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29)
EP.229 평범한 삶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지, 나에게 평범한 삶을 강요한 그녀는 ‘나’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삶이란 그 자체로 평범한 것.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그 모든 과정이 삶인데, 무엇을 평범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녀는 ‘나’에게 굴레를 씌워야 했다. 아득한 시간동안 거듭된 문답 속에서 가능성의 끝에 다다른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히스토리아가 감정을 쏟아냈지만 그녀의 불만은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살아남기 위해 뒷골목에서 구르고 굴렀는데….”
내 과거 역시 그에 못지않게 불우하단 점이다. 히스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히스토리아는 마음고생이야 어쨌든 승승장구하면서 장성까지 진급했다. 그 와중에 왕국의 잔당 제거, 첩자 처단, 비밀조직 검거, 타국 견제 등 수많은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어쨌든 그야말로 장군의 행보. 찬란한 경력이 뒤따랐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가. 살아남기 위해 군국 뒷골목에서 감정노동 육체노동 정신노동 탈법노동 등 몸과 마음, 그리고 양심과 준법정신까지 상해가며 일을 해야 했다. 빨대 하나 잘 꽂아서 크게 득을 봤지만, 그래도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뿐이야! 시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뜨내기가 수도에 자리 잡기 얼마나 어려웠는데. 연락을 안 한 건 맞지만… 애초에, 평범하게 사는 뒷골목 시궁창 인생은 육장성은커녕 장성과 마주치기도 힘들어.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못 만난다고.”
사람마다 고난의 이유는 다 다른 법. 둘 중 누가 더 고된 삶을 살았나 비교해보았자 종국에는 꼴사나운 징징거림으로 바뀌어버린다. 하물며 힘부터 지위까지 완전히 다른 우리 둘은 고난의 종류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
히스토리아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말없이 수긍했다.
‘…저 꼬마 때문에 나빠진 기분을, 휴이에게 화풀이해버렸네. 진정하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검증된 방법으로서 경건하게 마력초 연기를 들이마신 히스토리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국경을 넘어 도망치겠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줄 의향 있어.”
“어떻게 순순히 보내주는데?”
“보고를 늦추고, 복귀를 늦게 하고, 너희 전력을 부풀린다면. 군국도 추격을 단념하겠지.”
“군국이 단념할까? 놓쳤다고 가만히 보고 있을 거였으면 처음부터 안 막지 않았을까?”
군국은 합리적이다. 군국의 수뇌부인 사령부 역시 그러할 터. 만일 그들이 우리를 쫓는다면,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심지어 육장성 중 셋이 모였을 때도 몰랐다. 히스토리아가 우리를 쫓은 건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지만, 독심술로 슬쩍 읽어본 결과 절창도 마장도 사령부의 의중을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 그러한 이유가 있겠다, 하고 따랐을 뿐.
뭐, 육장성 정도의 전력이라면 억지로 알려달라고 요구해도 알려주겠지만. 이 안개처럼 막연하고 희미한 믿음 속에서 모두 임무를 수행했다.
“…군국의 의도야 어쨌든 달라지는 건 없어. 군국이 군대를 이끄는 이상, 너희가 국경을 넘어 도망친다면 따라잡지 못해.”
“그야 당연하지. 군대를 타국에 들이는 건 전쟁이라고. 추격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설마 우리 잡으려고 전쟁을 일으킬 것도 아니고서야.”
절대 못 따라오지…라고 내가 호언장담할 때였다.
“…전, 쟁?”
회귀자가 눈을 크게 끔뻑였다. 무언가를 잊어버렸다가 극적으로 재회한 사람이 보이는 태도였다. 잠시 뒤, 그녀의 눈이 낯선 빛을 마주친 짐승처럼 가늘어지며, 한층 날카로운 목소리로 캐물었다.
“잠깐. 병력이 극동을 향해 모인다고 했지?”
“응.”
“그러면 모인 병력은? 어떻게 돼?”
“육장성 휘하 그 본대는… 목표가 사라지면 해산해야지.”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에 한 군단이 모였는데. 아무것도 건진 것 없이 그대로 해산한다고? 과연 그럴까?”
