 대위, 그리고 늙은 공병뿐이었다. 아, 덧붙여 인질이 될 뻔한 어머니와 아들도.
대장은 살육의 현장 속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소리 높여 말했다.
“자아. 놀랐지? 사실, 나는 휴가 중인 파트락시온 대장이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어디 가느라 신분 좀 숨겼어. 불만 있는 사람?”
당연히 아무도 나설 턱이 없다. 나와 대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나마 우리가 좀 온건한 태도였지, 늙은 공병은 군국의 전설과 마주했다는 생각에 숨도 못 쉴 정도로 감격스러워했다.
장군은 내 쪽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어이, 아우님. 다시 한번 묻지. 창이 낫나, 총이 낫나?”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단언컨대, 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