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36)
EP.236 보았노라
처음에, 레지스탕스는 지방 영주를 주축으로 한 왕국 부흥군이었다. 그때의 그들은 여력이 있었고, 용기가 있었고, 의기가 있었다. 왕국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야망도 있어서, 맞서 싸우기 위해 왕가의 혈육도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렀다. 군국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권력을 공고히 했다. 연달아 이어진 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뒀다. 사고방식이 낡은 왕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지스탕스는 점차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완전히 패퇴하여 구석으로 숨었다.
레지스탕스가 공주를 모셔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구심점이 없다면 스스로 무너질 처지라 공주를 중심으로 결집하려고 한 것이다.
공주는 그 숙명을 받아들였지만, 저들이 공주를 존경하지는 않는 만큼 공주도 레지스탕스를 믿지 않았다. 어차피 공주는 군국과 공존할 수 없으니, 의무를 따르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다고 레지스탕스가 마냥 무너지기만 한 건 아니다. 긍정적인 요인도 있었다.
하멜른의 사건을 계기로, 군국에게 버려진 젊은이들이 대거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덕분에 레지스탕스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그건 안 맞는 팔다리를 억지로 꿰매서 만들어낸 시한부의 삶.
구시대의 권력자인 기사들과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잘 어울릴 리 없다.
기사들은 젊은이들을 자기 종자 혹은 사병처럼 생각한다. 이 나라를 무너뜨린다면 자기 휘하로 거두어준다, 그것만으로도 대가가 될 거라고 여긴다.
그에 비해, 젊은이들은 왕정복고 따위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다. 그들의 목표는 더 나은 이상의 구현, 혹은 끝없는 복수와 투쟁이다. 군국을 개선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거나. 둘 중 하나만을 노리고 있다.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은 군국 타도라는 목표 아래 모여있을 뿐. 태어난 것도, 타고난 것도, 바라보는 것도 정반대.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와중 명목상이나마 레지스탕스의 대표인 공주는… 군국을 증오하지 않았다.
시아티는 흐뭇하게 공주와 회귀자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나름 친하던 공주가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기특했던 게 첫번째 이유.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시아티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정리했다.
지휘통제소. 사령부 한구석. 스물여섯 명의 통신병.
‘통신병이라면 분명히 그 지긋지긋한 감시용 골렘과 함께할 거야. 사령부의 지령을 전달하는 통신병이라면 외부로 자주 노출하지 않겠지. 골렘을 통하는 게 효율적이니까. 그러니 중앙부보다는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
증오로 가득한 시아티의 사고회로는 군국 사냥에 관련된 분야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상태였다. 피냄새를 맡고 사냥감의 상태를 파악하는 포식자처럼, 몇 가지 안 되는 정보만으로도 약점을 거의 정확하게 짚어냈다.
‘골렘을 쓰는 놈들이니 무력 면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일 없겠지. 골렘 숫자는 많지만 한 명이 다루는 골램은 수십 개. 통신병의 전체 숫자는 꽤 적을 거야. 스물여섯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숫자겠지… 그들은 다 죽이면, 군국에도 타격이 가려나?’
그리고 흉흉한 살의를 풍겼다.
가장 가까이서 그 살의를 읽은 히스토리아는 얼굴을 굳혔다.
“…시아티. 그만해.”
“그만해? 뭘?”
“애꿎은 희생자를 늘리지 마. 통신병도 불쌍하면 불쌍했지, 더 나은 아이들이 아니야.”
시아티가 눈을 끔뻑였다. 육장성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시아티는 이내 배를 붙잡고는 폭소했다.
“아핫! 아하핫! 대단한 성녀 납셨어! 설마, 설마!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광기 서린 그 웃음을 앞에 두고도 히스토리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아티는 한껏 웃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히스토리아. 통신병들이 불쌍한지 아닌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전혀, 하나도. 상관이 없단 말이야! 그들이 군국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큰 타격이 될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공주는 그들과 대화하려는 생각인 듯한데. 너는 네 주군의 뜻을 무시할 거야?”
“예리엔 공주님은 내 주군이 아니야. 친구지. 마치 너와 나처럼, 서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
시아티는 히스토리아 곁에 앉아서는 손가락으로 공주를 가리켰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를.
그러나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공주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시아티는 부러운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공주님, 제법이지? 참, 씩씩하게 자랐어. 온실 속 화초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 같은 잡초도 아니고. 킥킥. 가끔 정말 종자가 다르다는 게 실감이 나!”
히스토리아도 내심 그 말에 공감했다. 서로 왕국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기품과 부티가 줄기줄기 새어 나온다면, 저 분위기는 타고났다는 뜻이다.
