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30)
EP.230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일개 인간이 자기 눈으로 다 볼 수도 없는 나라의 모양을 논하는 건 너무 오만한 관점이 아닐까 하지만, 지도에서 볼때 군국은 확실히 가로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핏줄은 몸을 따라가는 법. 그에 따라 군국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메타컨베이어 벨트 역시 넓적한 타원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로로 길쭉한 직사각형의 양옆에 각진 반원을 잘라 붙인 것에 더 가깝다. 굴곡이 있으면 가장자리에서 마모가 크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령부의 위치는 동그란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정중앙. 이너서클의 중심.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횡방향으로 어느 정도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한 번 떠났던 메타컨베이어 벨트에 재탑승하고 있었다.
사령부에 쳐들어가자는 작전이 입안된 뒤, 회귀자는 메타컨베이어 벨트로 향했다. 통신병이나 탐조등이 감시가 사방에 뻗친 가운데 행적을 들키지 않고 이동하기에는 그만한 교통수단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 손쉽게 그 위에 올라탄 우리는 모습을 감추고 시간을 보낼 컨테이너를 찾았다.
컨테이너 안은 화물로 가득 찬 상태였…으나, 회귀자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내부를 비웠다. 그녀의 아공간, 포켓을 열고 짐을 다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히스토리아는 물건을 끝없이 집어삼키는 포켓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저건 도대체 뭐야?”
“아, 사기 아이템이야. 참고로 저 안에는 온갖 기상천외한 도구가 가득 들어있어.”
“두 자루 보검도 그렇고, 기력량도 그렇고…! 제국 황제의 숨겨둔 아들이라도 돼?”
“제국 황제가 숨겨둔 아들은 요즘 저런 거 들고 다녀? 좀 부럽네. 황제 아들도 할 만한 것 같다, 야.”
아, 다행이다. 나만 부러움에 기반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히스토리아도 저걸 보고는 나와 비슷한 부조리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저딴 물건을 들고 있는 게 이상한 거야.
“쳇. 다 찼네.”
회귀자는 컨테니어의 3분의 2를 비우고서야 더 집어넣는 것을 멈췄다. 아쉬운 듯 혀를 차는데, 괘씸하다. 자기가 군국 물류업계의 혁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해주길 바란다.
1인간이 1컨테이너와 비견된다니, 물건을 담는 용도 하나로 만들어진 컨테이너가 억울하잖아?
회귀자가 포켓 안쪽에서 다른 생필품을 꺼내며 말했다.
“나머지는 대충 구석으로 치워놓자. 센트럴 기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테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레지스탕스와 접촉하는 것을 우선으로.”
“레지스탕스? 그들이 필요한가요? 너무 막나가는 건 아닐지.”
“소란을 키우는 데는 그들이 제격이야. 그들이 없으면, 뭐, 우리가 직접 깽판을 치자.”
군국 입장에서도 차라리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게 낫겠다. 회귀자가 치는 깽판은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일 테니까.
“끝났느냐? 그러면 나의 차례로구나. 이곳에 낙인을 찍으면 되는 것이냐?”
“네. 부탁드려요.”
“후후. 알겠다. 일을 나누어서 하다니, 뭔가 보람차구나.”
평소에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으시던 분이 노동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티르는 컨테이너 내벽에 피 묻은 손가락으로 낙인을 그려 넣었다. 어둠 속에서 피를 머금은 문양이 불길하게 빛나더니, 안쪽 벽이 그녀의 지배 하에 놓였다. 피를 마음껏 다루던 시기에는 손만 뻗어서 하던 일이었으나, 심장이 다시 뛰는 지금은 직접 한 땀 한 땀 그려 넣어야 했다. 컨테이너가 큰 편인데 특유의 느긋한 태도가 더해져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그러나 재촉할 수도 없다. 오직 티르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게 전문직이지.
자, 다들 일하고 있다. 나도 슬슬 밥값 할 시간이다.
일하지 않으면 내 지분이 사라지며, 그만큼 누릴 권리도 없어진다.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살고 싶다면 그 몫만큼 일하는 게 필수.
나는 손가락을 들어 저쪽을 가리켰다.
“자, 가자! 아지, 나비, 리아! 짐을 한구석에 치워놓는 거야!”
“멍멍!”
“냐아?”
“…나는 여기 끼는 거야?”
개가 아지처럼 달려나갔다. 아니, 거꾸로던가? 어쨌건 화물에 이빨자국과 발톱자국을 내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구석에 처박기를 수차례.
내 안의 네모난 각을 사랑하는 본능이 당장 뜯어말리고 각을 잡으라고 속삭였지만, 일단 보류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늘리면서까지 달성해야 하는 목표는 아니기에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달리 말해 귀찮다.
“냐아-. 잘한다냐-.”
“나비. 너도 일해야지.”
“냐? 냐, 먹는 일과 피우는 일 해야 한다냐. 당장 공물을 바치거라냐.”
