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61)
EP.161 군국의 저녁
흐름을 따라 걷자, 얼마 안 있어 15구역 변두리에 있는 커다란 공장이 나타났다. 도시마다 두어 개씩 존재하는 의복 패킷 공장이었다.
커다란 공장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집어삼켰다. 이미 거스를 수 없다. 사람들의 흐름 속에 있던 우리도 빨려들어가듯 공장 안으로 향했다.
연금원단을 의복패킷으로 가공하는 의류 공장.
지극히 노동집약적인 시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연금원단을 가공해야 했으며, 한 단계에서 잠깐이라도 밀리면 이후 단계에 차질이 생겼기에 일손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즉, 당일치기 노역이라도 반기는 장소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만 노역하고 싶다는 말인가?”
노역자를 감독하는 작업 감독관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와 대위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생글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참나. 태평하게 여자를 옆에 끼고 와서는 하는 말이….”
불만스러운 동시에 어떻게든 일당을 후려칠 생각으로 툴툴거리던 감독관은 그나마 차려 입은 대위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감독관이 아닌 척 대위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당일치기 노역을 하면서도 정상적인 보수를 바라지는 않겠지. 일당은 통상의 7할이다. 야, 너는 7번 레일로 가서 지시를 따라. 그리고 여자, 너는 모델이나 하면 딱이겠군. 의복 패킷 견본을 입어보게 시착실로 가라.”
딱히 누구를 써도 상관없을 터인데. 아니, 오히려 사람보단 아키 아바타를 쓰는 편이 더 나은데. 구태여 대위를 지목하는 그에게선 사사로운 욕망이 느껴졌다.
자, 어떻게 대응할까.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대위가 한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부합니다.”
“거부? 거부라고 했나, 지금?”
“긍정. 본관은 저 남자를 관리, 혹 그에 준하는 감독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대위는 그게 응당 따라야 하는 진리인 것처럼 말했다.
대놓고 한 거절은 나름 이 구역의 권력자인 감독관의 심기를 언짢게 했다.
‘고작 당일치기 노역이나 하려고 찾아온 하층민이, 2레벨 시민 중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감독관 역할을 부여받은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어? 세상 무서운 게 없는 모양… 잠깐. 무서울 게 없어?’
그리고 이 사람을 감독관 자리에 앉힌 책임자는 이것으로 그의 능력을 증명했다.
‘이 빳빳한 태도. 독특한 화법. 혹시? 장교?’
위기를 감지한 감독관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았다.
공장이라곤 하나, 그 역시 군국에서 파견된 기술관이 책임을 맡는다. 도시 근교의 대규모 공장이라 파견되는 기술관의 직위가 상당히 높지만… 그래 봐야 기술관, 기껏해야 사관급.
사관급인 기술관에 비해, 전쟁에 직접 투입되는 군국의 영관급 장교는 말 그대로 전력이다.
하물며 그는 기술관에게 임명 받은 감독관. 권한을 위탁받은 마름에 불과한 존재.
기술관도 아닌, 고작 2레벨 시민 따위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신분인 것이다.
‘에이, 설마…라고 생각하지 마! 미친놈아, 이런 시기에 느닷없이 찾아와서 생뚱맞은 요구를 하는 게 평범한 사람일 리 없잖아!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여!’
정신을 번쩍 차린 감독관은 갑자기 한층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둘이 같이 배정해주겠소. 7번 레일로 가시오.”
군국도 사람 사는 곳이라, 주제를 모르고 주어진 권력을 헛되이 쓰는 어리석은 이들이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보통 가장 먼저 노역장에 끌려갔다.
“혹시 아키 아바타를 조작할 만한 마력을 갖고 있다면 그 업무에 배정하겠소. 마력을 지닌 노역자는 귀하니. 가능하겠소?”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마법을 쓸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할 것이오. 여기, 이 아키 아바타에 마력을 흘려보시오.”
감독관은 마네킹처럼 생긴 인간의 본(本), 아키 아바타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요구했다.
대위는 나름 대위이고, 제식마법은 물론 고유마법까지 쓸 수 있는 마법사다. 아키 아바타를 작동시키지 못 할 리 없었다.
대위가 손을 대자마자, 마네킹의 아키 아바타에 따라 푸른 선이 돋아났다. 그 중심선을 따라 마네킹을 뒤덮고 있던 연금원단이 올올이 풀어지며 오므라들었다.
곧 전신을 뒤덮었던 연금원단은 엮이고 압축되어 하나의 작은 패킷으로 변했다.
충분한 마력을 지닌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빠르고 신속한 변환.
감독관이 침을 삼켰다.
‘씨발. 이 마력은 어지간한 마법사 수준이잖아.’
감독관은 서류를 얼굴까지 들어 올리고는 무언가를 끄적이는 시늉을 했다. 지금이라도 대위에게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이 정도면 레일 하나를 맡겨도 되겠군. 둘이 함께 11번 레일로 가시오. 아바타를 맡겠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오.”
