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80)
EP.180 상상 속의 고수
군국의 밤은 어둡다. 주간노역자는 내일 찾아올 노역을 대비하여 자기 거주지에서 죽은 듯이 잠들고, 야간노역자는 어딘가에서 바쁘게 움직일 시기.
나는 새카만 로브를 두른 채 13구역에 있는 버려진 노역장으로 향했다. 철골만 남은 건물 속에 연금사를 짜내는 물레가 부서진 채 방치된 장소를 넘어, 안쪽 창고로 한 걸음을 더 내디디는 순간.
날카로운 적의가 나를 향했다.
“멈춰라. 두더지.”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며 효율적인 수단, 암호.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모양이다.
하지만 독심술이라는 만능열쇠가 있는 나에게는 신뢰를 공짜로 얻는 셈이나 다름없다.
‘암호는 두더지, 답어가 마차.’
알려줘서 고맙다.
생각을 읽고 그대로 말했다.
“마차.”
“좋아. 무슨 일이지?”
“전령이다. 너희가 알아야 할 사실을 전하러 왔다.”
‘알아야 할 사실? 설마, 그림자 쪽에서 움직일 준비가 다 끝났다는 말인가?’
설명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의 생각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끝났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했던 일들이 모두 성과를 보였다.”
“성과? 도대체 무슨 성과를 말하는 건데?”
‘말을 뭐 이리 두루뭉술하게 하는 거야? 너희가 하기로 한 일은 마켓의 점장, 크린을 암살하는 거잖아! 암살을 했다거나, 할 예정이라 말하면 되는 것을!’
왜냐면, 정확하게 대답했다가 너희가 의심을 느끼면 큰일이니까. 말을 두루뭉술하게 끌고 가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읽는 편이 낫거든.
지금처럼 말이야.
크린의 암살을 바란다고. 알았다. 장단을 맞춰주지.
“창고지기, 점장, 시장의 대표이자 동시에 은밀한 밀수꾼. 애연가. 크린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가 끝났다. 그의 육신은 어둠 속에 잠기리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됐을 것을.”
어쨌건 고대하던 소식에, 노역장을 점거한 깡패들은 크게 기뻐했다.
“크린, 그 배불뚝이 자식. 드디어 천벌을 받는구나!”
크린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그들의 정체는, 배달부가 모여서 만든 운송 조합원들.
창고는 하나였지만 배달부는 많다. 크린은 배운 적도 없는 경제 논리를 자연스레 터득하며 배달부의 임금을 후려쳤다. 부와 권세를 누리는 크린에 비해 배달부들은 늘 쪼들리기만 했다.
그중에서 참다못해 크린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고 사경을 헤맸던 몇몇 배달부는 복수를 다짐했다.
‘그림자는 뛰어난 암살자야. 살만 뒤룩뒤룩 찐 점장 크린은 적수가 못 돼! 기공 좀 익혔답시고 꺼드럭대던 놈이 죽으면, 우리 운송조합은 그 혼란을 틈타서 마켓에 쳐들어간다! 어차피 창고에 든 것 중 태반이 장물이거나 밀수품이야. 먹고 날름 튀면 아무도 못 잡아!’
군국의 그림자라는 조직은, 다들 이와 비슷하다.
원래 체재에 불만을 가진 단체나 모임. 기존의 틀을 부수고 망가뜨리며 자신에게 유리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이들.
내가 대위의 생각을 읽어서 알아낸 결과, 울펜이라는 이름의 흑막은 이 화약들을 한데 모아 단번에 터뜨릴 작정이었다.
군국이라는 소방수가 출동하여, 깨끗하게 정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래. 비유하자면 숲에 불을 지르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화전민처럼 말이다.
자기 처지가 화전이 일어날 숲, 땅에 떨어진 바싹 마른 낙엽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조합원들은 한껏 들떠서 나에게 물었다.
“신호는 무엇이지?”
“창고지기가 죽으면 창고에 불이 솟아오를 거다. 그때를 노려라.”
“창고에서 불이 난다는 말이지?”
“그래.”
“큭, 크린 녀석. 애지중지하던 창고에 불이 붙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죽었으니 표정도 못 짓겠구나! 아쉽네. 그 못생긴 얼굴을 봐야 하는….”
