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44)
EP.244 잡음 제거 기술
공주를 죽이라는 과병의 명령은 너무 단조로워서, 꼭 어디 맡아둔 게 있으니 냉큼 가져오라는 말처럼 들렸다. 히스토리아는 곤혹스러워했다.
일단 히스토리아는 묶인 몸이었고, 딱히 공주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공주는 레지스탕스였지만 제법 말이 통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 히스토리아는 상대가 누구든 쉽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죽으면 결코 돌이킬 수 없지만,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토리아는 포로인 지금 상황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포로는 힘으로 억압되어 있으니 남을 향해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묶인 그녀는 누군가를 공격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런데 막시밀리앵의 명령은 포근한 꿈에서 그녀를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히스토리아가 대답하기 전, 이곳저곳에서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숨죽인 채 기습의 기회를 엿보던 시아티는 판단을 바꾸고는 공주를 지키기 위해 짐칸 옆문을 열었다.
시아티가 셀피를 이쪽으로 유도하는 사이, 회귀자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천앵과 지잔을 동시에 꺼냈다.
“그 말,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하지만 과병은 무시무시한 적을 앞에 두고도 태평한 태도로 대꾸했다.
“끼어들기를 좋아하는군. 하지만 자네, 예의범절을 티끌만큼이라도 익혔다면 좀 가만히 있게나. 나는 지금 히스토리아 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네.”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이 대화야?”
“아닐 건 뭔가?”
회귀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다른 이들의 반응이 따라오지 않았다. 아지도, 나도. 그리고 심지어 죽으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은 공주도 동요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앵의 말에는 살의가 거의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사무적으로 말했기에, 공주조차 위기감을 못 느끼고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히스토리아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국장. 나는 묶여있어요. 그리고 국장보다는 저쪽의 칼과 더 가까이 있죠. 제가 어떻게.”
“슬슬 자네에게 실망할 것 같으니 더는 말하지 말게, 소장. 왜 서로가 서로의 지성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말을 돌리려고 하는가?”
막시밀리앵은 히스토리아의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대꾸했다.
“고작 밧줄 따위로 자네를 묶을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자네를 묶어놓은 건 자네의 마음이겠지. 뭐, 그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네….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갖는 것도 자격 있는 자의 여유겠지. 어쨌건 내 요청을 거절했다는 걸 부정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뭘 그러나? 요청이야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지. 자네 마음인 것을. 그래, 이제 자네 요청을 듣지. 무엇인가?”
막시밀리앵은 한 점의 유감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단히 자상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응이었다. 히스토리아는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이들의 목적은 군국이 벌일 전쟁을 막는 것이에요.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령부로 돌격하는 것이고요.”
“호오. 그래서?”
“이들의 총전력은 국가 수준. 주력이 극동에 있는 이상 이대로 맞붙으면 승산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잠깐 전쟁 계획을 미루고. 병력을 불러들이며 이들과 협상하는 게 가장 피해를 줄이는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미리 답이 정해졌던 것처럼, 막시밀리앵은 가볍게 대답했다. 이유를 되묻기도 힘든 시원한 거절이었다.
“히스토리아 소장, 그건 군국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겠지. 자네가 신경 쓰는 건 하멜른의 일뿐이니까.”
“그래도 이건 군국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네가 사령부에 가서 주장하게나. 거기에 나를 끼우지 말고. 나는 굳이 전투를 피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네.”
“여럿이 죽을 겁니다! 사령부가 붕괴될 수도 있어요!”
“누구의 죽음을 걱정하는 거지? 아, 맞아.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찾았다고 했던가.”
렌즈가 흘긋 내 쪽을 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점은 다시 히스토리아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입장에서 나는 별로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만일 그가 나를 신경 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내가 히스토리아를 움직이는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앵에게 있어 나는 어디까지나 수단으로서의 존재다.
자격 없는 이에게는 이성의 한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특별하니까.
실제로 평범하진 않았다.
