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54)
EP.154 먼 곳의 이야기. 검과 창 – 마무리
“좋아. 좋아. 아주 좋아.”
파트락시온이 반으로 부러진 창을 쥐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땅을 몇 바퀴 굴렀는지, 그의 온몸에는 흙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만이 가득했다. 즐거워서 주체 못하는 순수한 미소.
“이런 느낌, 오랜만이야. 무기의 힘에 비해 센스가 딸리기는 하지만 그건 차차 익혀가면 될 일. 아주… 아주 마음에 들어. 센스야 익히면 되지만, 그런 힘은 쉽게 얻을 수 없으니.”
반으로 부러진 창대. 그것을 내려다보던 파트락시온은 둘을 합쳤다. 부러진 틈으로 그의 기운이 새어들며 더욱 단단히 동여맸다.
기공이 강철보다 강한 이들은 지푸라기도 무기로 만들 수 있다. 유물도 아닌 무기가 부러져도 절창의 전력에는 아무런 손실이 없다.
아니, 오히려.
“너도 기술을 썼으니, 그 답례로 나도 절초를 보여주마.”
파트락시온이 창대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가운데 끊어진 부분을 마디로 삼아 창이 풍차처럼 돌았다. 그건 창이라기보다 거대한 쇠도리깨 같았다.
끊어진 창, 그로 인해 생긴 마디. 그것을 축으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창.
반으로 끊어진 그 창은, 어느 때보다 위험해보였다.
“창은 곧고 딱딱하다. 간결한 선을 그려 적의 목숨을 빼앗지. 하지만, 사람은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 힘이란 부드러움에서 나오거든.”
과거, 파트락시온은 100번의 결투를 거치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는 피 묻은 창을 들고는 왕성까지 걸어갔다. 성문 앞에서 왕국 최후의 보루인 수호기사가 태산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대 최강이라는 수호기사는 누구보다도 강했다. 창을 휘두르면 한 번에 태산이 쪼개지고 땅이 휩쓸렸다. 그 폭풍에 휘말린 파트락시온도 몇 번 땅을 뒹굴었다. 들고 있던 창이 반으로 쪼개지고, 갑옷은 형편없이 부서지며, 금방이라도 거대한 할버드가 목숨을 앗아갈 듯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파트락시온은 부러져 덜렁거리는 창을 휘둘렀다. 그러다 문득, 그 창의 끝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직선이 짧다. 하지만 언제나 빠른 건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서 있으니까. 가장 빠른 궤적은 원에 가까운 곡선을 그리지.”
그때 잠깐이지만, 파트락시온은 이치에 닿았다. 움켜잡지는 못하고 그에 손끝만 닿았을 뿐이나.
수호기사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받아봐라.”
“…치잇!”
셰이가 지잔을 뽑아 들어 대지술로 땅을 뒤집었다.
바위로 된 가시가 우후죽순으로 솟아났다. 대지가 거대한 장벽이 되어 파트락시온을 막았다. 누군가 흙장난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팔방 깨져나간 땅의 위쪽으로 길게 늘어진 천앵이 떨어졌다.
그러나 파트락시온은 기이한 걸음을 밟으며 그 모든 것을 회피했다.
땅에 흐르는 파도를 부드럽게 타 넘기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참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기감으로 공격을 포착하고.
땅을 자연스럽게 밀고 당기며.
전신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경지에 이른 자가.
칼날 위에 선 듯 아슬아슬하게 펼쳐내는 묘기.
그렇게 모든 방해를 뛰어넘고 창이 닿는 범위까지 다가왔을 때, 절창은 가운데가 끊어진 창을 양손으로 쥐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처럼, 창끝이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땅이 파도치고 하늘이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파트락시온은 그의 인생이 달린 절초를 쏘아냈다.
절기, 절창(絶槍).
반으로 끊어진 창이 궤적을 그렸다.
그건 지극히 직선에 가까운 곡선이었다.
다리, 허리, 어깨, 팔, 손부터, 반으로 갈라진 창대의 마디까지. 관절 하나하나에 어마어마한 경력이 실려, 그 모든 곳에서 힘을 쏘아낸다.
이것이 절창이 깨우친 이치.
직선을 그리나, 그것은 그의 창과 육신에 존재하는 수많은 곡선들의 합.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이치에 닿은 궤적은 지잔을 타 넘고 셰이의 얼굴을 노렸다. 그가 그린 직선은 창이라는 도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몇 없을 정답.
절창이 절창으로 불리게 된 비기.
이것을 흘려낼 방법은.
“천앵!”
공간 자체를 뒤트는 것뿐.
천앵의 힘을 한껏 풀었다. 신비가 그 틈으로 엿보이며 공간이 부푼다.
막혀본 적도, 빗나간 적도 없는 절창의 절초는 아슬아슬하게 셰이의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끊어진 까만 머리카락이 어둠 속으로 흩날렸다.
“흠. 피부에 생채기는 내려고 했는데.”
파트락시온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애초에 볼을 살짝 비껴가도록 궤적을 정했으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빗나갔다.
그 중심에는 셰이가 든 보이지 않는 검이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예민하구만. 무기도 좋고, 기량도 좋아. 특히 방어하는 쪽에 있어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를 벌렸다. 셰이는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봐주다니.”
“대결에서 으레 하는 손대중이지.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서로 가진 기술을 하나씩 교환한 셈이었다.
그래도 셰이는 이 결과가 불만족스러웠다. 이기는 게 불가능하진 않지만, 싸움 자체는 압도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약해 보이는 이유를 알겠다. 네가 익힌 기공은 지극히 수비적이군.”
