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193)
EP.193 살고 싶다고 말해 – 9
울펜을 속이기 위해서는 끝까지 그를 마주봐야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눈을 감아도 스며드는 종류의 빛이라는 거.
덕분에 과한 자극을 받은 내 눈은 파업을 선언했다. 잔광이 명멸하며 내 시야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울펜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헛되이 비틀거렸다.
나는 타인의 시야를 훔칠 수 있지만, 훔칠 시야가 없다면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마침 근처에서 그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나 역시 내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응, 괜찮아. 지팡이 쓰면 돼.
미리 만들어 둔 마술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어떻게든 미리 봐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후우. 지팡이를 미리 만들어두길 다행이야. 시각장애인 체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도 길을 잃을 뻔했다.
어쨌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거주지 안까지 도망친 나는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는 도중 밖에서 쿵짝와작우드득와장창 소리가 들렸지만 어쨌건 지금은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계단이 같은 규격이라 다행이다. 한 번 발을 제대로 디디면,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여 꼭대기까지 이를 수 있으니까. 앞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와악!”
아, 마지막에 계단 다 끝난 줄 모르고 헛디뎠어!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잖아!
어쨌건, 반쯤 장님이 된 채로 계단을 오르니 어느새 옥상이었다. 그동안 시력은 천천히 회복되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며 옥상 문으로 나섰다.
옥상이 보였다. 콘크리트 빛 옥상은 좁고 각진 지평선 가진 채 나를 맞이했다. 물탱크와 파이프가 덩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고, 청소용 장비가 두꺼운 천 아래 쓰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주지의 평범한 옥상을 가로질러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침 울펜이 히스토리아에게 제압당한 채 누워있었다.
나는 쓰러진 울펜에게, 달빛 비추는 밤을 배경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울펜. 과정에 후회는 있을지언정 결말은 납득할 수 있겠지. 너는 너보다 강한 자의 손에 죽는 셈이니까.
나름 칼밥 먹고 산 사람이라, 울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무력함을 두려워했다.
규격 외의 강자에게 허무하게 짓밟히는 자신이 싫어서, 또 이보다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 분해서. 그렇지 않아도 비틀려 있던 그는 약자들 위에 군림할 계획을 세운 거다.
후. 그러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건데. 왜 꼭 깡패처럼 다 들쑤시고 다니냐고. 나처럼 조용히 슬로우라이프를 보내란 말이야.
“자. 어쨌건. 이제 어떻게 도망가냐인데.”
내가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아무 방이나 잡고 그 안에 숨어?
흐음. 그래도 안 될 거 같은데. 군국이라면 방 하나하나를 다 뒤져봐도 이상하지 않으니.
이걸 어쩐담.
에이비 대위는 내 정체를 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쟤도 내 정체를 안다는 거지.
그리고 나를 땅끝까지 쫓아올 의지도, 능력도 있고.
“체크메이트네.”
후우.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통신병의 감시를 뚫고 군국을 탈출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미 마력도 바닥이고, 몸도 만신창이라서.
에이비 대위야 몰라도 다른 통신병은 모르는 사람이라, 내 존재를 발견하면 곧장 추적할지도 모른다.
마술사, 절체절명의 위기.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세기의 대탈출 쇼를 벌여야 하나. 너무 어려운데.
그때였다.
내 그림자 아래에서 흑기사가 나타난 건.
오랜만에 보는 형상이었다. 그림자를 뭉쳐 만든 듯, 새까만 갑주를 입은 기사가 고요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너무나도 뜬금없는 등장에 할 말이 없어서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냐. 이 흙잡졸은.”
흑잡졸은 처음부터 내 그림자에 숨어있었던 듯했다. 지금까지는 거리에 드리운 어둠에 가려져서 안 보였는데, 옥상으로 올라오니 돋보이는 어둠이 내 그림자밖에 없어서 드러난 것 같았다.
