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84)
EP.184 멸망의 불씨를 미리 짓밟은 회귀자는 조용히 살고 싶다
마술사의 경고에, 패밀리는 전력을 끌어모으고 결전을 준비했다.
이건 패밀리도 바라마지 않는 기회였다. 뭔 괴이한 복면을 쓰고 수인을 사냥하겠다며 나서는 수인의 적, JJJ. 그놈들이 제 발로 싸우러 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룻밤의 유희에 불과한 그들과는 달리 패밀리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패밀리는 이번 일에 저항하기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전부 긁어모았다.
검은 고양이 잡지사 곳곳에는, 발톱을 세우고 무기를 든 수인이 가득했다.
수인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에 비해 뛰어난 편이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설사 그림자가 찾아오더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터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검은 고양이 잡지사, 편집장이자 얼굴마담으로 활동하는 수인 기자. 네루는 캐비닛 안에 숨어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패밀리 역사상 이만한 전력이 한곳에 모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헛된 자신감으로,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될 존재에게 싸움을 걸어버렸다.
그 결과가….
쿠과가강!
“아는 모든 것을 말하거라.”
“모, 몰라요!”
“그래?”
“잠깐만요! 말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모른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그냥 불려 온 거예요!”
“그렇다면, 아는 이가 있다는 뜻일 터. 너라도 너희 중 누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지는 알겠지.”
“네루! 네루라는 검은 고양이 수인입니다!”
“찾아오거라.”
툭. 떨어진 발이 땅에 땋는 소리.
그 소리를 시작으로, 패밀리에 헌신적이었던 한 수인은 밀고자가 되어 곧장 눈에 불을 켜고는 네루를 찾으러 뛰어다녔다.
“네루우우우우! 빨리 튀어나와아아아! 우리를 다 죽일 셈이냐?!”
“마술사에 대해 아는 걸 전부 토해내!”
“이러다 다 죽어! 패밀리가 먼저잖아!”
‘멍청이들! 여기서 상대 의도대로 끌려다녀주면 어떻게 해!’
자기를 찾는 동지들의 애처로운 부름에, 캐비닛 속에 숨은 네루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딱 보면 몰라? 저건 마술사가 불러온 거야! 묻는 것 자체가 시험일 수도 있다고!’
마술사를 견제한답시고, 그리고 패밀리를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한번 툭 건드려보았다.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못하리라. 어쨌든 그녀의 적극적인 교섭 덕분에 그림자가 수인 혐오자들을 충동질하여 습격해온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잖은가.
‘하지만…! 설마, 우리에게도 독을 심어놓았을 줄은…!’
조금 들떠버렸다. 마술사가 감싸고 도는 그녀에 대한 기사를 머릿속에 고이 보관해두는 대신, 짤막하게나마 활자로 적어 내려갔던 게 실책이었다.
그냥, 반쯤 장난으로 한 일인데.
설마 낯선 손님이 마술사의 정보를 알아보고는 반응할 줄이야.
‘이래서 마술사하고는 연관되면 안 됐는데…! 마술사가 양념을 친 정보야!’
좁고 어두컴컴한 캐비닛 속에 숨은 채, 네루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결전을 준비하는 오늘 잡지사는 휴무였다. 다만, 혹시나 급한 연락을 위해서 뒤쪽 비밀 창구만은 개방해두었다.
시크릿 멤버를 위한 접선망. 만일 급하고 은밀한 일로 연락할 사람-특히 마술사-이 있을 경우 이곳으로 연락할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평소에 보지 못했던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 넓은 아미텐그라드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쉽지만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곤란한 척 이야기를 끌며 협상에 나섰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패밀리의 명예와 명운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때 사람 찾는 의뢰를 받을 수는 없다. 네루는 예의 바르게, 딱 잘라서 그 요청을 거절했다.
상대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네루의 입장을 이해해주었고, 오히려 패밀리를 돕겠다는 의지까지 보였다. 하지만 수인도 아닌 외부인을 믿을 수는 없었기에 마음만 받기로 했다.