‘좆 될 뻔했다. 이 정도 마법을 쓰는 사람이 일반인일 리가 없지. 아니, 일반인이라도 이만한 재능이라면 나보다 높은 레벨이 될 수 있어. 모델이라고 명분을 깔아놔서 다행이지, 자칫했다간….’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감독관.
참 똑똑한 친구다. 내 친구 안톤이 그의 반만 닮았다면 좋았을 텐데.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를 향해 다가간 나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그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여주었다.
“운이 좋으시네요, 감독관님. 정답이에요.”
그는 정답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전혀 기뻐하지 못했다. 빨리 이들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뿐.
내가 방을 나서며 문을 닫자, 그 틈으로 감독관의 생각이 들려왔다.
‘…앞으로도 조심하자.’
노동은 단순하게 힘들었다.
평범한 컨베이어 벨트 양옆으로 수많은 사람이 섰다. 그들의 앞에 연금원단이 놓이면, 노역자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에 따라 원단을 자르거나 접어서 다음 사람에게 보냈다.
그렇게 사람을 거치며 차근차근 옷의 형태를 이룬 연금원단이 나와 대위 앞에 놓이면, 나는 그것을 아바타에 입힌 뒤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대위는 마력을 이용하여, 옷을 패킷으로 바꾸고는 상자 속에 담았다.
어느덧 의복 패킷 백 개째.
패킷이 가득 담긴 상자의 뚜껑을 닫은 나는 이마에 난 땀을 훔쳤다.
나는 누구지. 왜 여기 있지.
나는 분명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인형놀이는 옛날옛적에 졸업했다고.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인형에게 옷을 입혀야 하는데.
그러나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 돌았고 일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원단이 계속 우리 앞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몰래 대위를 불렀다.
“후우. 좀 힘들죠? 적당히 하고 튀는 게 어때요?”
“부정, 충분히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대위는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지쳤는데도 눈을 반짝이며 더욱 임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보람찹니다. 창문 없는 방에서 가만히 앉아 골렘에 접속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습니다. 본관이 임무를 완수하고 상자를 채울 때마다, 이 일이 의미가 차근차근 되새겨지는 듯합니다.’
아, 이 생각을 못 했네.
대위는 그 어떤 공장보다도 혹독한 노역을 홀로 견뎌온 통신병이었지.
심지어 내색한 적은 없지만, 싱크로 타입 골렘과 만 하루 정도 끊임없이 싱크로할 수 있을 마력량을 가지고 있다. 군국이 대우를 이상하게 해서 그렇지 나름 엘리트이기는 한 것이다.
‘백 개입니다! 본관이 백 개를 쌓은 것이, 콩 통조림 깡통 말고 무엇이 더 있었는지! 본관은 무언가를 백 개 만들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군국, 너희가 대위를 보호한 건지 이용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알겠다.
너희가 나빠.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지루한, 무언가 시계를 붙잡고 늘어지는 듯한 시간이 지나고.
“아바타 조, 업무 끝. 이제 퇴근하도록!”
감독관이 외치자, 아바타를 만지고 있던 노역자들이 의아해하며 감독관에게 물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르지 않습니까? 아직 조금 더 짜내면 가능한데….”
‘일찍 보내주겠다고 그러면 옳다꾸나 갈 것이지 뭘 따지고 그래! 여기 장교가 있다고, 장교가! 장교를 먼저 보내야 할 거 아니야!’
속내는 전혀 달랐음에도 감독관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마력이 희박한 날이다. 새로 들어온 녀석 덕분에 할당량도 채웠고, 마력을 다루는 너희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오늘은 조금 일찍 교대하도록.”
“언제 그런 걸 생각해주었다고.”
“시끄러워!”
“그야 그렇다고 쳐도, 지금 가면 일당은….”
“다 쳐주겠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한 시간의 소중한 여유를 얻은 노역자들이 썰물 빠져나가듯 나갔다.
감독관, 눈치도 좋아.
그의 추측과는 달리 우리는 그냥 놀러 온 거였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여전히 패킷으로 압축하기에 여념이 없는 대위를 불렀다. 대위가 아쉬운 듯 다 채우지 못한 상자를 힐끔거렸다.
“아쉽습니다. 오백 개를 채울 기회였는데. 본관 인생의 다시 없을 업적을….”
다시 말하지만, 군국 너희가 나빠.
중천에 뜬 해가 저 너머로 넘어가려는 시간. 여유를 얻은 우리는 일당을 받고 공장에서 나왔다.
당일치기 노역은 보통 후려치기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할 때, 감독관은 일당을 상당히 후하게 쳐주었다. 일반 노역자의 배는 되는 양이었지만 실제로 대위 덕분에 할당량을 넘겼으니 그리 과한 액수는 아니었다.