“어라. 저기요? 혹시 티르예요?”
손을 흔들었지만 흑기사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이쪽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거나, 거리가 꽤 멀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흑기사를 뿌려놓은 걸까… 내가 골똘히 생각하던 무렵.
아래쪽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네가 나를 부른 게 아니면, 누가 한 건데?”
“마술사…. 큭. 본은 결국, 끝까지 네놈에게 놀아난 것인가….”
총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울펜의 읊조림은 총사에겐 대답이 되었다.
“마술사?”
골똘히 생각하던 총사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대로변, 한쪽 가장자리에 뒷면을 보인 채 덮여있는 한 장의 카드. 그녀는 요령 좋게도 발끝으로 카드를 튕겨내고는 낚아챘다.
클로버 1, 빛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내 마법의 매개물.
“하.”
총사는 옥상에서도 다 들리도록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너밖에 없지. 이딴 일을 할 사람은.”
아, 저거.
매개 마법은 마법의 대가를 매개체가 대신 받는다. 그래서 방금 전 어마어마한 빛을 일으킨 카드는 아직도 반딧불이 같은 잔광이 맺혀 있었다.
주워둘 걸 그랬나? 하지만 1회용이기도 하고, 밤중에 빛이랑 마력을 줄줄 흘리는 카드를 품에 들고 있으면 나 잡아주쇼 하는 거랑 똑같다. 그래서 일부러 뒤집어서 구석에 처박아버렸는데.
들켜버렸다.
“이건 주로 네가 쓰던 방식이지, 휴이. 역시, 그때 죽은 게 아니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헛웃음을 지은 총사는 즉각 총을 뽑아 하늘을 겨눴다.
타아아아아앙.
이번 총소리는 이전과는 달랐다. 단지 총구로 기운을 흩뿌렸을 뿐인, 공기 말고는 아무것도 쏘아내지 않은 공포탄(空砲彈).
총구로 푸른 기운이 유리창처럼 깨져나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총성이 어두운 밤거리를 찢고는 널리 울려퍼졌다.
물에 잠긴 듯 먹먹한 귀로, 총사의 희열 어린 절규가 들려왔다.
“당장 튀어나와! 휴이, 이 빌어먹을 새끼야—!!!”
내 계획은 성공했다.
폭로지, 검은 고양이. 군국에서도 주시하는 가십이 담긴 잡지에다 정보를 흘렸다.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은 휴이. 아직 기억하는 이들이 들으면 절대 좌시하지 못할 이름을 미끼로 내걸었지. 덕분에 군국은 발작적으로 출동했다.
그런데 군국이 예상보다 조금 더 늦게 오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고. 왜 이리 움직임이 굼떴던 거야.
내가 위험하게 되었잖아….
본그림자 말고. 육장성에게 말이야.
쳇. 내가 혼자 그림자를 다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면 친구 찬스를 쓸 일도 없는데.
그리 중얼거리는 사이, 총사가 골렘을 향해 외쳤다.
“통신병! 관제를 시작해!”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제 술기운이고 나른함이고 뭣도 없었다. 두 눈에 격정과 분노를 가득 담은 채 총사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잡는다! 구역을 통째로 봉쇄하고 경로에 보급품 배치해! 근처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인적사항을 나에게 보내고! 헌병대보고 제 할 일 끝나면 전부 내 쪽으로 오라고 연락해!”
『피리 부는 사나이….』
잠깐 말을 끈 대위는 곧 자세를 다잡고는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소장님, 장성기를 장비하시겠습니까?』
“늦어! 대신, 골렘을 싹 다 긁어와! 그 자식은 무슨 수를 쓸지 모르니까!!”
육장성의 명령이다. 총사가 골렘에 대고 말하자 군국이 움직였다. 밤중이라 멀리 보이지 않음에도, 어두운 도시가 웅크린 괴물처럼 꿈틀대는 것 같았다.
