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64)
EP.164 디스 이즈 뒷골목
얼굴에 칼자국을 가진 불량한 인상의 사내였다.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에이비도 그를 본 순간 머릿속에 위법행위가 떠올랐으리라.
날이 바짝 선 장검을 어깨에 걸친 그는 에이비의 장교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장교?”
범죄자들은 장교와 눈도 마주치지도 못한다. 주어진 힘부터 권한까지, 장교와는 상대조차 되지 않기에.
그러나 눈앞의 사나운 인상의 사내는 장교를 보고도 전혀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도전적인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아이고, 장교 나리. 그 녀석은 우리 쪽 사람이라. 미안한데 좀 양보해주지 않겠어?”
에이비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크크. 알아. 우리는 그놈 목숨보다는 시체가 더 필요할 뿐이니까. 우리 동지였으니, 우리가 장례를 치러줄까 해서.”
곧이어 들리는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그들은 동지의 시체를 앞두고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보물상자라도 되는 듯 탐욕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뿐.
“골치 아프게 도망쳐서 뒈져버리기는… 빨리. 다 못 쓰기 전에 건네받고 싶은데. 슬슬 비켜주시지?”
이미 시체가 된 이상 에이비가 신경 쓸 이유는 없으나, 그렇다고 수상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필요도 역시 없다.
에이비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거절합니다.”
“켁. 어째서?”
“귀하에게 대답할 의무 없습니다.”
“아이고. 그래. 우리 장교님이 그러시단 말이지.”
비꼬는 듯한 말투. 거기에는 장교에 대한 경의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어깨에 걸친 장검을 위협적으로 뻗었다.
“참, 겁도 없어. 장교라고 해도. 고작 한 명인데 말이야…. 거기다 대위면 길가에 채일 정도로 흔하잖아.”
사내의 말에 곁에 선 부하가 조심스레 지적했다.
“저, 형님. 대위는 좀 높은데요. 바로 다음이 소령입니다.”
“끼어들지 마, 이 새끼야!”
버럭 소리 지른 사내는 곧 장검으로 에이비를 겨누었다. 칼을 겨누는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설사 그 상대가 군국의 장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대위면 또 어때? 칼이 안 들어? 아니면 총이 안 통해?”
부하는 이번에도 조심스레 지적했다.
“총은 안 통합니다. 대위급이면 가장 먼저 반탄기공 정도는 익혀서.”
“눈치 더럽게 없네! 야, 너 먼저 가!”
두 번이나 지적당한 사내가 화를 내며 칼을 곁에 있던 부하에게 겨누었다. 칼에 찔릴 뻔한 부하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네, 네?”
“총알은 안 통해도 칼날은 들 거 아니야! 가서 찔러! 그리고 저 새끼 배도 빨리 갈라! 그거 못 쓰게 되기 전에!!”
사내가 난폭하게 칼을 휘두르며 외쳤다. 가까이 있던 다른 부하들이 쫓기듯 에이비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백지장이 맞들면 나은지는 모르겠으나, 공포와 두려움은 확실히 맞들수록 나아진다. 같이 나서는 동료가 든든한지 괴한들의 발걸음에는 점차 힘이 들어갔다.
적의를 감지한 에이비가 낮은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경고했다.
“경고. 여러분들은 지금 군국의 군인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속히 중단하십시오. 이것은 명령입니다. 어기면….”
그러나 에이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괴한들은 코웃음을 치며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어쩔 건데? 혼자서 우리를 다 때려잡게?”
“어디, 잘난 장교님 피부는 칼도 안 들어가나 보자.”
에이비는 낭패한 상황에 놓였다. 설마 그들이 장교를 알아보고도 습격할 줄은.
일반 시민을 향한 살인사건도 꽤 무겁게 처리하는 군국이다. 장교가 범죄자들에게 습격당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조금의 유예도, 자비도 없이 곧장 헌병대를 파견할 것이다.