거칠고 난폭한 그녀와는 전혀 정반대.
심지어 레지스탕스의 대표면서 레지스탕스를 못 미더워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육장성이면서 군국에 의구심을 가진 히스토리아와 얼마나 상반되어 있는가.
세상에 정반대인 존재가 있다면, 그건 공주와 히스토리아일 것이다….
“둘이 참 닮았어. 서로 무언가를 타고났고, 뿌리칠 기회가 있었는데 인정에 휩쓸려 버리지 못한 것까지…. 얼마나 아이러니해?”
“뭐?”
시아티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공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공주님은 공주님이고, 나는 나야.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걷지만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달라. 어쩌면, 서로 방해하지 않을 수도 있지. 통신병을 통해 대화를 마친 다음에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비극을 되풀이하지 마. 하멜른과 같은 비극은 그때 한 번으로 족해.”
“한 번?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하! 히스토리아.”
시아티는 입술을 뒤틀고 웃었다. 동시에 아무런 조짐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의수가 히스토리아의 턱을 잡고 비틀었다. 둘은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에게는 여전히 한 번 째야. 그건 절찬리에 진행중이고.”
“…포기할 때도 됐잖아. 내가 너를 몇 번이나 눈감아줬는데. 그 정도 했으면.”
“그때 죽이지 그랬어? 안 죽여서 이 꼴이잖아.”
킥킥. 마른 웃음을 기침처럼 내뱉은 시아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군국을 망가뜨리기 전까지는 안 죽을 거지만, 네가 죽여준다면 만족할게. 네 마음에 가장 커다란 상흔을 남기면 그것도 군국을 망가뜨리게 되는 셈이니까.”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안 죽일 거야? 킥, 그러면 레지스탕스로 오던가! 육장성이 사실 레지스탕스였다, 그건 군국의 딸을 존경하는 모든 군국민에게 몇 배나 커다란 충격을 줄 거야! 최상의 시나리오인데!”
“나는, 너 같은 테러리스트가 될 생각, 없어.”
“누가 나를 따르래? 잡초 말고, 이상만이라도 드높은 공주님을 따라! 이상주의자는 같은 이상주의자 곁이 가장 좋지 않겠어? 어차피 너도 군국에 충성하는 건 아니…!”
“닥쳐!”
히스토리아가 외쳤지만 시아티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었다. 뚫어질 듯 그녀를 노려보던 히스토리아는, 묶인 채로도 시아티를 뿌리치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형형한 눈빛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휴이. 나도 데려가. 공주가 사령부와 독대하는 그 장소까지.”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한 나는 두 눈을 끔뻑였다.
히스토리아는 육장성이다. 군국에 몇 안 되는, 가치가 있는 인질이다. 원래는 적당히 인질인 척 데리고 다니다가 한구석에 던져놓을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미뤄지고 미뤄지다 결국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이래서 세운 계획은 그때그때 써먹었어야 했는데.
“거기까진 내가 순순히 따라갈게. 저항하지 않기로 맹세할 테니 묶은 걸 풀어도, 아니, 묶은 채로도 괜찮으니 나도 데려가 줘.”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왜? 사령부를 직접 마주하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배신하게?”
“배신이 아니야. 행동할 거야. 이번에야말로, 내 의지로.”
뒤쪽에서 시아티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늦어서 생겨난 비극의 결과는 여전히 히스토리아의 뒤까지 따라붙고 있었다.
저것을 떨쳐내기 위해 히스토리아는 굳은 결의를 담아 나에게 애걸했다.
“나는 그때처럼 후회하지 않아. 늦지도 않아. 모든 것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판단하겠어.”
[…점점 딸린 게 많아지는구나. 휴,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힘을 아끼기 위해 관 속으로 들어갔던 티르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동감이긴 한데,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별로 문제 될 건.”
[어찌 계집아이만이 늘어나는 것일까. 공간도 협소한데, 이러다가 그냥 어깨를 맞대고 지내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구나.]“풍기가 문란해질까 하는 걱정이었어요?!”
풍기를 걱정하는 와중에 나라와 싸우는 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니. 이게 천년 넘게 성황청과 갈등을 빚어온 흡혈귀의 마음가짐인가. 나라와의 갈등은 일상이라니, 대단하구나.
티르는 곧이어 일어날 전투에는 긴장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쪽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티르가 혀를 차며 가리킨 곳에는, 공주가 회귀자를 힐끔거리며 무언가를 자꾸 조잘대고 있었다.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저, 엄격하게 교육받아서 그런지 사실 남성분이 조금 어렵거든요. 그런데 귀공을 상대로는 그저 마음이 편하기만 하네요.”
“아, 그게…. 어.”