“진짜, 고양이 팔자가 상팔자다…. 저기 저 화물을 구석까지 잘 밀어 넣으면 네 몸에 딱 맞는 상자를 줄게.”
“상자? 달라냐! 당장!”
“이 짐승은 일과 보수의 관계도 모르는 건가?”
인간인 나는 뒷정리를 맡았다. 지능이 높은 존재의 특권이다. 아지가 몰아넣은 짐을 벽에 차곡차곡 쌓으며 우리가 지낼 공간을 마련했다.
아, 참. 바닥도 닦아야 하는데. 이건 다른 녀석을 쓸까.
“리아. 너는 걸레를 줄 테니까 바닥을 닦아. 손이 묶여있어도 걸레로 닦을 수는 있지?”
발가락으로 걸레를 잡아챈 히스토리아는 나에게 되물었다.
“…휴이. 농담이지?”
“농담이라니? 지금 이게 농담처럼 보여? 너도 이 무리의 구성원이면 일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포로는 일 안 해도 돼? 그러면 나도 포로할래!”
“그거 말고, 사령부로 쳐들어간다는 거.”
히스토리아는 나를 맹렬하게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언제부터 사령부 강습이 평범한 일이 되었지?”
“아니지. 셰이 씨 설명 못 들었어? 우리가 하는 건 평화 추구야. 러브 앤 피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
나는 양손으로 V자를 만들며 대답했다.
목줄이 매인 짐승이 있으면 그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가서 놀리고 싶은 게 본능인지라, 나는 히스토리아가 발끈하는 것을 알고도 계속 자극했다.
손이 묶여있지 않았다면 머리를 짚었을 것이다. 히스토리아는 정신적인 어지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전쟁을 막겠답시고 사령부를 치겠다고? 그게 전쟁이잖아! 바보 아니야?”
“우리끼리만 말하는 말인데, 솔직히 바보 맞는 것 같아.”
“…너 말하는 거야, 휴이!”
“엥? 왜? 이 작전부터 계획까지 다 셰이 씨가 입안한 건데? 바보라고 말하면 당연히 셰이 씨지!”
이전 회차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면 미리미리 알라고. 꼼짝없이 전쟁터가 될 열국으로 빠져나갈 뻔했잖아.
사령부 강습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지만, 전쟁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낫다. 전쟁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불안정한 살의는 나에게 너무 치명적이야. 눈 먼 총은 못 피한다고.
그리고 회귀자의 생각에 따르면 이번 전쟁을 기점으로 나라간의 전운이 점차 고조된다고 하니…. 뭐, 막아서 나쁠 건 없잖아? 내가 막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리아. 그런데, 내가 청소하라고 하지 않았나? 언제부터 청소가 나를 올려다보며 쏘아 죽일듯한 시선을 보내는 게 되었지?”
“휴이!”
“싫으면 당장 내려. 누가 말려? 발은 안 묶였으니, 당장 뛰어가서 절창 아빠랑 마장 엄마한테 가서 일러바치면 되잖아? 쟤네, 사령부로 돌격한대요! 빨리 가서 막아요! 이렇게 말이야! 내가 가는 길을 고난으로 물들여보라고!”
“이…!”
뒤로 묶여 보이지 않는 주먹 대신, 어깨와 가슴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내친김에 한껏 이죽거렸다.
“가 봐! 안 막는다니까? 우리가 뭐 너를 죽인대? 아니면 고문하거나 인질로 삼는대? 풀어준다니까? 지켜보고 싶다면서 같이 가자고 한 쪽은 너야!”
“야!”
히스토리아는 묶인 채로 다리를 움직였다. 걸레가 발등에 얹어지더니 즉각 나를 향해 포탄처럼 쏘아냈다. 자세가 영 나오지 않았음에도 걸레는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하하. 어림도 없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걸레를, 그것도 발로 던지는 걸레를 못 피하겠냐. 나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끄악!”
얼굴에 맞았다. 하필 허리를 젖히던 도중 맞았기에 내 몸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세대를 거치며 꼬리를 잃은 뼈는 딱딱한 바닥과 충돌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라진 꼬리가 그토록 그리울 수가 없다.
맞다. 다리는 팔에 비해 세 배나 되는 힘을 갖고 있었어…! 유일한 약점이라면 동작이 커서 알아채기 쉽다는 건데, 사실 독심술을 지닌 나에게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잖아!
넘어진 나는 얼얼한 꼬리뼈를 문지르며 내 얼굴 본을 뜬 걸레를 떼어냈다.
“퉤퉤. 감히, 먼지 가득 묻은 걸레로 내 얼굴을 쳤겠다!”
“한 짓에 비하면 당해도 싸지.”
“반성의 기미도 없어! 당장 징벌해주마!”
‘징벌? 내가 묶여있다고 한들, 어떻게 징벌할 건데?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거야, 휴이. 기대할게.’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나 말고! 나보다 센 사람이 말이야!