히스토리아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군국은 합리적이다. 쓸데없는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다. 애초에 손해가 될 것이 확실하다면 움직이지 않는다.
전략적 교전회피가 농담이 아니라 당당하게 교범에 존재하는 나라다. 군대가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낭비하는 힘이라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은 매우 극심하고 의미 없는 손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사령부는 왜, 막대한 손해가 될 것을 감수하고 군단을 모았는가?
‘전쟁이야.’
나조차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실을, 회귀자는 명쾌하게 꿰뚫어 보았다.
‘애초에 군단이 모인 건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우리를 사로잡는 척 군단을 모은 거야…! 우리가 미끼였어!’
회귀자가 이렇게 똑똑했나?
나는 독심술사. 나 자신은 그저 상대방의 예측을 미리 읽고 살짝 웃도는 마술사일 뿐이다. 0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도 아니며, 이 세상의 가장 앞쪽에서 무언가를 선도해나가는 선구자도 아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을 조금 잘 활용하는 평범한 사용자.
마음을 읽는 나는 모두가 상상하는 수준밖에 상상할 수 없다. 그에 반해, 회귀자는 죽음을 몇 번이고 뛰어넘은 그간의 경험이 무색하지 않은지, 몇 가지 정보만으로도 군국의 의중을 간파했다.
그토록 모자라 보였던 회귀자였는데, 이런 수준 높은 직관을 선보일 줄이야…!
자존심이 상할 지경….
‘왜냐면, 이전 회차에서도 이 시기에 첫 번째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고작 이레 만에 모든 전투가 끝난 이레전쟁이!’
야.
전 회차에서 보고 왔다면 미리미리 떠올려두라고! 인제 와서 기억을 되살리지 말고!
작전이 실패했다. 군국이 속았다.
통신병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온 군국의 장성들은 커다란 패배감을 느꼈다.
아무리 상대가 강대하다고 한들 고작 셋, 그리고 두 마리다. 그에 비해 지금 모인 병사의 숫자는 총 일만. 숫자 비를 세는 것조차도 의미가 없는 차이다.
거기다 5레벨 정예부대인 베르나르테른 1개 부대가 대기 중이다. 이대로 전쟁이 벌어져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강대한 전력이 극동에 모였다.
그러나… 정작 적의 모습이 사라졌다.
컨테이너를 이끌고 가던 붉은 말은,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마자 달리기를 멈췄다. 햇빛을 불만스럽게 쳐다본 혈마 랄리온은 공연히 바닥을 긁고 근처 나무에 머리를 두어 번 박다가, 하늘을 향해 ‘히히힝-‘하고 구슬피 울고는 사라졌다.
랄리온은 미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들을 쫓던 건 통신용 마도골렘을 대동한 세 명의 장교가 전부였으니까.
붉은 말은 미끼.
군국의 딸, 총사 히스토리아 소장이 직접 잠입하여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랄리온이 끌고 가는 컨테이너는 군국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다. 따라서 전력을 투자할 필요성이 없다. 통신용 골렘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정보는 정확했다.
컨테이너는 텅 비어있었고, 기껏해야 히스토리아의 제복 한 벌이 깃발처럼 휘날릴 뿐. 무게감 없이 덜컹거리는 컨테이너에는 조잡한 인형 말고는 사람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속았다면 배알이 뒤틀렸을 정도로 불성실한 미끼였다.
장교는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는 즉각 통신병을 통해 보고했다.
그러나… 정작 연락을 받은 본대는 침울한 분위기였다.
“…큰일 났다. 딸내미가 진짜로 납치당했어.”
극동 기착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심지어 그들보다 늦게 출발한 본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렸음에도 적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흘러가는 컨테이너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일일 노역자 체험을 끝난 군단은 본대와 어색한 합류를 끝내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절창 파트락시온은 상당히 막막했다.
“놓친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딸내미 납치당한 건 큰일인데. 설마 죽이진 않겠지?”
