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26)
EP.226 자리 정하기
지도로 보았을 때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군국의 내부를 지탱하는, 가로로 넓적한 도넛 모양의 도로다. 강처럼 흐르는 땅이라 ‘도로’라고 칭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 규모는 전국을 일주할 정도로 거대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쭉 나아가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흡혈귀가 당당하게 군림하는 안개 공국이 나온다. 시조 티르칸쟈카의 나라다. 거기에 들어서는 순간 군국의 추격은 불가능. 따라서 그곳이 목적지…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니까 벨트를 이탈하여 해안도로로 가겠다…고 페이크를 걸고, 사실은 벨트에 남아있는 척… 페이크를 걸고.
정작 우리는 인코스도 아닌 지름길로 돌아, 저들을 앞질러… 다른 곳으로 가겠다.
물론, 이 계획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 미끼가 충분히 먹음직스러울 것.
이건 랄리온을 제물로 바쳐서 달성했다.
“잘 가, 랄리온. 그는 좋은 말이었어….”
“음? 휴, 랄리온에게 미안한 마음은 기꺼우나, 걱정할 필요 없다. 랄리온은 돌아올 것이다.”
“네? 돌아와요?”
“내 다른 권속은 죽음을 멈춰놓은 존재이나. 랄리온만은 내 늙은 노새의 무덤에서 되살린 것. 아니, 내 옅은 기억과 추억을 담아놓은 그릇… 결국 내 일부기에, 그리 떨어뜨려 놓아도 언젠간 되돌아온다.”
랄리온은 그렇게 좋은 말은 아니었어. 되돌아올 수 있는 희생은 희생이 아니지. 암. 어쨌든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기에 써먹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
행적을 노출하지 않을 것.
이것 때문에 컨테이너는 포기해야 했다. 아무리 티르가 어둠으로 감싼다고 한들, 사방에 감시의 시선이 뻗친 지금 커다란 컨테이너가 어둠을 두르고 날아가면 눈에 안 뜨일 수가 없다.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건 위장 이전에 지능의 문제다. 질감부터 달라진다고.
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결단을 내렸다.
“야! 좁아!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거 저 아닌데요.”
“…설마, 묶어놓고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으르르. 갑갑해!”
“냐-. 좁은 곳의 안락함을 모르는 냐들이 불쌍하다냐-.”
[…조금 참거라. 애초 다섯이나 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진대, 공연한 불평을 하느냐.]오늘 밤, 해가 뜨기 직전까지. 어둠을 헤엄칠 수 있는 티르의 관 속에 모조리 숨어 전속력으로 날아가기로!
가진 물건은 회귀자의 포켓에 담고, 나비는 상자에 담아 발밑에 두고. 우리는 일렬로 나란히 관에 차곡차곡 포개어졌다. 꼭 시루에 빼곡히 자란 콩나물 같은 모양새다.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
티르의 관은 시조의 역사와 함께 한 보물이며 반쯤 이계화 된 신비. 사람 다섯 정도는 쉽게 수용이 가능한 공간이다.
크기도 딱 알맞다. 이정도면 마차보다도 작은 수준이라서 숲길도 건물도 사이로 지나다닐 수 있다. 컨테이너는 불가능한 입체기동도 가능.
역시, 탈것이 큼직할 필요는 없다. 그건 다 겉멋이야. 효율적인 소형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합리적 선택!
좁다는 건 문제지만, 뭐 이정도야 대가족이 아니라면 별로 상관은 없다.
아지, 리아, 티르, 나, 회귀자 순서로 나란히 누웠다.
이는 전적으로 티르의 탓인데, 이토록 좁은 곳에서도 남녀의 유별을 부르짖으며 구획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의 컨트롤을 위해 한가운데 누웠기에 자연스러운 배치였다.
‘계획대로구나. 오랜만에 휴와 가까이 있을 수 있겠어.’
사심이 조금은 들어있었지만 어쨌든.
가로로 눕기에는 공간이 좁아 모두 세로로 누웠기에, 그 탓에 나는 티르와 정확히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건 좋으나… 하필, 관이라니. 꼭 피륙을 들어내 안쪽을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뭐가? 피부 안쪽은 이미 숱하게 보고, 심지어 만지기까지 했잖아? 아직도 내 오른손에는 그 감촉이 훤한데?
