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28)
EP.228 이제 난 안전해졌다
새카만 관의 뚜껑을 열고 나오니, 그곳은 평화만이 가득한 땅이었다.
동화에 자주 나오는,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벽장에서 잠깐 머문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 튀기는 추격전을 끝마치고 좁은 공간에서 끙끙거리고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니 불아하게 요동치는 공기는 자취를 감추고 평화롭고 잔잔한 바람만이 불어왔다.
안전해졌다는 확신이 든 나는 크게 외쳤다.
“좋아요! 우리는 안전해졌어요!”
이게 평화의 맛인가. 달구나. 공기조차도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숲과 나무가 무성한 남부와는 달리 북부는 황야와 고원의 땅이다. 뭐, 군국의 영토가 그다지 넓지는 않으니 요만큼 위로 올라온다고 극적인 변화는 없다.
그래도 확실하게 달라지는 지점은 있다. 연속적으로 변하는 기후와 식생도 무저갱 평야를 기점으로는 일변한다. 하나의 선을 경계 삼아 나라를 가르는 국경처럼, 무저갱 평야를 넘으면 황량한 인공물의 초원과 평야가 펼쳐진다.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
한때 연금술의 나라였으면서, 연금술 때문에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진 열국(劣國)이.
단,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진 만큼 나 같은 떠돌이가 비집고 들어가긴 오히려 좋은 땅이지.
“여기까지 왔으면 군국에서도 우리를 쫓아오지는 못 할거예요. 뒤늦게 트릭을 눈치채고 어찌저찌 쫓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때쯤은 우린 이미 저 멀리 도망가 있겠죠. 여기서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북동부 기착지가 나오고, 그 위쪽 무저갱 황야를 지나 열국으로 도피하면… 군국에게 다른 나라의 국경을 제한 없이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저희를 잡는 건 무리죠!”
감격스럽다. 군국의 추격을 이토록 오랫동안 따돌린 사람이 나 이외에 존재나 할까? 군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일이지.
군국으로부터 탈출 경력. 이 이력이면 다른 데 가서도 문전박대당하지는 않겠어.
나를 따라 관에서 기어 나온 회귀자도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우. 집요하네. 군국 이 녀석들은 도대체 뭐야? 조용히 갈 길 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쫓아오고.”
“셰이 씨, 그건 군국이 억울할 거 같은데요. 셰이 씨가 수도에서 난리란 난리는 다 쳤는데 조용히 갈 길 간 건 아니죠.”
“뭐어? 너보단 낫거든,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씨? 너만 아니었어도 저쪽이 사냥개처럼 쫓아오진 않았을 거야!”
“제가 뭘 했다고. 저는 조용히 은둔하고 지냈거든요? 여러분이 오기 전까진 아무런 경보도 없었다고요. 그에 비해 셰이 씨는, 뭐? 수도사령부를 건드려? 그거 다른 말로 전쟁이라고 하는 거 알죠?”
“너는 피리를 불었잖아!”
“휠릴리, 휠릴리. 그렇게 말하니까 예술에 종사하는 건전한 사람 같네요. 어쨌든 제가 아미텐그라드에서 한 범죄행위는 없다고 봐도 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문제는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야! 너랑 만나기 전까지 군국은 적극적인 교전회피를 하고 있었다고! 그러던 군국이 왜 전병력을 이끌고 우리를 따라온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물론 나는 무차별적인 독심술로 정보를 끌어모으곤 한다. 내 독심술은 상대가 사람이라면 잠깐 그와 동화(同化)… 아니, 기억을 모조리 읽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군국이 왜 이딴 행동을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왜냐면, 군국은 사람이 아니거든.
우리를 잡으려던 두 육장성, 절창과 마장.
절창은 갑자기 왜 명령이 바뀐 건지 의아해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는 강자와의 싸움을 즐긴다. 나이를 먹으며 예전처럼 무모한 짓은 좀 줄었다지만, 명령까지 내려온다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장은 군국의 명령에 충실하다. 부족한 재능을 시스템과 자원으로 메운다. 군국의 이상을 정확하게 실현한 예이며, 그저 그런 마법사로 늙어 죽을 뻔했던 마장에게 군국은 은인이다. 군국과 마장은 서로가 서로를 긍정하는 관계다.
그리고 다른 장성과 병사들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니까 군국의 본의는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 나라에 본의라는 게 있는지. 나는 그것도 모르겠다.
회귀자는 여기서 가장 군국에 가까운 사람인 히스토리아를 불렀다.
“총사! 너는 육장성이니 알고 있겠지. 군국이 누구 때문에 우리를 쫓아온 거야? 나야, 아니면 얘야?”
