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07)
EP.207 강처럼 흐르는 땅 – 9
태양이 내려앉았다.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불이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의 하늘을 장막처럼 뒤덮고는 점차 부피를 불려갔다. 화염의 폭풍이 대지를 구워버릴 듯 몰아쳤다.
“이건…!”
뒤쪽 컨테이너를 흘긋 본 티르가 재빨리 양손을 펼쳤다. 관의 뚜껑이 벌컥 열리며, 불길하게 휘몰아치는 어둠이 흘러나왔다.
어둠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적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켜 화염을 밀어냈다.
태초 이래로 끝났던 빛과 어둠이 싸움이 재개되었다. 솟아난 어둠에 불꽃이 빛을 잃고, 번뜩거리는 화염에 어둠이 갉아 먹히며 서로 뒤엉킨다.
결국 남은 건 잿더미. 구름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잿빛 연기가 뒤로 흘러가며, 그 뒤에 숨어있던 인영을 드러냈다.
눈가에 단단한 주름이 잡힌 노인이었다. 고집 센 인상에 굳은 입가는 얼굴만 보고도 그녀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군국 최강의 마법사는 자기 몸에 세 배는 될 법한 망토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았다.
“오랜만입니다, 시조 티르칸쟈카. 그대는 나를 보지 못하였으나, 나는 관 속에서 잠든 그대를 먼발치에서나마 뵈었지.”
가장 어리석으며, 가장 현명한 마법사. 제식마법의 창시자.
작지만 무수한 빛으로 밤하늘을 은은하게 비추는 은하수, 마장 프렐비요르가 티르를 내려다보았다.
“투항하시지요. 본대가 오고 있으니.”
불꽃이 승부를 겨루다 몰아치는 바람에 흩어졌음에도 어둠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불쾌감은 있는지, 티르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대답했다.
“어딜, 같잖은 마법 하나 가지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만한 마법을 쓰는 이가 너 하나였던 것 같으냐?”
“물론 아니겠지요. 그대 역시 흡혈귀의 군주이지 않습니까. 홀로 군단에 맞서는 게 얼마나 무색한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 터.”
흘러가는 땅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위에 둥둥 떠 있다. 즉, 현재 메타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속도로 하늘을 날아가고 있다는 의미.
밤이라면 모를까, 흡혈귀는 태양을 싫어하는 만큼 공중도 꺼린다. 허공에는 그늘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흡혈귀도 쉬이 닿지 못하는 거리에서 고고히 선 프렐비요르가 딱딱하게 말했다.
“투항하신다면 안전은 보장하겠습니다. 빨리 결정하는 편이 당신에게도 유리할 겁니다. 우위가 사라진 다음엔….”
프렐비요르가 고개를 들어 벨트 저 뒤쪽을 바라보았다. 의도적인 몸짓에 티르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에서, 소수의 인원이 컨테이너를 훌쩍 뛰어넘으며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창을 짊어진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군국의 딸내미! 잠깐만 기다려라! 아빠들이 간다–!”
절창을 비롯한 열 명의 장성이 본대를 놔두고는 총사대의 구원을 위해 달려온 것이다.
이제 시간은 군국의 편이다. 바람 마법으로 중간까지 저들을 데려온 프렐비요르가 티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의 처지가 절박해질수록, 투항의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니.”
촤라라라락.
어둑한 컨테이너 안에 숨어 카드나 섞고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저쪽에 덮어두었던 카드 한 장을 뒤집었다.
“예상대로, 마장이었네. 하긴 그 정도가 아니면 무의미하니까.”
내가 뒤집은 카드는 클로버 퀸, 마법 그 자체를 상징하는 군국의 여걸. 지선과 함께 이 나라의 기틀부터 쌓아 올린 영웅이다.
클로버 퀸과 하트 퀸이 서로 맞닿았다. 스페이드 잭과 퀸 역시 서로 싸우는 중이다. 와중에 저쪽의 킹이 달려들고 있다.
셋과 둘. 단순 숫자만 비교해도 저쪽의 우위다.
“대강 예상은 했는데…. 진짜 전쟁이라도 할 셈이야? 이게 무슨 도박수지? 비교우위이긴 하지만, 자기네 국토에서 굳이 싸움을 벌일 만한 압도적인 전력우위도 아닐 텐데….”
마장 프렐비요르는 국가전력이다. 절창이나 총사가 아무리 강력해 봐야 일개 개인을 벗어나지는 못하나, 마장의 힘은 간단하게 산을 허물고 강을 비틀며 가끔은 시멘트를 강처럼 흐르게 할 수 있다.
땅을 다루는 지선조차도 홀로는 해내지 못할 일. 그것을 같이 해낸 게 바로 규모의 마법사 마장 프렐비요르다.
“뭐지? 진짜 모르겠어. 합리성이 없잖아…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나?”
진짜, 나 하나 잡으려고 온 건 아니겠지? 군국 쪽에서도 뭔가 알지 못할 사정이 생긴 느낌인데.
에이, 내가 군국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하냐. 지금 해야 할 건 대책을 세우는 거다.
“상성 상 절창은 티르가, 마장은 셰이 씨가 상대하는 게 나은데.”
티르야 이름 높은 기사살해자. 회귀자는 회귀를 거치며 신비를 살해해온 탐식자다.
나는 하트 퀸을 밀어서 저쪽의 본대, 킹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스페이드 잭은 뒤집어 스페이드 에이스로 바꾼 뒤 클로버 퀸에게로 밀었다.
그러니까 스페이드 퀸이 남는다.
군국의 딸, 히스토리아가.
“흠. 그러면 리아는 누가 잡아? 나? 설마 내가?”