그렇게 훈훈하게 끝나려나, 할 때.
“…결혼?”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던 은발의 소녀가 중얼거린 순간. 패밀리의 운명이 바뀌었다.
옛 왕국의 귀족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품을 지닌 소녀였다. 소녀가 성큼 창구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그녀를 막지 못했는데, 다른 게 아니라 두꺼운 콘크리트와 강철 격자로 된 격벽보다 강한 저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를 부수고 강철 격자를 파헤친 채 들어온 소녀는 이곳이 제 구역인 것마냥 천천히 정보를 열람했다.
“중등학교 전교 1등, 두뇌명석한 휴이…. 그의 이름이 정말 휴이가 맞느냐?”
그래서 소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네루는 너무 놀라서 꼬리가 떨어질 뻔했다.
매대에는 그가 마술사라는 말을 적어놓지도 않았는데 정확하게 그 점을 지적해왔으므로.
지인인가, 아니면 추격자인가.
어쨌든 쉽사리 마술사의 정체를 알려줄 수는 없다. 기밀이기도 했고, 패밀리에게 주요한 정보를 알려준 마술사에 대한 상도의가 아니었으니까.
네루는 입을 다물었다. 매대에 놓인 정보는 오직 손님의 갈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맛보기. 말하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손님이 갈증을 참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놓거라. 너희가 그에 대해 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더 지체할 이유 없을 터. 대가를 치를 테니 정보를 팔아라.”
상대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안다. 방금 보았으니까. 하지만 네루는 그 정보를 알아도 되는지 안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마술사가 대놓고 건넨 정보다. 비싸게 팔았다가 어떤 독으로 돌아올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네루가 미적거리던 찰나, 소음을 듣고 패밀리의 다른 멤버들이 들이닥쳤다.
“뭐야?! 습격이냐?”
“적의 숫자는?”
“설마 이쪽으로 쳐들어오다니…!”
“제 무덤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구나!”
‘잠깐! 안 돼! 상대는…!’
한껏 바람이 들어간 이들은 새하얀 분위기의 소녀를 둘러싸고 위협…하려고 했다. 그 순간, 사방팔방에서 어둠으로 만들어진 새카만 흑기사들이 우글우글 기어나왔다.
거기서 끝이었다.
“네루우우우우!”
“나와!”
“내가 잡지사 한답시고 나댈 때부터 알아봤어!”
캐비닛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먼 곳에서 전해지는 메아리 같았다. 네루는 눈을 감고 벽에 기댔다.
캐비닛은 편안했다. 좁고 어두운 공간은 네루를 편안하게 했다.
사방이 꽉 막힌 어둠. 이 공간 안에만 있으면 네루는 안전하다. 누구도 그녀를 찾을 수 없고, 다치게 할 수도 없고, 괴롭히지 못한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 어둠 속이라면 모두 공평해지니까.
고양이가 좁은 공간을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아늑하고 편안한 것을….
그러나 알은 세계이며, 깨지기 위해 존재하니.
“여기다!”
콰드드드득.
캐비닛이 뜯겨나가고 빛이 찾아왔다. 네루는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눈을 괴롭히는 빛 아래에서 신음했다.
곧이어 등장한 건, 화가 잔뜩 난 패밀리의 멤버들.
그리고 그 뒤에서 왕처럼 앉아있는 소녀였다.
“네루 이 자식! 빨리 말 안 해?!”
“지금 일전을 준비하는 중인데!”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가 일어났는지 알기나 해?!”
멱살 잡혀서 끌려 나온 네루는 한순간 패밀리에게 둘러싸였다. 네루는 그녀를 향한 적의와 마주했다.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한 패밀리의 멤버들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네루를 탓하고 있었다.
“빨리, 네가 아는 모든 정보를 토해내!”
“이 부분을 맡겼더니 제멋대로 하기나 하고!”
“애초에 깜냥이 안 되면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당찬 기자에서 대역죄인으로 바뀌기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저, 네루는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설움이 북받친 네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네루가 흐느끼며 말했다.