“나도 몰라.”
히스토리아는 오랜만에 바깥에 나온 기념으로 마력초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묶인 채로도 뻔뻔하게 불 달라고 요구하는 골초를 보며, 명쾌한 해답을 기대하던 회귀자는 인상을 팍 구겼다.
“너는 알아야지! 네가 육장성이잖아!”
“육장성이라고 다 알아야 한다는 건 편견이야. 나는 말만 육장성이지, 아직 소장밖에 안 돼서.”
“너… 후우, 그래. 그러면 너는 왜 우리를 쫓아온 건데?”
“명령에 이유를 따지는 군인이 있던가.”
“아니, 그래도! 가장 열정적으로 우리를 쫓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 맞다.”
‘전 연인에게 미련이 남은 데다가, 하멜른에 관련돼서 물어볼 게 있다고 했지? 그래서 쫓아온 거고…?’
회귀자는 나를 흘긋 보고는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 연인 그 한마디로 히스토리아의 모든 행동을 이해해주다니, 환상이 있는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모르겠다.
결국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 못내 불만스러운 듯이 투덜거렸다.
“군국 이 나라는 자기 병사에게 싸우는 이유도 안 알려줘?“
히스토리아는 회귀자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신기한 관점이네. 이유가 납득이 가면 싸워도 되고, 그렇지 않으면 항명할까?”
“그건 아니지만! 누군가는 명령을 내릴 거 아니야! 육장성에, 우리를 직접 따라온 한 명인 너도 모르면 도대체 누가 안다는 거야?”
“그야 물론, 사령부가 알지 않을까.”
“사령부?”
사령부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회귀자의 얼굴에 싫은 표정이 떠올랐다. 막막함보다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찝찝함. 청소를 끝낸 뒤 구석에 조금 남은 발견했을 때 느낄 법한 언짢은 감정이었다.
어라, 예전에 군국 망가뜨렸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나? 사령부 상대로 이겨본 적 있으면서 무슨 표정이지?
‘지금껏 꽤 많이 군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멸망시키기도 했지만…. 사령부의 모습을 직접 본 적 없어. 그놈들, 군국이 멸망하면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회귀자! 13회차 동안 군국이랑 드잡이질했으면서 사령부의 정체를 몰라?! 너 이 자식…!
다행이다. 나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어.
지금껏 25년 가까이 군국에 살면서 수많은 사람의 생각을 읽어 온 나다. 군인이든, 교관이든, 아니면 왕국의 잔당이든 닥치는 대로 생각을 읽어들였다. 딱히 노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능력이 능력인지라 아는 게 좀 많다고 자부한다.
그런 나조차도 사령부가 무엇인지, 그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독심술사인 내가 말하는 ‘모른다’의 의미는 정말 짚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아미텐그라드. 군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이자, 가장 커다란 도시. 거기에 상주하면서도 사령부에 속했거나 그들과 접한 이들을 마주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사령부의 높으신 분들은 거리에 얼굴 잘 내밀지 않는 모양이다.
…최근에 만난 한 통신병 덕분에, 조그만 단서는 얻긴 했지만…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통신병조차도 사령부의 팔다리에 불과하니 원.
‘총사도 사령부의 정체는 모를 거야. 알았다면 지난 회차에서 티를 냈겠지. 그래도 밑져야 본전. 총사와 지금처럼 가까웠던 적은 처음이니, 한번 떠볼까.’
그래. 시간을 거스르며 세상 온갖 비밀을 파헤치고 보물을 모은 회귀자조차 모르는데, 일개 독심술사인 내가 어떻게 알까.
내가 만족감을 느끼고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회귀자는 이번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회귀자는 대놓고 물어봤다.
“너희들이 사령부라고 지칭하는 그거, 실존하긴 하는 거야?”
회귀자의 걱정과는 달리 히스토리아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겠지. 통신병을 통해서 명령이 내려오곤 하니까.”
“그러니까, 실존하는 거냐고. 명령을 전하는 건 통신병이지만 사령부의 본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
다만, 얻기 쉬운 것은 그만큼 적은 가치를 갖고 있었다. 히스토리아조차도 사령부의 정체에 대해서는 나만큼이나 모르고 있었으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장성이 된 지 꽤 지났지만, 아직 대부분 내 얼굴도 모를 텐데. 누가 내 얼굴 보고 경례를 하겠어. 내 가슴에 달린 별을 향해 경례하는 거지.”
히스토리아가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을 보란 듯이 가슴을 쭉 펴서 내밀었다. 꽉 매인 천잠사 사이로 윤곽이 돋았다.