그건, 조금 전까지 무기를 맞대고 싸운 파트락시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반쯤 부러진 창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대응책이 완벽해. 내 모든 공격에 따라왔다. 심지어, 오늘 처음 본 절초마저도 나름 반응해냈지. 훌륭하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수비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나도 알아!”
“기공을 뜯어고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 너는 거기서 나름의 수단을 강구해야 할 텐데.”
천반경은 궁극의 방어기공.
그 말뜻은, 공격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뜻.
회귀의 경험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몸에 새긴 덕분에, 회차를 지나갈수록 셰이의 생존력과 대응력이 올라갔다. 덕분에 셰이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도, 셰이는 수준이 비슷한 적을 압도하지 못했다.
“혼자서는 무리인 것 같군. 무저갱 안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야.”
셰이의 기량은, 대부분 천반경으로 인한 것. 그녀가 죽어가면서 지켜보았던 공격을, 다음 회차 몸에 새기며 하나하나 극복해나갔다.
그렇지만, 점점 숙련되는 천반경에 비해.
여전히 그녀의 공격은 단순한 힘에 의존하고 있었다.
“장성이 되어라. 제자, 아니지. 대등한 입장에서 견식을 시켜주마. 경험도 쌓을 수 있고, 다른 강자를 소개해 줄 수도 있다. 도움이 될 터.”
절창의 제안에도 셰이는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면, 이전 회차에 이미 겪었으므로.
셰이가 무저갱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군국을 돌아다니던 때. 한번 절창의 가르침을 받아보았기 때문에.
그때 셰이는 남장을 하지 않았다. 절창이 자기 딸을 극진히 아끼며, 그 또래 아이들에게 너그럽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절창은 그때의 셰이에게 과하게 너그러웠다. 셰이가 탄탈로스에 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고, 덕분에 시간이 많이 끌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셰이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보았으나.
방어적인 측면은 몰라도, 셰이의 공격적인 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거절할게.”
이미 실패해본 터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파트락시온이 혀를 찼다.
“그러냐. 아쉽구나.”
“나는 별로 안 아쉬워.”
“뭐? 야. 이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며칠 전만 해도 내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어.”
둘이 잠깐 소강 상태에 이르러, 무기를 고쳐쥐던 때였다.
“거기까지 하거라.”
어둠 속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기에 먹을 흩뿌린 듯한 새까만 어둠이 흩어지더니, 그곳에서 은발의 흡혈귀가 당당하게 걸어 다가왔다.
그리고 티르칸쟈카의 손에는 웬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파트락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엥. 야, 간드. 거기서 뭐하냐?”
주변을 지키고 있던 파트락시온의 제자이자 부관, 간드 대령은 티르칸쟈카에게 멱살이 잡힌 채였다. 그는 가녀린 팔을 떨쳐내지 못하고는 발버둥치며 외쳤다.
“…면목, 없습니다! 다만, 스승님, 물러나십시오! 시조는…! 우리가 이기지 못합니다!”
“뭐?”
파트락시온이 흡혈귀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깨달았다.
티르칸쟈카의 오른팔은, 손바닥부터 팔꿈치까지 창이 관통한 상태였다. 분명 간드의 작품이리라.
다만, 티르칸쟈카에게 관통상이란 바늘에 찔린 것만큼이나 사소한 상처였다. 티르칸쟈카는 팔을 꿰인 채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 간드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기량이 제법이로구나. 내 몸을 이토록 상하게 한 존재는 많지 않다.”
파트락시온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찔려도 피도 안 나?”
“제, 길…! 피하십시오! 상성이…!”
절창이라고 한들, 본질은 무엇이든지 꿰뚫는 궤적을 그리는 것.
그러나 흡혈귀의 시조는 꿰뚫어보았자 죽지 않는다. 즉.
“너희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터이지.”
티르칸쟈카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괜히 기사 살해자라고 불린 게 아니다. 티르칸쟈카는 죽지 않기에, 소모되지 않기에 칼과 창을 쓰는 기사들의 천적.
티르칸쟈카가 창을 빼냈다. 그 과정에서 티르칸쟈카를 이루는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진흙인형에다 찌른 막대기를 빼내도 이보다 비극적인 광경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파트락시온이 중얼거렸다.
“와. 잠깐만. 저 정도였어? 괜히 ‘적극적인 교전 회피’를 하라는 게 아니었군.”
“나 역시, 네가 그리하였으면 한다. 만일 계속 저항하겠다면, 손안의 이 녀석을 내 그림자로 만들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오케이!”
파트락시온이 부러진 창을 냅다 던졌다. 그와 동시에, 티르칸쟈카도 간드 대령을 놓았다. 간드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파트락시온은 간드 대령이 돌아오자마자 그 머리를 장난스레 후려쳤다.
“야, 너는 쓸데없이 까불고 그러냐.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면 적당히 넘겨야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새끼, 자신감 떨어진 거 봐. 이제 알겠냐? 세상에 얼마나 이상한 게 많은지?”
그동안 셰이를 향해 다가간 티르칸쟈카는 조금 식은 눈으로 그녀를 타박했다.
“적당히 즐기거라. 우리에겐 휴를 찾겠다는 목적이 있지 않느냐. 네가 만일 여기서 자칫하다 죽어버리면, 내가 무엇이 되겠느냐?”
“…알았어. 미안해.”
“음? 웬일로 고분고분하구나. 되었다. 사내들이 이런 식으로 교분을 다지는 거야 여럿 보았으니.”
“…사내….”
“단,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으면 나를 불러야 할 것이다. 좋은 구경을 놓치지 않았느냐….”
그렇게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세기의 결투가 끝났으나, 관객은 없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을 망각 저편으로 보내며 팔카리스의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