나는 그 기세로 티르와 회귀자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쳤다.
“엄마! 아빠! 쟤가 나 때렸어요! 혼내주세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빠라고 불린 회귀자는 마치 자기가 총에 맞은 것처럼 격하게 외쳤다.
“내가 왜 아빠야! 애초에 난 여, 아니! 오히려 네 쪽이 연상이잖아!”
오, 연상인 건 알고 있었구나? 나는 맨날 이리 치이고 무시당해서 네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면 회귀 이전 나이까지 세고 있던가.
…연상인 걸 알면서 찍찍 건방지게 말 내뱉는 게 더 악질인가, 싶지만. 사실 공평한 거다.
“셰이. 그저 웃고자 하는 가벼운 농담 아니더냐. 장단을 조금 맞춰주어도 되지 않겠느냐.”
“안 돼! 아빠가 뭐야, 아빠가! 농담이라고 해도 소름 끼쳐! 나는 저딴 아들 둔 적 없다고!”
회귀 이전까지 다 고려하더라도, 못해도 천 년 연상인 티르에게도 이러니까 말이지. 공평하게 싸가지가 없으니 도리어 호감이 가네, 암.
와중 티르는 전혀 그것을 지적하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별별 사람을 다 겪었기에 사람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이다. 하긴, 얼굴 마주쳤다 하면 더러운 흡혈귀 그 팔다리에 쇠못을 박아주마 하고 온갖 모욕을 일삼는데 그에 감정이 상해서야 마음이 남아날까.
티르는 가볍게 회귀자를 나무라고는 인자하게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오냐. 이리 오거라. 어찌 해주기를 원하느냐?”
나는 그대로 쪼르르 달려가 히스토리아가 한 만행을 일러바쳤다. 걸레를 내 얼굴에 던져서 이 잘생긴 얼굴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고, 컨테이너 바닥을 긁어낸 누룽지 먼지 맛이 아주 일품이라고.
종알종알 말한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선 히스토리아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주 혼쭐을 내주세요! 다시는 저런 짓을 못 하게!”
“알겠다.”
짐짓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사뿐사뿐 걸어가서는 히스토리아 앞에 섰다. 그러고는 나에게 들려주듯 큰 목소리로 그녀를 훈계하기 시작했다.
“네가 휴와 친밀한 관계였으며, 잔정에 그리워하였다는 것은 알겠다. 또한, 이전 일로 크게 후회하고 원망하여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심정도 수긍하겠다. 하나.”
척. 티르는 약간 으스대듯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기억하라. 너는 휴를 쫓고자 하는 측이었으며, 우리는 너희에 대항해 휴를 지키려고 하였으니. 흑백이 이리 뚜렷하거늘 너무 허물없이 굴려고 하는구나. 심지어, 그에게 작게나마 위협을 가하기까지… 너는 어디까지나 포로이며, 함께하겠다는 네 요청을 선의로 받아들이는 것을 잊지 말거라.”
정론이며, 상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동시에 나에게 완벽하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상대는 시조 티르칸쟈카. 히스토리아가 만전인 상태에서도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다. 팔이 묶이고 동행을 계속하려는 지금, 히스토리아는 입장상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시조.”
“다짐이 없구나. 무엇을 알았는지, 네 입으로 말하거라.”
연이은 훈계에 히스토리아는 이를 악물고는 치욕적으로 대답했다.
“휴이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게.”
“네 스스로 한 말이니, 네 의지와 명예를 걸고 지키리라 믿겠다.”
단언한 티르는 슬쩍 나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되었냐는 뜻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티르는 양팔을 슬쩍 벌리며 텅 빈 품을 내보였다.
‘장단을 맞추어 혼쭐을 내주었다. 어떠하냐?’
장단을 너무 잘 맞춰주는 예쁜 누…님? 어쨌건, 이런 장단은 나도 잘 맞춰주는 편이다. 생각을 읽다 보니까 상대방이 계획한 연극을 그대로 맞춰주고 말거든.
나도 양팔을 펼치고 달려가 티르의 품에 안겼다.
“고마워요, 티르!”
“무얼.”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인 티르에 비해 내가 더 큰 탓에 도리어 내가 티르를 감싼 모양새가 되었으나, 티르는 만족한 듯이 나를 끌어안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후훗. 즐겁구나. 눈앞의 여장군에겐 가혹한 일일지는 모르나, 과거의 잔재의 앞에서 현재의 관계를 자랑하는 건 저열하면서도 말초적인 쾌락을 주니. 인간에겐 이리 유치한 감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살짝 우월감에 젖은 생각이 품 안에서 들린다. 히스토리아는 약이 바짝 올라서 나만 찌르듯 노려보고 있었다. 총을 미리 빼앗아서 다행이다. 안 빼앗았다면 등이 과녁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때였다. 세상이 앞으로 쏠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벨트가 느려지고 있었다.
컨테이너가 중간 기착지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