군국의 힘을 자국민에게 쏟아부을 권리를 지닌 부대가, 자국민을 향해 일부 차별적인 공격을 가한다. 아무리 무법자들이라도 그에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뒷일도 생각지 않고 장교를 위협하다니, 헌병대를 부를 작정이 아니고서야….
설마.
에이비가 중얼거렸다.
“…혹시, 그것이 본 목적?”
에이비의 혼잣말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괴한들은 날붙이 하나씩 단단히 쥔 채로 에이비를 향해 걸어왔다.
“크크. 장교의 피도 우리와 같은 색일지 궁금한걸….”
숫자는 일곱. 다들 날붙이로 무장하고 있다. 심지어 대장으로 보이는 마른 사내에게서는 수준이 그리 높진 않지만 기공의 흔적이 느껴졌다.
“경고, 곤란….”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선 골렘을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나, 그건 통신병의 신분을 노출하는 행위이다. 그 앞에는 자결만이 남는다.
근접전을 해야 할까?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에이비는 전문적으로 기공을 익힌 전투인력이 아니었다.
죽이고 죽느냐. 그냥 죽느냐.
골렘을 써서 이들을 쓰러뜨리고 자결하느냐, 혹은 이대로 그들의 손에 쓰러지느냐.
오랜 고민을 요하는 일이었으나 선택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가로등이 어렴풋이 거리를 비추는 가운데 칼날은 서늘하게 번뜩였다.
에이비의 몸에 구멍을 내고 붉은 생명을 쏟아내게 할 시퍼런 칼날….
결심을 마친 에이비가 주먹을 쥐었을 때였다.
“이 미친 새끼들이!!”
두다다다.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고 에이비를 습격하려던 괴한들을 덮쳤다. 기습을 당한 괴한들은 그대로 인파에 휩쓸렸다.
비명과 아비규환. 그리고 연달아 들리는 매타작.
날붙이를 든 이들도 숫자의 폭력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하나같이 기다란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더더욱.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마술사에, 장교까지. 아예 벌집이란 벌집은 다 들쑤시고 다니네! 벌에 쏘이고 싶으면 벌집 앞에서 알몸으로 탭댄스나 추라고! 이리저리 쑤시고 돌아다니지 말고!”
후덕한 중년이 가장 앞에서 괴한을 두들겨 패며 외쳤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하던 칼자국 사내는 장검을 높이 들고는 중년에게로 돌진했다.
“네놈들, 마켓이구나! 밀수업자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
칼자국 사내는 칼에 기공을 두른 채 그대로 내질렀다. 살을 찢고 뼈를 가르는, 기공을 두른 칼. 중년의 후덕한 몸도 기공을 두른 칼에 맞는다면 멀쩡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중년은 덩치에 맞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물러났다. 푸르게 빛나는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중년의 코앞을 지났다.
“흐익! 이 썩을 놈이 칼질까지 해!”
호들갑을 떤 중년이 꺼낸 건, 끄트머리가 갈라진 커다란 쇠지렛대. 중년은 쇠지렛대 갈라진 틈에 사내의 칼을 끼워 넣었다. 일련의 흐름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둘이 합을 맞춘 듯했다.
철컥, 지렛대 사이에 칼날이 걸렸다. 칼자국 사내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 상태로 중년이 손을 비틀자, 쇠지렛대 사이에 끼인 장검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지레의 원리에 의해 무기를 잃은 사내의 위로 중년의 쇠지렛대가 작렬했다.
“주제를 모르는 건 네놈이지! 여기 우리 영역이야 이 새끼야!”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가 칼자국 사내의 두개골에서 들렸다. 이제 그의 얼굴엔 칼자국 말고도 쇠지렛대 자국이 남게 되었다.
사내는 그에 대해 어떤 감상을 표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히 그가 기절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핑글 돌아가며, 마른 몸은 그대로 땅 위에 쓰러졌다.
“새애끼. 간 떨어지게 하고 있어….”
격하게 숨을 몰아쉰 중년은, 곧장 에이비 쪽을 향해 허둥지둥 다가왔다. 에이비가 미처 경계하기도 전 그는 허리를 숙이고 양손을 싹싹 빌며 저자세로 나왔다.