그러나 히스토리아가 잠깐 깜빡한 게 있었으니. 그녀의 제복은 군국을 낚을 미끼가 되어 반대편으로 내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에휴, 내가 못 살아. 아직도 칠칠치 못해서는. 이럴 때 도와야 진정한 친구겠지?
어디 보자. 이럴 때는 직접 언급하면 무례하다고 하니까, 아까 했던 대화를 참고하여 살짝 돌려서 말해주자. 요즘은 이게 매너란다.
나는 히스토리아의 가슴에 대고 경례했다.
“충성.”
내 비언어적 표현은 효과적으로 의무를 수행했다. 히스토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히스토리아는 자기가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천잠사라는 전설적인 실로 묶여있다는 것도.
잠깐 얼굴을 붉힌 히스토리아는, 마력초를 꽉 물고는 나를 냅다 걷어찼다. 아무런 사전동작 없이 솟구친 다리인데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내 허벅지를 가격했다.
“악, 악! 말로 해, 말로! 발 말고!”
“…”
“아야야! 포로 발 안 묶은 사람 누구야! 육장성 급이면 전신이 무기인 거 몰라?!”
제길, 몸이 휘청거린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해도, 제압해보려고 해도 다리는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내 허벅지를 집요하게 노렸다.
내가 히스토리아의 발에 시달리는 동안 회귀자는 꼴 좋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흥. 자기가 버려놓고 헤벌레하는 꼴이란. 후회해도 늦었어. 너 같은 녀석한테는 과분해.”
“제발 당신 머릿속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전여친 필터는 이제 그만 치워주시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매듭도 당신이 묶은 거잖아요! 단단히 묶겠답시고 벼르다가 ‘어? 너무 센가?’ 싶어서 다리 쪽은 방치한 주제에!”
‘어? 그걸 어떻게?’
“뭐, 뭐뭐가! 육장성 상대로는 이 정도도 구속도 부족하거든!”
“네! 부족해요! 지금 제 몸으로 증명되고 있네요! 아야야!”
어쨌건, 히스토리아도 사령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게 드러났다. 회귀자는 실망해서 투덜거렸다.
“육장성도 정체를 모르는 사령부라니, 대놓고 수상하잖아! 왜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는 건데?”
“뭐, 정체를 모르니까 의심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요?”
“정체를 모르면 더 의심스럽잖아!”
“그건 셰이 씨가 국가전력급 강자이기 때문이죠. 수틀리면 나라를 뒤집어엎을 만한 사람이니까 눈높이가 맞는 거지, 평범한 사람들에겐 군국이니 사령부니 너무 큰 개념이라고요.”
사령부란 군국을 다스리는 수뇌부를 총칭하는 말이다. 군국에서 공고나 명령, 지시가 떨어지면 다들 ‘군국이 시켰다.’ ‘사령부가 명령을 내렸다’라고 말하며 일단 따르고 본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 같은 존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니, 폭군은 맞는데, 조금 다르다.
폭군은 눈앞에 버젓이 존재한다. 그들은 타고난 힘과 난폭함을 휘두르며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준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기에,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폭군의 악심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쓴다. 폭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을 부리며, 그의 무관심을 틈타 재물을 모으고, 사치와 향락을 부리며 나라를 차근차근 좀먹는다. 윗물에서 흐른 때와 기름은 그대로 아래쪽으로 스며 들어가 점차 물 전체를 더럽힌다.
그러나 사령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통신병을 통해서, 그마저도 통신병 본인이 아닌 통신용 마도 골렘을 경유하여 명령을 내린다. 대위에 불과한 통신병은 난폭하지도 않으며 가할 힘도 누릴 권력도 없다.
심지어 나도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창문 없는 방에서 속세의 모든 것으로부터 박탈당한 채,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사령부의 명령을 전한다. 청렴결백을 넘어 결벽적인 전령의 삶이다.
장교들은 지위도 낮은 주제에 또박또박 명령을 내리는 통신병을 혐오하나,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한다. 통신병조차 골렘의 모습으로만 등장하며, 인간이 아닌 것을 증오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노릇이기에.
통신병과 골렘조차 그러할진대 사령부는 오죽할까.
“상대가 자기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날수록, 시야에 담기에 너무 크고 강대하며 복잡할수록 느끼는 감정이 달라져요. 보통 사람들은 시야 너머의 존재를 신이라 부르고 추앙하죠. 신이 생명을 앗아가고 재산을 파괴해도 안타까워할 뿐 분노하진 않죠. 셰이 씨도 폭풍이나 벼락을 보고 공격할 마음을 품지 않잖아요?”
