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66)
EP.166 노장은 죽지 않는다
옛 장성이 저자세로 나왔음에도, 에이비는 그를 장성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처럼 황송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자기 할 말만 했을 뿐이다.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무리한 요구는 거부될 수 있으며, 또한 귀하가 그러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 역시 보고될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조금 전이라면 버릇없다며 윽박질렀을 프론타인도 이번에는 뭐라 탓하지 않았다.
“어떤 나라든 범죄가 없을 수는 없다. 군국만큼 치안 좋은 나라는 또 없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지. 폭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
목이 탄 프론타인이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곤 화두를 꺼냈다.
“알다시피, 군국은 성인이 되면 생체 단말을 부여받으며 동시에 시민 레벨을 발급받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평생 그 레벨에서 살거나, 잠깐의 실수 혹은 오해로 인해 레벨이 떨어지지. 사실상 레벨 상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는 셈이지.”
에이비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경고. 귀하의 발언은 과하게 부정적입니다. 군국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부지런히 살아간다면 사망 전까지 충분히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콩 통조림과 수돗물만 먹고 살 수는 없네, 대위.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끔 꿈과 희망이 필요해.”
“꿈과 희망은 결핍된다고 죽지 않습니다.”
“아니, 가끔 죽기도 한다네. 자네도 아이를 키워보면 알 거야.”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에이비는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노장의 비겁한 논리에 살짝 발끈하기도 했다.
그동안 프론타인은 손에 쥔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해. 나라도 그렇고, 시민 레벨도 그렇고. 너무 딱딱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하나도 없어. 최소한, 천신과 성황청을 배척하면 안됐어.”
“정정. 군국은 천신과 성황청을 배척한 적 없습니다.”
“종교에 2레벨의 사치세를 매겼을 뿐이지. 그게 배척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마음의 지지대도 돈 주고 사야 한다면, 당장 입가에 풀칠하기도 힘든 사람들이 신앙을 살 수 있겠나?”
에이비가 담담하게 지적했다.
“그것은 선택입니다. 만일 신앙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여유자금을 소비하여 소유하면 됩니다.”
“…허, 말은 되지. 하지만 세상은 다 말처럼 되지 않아! 자네가 세상을 얼마나 살았다고 그렇게 말하나!”
혹 귀하가 천신의 신도라서 그러는 것 아니냐고, 에이비는 그가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려고 했다.
그러기도 전에 프론타인이 냅다 외쳤다.
“더 잃을 것 없는 젊은이들은 난폭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에겐 꿈도 희망도 없어. 심지어 죽은 다음에 그들에게 안녕과 평화를 약속해주는 신앙조차 굴복해서 세금이 붙었지! 세금을 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천국이 어디 있겠나! 그들에겐 마음의 지지대가 하나도 없는 셈이야!”
프론타인이 허공에서 주먹을 콱 쥐었다. 늙은 몸으로 끌어낸 기공이 볼품없이 그의 주먹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군국의 그림자가 모은 희생양들이 그들이다. 꿈도 희망도 잃고 자기 인생을 도박에 몰아넣은 이들. 그림자가 그들을 희생양으로 쓴 거야. 그러니 나는….”
그 짧은 사이 한참 늙은 프론타인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에이비에게 부탁했다.
“그들에게… 약간의 자비라도 있었으면, 한다. 아이들은 잠시 방황했을 뿐이니.”
보호소.
몇 개 구역의 고아원을 관리하며 배급소의 운영을 위탁받은 그곳은, 자식 없는 전역군인들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둥지이자, 전사한 이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사설 보훈처.
그러나 외동아이조차 부모의 바람대로 자라지 않는데, 고아원의 고아들은 어떨까.
자식의 비행을 온전히 부모의 탓으로 돌리지는 못할 것이나, 부모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따라서 그곳의 수장인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고는 프론타인은 일개 대위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했으나.
그건 에이비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가합니다.”
“…그래. 그러겠지.”
이미 죄를 저지른 순간부터는 어떠한 자비도 없다. 군국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만, 본관은 최소한 공평한 판결을 받게끔 할 수 있습니다.”
통신병이 제공한 정보에는 그만한 공신력이 따르기에.
에이비가 이 모든 사건을 명확하게 관찰하여 전달한다면, 군국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고맙네.”
관등성명도 소속도 대지 않은, 일개 대위의 장담에도 프론타인은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이대로 헤어져도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포장할 수 있을 법한 분위기.
그 분위기를 헤치고 에이비는 한가지 더 물었다.
“한 가지, 의문이 남았습니다.”
“나이도 많고 한때 계급도 더 높았던 내가 고개까지 숙였는데, 더 짜낼 것이 있다? 참, 자네는 군국 같은 군인이로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프론타인도 무언가 바뀌리라고 기대하고 투덜거린 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에이비의 질문을 기다렸다.
“마술사에 대해 아십니까?”
그러자 퇴역군인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마술사? 그 유쾌범죄자?”
유쾌, 범죄자?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에이비는 의아해했다.
“유쾌범? 범죄자가 어떻게 유쾌하다는 말입니까?”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다네, 대위. 경험이 부족한 자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부정. 불가능한 일입니다. 범죄는 기피되고 배척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유쾌한 범죄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글쎄? 마술사의 행적을 들어보게나. 그래도 부정할 수 있을까?”
