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7)
EP.17 정답이다 연금술사
오늘 수업도 좋았다. 한껏 기지개를 편 내가 문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흡혈귀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느냐?]“아무것도라니요?”
[말 그대로 아무거나. 무언가 신기한 거 말이다.]‘어제 들었던 이야기, 옷과 바늘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는데. 녀석에게도 제법 말하는 재주가 있구나. 다른 이야기는 무어 없으려나?’
몇백 년 동안 관 속에서 세상과 거리두고 있었던 흡혈귀는, 어제 내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여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꼭 적적한 할머니처럼 나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기대해보았자 내가 할 이야기가 다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깃거리도 딱히 없는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신기한 거라. 그러면 뭐, 마법이라도 가르쳐드릴까요?”
[마법?]별로 관심 없을 줄 알고 건넨 말인데. 흡혈귀와 회귀자가 동시에 관심을 보였다. 어라, 이렇게 큰 관심은 부담스러운데.
“기대하지 마세요. 제가 가르쳐드릴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해봤자 중등학교에서 배우는 군국 제식마법뿐이니까요.”
‘에이. 쯧. 나는 또 고유마법이라고.’
회귀자의 관심은 금방 꺼졌다. 저 여자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나 같은 사람이 쓰는 평범한 기술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정작 자기도 ‘그들’ 사이에 끼면 ‘재능을 앞당겨 쓴 범재’ 평가를 들으면서. 흥, 기연빨 템빨 범재 회귀자. 잘 해보라지.
그에 반해 어떤가. 모범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흡혈귀의 반응이란.
[네, 네가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인간은 자기보다 위쪽을 보며 의욕을 고취하고, 아래쪽을 보며 자신의 안정감을 찾곤 한다. 나에게 있어 아래쪽은 수상할 정도로 나이만 많은 흡혈귀.
아아. 자긍심이 채워진다. 현대인 천재론은 실재한다. 왜냐면 고대인인 흡혈귀는 내가 꼭 천재라도 된 듯 대단하게 여기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네. 마법, 쓸 수 있습니다.”
그러자 회귀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개나 소나 배우는 군국 제식마법이잖아.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법 가지고 으스대기는….’
자기는 1회차 때 개나 소도 못 되었으면서. 소 뒷발에 차여 죽은 쥐쯤 되려나?
너는 그냥 가라. 왜 아직도 여기서 내 말을 듣고 있니.
남아서 수업을 들을 거면 흡혈귀의 반응을 참고해줬으면 좋겠다. 저렇게 반응해주어야 설명할 맛이 나지.
[마법이란 신비의 산물이며, 깊은 현자들만이 다가갈 수 있던 외법! 나조차도 쓰지 못한 그것을, 너 같은 것이 다룬다고?]“너 같은 것이라니요. 저 이래 보아도 원래 있던 곳에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거든요?”
내가 군국에서는 범죄자고 여기서는 빌빌 기어다니고 있지만, 중등군사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 중퇴하고 난 이후에도 뒷골목 마술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현자보다는 광대 같은 느낌으로 유명했던 거지만….
“그리고 딱히 제가 특별한 건 아니에요. 저 말고도 마법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중등학교만 들어가면 다 한 번씩 써보는 게 마법이에요.”
평범한 ‘상식’을 말했을 뿐인데, 흡혈귀는 마치 세계의 종말이라도 마주한 듯이 놀랐다.
[다… 한 번씩 써본다고? 마법을?]“물론이죠.”
[그들이, 몇 명이나 있느냐?]“제가 다니는 중등학교는 한 학년에 이백 명이었고, 그런 학교가 열 개 있으니…. 네. 최소한 이천 명의 마법 인구가 있네요.”
[이, 천….]흡혈귀는 진심으로 놀라 혀를 내둘렀다.
[이천 명의 마법사라니. 어지간한 도시의 인구보다도 많구나.]“요즘은 인구 이천은 도시 축에도 안 껴요. 인구가 얼마나 늘었는데. 저 시골 변두리에 가야 이천 정도 될 걸요. 그리고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한 학년에 이천 명이라고.
아차. 그때는 학교와 학년이라는 개념이 없었구나. 그 오해를 정정해주어야 했다.
“전체 마법 인구가 이천 명이 아니라, 중등군사학교에 다니는 13세 아이들, 그들만 이천 명이에요. 그보다 한 살 많은 14세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숫자의 마법사가 있고, 그보다 한 살 많은 이들도 역시….”
“마법사까지는 아니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구? 그중에서도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은 얼마 없고요.”
[그래도, 십만이라니. 십만….]옛날에는 한 나라 인구가 십만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요 정도? 천 년의 시간이란 이 정도의 간극이 있네요.”
