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87)
EP.187 살고 싶다고 말해 – 3
슬프게 묻는 대위를 향해 나는 단언했다.
“몰라요.”
“…무책임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처음의 성녀 같은 예언자가 아닌걸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몰라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알죠. 이번 사건으로 무언가를 잃을 이들에겐, 대위의 행동이 무엇보다 가치 있을 거예요. 아무리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오늘 죽을 이들에게는 무덤 위를 비추어주는 햇볕에 불과할 테니까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대답이 들려왔다.
애초에, 그녀는 외면하지 못한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굳게 결심한 대위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본관은… 저는, 임무가 아닌,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받은 임무와 해야 하는 의무. 대위는 결국 그것을 스스로 결정했다. 군국의 인형이 삶을 되찾았다.
대위는 자기가 만든 가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통신병은 제가 모르는 정보를 접했을 수도 있으며, 제 행적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제 시도는 헛된 것이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인생 최후의 결정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대위의 말은 담담했다. 사무적인 어조의 담담함이 아닌, 각오한 자의 흔들림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어려운 일일 거예요.”
“긍정. 그럼에도, 해야 합니다.”
대위는 모자를 챙겨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림자가 뿌린 정보를 군국이 감지할지, 대위가 한발 먼저 그것을 다 알아차리고 사전에 차단할지. 시간 싸움이었다.
당장 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대위는, 문고리를 잡기 직전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몇 번 오므리다가, 주먹을 살짝 말아쥐고는 주저하듯 물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처음부터 받기만을 하였습니다. 상자에서 발견될 때부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귀하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목숨을 구해졌고, 의무마저도 부여받았으니. 몸도 마음도. 귀하에게 선물받은 셈이군요.’
은혜를 아는 건 짐승도 마찬가지이라. 오히려 머리에 의심이 가득한 인간이 도리어 은혜를 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알았구나. 내가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 조금 늦었네.
자기 삶이 없었던 이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만큼 의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내심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내 뒷배가 되어줄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대위는 모자를 가슴에 품은 채 나에게 물었다.
“…당신을 위해,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좋아. 이거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살아만 있다면요.”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다. 생각하고 행동할 수만 있다면 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통신병이라는 거, 말만 대위고 물대위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쓸만하고… 또 위협적이더라고.
특히, 군국이 원거리 감시를 하려고 통신병을 쓰면 나는 꼼짝없이 잡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에이비 대위처럼 통신병에게 큰 은혜를 입혀두면 편하지.
군국. 너희는 이런 일을 경계했겠지만… 너희들의 도구는 내가 잘 이용해주지.
내가 말을 이으려던 무렵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갑자기 뭘 알아? 말은 다 듣고 가야지.
네가 나를 위해 해줄 일이 산더미인데. 혹여나 나에 대한 수사가 들어올 경우 컷해주는 거, 위험할 때 골렘으로 경고해주는 거. 전쟁이나 그에 관련된 소식은 다 전해주는 일 등. 할 게 많은데?
‘직녀가 말한 것과 똑같군요. 소원을 이루어준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저도 할 수 있는 한, 당신처럼 베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서두르겠습니다.”
꾸벅 머리를 숙인 대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버렸다. 마차 안에 홀로 남은 나는 얼떨떨해서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대위의 생각이 들렸다. 대위는 골렘에 접속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마디를 되뇌었다.
‘당신은 저를 보지 못하겠지만. 저는 언제나 당신을 바라보겠습니다. 당신에게 받은 삶을 살아가며.’
어, 언제나 바라볼 필요는 없는데…. 내 신변에 위협을 느낄 때만 지켜봐 주면 되는데?
그렇게 출발하려는 대위의 시야 한켠. 그녀의 영향 아래 있는 창문 중 한가운데에서 어떤 광경이 비쳤다. 걸어가려는 대위가 발걸음을 멈추며 관측된 시야를 보고는 경악했다.
‘보호소의 퇴역군인들이…! 전멸?!’
어?
그 사람들이?
12구역에 있는 가장 큰 군사학교. 그 연병장.
보호소의 퇴역군인이 불량배들을 잡아 기합을 주고 있었던 그 장소는, 지금 모종의 습격으로 인해 격변한 상태였다.
“허억, 허억, 허억. 젠, 장맞을. 10년만 더 젊었어도….”
보호소장 프론타인은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그의 주름을 따라 비스듬히 흘러가다가 턱 쪽으로 떨어졌다.
전신에서 기공을 끌어올리며, 프론타인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외쳤다.
“어디냐! 늙은이 상대로 숨지 말고 나와라, 그림자!”
“숨지 않았다.”
프론타인의 귀에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론타인이 고개를 홱 돌리자, 학교 입구에서 걸어나오는 한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프론타인이 외쳤다.
“네놈, 그림자!”
“기왕이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야, 군국도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테니.”
감정이 없는 듯 음울한 목소리가 그림자 틈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혹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까지 간신히 서 있는 퇴역군인들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뒤룩거리는 양아치들도. 어디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
기공인지, 아니면 그의 힘인지 모를 기묘한 능력.