“아이고, 대위님. 이건 저희 구역 전체의 뜻이 아니라. 저놈들이 이상한 겁니다. 저놈들, 스스로 군국의 그림자라고 지칭하는 미친놈들인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이 아주 저희도 곤란해 죽겠습니다….”
에이비의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등장해서는 그들을 제압한 무리 역시도 수상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위협적인 날붙이를 들고 있던 괴한들과는 달리, 지금 나타난 이들이 든 것은 쇠지렛대나 부지깽이처럼 친숙한 물건이 대다수였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일상에 녹아들어도 별문제 없을 정도로.
도구가 온건한 분위기를 만든 탓일까. 에이비는 살짝 경계심을 풀고는 말했다.
“…의문. 여러분의 정체는 또 무엇입니까?”
“아차. 자기소개부터 했어야 했군요!”
호들갑을 떤 중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를 소개했다.
“네에, 네. 전 시장 상인들의 공용 물류창고 관리역을 맡은 크린이라고 합니다.”
시장에는 물품을 들여놓아야 하고, 그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창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곳은 잡범들의 천국. 언제 어느 순간 도둑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창고와 자물쇠 하나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장 상인들은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운송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했고, 거기에 배달부나 일꾼까지 엮여 점점 커지며 나름의 세력을 일구게 되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 상인 조합… 아니, 이조차도 아니지요. 상인들의 물건을 대신 지켜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일개 창고지기죠.”
크린이 저자세로 말했으나, 에이비는 그 이름에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크린. 점장. 마켓.
분명, 그가 소매치기 아이를 잡았을 때 언급했는데.
“…크린 점장? 귀하가 혹 마켓이라는 단체의 수뇌입니까?”
그러자 크린이 입에 거품을 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수뇌는 무슨! 그냥 얼굴마담입니다! 창고의 물건을 지키기 위해 연합한 일종의, 수평적인 관계죠! 잔잔한 물처럼 평평한!”
조금 전 보여준 몸놀림부터 쇠지렛대로 펼친 기공까지 생각하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분명했지만. 크린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대신 아무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여기 없는 인물을 원망했을 뿐이다.
“마술사 새끼, 장교한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인 거야…!”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에이비는 더 묻지 않았다. 기공을 익히거나 범상치 않은 몸놀림을 한 것이 죄는 아니었기에.
“수긍. 본관은 이 사태에 대해 물을 것이 있습니다. 본관에게 협조하여 주십시오.”
“물론입죠! 그게 모범시민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빳빳하게 선 크린이 에이비의 말을 기다렸다. 에이비는 잠깐 정보를 정리하고는, 가장 궁금한 내용부터 물었다.
“군국의 그림자, 는 무엇입니까?”
크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요새 군국에 갑자기 나타나서 날뛰는 범죄 조직입니다.”
“범죄 조직? 혹 레지스탕스입니까?”
“아아, 아닙니다. 레지스탕스는 최소한 시민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시늉은 보이죠. 그들은…. 그냥 무법자입니다.”
“군국의 법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무법자가 당당히 나다닐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에이비의 물음에 크린이 크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저희도 골머리를 썩이던 참입니다. 이놈들, 법이 무섭지 않은지, 요즘 들어서 사방팔방에서 날뛰고 있더라고요. 강도에, 약탈에, 방화에, 심지어 살인까지. 소규모로 몰려다니며 별의별 짓을 저지르니, 저희도 그저 곤란할 따름입니다.”
“당국이 별다른 대응을 취하지는 않았습니까?”
“요새 군국이 조금 바빴잖습니까. 3개월쯤 전에 이미 대규모 불심검문도 진행했고요. 아직 그게 덜 식어서 나서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이비가 문득 3개월 전을 떠올렸다.