하트터치보단 관 안에 있는 게 훨씬 더 정상적이지 않아? 인간은 관 안에 들어가는 일은 있어도 다른 심장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는 일은 드물다고!
‘우으으. 관 안에 홀로 있을 때는 관이 어쨌든 아무 상관이 없었거늘…. 지금은 왜 이리 신경이 쓰일까.’
사적인 장소에 사람을 들였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티르의 마음에는 꺼림칙함이 남아있었다. 그 때문에 티르는 자꾸 내 앞에서 불평해댔다.
[나의 이 제향나무 관은 내 권능으로 가득 찬 공간이며, 오롯이 나를 위한 신전이다. 한평생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터라, 적은 물론 나의 권속조차도 이 안쪽을 목도한 적이 없지.]“그다지 볼 건 없던데요? 뭐, 관 조금 보여주는 것 가지고.”
[그런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곳은 세상에 드러난 적 없는 은밀한 비경이니, 더 파헤치려고들 말고 들어온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거라.]우리 존재가 계속 거슬리는 듯, 어둠으로 관을 움직이면서도 잊을 때쯤 불만을 토하고 있다. 뭐, 티르가 쪼잔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사적인 공간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니 조금 괘씸한데? 왜 이런 거로 비위를 맞춰줘야 해?
관 정도는 같이 쓸 수도 있지! 나도 죽기 전에 관짝에 들어오고 싶진 않았어! 내가 사정사정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필요했던 일인데!
그리 신경 쓰여? 그러면 하나하나 비집어주지!
나는 비좁은 공간을 움직여서 손으로 융단을 슬쩍 들쳤다.
“은밀하고 깊은 비밀이 뭔데요. 이 빨간 융단? 그다지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요.”
[앗. 거긴.]“아, 이 뒤쪽에도 뭐가 있었네. 어디 보자… 옷?”
[안 돼! 건드리지 말거라!]융단 너머에 있는 건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듯한 옷가지였다. 패킷이 아닌, 보관하기 위해서 가지런히 접어야 할 원시적인 의복이 내 눈앞에 그 단점을 여실히 보이며 드러나 있었다.
나는 구겨진 자국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패킷이 아닌 빨래를 넣을 때는 잘 개어서 넣으셔야죠. 다 구겨졌잖아요. 이게 뭐예요… 아.”
그래서였구나. 들추지 말라는 게.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방 정리를 안 하셔서 부끄러워하신 거였군요. 그러게 평소에 관에 그리 오래 계시면서 정리 좀 하고 사시지.”
[애초에 누구를 들일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방구석에 처박혀서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들도 다 그런 말 하더라고요. 애초에 나 혼자 사는 방인데 좀 더러우면 어때서. 맞는 말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곧장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러니까 평소에 잘 정리해두라는 말이에요! 다른 사람은 할 일이 없어서 청소하고 정리합니까? 언제 부모님이, 연인이, 귀한 손님이 찾아올지 몰라서 청소하는 겁니다! 티르는 평소에 정리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요!”
[읏…!]구겨진 옷가지를 들이밀며 추궁하자, 할 말이 없어진 티르는 이를 꼭 물고는 내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 그래 봐야 서로 거의 밀착한 상태라서 여전히 내 눈앞에 드러난 상태였지만.
후우. 내가 살면서 언제 12세기 소녀에게 훈계를 해보겠어. 이럴 기회 또 없지.
장유유서 역전세계. 신나는데?
“청소란 인생과 닮아있습니다. 언젠가 어지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자기 주위를 정돈하죠. 마치, 언젠가 죽을 것을 알고도 맹렬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그러니 티르도.”
[응? 혹 죽음을 극복하고 싶으냐? 그렇다면….]“비유가 다르잖아요! 일대일 대응 관계! 죽음이 어지럽힘이라면 티르는 영원히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이미 어지럽혀진 순간 끝난 거잖아요!”
갑자기 드리프트를 홱 꺾어버리네! 너무 급작스러워서 논리도 무시하고 수긍해버릴 뻔했잖아!
‘호오.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나는 살아있지 않았으며, 땀을 흘리지도 않고 피 이외에는 식음을 하지 않으니. 옷이든, 관 속이든 더럽혀질 일 자체가 없겠구나. 처음부터 나의 관 속은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와중에 내 논리를 차용한 티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말대로구나. 정리란 필요한 이가 하는 것. 그러나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 물과 음식조차 필요로 하지 않으며, 피와 어둠을 먹고 사는 존재. 청소고, 정리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단지, 너희 몸을 들이느라 잠시 어지럽혀졌을 뿐이다.]“오호라.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건가요?”