그때였다. 13구역 저편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솟아올랐다. 흩어지는 화약이 군국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곳곳에 숨어있던 운송 조합원들이 자기 옷에 불이라도 붙은 듯 화들짝 뛰쳐나왔다. 그들은 황망하게 창고 쪽을 바라보다가, 곧 신이 나서는 환호성을 질렀다.
“개자식들. 꼴 좋다!”
“잠깐. 창고가 불타면 우리 몫은?”
“괜찮아! 마켓의 창고는 커. 저렇게 불타도 반절은 남을걸!”
“빨리 가서 물건 챙겨!”
“타이밍 죽여주는구나!”
나는 저 멀리 붉게 번져오는 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 타이밍 봐라.”
더럽게 못 맞추네. 나 간 다음에 할 것이지, 이러면 더 바빠지잖아.
내 앞에 있던 조합장도 급하게 움직였다.
“설마 벌써 암살에 성공했을 줄은! 다들 준비해! 마켓을 덮친다!”
조합원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조합장은 희열에 찬 미소를 짓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네들이 뒷골목을 휘어잡으면! 우리는 성심성의껏 당신들을 돕겠소!”
“…기억하겠다. 그럼 다른 곳을 들려야 해서 이만.”
“맡겨주쇼!”
운송 조합장의 관심은 금방 마켓 쪽으로 옮겨갔다. 나는 새카만 망토를 뒤로 길게 휘날리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사실 저 불꽃은 마켓이 폭약을 처분할 겸 계획한 불꽃놀이다. 크린이 여차할 때 무기로 쓰려고 입수한 폭약인데, 내 협박에 못 이긴 크린은 그것을 불꽃놀이용 폭죽으로 바꾸었다.
무기용 폭약을 연금술로 변환하여 불꽃놀이에 쓴다는 낭만. 이 낭만은 군국 전역에 가짜 신호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면 뭣도 모르는 부나방들은 지금이 타오를 때인 줄 알고 불꽃 속에 몸을 던지겠지.
결행일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그날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불태운다.
이미 탄 것은 다시 불타지 않기에.
“자아. 앞으로 들러야 할 곳이….”
밤은 생각보다 짧다. 앞으로도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터였다. 나는 세피네 집에서 가져온 고급 자동마차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비싼 게 좋긴 좋은지 촉감부터 남달랐다.
막 출발하려던 때였다. 저 앞에서 나와 비슷하게 로브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수상쩍은 차림에 수상쩍은 행동거지.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생각을 읽었다.
‘젠장! 알려야 해…! 어떤 미친놈이 우리 그림자를 사칭하고 다니고 있다고! 운송조합 놈들이라도 경거망동하지 않게…!’
진짜 그림자의 전령이었다. 이상한 사태를 감지하고는 자기 조직원들을 단속하러 나오는 모양이었다.
단속… 단속… 아, 잠깐만. 나쁜 기억이.
트라우마가 나를 엄습하는 바람에 가속페달을 밟아버렸다. 전령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건 심신미약 때문이야.
콰아앙.
급발진한 자동마차에 부딪힌 전령이 땅을 뒹굴었다. 충돌한 직후 나는 자동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냅다 소리 질렀다.
“아, 씨! 운전 똑바로 안 해!”
꽤 단련이 되어 있는지, 전령은 차에 치이고도 반사적으로 낙법을 취해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갈비뼈가 나간 것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아까비. 더 세게 칠걸.
“크흑…! 운전한 건 네놈이잖아…!”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나머지, 전령은 생각도 정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대답했다.
“이것 봐! 차 앞이 다 찌그러졌잖아!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차에 치였다고…!”
“그러게요. 당신 얼굴은 제 차보다 더 찌그러졌네요. 죄송합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요.”
“미친놈이…!”
도발이 먹혀들어간 탓일까. 전령은 품속에서 소도를 꺼내 들었다. 새카만 칼날을 본 나는 기겁해서 외쳤다.
“꺄악! 칼이야! 이 사람, 흉악한 무기를 갖고 다녀!”
“사람을 친 놈이 할 말이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죽여주마…!’
그의 고통이 공격본능으로 바뀌었다. 전령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에 맞서 나는, 그의 생각을 차분히 읽으며 카드를 한 장 꺼냈다.
다이아몬드 4, 네 개의 마름모가 동서남북으로 배치된 카드. 나는 연금술을 이용하여 카드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냈다. 카드가 마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몸을 부풀렸다.