제힘으로 번 돈에 새삼 뿌듯함을 느낀 대위는, 품 안에 연금화를 안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걸었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걸을 때마다 금빛 머리카락과 치마가 가볍게 들썩거렸다.
“돈 처음 벌어봐요? 왜 이리 좋아해요.”
“봉급을 이리 받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이 돈의 무게로군요….”
“아, 그러네. 군인은 보훈처에서 월급을 일괄지급하죠?”
“긍정. 군에 복무하는 동안에는 따로 봉급을 쓸 일이 없기 때문에….”
연금술의 존재 때문에, 연금화가 아닌 그 어떤 화폐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금조차 흉내내는 연금술 앞에서 지폐나 어음 따위가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온 나라의 행정을 손에 쥐고 있는 군국 정도 되니까 보훈처에서 어음 혹은 연금의 형태로 봉급을 지급하는 거지, 옆 나라 열국은 온 나라의 연금술사를 싹 다 쳐 죽이고도 나라 경제가 파탄이 나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러고 보면 삐는 나름 대위였죠.”
“부정. 나름이 아니라 확실한 대위입니다.”
“돈을 안 쓰고 모아두었으면 남은 돈도 꽤 많겠네요.”
“긍정.”
“그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요? 이루고 싶은 건 없어요?”
땀흘려 번 돈이라 실감이 난 탓일까.
오늘 번 일당을 소중히 품에 안은 대위는 내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했다.
‘본관은 3레벨 시민입니다. 상속권은 있지만 받을 재산이 없고, 후대에 재산을 남길 수 없습니다. 애초에, 재산을 남길 대상도 없습니다. 본관이 죽으면 그 재산 전부 소각됩니다.’
오오. 드디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구나.
이제 보여주나?
삶은 저항이다. 사납고 위협적인 외부에 대해, 내 작고 연약한 소우주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자기가 무언가를 진정 잃어버릴 때, 살아있는 이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군 당국이 본관에게 지급한 돈, 소각되어 군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아쉬울 것 없습니다. 그 돈이 더 나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면, 사소한 행운에 기뻐하던 다른 이들에게 돌아간다면.’
그런데 통신병은 그런 건 모르는 듯했다.
진짜진짜 너희가 나빴다.
기회도 삼세 번이라는데, 이 정도 나쁘면 슬슬 멸망해도 되지 않을까?
‘그나마, 본관이 자란 시설에 적을 두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본관이 임무 중 사망하면 보상금이 지급되겠지요. 유산이랄 것도 없지만, 본관이 동생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터.’
군인은 결혼을 장려받는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 재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재산은 쌓인다. 그러다 죽으면? 그대로 소각된다.
그렇다고 보훈처에 가서 일괄지급을 요청한 뒤 어딘가에 꿍쳐둘 수도 없다. 걸리면 노역행이니까.
얻은 봉급을 바로바로 소비하기 위해서라도 가정은 필수적이다. 보훈처도 가족이 대신 봉급을 타는 일을 막지는 않으니.
그래서 군인 중에는 젊은 나이에 가정을 꾸린 이들이 많았다.
쉽게 가정을 만들었다가 죽어서 책임지지 못하게 되면?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다.
유산은 없겠지만, 사망보상금이 지급된다.
어지간한 유산보다도 많은 금액이.
죽음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군인은, 가정을 남기는 데 온힘을 쏟는다.
‘이렇게 되니 조금 아쉽습니다. 본관이 결혼이라도 하였다면, 조금 더 많은 것을 남기고 갈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최소한 긍정적인 변화는 끌어냈다.
남긴다는 것.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받아들인 이의, 최소한의 열망.
대위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에 피어난 절절한 욕망을 맛보며, 봉투 속 들어있는 푼돈을 소중히 끌어안고는 대답했다.
“…기밀, 입니다.”
더 묻지 않았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슬슬 저물어가는 거리를 걸어 돌아오는 길이였다.
시장 한구석이 소란스러웠다. 왁자지껄 다양한 목소리가 섞여야 할 시장 구석은, 오늘따라 혼란스러운 웅성거림만이 가득했다.
모인 사람들은 도움을 청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나를 발견하고는 곧장 소리쳤다.
“야! 휴즈! 큰일났어!”
생각을 읽은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 박자 빠르게 알아차렸으나, 지금에 한해서 독심술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나가 흠씬 두들겨 맞았어…!”
생각을 읽을 필요도 없이 금방 밝혀졌기 때문이다.
인파를 헤치고 다가간 우리가 발견한 건, 얼굴과 팔 곳곳에 멍이 든 채 쓰러진 안나였다.
억척스러움이 돋보이던 안나는 지금 중환자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안색을 바꾸며 뛰쳐나가는 대위를 그냥 보내고, 나는 기절한 듯 쓰러져 있는 안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와.
나 없는 사이에 정말 개판이 되었구나.
그나저나 밥은 누가 해주지.
저녁 기대하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