사냥감이 된 입장에서, 사냥꾼의 명령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아. 업보 청산의 시간인가. 너무 많이 해 먹기는 했어.”
울펜과 싸운 이상, 정체를 들키는 건 상수였다. 이렇게 바로 알아낼 줄은 몰랐지만, 냄새를 엄청 잘 맡았네.
이게 다 울펜이랑 군국 때문이다. 울펜이 갑자기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군국이 제때 출동만 했어도 내가 나설 일 없잖아.
어쩌지? 히스토리아 상대라면 딱 한 번. 딱 한 번은 떨쳐낼 방법이 있긴 한데. 문제는 다른 추적자들은 못 떨친다는 거지.
끝장인가.
그 순간, 옥상 난간 근처에서 무언가가 목을 돌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가만히 그게 뭔지 살폈다.
골렘이었다. 머리 위만 달린, 순수한 감시용.
여기도 있냐? 와. 도대체 몇 개를 숨겨놓은 거야, 군국.
당장 도망쳐야….
『귀하. 본관입니다.』
“에이비 대위?”
『긍정. 본관이 이 골렘과 동조한 동안, 다른 통신병은 동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주는 잠시 멈추어주십시오.』
즉각 달아나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간결하게 설명한 골렘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귀하. 상황이 급박하니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히스토리아 소장님께서 찾는 휴이가 귀하입니까?』
“아. 네.”
『그렇다면 귀하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입니까?』
“아하하. 그, 긍정. 사실 피리를 분 게 아니라 호각을 불긴 했지만요.”
어쨌든 내가 불긴 했지…. 순순히 수긍하자, 골렘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말을 끌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래쪽에서는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위는 시간에 쫓기듯 다급히 말했다.
『…본관은 귀하를…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귀하가 소장님의 추적을 피해서 도주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됩니다.』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지 않는 한,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따라, 요청합니다. 귀하, 자수하지 않겠습니까?』
자수해달라고? 군국 대위가, 사상 최악의 사상범에게?
골렘 너머에서도 대위의 걱정이 전해졌다. 거 참, 약을 조금 쳤는데도 범죄자 걱정까지 다 해주네. 사람이 얼마나 순수한 거야.
하지만, 마음은 고마운데.
“군국이 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걸요. 저는 피리 부는 사나이니까요.”
억울하지. 앞에서 호각만 좀 불어주었다고 내가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고. 그래서 나도 죽은 척, 중등학교 1등 스펙조차 포기한 채 휴즈로 신분 세탁해서 수도로 올라와야 했다.
이제와서 자수해봐야 ‘그래, 앞으로 잘하자’라는 말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학생 161명, 국가적으로는 참 사소한 손실이나… 동시에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니.
『…그렇다면. 본관이.』
“아하하. 그러니까 열심히 잘 살아요, 에이비 대위. 저는 이만 물러날 때인 것 같네요. 가야 할 때를 아는 자는 뒷모습만 보여야 하는 법이죠.”
바닥난 마력을 짜내며 다이아몬드 2 카드를 변환시켰다.
다용도 갈고리. 그걸 밧줄에 매단 채 빙빙 돌렸다. 목표는 반대편 건물. 거기에 밧줄을 연결하고, 몸을 던져서 내려가자.
『…확인했습니다. 귀하라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겠지요.』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어쨌든 살기 위해 발버둥은 쳐봐야지요.”
『무운을 빕니다.』
“저도 제법 즐거웠어요. 나머지는 부탁드릴게요. 에이비 대위, 세피한테도 안부를 전해주시고요.”
빙글빙글 돌리던 갈고리를 던졌다. 철컹, 차가운 쇳소리와 함께 갈고리가 반대편 난간에 단단히 걸렸다.
그러는 동안, 대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일 도주할 거라면 동쪽으로 가십시오. 귀하를 도울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골렘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직후.
“찾았다.”
히스토리아가 사냥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