고맙다, 문명이여. 나를 흡혈귀보다 천 년은 앞서게 해준 소중한 인류의 역사여.
한참 으스대는 중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꾸 오해를 부추기지 마. 그들 중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들은 극소수잖아.”
회귀자가 딴지를 걸고 나섰다.
나 참, 자기도 마법은 익혔으면서 왜 이리 내려치기를 하지? 그녀는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처럼 핀잔을 줬다.
“정작 마법을 시켜보면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도 태반일걸. 무엇보다 재능이 중요한 영역이니, 마법은 기초만 익히고 아예 뒷전으로 놓는 사람도 많아. 그거 배울 시간에 전투나 전략을 배우는 편이 나으니까.”
제 딴에는 평가절하를 노리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흡혈귀에게는 그마저도 신기한 일이었다.
[마법을 익힐 기회를 잡고도 포기하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아,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음.”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었다.
“지식이 길가의 돌멩이보다 흔해지면, 사람들 역시 지식을 돌보듯 하게 되는 법이죠.”
[익히면 힘이 될 것이 분명한데도?]“힘 역시 경제 논리에 따르는 하나의 상품이라는 뜻이겠죠. 귀하지 않으면 얻을 필요 없는.”
[허어. 희한한 시각이로다….]“뭐, 그것이 바뀐 세상 아니겠어요?”
[그으, 그러면. 혹여나.]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관 안쪽에서 흡혈귀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마치 바라서는 안 될 것을 탐하는 욕심쟁이, 아니, 단순히 욕망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욕심쟁이라고 자책하는 소심한 소녀처럼.
[나 같은 이라도 배우기를 청한다면… 가르쳐주느냐?]“티르칸쟈카 교육생은 마법을 못 익히지 않나요?”
[내가 사용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한 번 배워보고 싶구나. 그 학교라는 곳에서, 다른 이들이 배우는 것처럼….]“아아. 만학도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제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미련을 갖고는 하지.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선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미련이란 지나온 세월만큼 얹히는 법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학교에 가려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주민등록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겠지만….”
그건 어렵다. 군국의 주민등록은 꽤 깐깐하니까. 뭐, 흡혈귀 정도라면 깐깐한 군국도 신분 정도는 어려울 것 없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꾸했다.
“배우겠다고 하면 굳이 학교를 선택할 필요는 없어요. 돈만 지불한다면야 사립학원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지식은 흔해졌지만 그래도 돌멩이만큼의 가치가 없지는 않다. 3레벨 전술 급 마도부터는 군국에서 꽉 쥐고 알려주지 않지만 2레벨 전투 급 마도까지는 사설학원에서도 가르치고는 하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을 때.
[그렇다면. 혹 나에게 한번 마법을 가르쳐줄 수 있겠느냐?]“네? 저요?”
[그렇다. 지금 내가 세상과 접하는 창은 너와 셰이밖에 없으니.]천 년 묵은 흡혈귀이자, 행적 하나하나가 전설 속에 기록된 시조한테 마법을 가르친다고?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이론은 빠삭하지만 실기는 영 젬병이다.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마법 선생의 생각을 낱낱이 파헤치고도 0레벨 현상 급 마도밖에 쓰지 못해 결국 중퇴해야 했던 나였거늘.
이건 겸양도 아니다. 아무리 내 전공이 마법이 아니라지만, 0레벨 마도도 간신히 써재끼는 모습을 보이면 나의 실력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고민할 필요 없이 무조건 피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거절하려고 했던 때였다.
‘비용이 든다고 했던가? 상관없다. 황금은 차고 넘치니….’
돈.
언제나 그랬다. 황금이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금속.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강철로 하여금 사람의 피를 묻히게 하고는 홀로 고고하게 있다 다른 정수리에 옮겨타는 가증스러운 전리품.
점잖은 사람조차도 경멸할지언정 멀리하지는 않는 게 돈이다. 나처럼 진중하고 사려깊은 사람도 마찬가지.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고는, 주먹을 말아쥐고 가슴팍에 손을 댔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도 가르쳐드릴 수 있는데요.”
그리고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살짝 흔들었다.
“아, 그런데 이게. 아무리 교관이라도 마법은 좀 맨입으로 가르쳐드리기 그렇고. 단계가 올라갈수록 보안 등급이 높아지다 보니까. 대가가 좀.”
[금을 달라는 것이냐?]“꼭 그런 건 아니고. 성의 정도만요. 제가 그럴 마음이 들게.”
너무 속 보이는 말투였다. 회귀자가 칫 하고 혀를 차며 나를 노려볼 정도로. 생각을 읽을 필요도 없다. 군국 장교라는 작자가 다른 주머니를 찬다고 비난하려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거 아니?
몇백 년 전 과거에는 뒷돈이 ‘상식’이었단다.