티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진실이니.]“그렇게 나오시겠다면야….”
좋아. 뻔뻔함을 배웠군.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우리가 관 좀 빌려 쓴다고 뭐라 하지 않겠지… 어라? 잠깐만.
더러워지지 않으니까 정리하지 않는다? 그러면 옷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면 티르, 혹시 빨래도 안 해요?”
[음?]“빨래 말이에요, 빨래. 혁신적 발명품인 의복 패킷조차도 가끔은 빼내서 세탁해야 해요. 그런데 티르는 매일 같이 입는 옷을 빨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생각해보니 탄탈로스에서도 티르가 손빨래를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나도 패킷을 쓰니까 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 아닌가. 의복의 세탁은 가사노동력을 잡아먹는 괴물. 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까?
결론은 하나다.
“옷을 숨기려는 이유가, 빨래조차 하지 않아서…. 아하.”
[모함이로구나!]“그러면 빨래를 했어요? 저는 그런 모습 못 봤는데.”
사실 시조씩이나 되는 존재가 쪼그려 앉아 빨래하면 그것도 나름 웃기겠지만. 직업에는 귀천이 있겠지만 작업에는 귀천이 없다. 해야 할 일은 누군가 해야 하는 법.
나조차도 온갖 잡일을 떠맡아서 했는데, 시조라고 배겨? 좀 배아프네?
[거, 거듭 말하나. 나는 어떤 더러운 것들도 내뱉지 않기에….]“그러면 이래도 상관없겠네요?”
흥, 이건 어떠냐.
나는 티르의 옷자락을 쥐어서 코에다가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들이마시는 시늉을 해 보였다.
티르의 머릿속 회로가 삐걱거렸다. 붉은 눈을 끔뻑이며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티르는, 고장 난 것처럼 한 박자 늦게 기겁했다.
[휴?!?! 무얼 하는 짓이냐?]“냄새 확인이요. 어디, 자칭 더러워지지 않는 옷은 어떤가 볼까요?”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기만 해봐라. 이걸 구실로 더는 얼굴도 못 들도록 해주마…. 어라.
“어? 정말 안 나네?”
뭐지? 빨래도 안 하는… 아.
시조는 피와 어둠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사방이 피로 가득한 공간에서도 피 냄새 하나 내지 않을 만큼 제어력이 강한 그녀다.
심지어 시체를 처리할 때, 피로 아예 으깨서 곤죽을 내버린 다음에 집어삼키기도 했다. 몸 안에서 나온 노폐물이든 몸 밖의 이물질이든 아예 녹여서 따로 내버릴 수 있는 존재.
“와, 몇몇 사람들은 흡혈귀가 되고 싶다고 공국을 찾아가기도 한다는데, 그 이유는 대강 알겠네요. 안 죽는 것 말고도 그냥 이것저것 편리하네….”
[놓, 놓거라! 이 무례한 녀석 같으니!]옷에서는 정말 섬유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냄새조차도 말끔하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편하겠다고 농담 삼아 말하던 게 설마 진실이었을 줄이야….
삶의 한탄하고 있는데, 앞뒤로 목소리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관의 벽면을 타고 등 뒤에서 회귀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꿈틀거리지 마! 좁단 말이야!”
“얼마나 움직였다고.”
“많이 움직였거든? 거기다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이상한 짓이나 하니까 그렇지!”
“아! 아! 찌르지 마요! 아파!”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니까 아파! 힘은 더럽게 센데 손가락은 가늘어서 더 아파! 이게 압력과 면적의 상관관계인가!
이 세로로 길쭉한 육각형 모양의 관, 저쪽 반대편 모퉁이에서 시작된 리아의 목소리가 귓가까지 전해졌다.
“…서로 친해 보이는 건 좋은데. 자리, 좀 바꿔주면 안 될까? 그쪽이 움직이니까 너무 비좁은데. 그, 말로 하기는 그런데. 여기 하필 둘이 이렇게 있다 보니.”
“멍, 좁아! 가슴, 답답해! 너, 너무 커!”
“음, 대충 이런 이유로.”
저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나지만 좁아서 볼 엄두가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