“흐, 흐으으윽…! 멍청이들아, 그건 마술사야…! ”
“뭐?”
“마술사…! 이 벌레자식들아! 이 상황 자체가…! 흑! 마술사가 만든 결과라고!”
마술사라는 한마디에, 패밀리의 멤버 모두 대충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흡혈귀로 추정되는 은발의 소녀는 강했지만 손속이 과하지는 않았다. 철근을 간단히 찢어버리면서도 비슷한 처지가 된 사람이 없다는 점부터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흡혈귀이다. 패밀리를 죽이지 않는 건 인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럴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 따라서 패밀리의 수인들은 소녀의 수족이 되어 열심히 네루를 찾아야 했다.
목숨까지 위험하지는 않지만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재난.
“왠지. 딱 마술사가 저지를 법한 일이긴 하네.”
“이제 와서 아는 척 해봤자 소용없거든…!”
“미안하다. 그런데 너는 마술사 왜 건드렸냐?”
네루가 눈물을 닦으며 훌쩍거렸다.
“흑…! 미안해…!”
“별일도 다 있네. 네루 입에서 사과도 나오고. 이게 마술인가?”
파파라치 기자가 하지도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게 사과였지만, 이 사태에 한해서 네루는 할 말이 없었다.
어쨌건 상황이 조금 풀렸다. 패밀리의 다른 멤버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네루를 탓하는 분위기는 한결 가셨지만, 이제 네루는 그녀와 독대하게 되었다.
붉은 눈을 빛내며 여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조금 옛날 느낌으로 차려입은 소녀를.
“마술사라. 그가 틀림없구나. 그도 스스로 마술사라 칭했지. 카드를 가지고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소녀가 추억을 회상하듯이 중얼거렸다. 거기서 느껴지는 아련한 그리움에는 그다지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손속이 그리 과하지 않았던 거겠지….
“설마,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좋은 소식이 들려올 줄은 몰랐건만….”
아무래도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네루가 몸을 떨었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이건 적당히 아는 지인 수준을 뛰어넘잖아.’
지나가는 폭풍조차도 그녀보다는 온건할 것이다. 군국의 장성… 아니, 그조차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강함.
마술사에게 이런 뒷배가 있었다면, 뒷골목뿐만 아니라 아미텐그라드 전체가 그의 손에 떨어졌으리라.
어찌 되었든, 이건 네루가 불러온 참사다. 덕분에 준비해둔 무기나 함정 태반이 못쓰게 되었다.
네루가 총대를 매고 책임져야 했다.
“…말해드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조용한 대화를 위해서 바깥에서 쳐들어오는 이들을 막아야 하겠는데요.”
“바깥이라.”
상대를 이용해서라도 패밀리를 지켜야 한다. 네루는 바싹 긴장한 채 말했다.
“네. 저희는 수인이라, 보시다시피 적들이 많거든요. 아가씨처럼 대단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란을 피울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네루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교섭이었으나, 상대는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믿음직스러운 아이가 이곳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으니.”
셰이는 검은 고양이 잡지사 주위를 서성거리다,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한번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티르칸쟈카가 내부를 다 정리한 모양이었다.
“티르칸쟈카가 다 부수진 않겠지? 흠, 왠지 미안하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평범하게 교섭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티르칸쟈카의 행동이 더 빨랐다. 어쨌건 결과만 좋으면 되었기에 셰이는 티르칸쟈카를 방치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가 정보를 얻는 동안, 이 불량스러운 무리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셰이는 복면을 쓴 괴한의 앞에서도 태평하게 말했다.
“이곳은 잠깐 우리가 쓰고 있어. 볼일이 있으면 나중에 와….”
“시끄러워…! 방금, 수인이 우리 동료를 공격했어! 이 팔을 봐!”
“그거야 뭐 네 사정… 잠깐.”
마침 나비가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셰이는 힐끔 그 상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찢겨나간 상처는 나비가 만들어낸 것과 유사했다.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 셰이가 중얼거렸다.
“그 상처를 입었으면 병원이나 가지 왜 여기 왔어.”