[금 정도면 조촐하구나. 알겠다.]끼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관 뚜껑이 비스듬히 열렸다. 여전히 어둠이 넘실거리는 그 안쪽에서 새카만 손이 무언가를 얹고는 둥실둥실 떠올랐다.
와, 진짜? 진짜 주는 거야?
역시, 위기는 곧 기회. 천 년 묵은 흡혈귀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는 위기는, 세상물정 모르는 늙은 부자를 등쳐먹을 기회와 동등하구나!
안달을 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검은 손이 들고 오는 물건에 집중했다. 그것은…. 딱 보기만 해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황금 왕관이었다.
횡재다. 기쁨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관에서 꺼내니까 꼭 부장품같네요. 아야!”
[잡소리는 거기까지만 해라.]그렇다고 왕관을 던질 필요까지는. 이 귀한 물건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지문이라도 묻을까, 나는 소맷자락을 길게 빼서 소중하게 왕관을 받아들었다.
세상에. 이 묵직함. 정말 왕관? 이게 다 황금이라면, 아무리 연금술 때문에 가격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도 얼마….
…앗, 잠깐.
연금술, 천 년 전, 기술적 간격과 저 묘하게 호구스러운 태도….
설마. 나는 아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황금 왕관을 살펴보았다.
아, 어째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이거 가짜에요!”
[…?]“생각해보니 연금혁명 전 황금이잖아요? 그러면 가짜 금이야! 아이고, 이걸 어째!”
흡혈귀는 진심으로 당황해했다.
[금이라면 다 같은 금이지, 어찌 가짜 금과 진짜 금이 나뉘어있다는 말이냐.]“나뉘었어요. 백 년 전에.”
[뭣, 뭣이. 설마.]‘또, 시대에 따르지 못했다는… 그런 건가? 또 그러한 패턴인 것인가…?’
사기당한 기분이 들어서 화풀이라도 할까 했지만, 생각을 읽으니 너무 불쌍해서 그럴 기력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받을 돈 조금을 잃었지만, 흡혈귀는 가진 전부를 잃은 셈이니.
이럴 때는 독심술이 애석하다.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그냥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때까지 탈탈 돌려버리는 건데.
에휴. 내 팔자야. 돈 좀 챙기나 했더니.
“본래라면 금화위조로 잡아가야겠지만,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살던 시절에는 연금술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으니 넘어갈게요. 자, 보세요.”
나는 손가락으로 금관의 한가운데에 별표를 그렸다. 완전한 금이라면 손에 아무것도 묻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왠지 불에 달군 인두에 지져진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관이라 하면 반짝임과 무거움. 아마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서리겠군요. 음, 확실히 옛날 연금술이라 그런지 연금 레벨이 낮네요. 저라도 풀 수 있겠어요.”
세 번째, 네 번째 모서리를 톡톡 건드린다. 손톱으로 앞면과 뒷면을 긁으며 한 바퀴 돌렸다. 툭. 마지막으로 선을 따라 마력을 밀어넣자, 금관이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며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기에 드러난 건, 칙칙한 빛을 내는 묵빛 금속.
황금보다 훨씬 더 쓸모 있고, 자주 쓰이며, 값싼 마력전달금속 미스릴이었다. 분명 황금보다 몇 배는 훌륭하지만… 덕분에 귀금속에서 멀어지게 된 불운의 금속.
나는 그것을 교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미스릴은 마력 전도율이 뛰어난 금속이죠. 얼마나 뛰어난지, 이걸로 연금술을 쓰면 세상 모든 금속을 흉내낼 수 있었죠. 당연하게도, 가장 많이 흉내낸 게 바로 황금. 다만, 그때는 미스릴조차도 귀해서 황금 속에 가짜 금이 섞여도 그렇게 티가 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시중에 알음알음 가짜 금, 미스릴이 풀렸죠.
그러던 어느 날, 더 큰 돈을 만지고 싶었던 한 연금술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어요. 진짜 금은 만들기 어려우니, 미스릴을 만들어 금으로 바꾸고는 팔아넘기고자 했죠. 뭐, 미스릴도 만들기 어려운 금속이었으니 그의 노력은 헛고생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성공했다.
연금패턴이 밝혀졌다.
추정 3레벨. 적당히 할 줄 안다는 연금술사들은 미스릴을 찍어냈다. 비록 가내수공업 정도였지만 꾸준한 공급은 가격을 하락시켰다.
금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변화를 두려워했다.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 재산이 반감기를 걸쳐 줄어들고 있었다. 소식이 빠른 몇몇은 분개하여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힘썼고.
“그리고 진실을 깨달은 순간, 곧장 입을 다물고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금을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어째서이냐? 가짜 금을 만들어낸 연금술사들을 단죄하지 않고?]“왜냐면 자기 금이 가짜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다 처분했어야 하니까요. 단죄했다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요?”