연금변환을 거쳐 나타난 건, 표준적인 길이보다 살짝 짧고 가벼운 단창. 마름모꼴 창날에 기다란 창대를 지닌 곧고 평범한 창이었다.
품 안에 숨기기 위해서 소도를 들고 다니는 전령은 내 단창을 보고는 억울한 듯 외쳤다.
“미친놈이 창을…!”
“먼저 칼을 꺼냈으니까 정당방위!”
정당성도 선공권도 나에게 있다. 나는 머릿속으로 절창과 그 제자를 떠올리며 한껏 자세를 잡았다.
전령이 이를 악물었다.
‘자세가 심상치 않다! 저 사내, 고수가 틀림없어!’
조금 다르다. 내가 한 건 어디까지나 형태 흉내내기.
사람마다 성격이나 육체가 다 다르기에, 그들에게 있어 최적의 형태는 나에겐 맞지 않다. 한마디로 내 자세는 허세가 잔뜩 들어간 몸 부풀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피해야 해! 자칫하다간 일격에 목숨을 잃는다!’
허세인 것을 상대가 모르면, 가짜 자세는 진짜가 된다.
상상 속에서 자신을 찢어발길 창날이 두려워 몸을 사리면 나는 그만큼 운신의 자유를 얻게 되니까.
‘한 번만 접근하면 된다! 오의, 그림자 숨기로 땅에 가라앉듯이 피하면 돼! 자세가 무너지겠지만 그것만 이겨낸다면…!’
좋아. 계획은 그려졌다.
나는 얼굴에 있던 표정을 싹 거두었다. 장난기를 빼고, 한순간 싸늘한 무표정을 보이며, 어깨와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는 앞으로 움직였다.
‘…저 표정…! 프로다! 처음부터 나를 알아보고 차로 친 거야!’
창끝이 흔들렸다. 그것을 본 전령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전력을 다하여 기공을 펼쳤다.
‘오의, 그림자 숨기!’
사실 오의라고 칭하기도 초라한 기술. 곤기공으로 땅을 잡아당겨, 자기 몸을 땅에 바싹 붙인 채 상대 뒤로 돌아가는 잡기술이었다.
경지에 이르면 그림자 속에 숨어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그림자’의 칭호도 받지 못한 일개 전령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의표를 찌르기는 충분하겠지만.
‘피했다…!’
애초에 찌르지도 않았다. 나는 창을 빙글 돌려 세로로 잡았다. 뭉툭한 끝을 아래로 향한 상태로 곧장 내리찍었다.
바닥에 붙어, 땅을 미끄러지는 전령의 복부를 향해서.
전령의 눈이 커졌다.
‘컥! 이걸, 간파하다니…!’
어디까지나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데 특화되었지만… 미안, 나는 심리전만큼은 진 적이 없거든.
전령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안 그래도 차에 치인 뒤 반쯤 사경을 헤매던 전령은, 내 공격을 끝으로 의식이 끊어졌다.
“원만하게 합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우, 위험했다. 간부인 반그림자도 아니고, 전령 역할이나 하는 일개 심부름꾼이 이렇게 끈질기다니. 아무리 자동마차가 말보다 못하다지만 그래도 이만한 철덩어리에 치이고 시작해도 버텨?
일개 전령이 이 정도면 간부인 반그림자나, 보스인 울펜은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후, 원래도 내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더더욱 적극적으로 교전을 회피할 수밖에.”
승리는 한 번이면 족하다. 이 이후로는 정신적인 승리만을 추구하기로 했다.
내가 잡은 건 그림자의 잡졸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나는 전령에게서 뽑아낸 기억을 곱씹으며, 기절한 그의 몸을 으슥한 골목길에 대충 던져놓고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뭔가 새카만 형체가 어둠 속에서 일렁거렸다. 나는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기절한 전령의 신음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이상하다. 뭔가 있지 않았나.”
귀신인가? 아니면 유령?
아니, 뭔가 무저갱에서 보았던 흙잡졸을 닮은 것 같은데….
“잘못 본 거겠지. 그게 여기 왜 있어.”
이런 뒷골목에 볼 게 어디 있다고.
평소 같았으면 조금 알아보았겠지만, 지금은 바쁘다. 나는 다른 쪽 접선지를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