‘나는 사실 남장 중이니까. 그렇지. 끄응. 지금 또 인상을 바꿔서 경계심을 주고 싶지도 않고….’
저 정도면 원죄다. 처음부터 남장하고 다니기로 한 순간부터 너는 첫단추를 잘못 꿴 거다. 이번 회차는 남자로 살아라, 그냥.
티르는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후우. 내 저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이 메는구나. 셰이는 남자를 좋아하는데, 어찌 공주라는 아이가 보답받지 못할 정을 품었을까….]…확실히.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맞고 보답받지 못할 감정도 맞긴 하다.
오해야 어쨌든 그 오해도 회귀자의 잘못이지. 나쁜 남자, 아니, 나쁜 여자 같으니.
“잠깐만. 어디서 나를 모함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쓸데없는 감각만 예리해서는.
대화가 전해지지 않도록 어둠으로 주변을 두른 티르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의외구나. 내 지켜본바, 셰이는 귀찮은 일은 떠맡지 않으려고 드니, 공주의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했거늘.]“동감이긴 한데… 셰이 씨.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는 묘하게 친절해요.”
회귀자는 뭐든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말을 부싯돌처럼 틱틱거리게 하는 가공할 사교성의 소유자지만, 이전 회차에서 친구가 된 이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도, 무저갱에서는 최강의 흡혈귀 티르칸쟈카를 상대로 처음부터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다가갔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때 가장 먼저 나서기도 했다.
공주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
[휴, 너의 행동 하나하나를 과하게 의심하지 않았느냐.]“인내심의 총량을 맞추기 위함인지 몇몇 사람에겐 더더욱 매몰차고요. 저는 그 몇몇이었나 봐요. 억울하다, 억울해. 내가 어때서.”
[그러게 말이다. 이토록 믿음직스러운 네 어디가 의심스럽다고 그러는 건지.]응? 티르도 나를 처음 봤을 때는 수상쩍다고 하지 않았나?
[변덕스럽기는 새색시보다 더하구나. 어찌 태도가 저리 달라진단 말이냐?]“알았으면 제가 먼저 써먹었죠. 저는 몰라요.”
사실 안다. 알지만 따를 수 없을 뿐이다. 하려면 이전 회차로 돌아가서 신뢰 관계를 쌓아야 하니까.
뭐, 불평하듯 말은 이렇게 했지만, 회귀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겠지. 내가 이전 회차 기억을 읽지 못해서 그렇지, 회귀자도 전 회차에서 나름의 사건을 겪어가며 온갖 경험을 했을 터.
아무리 새로운 회차가 시작되었다 해도 그때의 기억과 경험이 여전하니까 친밀도가 다를 수밖에.
“그나저나, 티르야말로 저희를 도와주어도 괜찮은 거예요? 군국은 성황청과 갈등을 빚는 나라인데 아군을 잃는 것 아닌가요?”
[인간의 나라가 언제부터 흡혈귀의 아군이었더냐? 내 살며 성황청과 싸운 나라는 보았어도 우리와 동맹을 맺은 나라는 보지 못하였다. 기껏해야 불가침 조약이 전부였지.]“그래도 단신으로 나라와 싸우는 건 좀 부담스럽지 않으신가요?”
[셰이야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고, 너도 그러하지 않느냐. 내가 한 손 거든다고 나쁜 일은 없을 터.]인자하게 말한 티르는 관의 뚜껑을 살짝 열었다. 좁은 틈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흡혈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너를 응원한단다. 세상이 너를 저버릴지라도, 나만은 너를 도와주마.]시조 티르칸쟈카의 진심 선언. 든든하다. 의심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그 감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독심술로 생각을 읽었다.
‘그러다가 나라와 크게 척을 지고 쫓기는 처지가 된다면. 서로서로가 유일한 기댈 곳이 되니. 그때부터는 좋으나 싫으나 계속 함께 지내겠지. 낭만적이지 않느냐.’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도망자의 삶에 뭐가 낭만이 있어? 야만뿐이지.
어, 잠깐만. 티르가 계속 나나 회귀자의 막장 행보를 응원하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막 하게 도와주는 것도, 혹시….
“티르. 이번 사령부 습격에서, 아예 궤멸시키실 건가요, 아니면 적당히 손봐주고 빠질 생각인가요?”
티르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파괴와 혼란이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엄중히 경고만 하고 도망치자꾸나. 한 나라와 그 명운을 마음껏 주무르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하지만 남은 이들이 저를 추적할 거 아니에요?”
[걱정 말거라. 내가 지켜주마.]‘충분히, 오랫동안.’
나는 등에서 땀을 삐질 흘렸다. 어쩌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함정에 빠진 건 내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