3개월쯤 전, 탄탈로스에서 탈옥 사건이 있었다. 에이비는 그 사실을 관측하자마자 곧장 본국에 보고했고, 본국에서는 즉각 반응했다.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는 한편 대대적인 검문을 통하여 탈옥범들을 다시 잡아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탄탈로스 탈옥범들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운 없는 잡범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을 뿐.
“…근거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사태는 치안이 나빠지지도 않았는데 검문을 강행했던 폐해일 수도.
“그래도 뭐, 더 나빠지면 높으신 분들이 나서서 정리해주시겠지요! 하하하! 저같은 서민은 그저 나랏님들만 믿고 있지요!”
한껏 웃던 크린은, 곧 목소리를 낮추고는 은근히 말했다.
“그, 그러니까 말이죠. 나중에 위쪽에서 말할 때, 저희 쪽 사람들은 결백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저 멍청이들 때문에 같이 잡혀가면 억울해서 노역도 못합니다요.”
크린의 비굴한 태도만 보면 꼭 청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이비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으나, 그렇다 하기엔 내용면에서 문제 될 것이 없다.
에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이 건에 한하여, 기회가 생긴다면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점장의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에이비의 말에 그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네? 두 번째…?”
당황했는지 크린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내키지 않는 기색에도 에이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마술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군국의 그림자를 자칭하는 이들은, 고의적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중이다. 그들의 행동에는 일종의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즉, 이 이면에는 조금 더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뜻.
에이비는 통신병의 직감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들을 사냥한 마술사는 과연 누구인가?
“마술사요? 아하,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계속 눈치를 보던 크린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대꾸했다.
“하하. 그냥 뭐. 뒷골목에서 흔히 보이는 재주꾼을 통틀어 마술사라고 부르죠. 야바위를 하거나, 카드 게임을 할 때 패를 이상하게 섞거나, 인형극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손기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이들이 아직 남아있습니까?”
“아이고. 거의 없지요. 말이 마술사지 사실 사기꾼이나 타짜 비슷한 놈들인데, 나라가 멀쩡하거늘 그깟 놈들이 어떻게 나돌아다니겠습니까?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거의 다.”
손을 내저은 크린이 눈을 살짝 치켜뜨고는 물었다. 한순간, 그의 너구리 같던 눈이 노회하게 빛났다.
“그런데 마술사는 왜 찾으시는지….”
에이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방금 본관의 앞에서 쓰러진 자가 마술사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게 끝입니까?”
되돌아온 질문에 에이비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물었다.
“귀하. 경고합니다. 무언가 더 아는 바가 있다면 즉각 증언하십시오. 협조하지 않을 경우 귀하 역시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이비의 반문에 크린이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뭘 했다고.”
“귀하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까?”
다시 저자세로 돌아온 크린은, 누가 들을까 봐 무섭다는 듯 주위를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저도 마술사의 부름을 받고 왔거든요. 우리 구역에 그놈들이 나타났으니 잡으라고 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인 에이비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마술사는 개인을 칭하는 단어군요. 확인했습니다.”
“…하하.”
멋쩍은 듯 웃는 크린은 이 이상 말을 피하는 모양새였다. 에이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켓의 상인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건 정리하듯 쓰러진 이들을 구속하고, 떨어진 물건을 줍고, 난투의 흔적을 지우는 도중이었다. 어느새 거리는 깨끗해졌다.
“뒷정리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쇼.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경관에게 넘기십시오. 그들은 군법의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본관이 해당 구역의 경관에게 신고하겠습니다. 귀하가 사적으로 제재하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으니 주의하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에이비는 그들을 뒤로하고 걸어갔다.
그림자, 마술사, 그리고 군국.
그녀는 군국에 충성하는 군인이었으며, 동시에 곧 죽어야 하는 통신병이었다.
에이비에게 남은 잠깐의 유예 동안, ‘그림자’라는 이를 처단하고 마술사의 정체를 파헤치는 게 군국에게 선사할 마지막 충성일 것이다.
덧붙여, 더 안전한 군국을 만드는 것이 안나나 휴즈를 위한 선물이 되리라.