“복수를 해야 하니까! 당장 비켜. 거기 있으면 너도 수인이라고 간주하겠다!”
저들의 기세가 너무 흉흉해서, 셰이가 힘을 보이지 않고는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셰이는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흠. 잠깐만.”
무심하게 대꾸한 셰이는, 지잔을 꺼내서 땅을 내리쳤다.
아미텐그라드에 국소적인 지진이 일어났다. 사람과 자동마차는 물론 건물까지 떠받치던 콘크리트 땅이 얇은 얼음조각처럼 쩌적 갈라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셰이는 지잔의 칼끝으로 콘크리트 파편 하나를 튕겨 올린 뒤, 그대로 옆면을 가격했다.
부서진 콘크리트가 유성군처럼 쏟아졌다. 크기는 작지만, 하나하나의 기세가 날아오는 화살 못지 않았다.
그 파편과 먼지에 맞은 이들이 일제히 뒤로 나자빠졌다.
“크헉….”
“으허허….”
무리를 짓는 바람에 잠시 망각했던, 이 세상의 규칙.
세상에는 소수의 강자가 있으며, 그들은 홀로 땅을 뒤집고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이들이다. 잡것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이기지 못하니.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전신을 난타한 듯한 고통은 그들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열기가 가라앉자 남은 것은 자괴감과 회한뿐.
“나, 집에 갈래….”
“엄마아….”
복면 아래에서도 새어나오는 두려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셰이는 지잔을 어깨에 걸쳤다.
“자. 이곳은 우리가 쓰고 있어. 볼일 있으면 나중에 와.”
“네.”
오늘, 수인 혐오 단체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물러나는 평범한 사람들. 셰이는 별다른 감흥 없이 그들을 보다가 문득 눈을 붉은색으로 빛냈다. 그녀의 시선이 모퉁이로 향했다.
“자. 그리고 훔쳐보는 그쪽. 볼일 있으면 나와.”
모퉁이에서 숨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다섯 번째는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싸우면? 질 것이다. 심지어 부상 입은 몸으로는 시간조차 끌지 못한다.
나비에게 부상을 입었던 다섯 번째는, 즉시 상처를 움켜쥐고는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멀어지는 괴한을 보며 셰이는 지잔을 어깨에 걸친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볼일은 없나 보네. 그나저나 군국 뒷골목이 이랬던가. 오늘따라 많이 소란스러운데….”
물론, 셰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정작 군국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1구역에서 깽판치고 나온 게 고작 만 하루 전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번 일은 우리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닐 것 같은데…. 아, 혹시 이게 그때인가? 군국 51차 불심검문?”
셰이는 더 떠올리려다가 포기했다. 전쟁을 앞둔 군국이 군국민을 상대로 잦은 불심검문과 언론탄압을 반복하다가 서서히 약점을 드러내게 된 일.
“에이. 숫자를 세서 뭐해. 어차피 다 뻘짓인데.”
그건 천이 물에 젖어드는 것처럼 연속적인 일이라, ‘이 일이 계기다!’ 하고 명확하게 할 부분이 없었다.
이대로 무저갱 평야를 두고 열국과의 전쟁까지 넘어가면 군국은 더 지속된다. 약점을 들쑤시고 사방팔방에서 난리를 치면 무너질 수도 있고.
“이제 슬슬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래. 결정했다. 이번에는 필요한 힘만 챙기면서 조용히 상황을 보자.”
무저갱이 원만히 사라졌을 때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봐야 나중을 기약하기 좋을 것이다.
조용히 지내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지, 셰이가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때였다.
셰이의 옆으로 기척이 희박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셰이가 익히 아는 존재였다.
“…? 흑기사?”
티르칸쟈카의 사역마. 의식은 없으나 명령에는 충실한, 옛 기사들의 메아리.
하나가 아니었다. 세상에 찾아온 어둠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흑기사가, 아미텐그라드 전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목적은 아마….
“조용히 살기는 글렀네.”
계획이 다 어그러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여, 셰이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