[자기가 소유한 금이 가짜이다. 그것을 알고도, 팔았다?]“아니까 판 거죠.”
그동안 쌓아온 자기 돈이 실시간으로 증발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게 바보지. 당연한 일이다.
[하나, 그 가짜 금을 진짜라 알고 사게 된 이들은?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정답!”
배움에 대한 의욕이 넘치는군.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펼쳤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은 단적으로 말하기 힘들어요. 산 사람은 분노하고, 판 사람은 발뺌하고, 둘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전쟁을 일으켰죠. 완전 난리도 아니었대요. 한 역사자가 평가하건대, 그때까지 존재하는 금의 무게만큼의 피가 흘렀다, 라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나는 미스릴로 만들어진 왕관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단적으로 말해, 이제 미스릴 가격은 껌값이에요. 허풍 좀 보태면 장작더미랑 비슷한 가격일걸요.”
즉 흡혈귀가 가지고 있는 재산 대부분이 똥값이 되었다는 거다. 나는 아쉬움에 한탄하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술이나 젓갈 아니면 골동품 같은 경우는 적당히 묵히면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섭리가 그렇듯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다 상해버리는 법이다. 천 년은 너무 길었다.
흡혈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역사에, 연금술까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설마.]오, 이 와중에도 호기심이. 그 태도가 기꺼워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것도 ‘학교’에서 배웠죠.”
[또!]“연금술뿐만 아니에요. 수학, 생물학, 자연과학, 외국어, 마법학, 기계공학, 탄도학 등등. 중등학교에서 전부 가르치는 내용이에요.”
[도대체… 그 학교라는 곳은 무엇이냐? 세계 각국에서 불러 모은 재능 있는 아이들이 배움을 청하는 곳인가? 현자의 탑, 그러한 곳인가?]“아니요? 만 14세부터 17세까지, 초등시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 중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데요.”
[마, 말도 안 돼.]큰 충격을 받았는지 관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작아졌다. 컬쳐쇼크가 좀 심했나 보다.
하긴 그때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고위층만 할 수 있던 시대지. 배움의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며 험난했다. 거기에 폐쇄적이기까지 해서, 길의 끝에 다다라서도 굳게 닫힌 문에 절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더 나아진 걸까.
“어쨌든. 아셨죠? 애석하게 되었네요. 후우. 힘들었다. 오늘은 역시 휴강으로.”
[으, 으음. 잠깐.]흡혈귀는 바뀐 세상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지, 기어이 회귀자에게 교차검증을 시도했다.
[셰이. 저 말이… 진짜더냐?]“…전부 사실이기는 해. 하지만.”
‘배웠다고 해도, 저 남자처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군국은 전문화를 추구해. 각자 적성에 맞는 분야를 깊이 파고들지. 내 일검을 받아낼 정도이면서, 연금술과 마법에도 조예가 있는 게 이상한 거야….’
그놈의 칼날 튕겼다고 고평가는. 참 나. 칼 못 튕겨냈으면 얼마나 버러지처럼 대했을지 상상도 안 간다.
아, 그러면 팔이 잘렸겠구나. 진짜 땅을 기는 버러지가 되었겠네.
“하지만 저 녀석이 이야기한 것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야. 기대했다가는 크게 실망할걸.”
회귀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제로도 평범한 곳은 맞으니까 나도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감탄하던 흡혈귀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표했다.
[셰이, 너도 중등군사학교라는 곳을 나왔느냐? 혹 둘이 동문수학한 사이더냐?]“아니, 나는 초등시민학교만 나왔어.”
‘으음. 확실히. 말본새부터 다르다. 둘의 격차가 있는 모양이로구나….’
흡혈귀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끌었다. 그 어조 속에 숨은 안쓰러움을 알아차린 회귀자가 다급히 변명했다.
“아니?! 내가 초등시민학교까지만 나온 건, 고아원 출신이라 학비가 없었기 때문이야!”
[저런.]“아니! 내 말은! 나는 중등학교까지 나올 이유가 없었어! 그러지 않고도 충분했으니까!”
[알겠다. 걱정하지 말거라. 혈조술은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가르쳐주마.]“그러니까 아니라고!”
하아, 딱히 자랑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나는 코를 쓰윽 닦으며 말했다.
“참고로 말하면, 저도 부모가 없었는데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중등군사학교까지 전교 1등이었거든요.”
“너는 닥치고 있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물건이 많이 담긴 주머니일수록 흔들림에도 고요한 법…. 그토록 원하신다면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게 닥치는 거냐?!”
이래서 못 배운 사람들은. 하아.
시킨 대로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는데, 회귀자는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