내일부터 바빠질 것이었다. 에이비는 뚜벅뚜벅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어둠 너머로 그녀가 사라지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크린이 혀를 차며 허리를 폈다.
“…나는 할 일 다 했다, 마술사. 시부럴 놈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별 같잖은 일을 시키고.”
몇 시간 전, 크린은 마켓 한복판에 솟아나듯 나타난 ‘그’와 마주쳤다.
마켓의 근거지가 거대한 물류창고 한가운데 마련한 비밀스러운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오직 크린의 측근만이 여는 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크린도 그를 그나마 반갑게 대했을 것이다.
달리 말해, 크린은 그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마켓에서 은밀히 숨기고 있던 밀수품 내역을 찬찬히 읽던 마술사. 그는 크린이 돌아오자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맞이했다.
그 순간, 크린은 자기가 협박당할 것이며 마술사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의 직감은 놀라울 만큼 잘 들어맞았다.
-이 구역에 쓰레기들이 있어. 내가 적당히 양념을 쳐놨으니까 가서 좀 치우지 그래?
크린은 즉각 전력을 이끌고 출발했다.
마술사를 덮쳐? 크린은 그런 도박을 하는 사내가 아니다. 마술사의 진정한 힘은 아무도 모를뿐더러, 애초에 도박으로 마술사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미친놈은 미친놈이랑 싸우게 둬야지. 내가 거기 끼어들 필요는 없어.”
군국의 그림자는 목적을 알 수 없는 희한한 단체다. 약간 자기파멸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필연적으로 마술사와 갈등을 빚을 것이다. 둘이 부딪힐 때마다 뒷골목에 피가 흐르겠지.
누가 이길지는 확실치 않으나, 크린은 뒷골목에서 벌어졌던 갈등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파산권사나 참철검, 파이어로우.
마술사와 갈등을 빚었던 그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
마술사가 죽인 건 아니었지만, 살아남은 건 언제나 마술사.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에이, 몰라. 알아서 하라지. 나는 내 일만 하면 돼.”
머리가 복잡해진 크린이 투덜거리는 동안, 그의 직원 한 명이 거품을 물고 죽은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점장! 황금똥을 싸는 시체는 어떻게 할까?”
마술사의 말에 따르면, 저 뱃속에는 뿌리는 금가루라는 별명을 가진 진귀한 향신료가 있다. 그것을 팔면 톡톡히 재미를 보리라.
그러나 크린은 냅다 손을 저었다.
“그냥 묻어줘라. 그딴 거 건드리면 재수 옴 붙는다.”
“아까운데.”
“시끄러.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설사 진짜라고 하더라도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물건을 어떻게 팔아?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해라.”
“알았어.”
혀를 찬 직원이 보자기 속에 시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쳇. 팔자도 좋다. 저승가서 노잣돈이 부족하진 않겠구나.”
“그 자식 묻고 비석에 사상 최고가의 사인(死因)을 지닌 사나이라고 써놔라. 역사에 이름이 남을지도 모른다.”
툭 내뱉은 크린은 마력초로 만든 담배 하나를 꺼냈다. 희미한 가로등만이 비추는 거리에서 빨간 불꽃이 돋보였다.
후우. 깊은 한숨과 더불어 마력초 연기가 피어올랐다. 번지는 가로등 아래로 솟구치는 희뿌연 연기는 꼭 열화된 태양과 구름처럼 보였다.
소심한 크린이 밀수에 손대게 만든 원인인 마력초는, 오늘도 그의 지친 마음을 달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크린이 사소한 행복을 만끽하는데 다른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또 피십니까? 건강 나빠집니다.”
“균형을 맞추는 거다, 새끼야. 정신에 비해 몸이 너무 건강하거든.”
다시 마력초를 흠뻑 빨아들인 크린은, 몽롱한 눈으로 한결 깔끔해진 거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분간 숙여야 해. 난리가 날 거다.”
그림자, 마술사, 그리고 장교까지.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중이다.
지금껏 몇 번이고 고난을 헤쳐온 크린이지만, 이 일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크린의 한숨만큼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