프론타인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처럼 미소 지으며 운을 떼었다.
“천의무봉은 알고 있겠지?”
군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주회사의 이름에 에이비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키 아바타와 군장을 생산하는, 군국에서 다섯 개밖에 없는 지주회사 중 하나 아닙니까.”
나라의 모든 것은 군국의 소유이나, 군국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물품이 몇 개 존재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키 아바타와 연금원단.
연금원단은 그에 감응하는 인간의 본, 아키 아바타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보통 의복 패킷과 한 쌍으로 엮이는 아키 아바타는 아주 특수한 마법과 뛰어난 기술,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군국이 몇 번이고 양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고난이도의 마도구.
현재 군국에서 아키 아바타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지주회사 천의무봉이었다.
옛 왕국의 어떤 포목점을 전신으로 둔 천의무봉은 아키 아바타와 의복 패킷을 발명한, 그야말로 군국의 기술적인 지주.
“그들이 마술사 하나 때문에 망할 뻔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은 에이비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간단하네. 그놈들, 가죽으로 가방이나 장신구, 지갑과 벨트를 만들어서는 팔려고 했거든! 그런데 웬 미친놈이 이 구역 저 구역 할 거 없이 소매치기하고 다니지 않던가!”
한때 별을 달았던 위대한 군인이자, 산전수전 다 겪으며 얼굴에 상처와 주름이 가득한 노인을 저토록 어린아이처럼 웃게 만드는 존재는 누굴까.
마술사는, 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술 비슷한 일을 해냈다.
“그때의 천의무봉은 확실히 망나니 같았지. 자기네 물건 만든다고 노역자까지 끌어다 쓰고, 작은 손을 가진 아이들이 더 잘 만든다며 고아원까지 동원해서는…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장신구들이 소매치기 한 명한테 싹 갈려 나간 덕분에, 그놈들은 아주 쫄딱 망해버렸지!”
“정정. 천의무봉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직녀가 사장으로 취임해서 다시 일으켜 세운 거지, 아니었으면 되었겠나!”
한참 낄낄거리던 프론타인은 곧 멍하니 과거를 반추하며 추억 속에 잠겼다.
“그때 내가 담당하는 고아원에서는, 장래희망 마술사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가 소매치기였지. 서로 훔치기 놀이를 하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는지…. 내가 부끄러워서 잘 말하고 다니진 않는데, 몇몇은 진짜 소매치기가 되었을 거야.”
“기이하군요. 군 당국에서 그를 잡으려는 시도는 없었습니까?”
노인의 추억은 그의 세월만큼이나 깊어서, 그는 추억에서 빠져 나오는데 한참은 걸렸다. 에이비가 두어 번 재촉하고 나서야 프론타인이 대답했다.
“경관 몇이 수사를 나섰지만 다 헛물만 켰을 뿐이네.”
“헌병은 뭐라 했습니까?”
그러자 프론타인은 무슨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킬킬거렸다.
“뭐? 소매치기의 제왕을 잡으려고 헌병을 쓰겠다고? 알잖나. 군국은 어지간히 치안이 망가지지 않으면 구태여 손을 쓰지 않는다네. 소매치기의 제왕이라고 한들 소매치기범. 그 하나 때문에 수사를 나서서야 타산이 맞겠나!”
에이비의 이성으로는 범죄를 향해 유쾌하게 웃는 그에게 동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즐겁게 웃고 있었기에, 에이비는 그 감정에 수긍하고 말았다.
“어쨌든, 범죄자라는 말이로군요. 알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실컷 웃던 프론타인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무게를 잡았다.
“…어쨌든, 조심하게. 마술사가 장교인 자네를 건드리지는 않겠지만… 그림자를 자칭하는 그놈들은, 도리어 자네를 더욱 노릴 가능성이 있네.”
“조언 감사합니다.”
에이비는 모자를 가슴에 안고는 꾸벅 인사했다. 상대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퇴역군인이라 평범한 예절을 갖춘 것이지만, 프론타인은 경례를 받은 것보다 만족스러워했다.
“허, 낭만은 없어도 군인은 있나. 군국의 미래가 밝구만.”
보호소의 작은 마당을 걸어가는 에이비를 보며 프론타인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노장은, 그저 물러날 뿐이지…. 나서지 못한다는 게 아쉽구만.”
그들은 퇴역군인. 늙거나 다쳐서 더는 싸우지 못하게 된 이들.
한때 군인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인의 시선에서 군국을 바라보는 관찰자.
보는 위치가 달라지면 관점이 바뀐다. 퇴역했기에, 일반인이 되었기에 그들은 군국을 보고 참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랑스럽고 완전무결한 휘장 뒤편에,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덕지덕지 붙인 대못과 접착제. 그건 퇴역군인 정도 되는 이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흉물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나라가 잘되었으면 하는 건… 충성심일지, 아니면 내가 만든 나라라 애착이 가는 것일지.”
노장은 끌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고작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으로 비명을 지르는 허리가 평소보다 야속했다.
“어디 보자. 크린 녀석에게 통조림을 좀 주문하고…. 패킷도 사야지…. 아, 울타리도 고치고.”
그에겐 나이보다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