어이가 없네. 하멜른에 다닐 때도 실기론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는데 뭘 잡아. 애초에, 나는 모든 학생의 머릿속을 컨닝하여 전교 1등을 꿰찬 사기꾼에 불과하다. 측정불가능이 뜨는 바람에 평균치를 빌어먹게도 올려버린 둘에 비하면야 나는 인간미 있는 1등이었지, 암.
“불가능이야. 나를 미끼로, 다른 카드를 써야겠는데….”
손을 바닥에 대고 크게 휘저었다. 늘어졌던 카드가 한순간 자취를 감추고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착. 모든 카드를 다시 한 뭉치로 만들며 크게 한탄했다.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지낸 정이 있지, 죽이지는 않겠지…? 그렇지, 리아?”
세상이 카드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이기고 판돈을 쓸어갈 텐데.
하지만 세상이 카드판이라고 해도 나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이 카드의 주인인 나조차 세상이라는 판 위에선 기껏해야 홀로 움직이는 카드 한 장에 불과하다.
셔플을 마치고 위에부터 아홉 장을 꺼냈다.
다이아몬드 1, 2, 3, 5, 6, 7, 8, 10. 마지막으로 J.
몇몇을 제외하곤 쪼개지거나 마력 혹은 탄환을 잃은, 손상된 다이아몬드 카드들.
울펜과 싸우며 잃어버린 카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 만드는 데 연금화 한 장 가까이 들었는데도, 손상되거나 잃어버리면 끝.
“연비 진짜 안 나오네. 눈물 난다. 내 돈….”
탁, 탁. 눈물을 머금으며 카드를 가지런히 섞었다. 그 뒤 맨 위 한 장을 뒤집었다.
다이아몬드 J, 금속을 두른 기사가 그려진 다이아몬드.
“무기는 다 써버리는 바람에 무장이 부족하지만…. 뭐, 내가 언제 무기로 싸웠나. 그냥 돌연사만 막자.”
저기에 끼어드는 순간 내 목숨은 풍전등화다. 그래도 어쩌랴. 안 끼어들면 잡힐지도 모르는데.
휩쓸려서 죽지만 않기를 바라야지.
다이아몬드 J, 풀 플레이트.
달리 말해, 군국의 군장.
다이아몬드 카드 뭉치를 통째로 생체 단말에 꽂았다. 마력이 카드 뭉치를 타고 흐르며 아키아바타를 뒤덮는 갑갑한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내 마력이 한점으로 빨려들어갔다.
몸의 수분이 전부 빠져나간 듯한, 전신에 허탈감이 느껴진다.
이야. 고작 이것 가지고 마력이 반토막이 나? 심지어 마력 대부분은 카드 자체가 머금고 있는데?
나도 마장만큼 마력통 좀 줘…라고 하기엔 그분이 걸어온 길이 좀 가시밭길이지. 그만큼 피땀 흘려서 살 바에야 그냥 독심술로 즐기면서 살자.
결심을 끝마친 내가 일어설 때, 아지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멍? 가게?”
“그래.”
“무리! 너, 부실해!”
“알아, 인마. 그래도 어쩌냐. 위험을 알고도 가야 할 때는 가야 하는 법이다. 이게 인간의 존엄이야. 그리고.”
으쓱거리는 어깨 위로 견갑이 생겨났다.
얇고 가느다란 갑옷이었다. 왼손에는 버클러가 한 몸처럼 매달리고, 철사와 사슬이 몸을 따라 생겨난 철판을 단단히 조였다.
다이아몬드 카드는 무장을 의미한다. 그중에서 J를 필두로 한 풀 플레이트 아머는,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한 번 정도는 내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
인간은 갑옷을 입어야 용감해지는 법. 묵직한 무게감만큼 마음속 용기도 솟구쳤다. 움직일 때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
“나는 태생이 도박사라. 몰린 상황일수록 과감한 배팅을 한다고.”
내 각오를 다진 말이었는데 왠지 아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멍, 이해해! 나, 과감!”
“내 이야기를 하는데 왜 네가 으쓱해하냐?”
“그런데, 나! 멍! 물렸어!”
“네가 물면 물었지 누구한테 물려.”
“멍멍!”
“왜 나를 보면서 짖냐? 내가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개는 안 문다.”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옷은 내 얼굴까지 뒤덮기 시작했다. 강철 가면이 얼굴을 감싸며 변환이 끝났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갑옷이 무겁다. 마력이 반토막나서 허탈하다.
그래도 어쩌랴. 살고 싶으면 입는 수밖에.
와중 아지가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휴짓조각, 싫어! 나, 갈게! 너 따라!”
“…그래?”
아지가 스스로 나를 도우러 나선다니? 인간끼리의 싸움에는 최대한 안 끼어들 것 같았는데.
이게 평소에 잘 대해준 보답인가? 하긴, 동물도 은혜를 안다고. 옛이야기에도 인간에게 덕을 본 동물이 보은했다는 설화가 많지.
“고마워. 돌연사는 막겠, 헉!”
정작 나는 걸어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아지가 앞발로 턱 잡아주지 않았다면 곧장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지는 측은하고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멍. 그냥, 숨어있자?”
“미안미안. 내 실수. 이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돼.”
개에게 걱정을 받다니. 일생일대의 수치다.
오랜만에 갑옷을 입어서 그런가 익숙해지지를 않았을 뿐이야. 적응하면 된다고!
“죽지만 말자, 죽지만.”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리아를 위한 깜짝 선물을 들고는 컨테이너 밖으로 나섰다.
강처럼 흐르는 땅 위, 전설에나 나올 법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