“세월은 그토록 길었던가. 무상하구나. 차마 언급할 수도 없는 끔찍한 존재가 기거하는 그곳은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마경이었거늘…. 안온한 도시에서 다들 늙고 약해졌구나. 군국도, 그림자도.”
울펜이 한탄하듯 말했다. 어느덧 그의 신형은 연병장 가장자리까지 나와 있었다.
그에 맞서 프론타인은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고는 달려들었다.
“네 이놈! 맞서 싸워라아아!”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갉아 먹힌 참이다.
그림자의 수장, 본그림자 울펜의 암습은 은밀하고 신속했으며 치명적이었다. 울펜은 순식간에 다섯을 쓰러뜨리고는 유유히 떠났다. 격노한 프론타인이 그를 추격했다가 역으로 습격을 당하고는 상처를 입었다.
잠깐 프론타인이 경계하는 사이, 울펜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던 퇴역군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 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울펜이 다시 몸을 드러냈을 때, 이게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퇴역군인들이 일제히 몰아쳤다.
몇 남지 않은 퇴역군인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때.
울펜의 신형이 사라지고 대신 목소리만이 남았다.
“이미 싸움은 끝났고, 너희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너희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
푹. 다가가던 도중, 외팔이 퇴역군인은 보이지 않는 칼날에 맞고는 남은 쪽 어깨를 크게 베였다. 그는 고통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눈을 부릅떴다.
“반탄기공을…! 썼는데!”
“맹신하지 말라.”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외팔이 군인이 쇠도리깨로 소리 난 쪽을 노렸으나, 콘크리트도 깨부술 위력을 지닌 도리깨는 허무하게 허공만 갈랐다.
푸욱. 그리고 다시 생명이 빠져나가는 소리. 칼날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크게 베인 가슴, 흐르는 피. 외팔이 군인이 천천히 쓰러지려는 때. 그가 눈을 빛내며 손을 뻗어 울펜의 옷을 붙잡았다.
존재할 리 없는, 잘린 어깻죽지에서 솟아난 오른팔로.
“기공수?”
울펜이 반응했다. 아무리 그라도 기공으로 붙잡은 손을 떨쳐내지는 못하리라.
잠시 그림자를 묶어둔 그의 곁으로 프론타인이 다가왔다.
“잡았다! 네노오오옴!”
주름진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부족한 체력 때문에 아끼고 아꼈으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
기공을 잔뜩 머금은 지팡이가 진동한다. 어둠 속에서도 섬광이 번쩍였다. 프론타인의 지팡이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뒤에 폭풍을 휘감은 지팡이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타. 만일 울펜이 몸을 피해낸다면 기운을 폭파시킬 것이다.
암살자를 붙잡고, 그 위로 가하는 일격.
“…흑정공.”
그러나, 울펜의 몸에서 스며나온 어둠이 섬광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벼락이 한순간 어둠에 삼켜진다. 기묘하게 기공을 끼워 넣은 울펜은, 떨어지는 프론타인의 지팡이를 단검으로 흘려냈다.
지팡이가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비껴 나간다. 프론타인의 얼굴에 절망이 감돌고, 그 순간 그림자의 칼날이 노장의 몸을 사정없이 파헤쳤다.
마른 몸에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노장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다.
“커허…. 제기랄….”
끊어져가는 호흡을 붙잡으며 노장이 신음했다.
울펜 펜슈타인은 암살자. 준비된 일격을 가하는 데 특화되었기에 정면대결에서 약하다….
“…그리, 생각했던 것이. 패착인가….”
“본이 정면으로 싸우지 않은 것은, 단지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감정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울펜. 프론타인은 피를 토하며 대꾸했다.
“나도… 안다. 세상에… 나 같은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이들이 많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그가 키운 아이들 중에서도 나올 수도 있었다. 장성을 넘어, 육장성에 비견될 아이가 나타날 수 있다.
최근에 육장성으로 인정받은, 최연소 육장성인 총사처럼.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이 저물기 전에 피워주는 게 어른들의 일.
그렇기 때문에, 프론타인은 죽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리는… 네 정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저 아이들은, 네 정체를 몰라….”
그가 불러온 퇴역군인들은 전부 죽었다. 이미 퇴역했음에도 여전히 군인이었던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한 채로 울펜의 앞을 가로막았다.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보험을 달아두었기에.
“살인멸구를 할… 필요는 없다….”
다 죽이는 게 네 목적은 아니지 않냐며, 프론타인은 끝까지 아이를 감쌌다.
죽어가면서도 호소하는 노장을 향해, 울펜이 감정 없는 눈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면야.”
어차피 울펜의 목적은 터부를 퍼뜨리는 것이었으니, 그가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터부를 들킨 군국이 저들을 상대로 어찌 나올지는 모르나, 울펜이 그마저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울펜의 마음이야 어쨌든.
프론타인은 울펜의 말을 듣고, 안심한 채로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잠은 인생보다도 길었다.
노장이 죽었다. 물론 울펜은 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음 목표만 바라보았을 뿐.
다음은 마켓이다. 어둑한 거리로 울펜의 신형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렇게 마켓으로 향하던 울펜의 눈에.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