“응?”
‘아니? 벼락까지는 잡아봤는데?’
아, 맞다. 저건 신조차 모독하는 사상 최악의 존재, 회귀자였지. 저쪽에 상식을 갖다대면 안 되겠다.
군국과 맞서 싸울 힘을 갖고 있으면서, 진심으로 한 나라를 ‘적’으로 대하는 게 가능한 거물.
거물 맞지? 그냥 유치한 거 아니지?
무슨 상관이람. 유치해도 힘이 세면 그게 곧 거물이 되는 거다. 만일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힘이 부족한 게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에게 군국이란 그런 천재지변과 비슷한 거예요. 장교들도 기껏해야 통신병한테 불만을 품는 게 전부고, 사령부를 탓하지는 않잖아요.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미워할 수 있는 거예요….“
어라, 잠깐만. 나는 내가 뱉은 말을 잠시 되새겼다.
신. 그리고 종교.
군국에는 신이 없다. 성황청은 배척받았고, 지모신도는 토목회사가 되어 이 땅에 왔으니까. 다른 민간신앙은 악마나 요정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그러면…. 이 나라의 종교는….
생각이 점차 깊어지려는 순간 회귀자의 투덜거림이 내 상념을 방해했다.
“…그런데 이 육장성은 국가전력인데 왜 몰라? 알 만한 위치잖아. 사령부도 모르고, 하멜른에 대해서도 모르고. 도대체 아는 게 뭐야?”
회귀자가 무심코 투덜거린 한 마디는 히스토리아의 정곡을 찔렀다.
평소 같은 회귀자와 평소 같은 언행이다. 상대가 나나 티르였다면 하하 웃으며 넘겼겠지. 하지만 대화는 상대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는 법. 히스토리아는 참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응?”
“통신병을 다그칠까? 그 불쌍한 녀석들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서 진실을 토해내라고 협박할까? 아니면, 사령부를 쥐 잡듯이 뒤져가면서 뒤엎은 다음. 다 죽여가면서 진실을 알아낼까?”
“왜, 왜 화내고 그래…?“
화낸 사람에게 왜 화났냐고 묻네. 설마 했는데. 놀랍다.
“모두가 다 너처럼, 휴이처럼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을 줄 알아?! 못 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가는 게 이상한 거야! 어떻게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추억과 인연을 버리고…. 떠날 수 있어?”
말은 회귀자에게 하고 있지만, 저 말은 나를 향한 것처럼 들렸다. 회귀자의 잘못이라면 저 감정의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도발한 것밖에 없다.
좀 많네.
애꿎은 회귀자에게 감정을 다 쏟아낸 히스토리아는 다시 감정의 영점을 조절했다. 그녀의 가라앉은 눈이 나를 향했다.
“너를 비롯한 몇몇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어! 하지만,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어. 누가 물어보면 다 죽었다고, 구해보려고 했지만 시체밖에 없었다고.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어! 미심쩍은 시선이 나에게로 향할 때도, 입을 꾹 다물고 내게 주어진 지시를 성실하게 따랐어…! 내 증언의 진실성을 뒤늦게나마 지불해야 했으니까!”
동기들이 자살 비슷한 방법으로 사라지고, 덕분에 홀로 고립된 채 사관학교로 올라간 그녀는 군국의 명령을 묵묵히 따랐다. 그녀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몸을 아끼지 않은 작전 수행 덕분에 ‘군국의 딸’이라 불리며 전 장병의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히스토리아는 중등학교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성실한 녀석은 아니었다. 제 잘난 듯이 굴며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기도 했고, 수업도 밥 먹듯이 빼먹었던 전형적인 불량스러운 천재였다. 성실한 모범생은 내 쪽이었지.
그런 그녀가 모범적인 장성이 된 건….
“일이 잠잠해지면 누군가는 찾아올 줄 알았는데…! 혹시 내 행적을 모를까 봐, 육장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하지만 너는, 나를 찾아올 기미가 조금도 없고…! 나를 찾아오는 건…!”
‘계속… 기다리고…. 다시 만난 직후부터 이 멍청이는 계속 도망치고 뿌리치고…!’
이제 히스토리아가 마력초를 깨무는 건지, 아니면 입술을 깨무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밧줄은 그녀의 팔을 묶었지만 감정은 고삐가 풀린 채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그 시선을 받았다.
“…사실 나도 나름 바쁘게 살긴 했는데. 왠지 이렇게 되니 내가 엄청 나쁜 사람이 된 거 같은데.”
“맞아. 천벌 받을 거야.”
회귀자가 얄밉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추임새를 넣었다. 부추기는 시누이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