그 물음에 부관인 간드 대령이 대답했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면, 하멜른의 마지막 생존자인 히스토리아 소장님과 동기입니다. 구면이니 쉽게 목숨을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내가 답답하게 말 끌지 말라고 했지? 너 나랑 선이라도 보냐?”
“…제발 그딴 망발 좀 하지 마십시오! 소름 끼치잖습니까!”
“내가 이런 방법까지 쓰도록 말을 절어댄 네 잘못이지. 그래서, 뭐?”
“히스토리아 소장님… 참모장님 말씀대로, 그들을 돕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붉은 말이 미끼라는 암호를 전하셨으면서 다른 단서는 전혀 남기지 않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대령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감히 육장성을 모함할 수 없었기에 간드 대령은 조심스러웠다. 대신 그럴 자격을 지닌 유일한 위인에게 말을 전했다.
파트락시온이 그 뜻을 알아듣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딸내미는 말 좀 잘 듣나 싶더니 피리 부는 딴따라에 홀랑 넘어가버렸군. 이래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있는 건가!”
“…비유야 그렇다 쳐도.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그건 결과를 지켜봐야지. 돌아오면 어디 입술 자국이라도 남아있는지 보자고.”
허초와 실초를 귀신처럼 구분하는 간드 대령도 빌어먹을 스승의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기 어려워했다. 간드 대령은 못 미더운 상관이자 존경하는 스승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스승님. 그건 경험담입니까?”
“야, 야! 큰일 날 소리를. 그건 여편네의 공연한 의심이었다고!”
그때 마장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임시 사령부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밤낮으로 일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텐데, 그녀는 처음 날아왔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절창에게 말했다.
“파트락시온 대장. 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뭐래? 집 나간 딸내미를 어디서 찾았대?”
“끝까지 들어라. 사령부의 판단에 따르면 그들은 이너서클을 통과하여 우리를 앞질렀다고 한다. 즉시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북부로 집결하라는 명령이다.”
“북부?”
“그래. 북부사령관인 네가 일단 군단을 맡는다.”
절창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너서클을 경유하여 앞질렀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참모진에서 언급된 내용이었으므로. 절창도 이 예측에 동의했다. 정확히 허를 찌르는 움직임이라고 크게 박수까지 쳤을 정도다.
의문은 그게 아니라, 이 와중에도 집결 명령을 내린 군국에 대한 것이었다.
“앞질렀다면 이미 늦었잖아? 거기다 대군이 북부로 집결하면, 국경을 맞댄 열국이 분명 반응을 보일 텐데? 아.”
절창은 말을 하며 스스로 군국의 저의를 깨달았다.
소수의 강자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밀집이 아니라 산개해야 한다. 저 제국의 천라지망처럼, 사방팔방에 죽음을 각오한 정찰병들을 풀어놓고 목숨을 미끼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군국은, 아무리 메타컨베이어 벨트라는 특성이 있다고 해도 과할 정도 밀집했다. 좁은 도로 위에서라면 밀집한 군단이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소수일 텐데.
하지만 이 의문 역시도 단숨에 해결되었다.
군단을 모은 이유가 군단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이 추격 자체가 연극이라는 뜻.
파트락시온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사령부, 요것들. 재미있는 짓을 해주네…. 하여튼 머리는 잘 써.”
이 추격이 사실 추격극이었다면 파트락시온이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는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셈이니까. 이제 그는 진짜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단,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마장은 인상을 더욱 굳히며 물었다.
“음? 알았다니? 무엇을 말인가?”
“…할매는 마법사 맞아? 마법사 똑똑하다는 선입견은 댁이 다 까먹는 것 같아.”
“선입견이 아니라, 편견이다. 고치도록.”
“똑똑하다는 편견이라면 좀 지켜. 좋은 거잖아.”
마장에게 설명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쨌건 전쟁이 결정되었다.
이제 도망자들은 군국의 관심을 벗어났다….
극동에 모인 병력. 전쟁을 준비하는 군국. 그리고, 감시망에서 벗어난 우리들.
텅 빈 사령부. 통신병, 사령부의 정체.
회귀자가 거듭 생각한 끝에 제안했다.
“사령부를 치자.”
나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