“취미는 그 정도껏 하게, 소장.”
막시밀리앵은 한탄하듯이 말했다.
“쯧. 쓸모도 없는 애새끼 이백 명 정도 뒤졌다고 난리를 피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웬걸, 그냥 묻으면 사라질 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소한 사건을 괜히 들쑤시고 다녀서 억지로 일을 키우더니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백 명이 죽었는데도?”
“힘도, 재능도. 하다못해 약속된 미래조차도 없는 이백 명의 사람인데. 어찌 기억하겠나. 히스토리아 소장과 란카르트가 발작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끝났을…. 그런데 잠깐, 지금 말한 사람이 누구지?”
막시밀리앵은 히스토리아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측하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당장 그의 시야에서는 화자가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그 말을 한 사람은, 짐칸에 있던 시아티였으니까.
“그 말, 취소해!”
짐칸 문을 연 채로, 무슨 일이 생기면 냉큼 공주를 구출할 준비를 하고 있던 시아티였다. 그러나 막시밀리앵이 하멜른을 언급하자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문에 매달렸다.
몸을 내민 시아티는 이글거리는 눈길로 막시밀리앵을 노려보았다. 그녀를 불태우는 증오가 눈빛으로 이글거렸다.
“그걸 어떻게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하멜른은, 네깟 놈에게 무시당할 일이 아니…!”
하지만 시아티. 쓸모없는 일이야.
진정으로 너를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말조차도 무의미하니까.
“싹퉁바가지 없는 새끼가아아아!”
삐걱.
막시밀리앵의 머릿속에 있는 톱니바퀴 하나가 살짝 어긋났다. 그의 이성적이고 포용력이 가득한 부분은 시아티를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그의 이성을 쓰기에는… 시아티의 자격이 부족했던 탓이다.
“이제는 별 같잖은 것들이 내 말을 방해해애애애애! 잡음, 잡음! 시끄러워어어어어!”
살의가 급격하게 용솟음쳤다. 생각을 돕는… 혹은 방해하는 톱니바퀴. 그의 이성과 공감을 연결해주는 하나의 스위치가 꺼지고, 감정의 어두칙칙한 부분과 이어진다.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적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적의는 바로 현실이 되었다.
막시밀리앵이 톱니바퀴 여섯 개를 한 손으로 들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그건 권양기가 달린 활이었다.
동력은 필요없다. 톱니바퀴를 돌리는 힘, 그게 곧 동력이니까.
끼리리릭. 쇳덩이가 비틀어진다. 시위에 매겨진 날카로운 화살이 빛을 발했다.
핑, 하고. 기계적인 힘을 잔뜩 머금은 활대가 화살을 밀어냈다. 화살은 빛살이 되어 시아티의 가슴팍 한가운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결심부터 행동까지 단 한순간의 주저나 유예가 없다. 실제로, 그는 존재하는 잡음을 치운다는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대다수는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까지 공격의 의도를 읽지 못했다.
그에 대응한 건, 처음부터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히스토리아뿐.
그녀가 묶인 채로도 발을 뻗었다. 펑, 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히스토리아가 균형을 잃었다.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말 위에 얹혀있던 히스토리아의 몸이 붕 떠올랐다.
“꺅?! 총사님!”
공주가 손을 뻗었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다. 공주와 셀피를 위험하게 할 수 없었던 히스토리아는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띄웠다. 낙마였다.
나는 즉각 외쳤다.
“아지야! 주워!”
“멍!”
내 외침을 들은 아지가 뛰어내림과 동시에.
콰앙. 자동마차 앞쪽이 유리판이 쪼개져 날아갔다. 회귀자가 거슬리는 바람막이를 단번에 치운 뒤 천앵을 쥐고는 뛰쳐나간 것이다.
“이 미친놈이! 싸우자는 뜻으로 알겠어!”
정작 멋대로 공격을 가했던 막시밀리앵도 화가 잔뜩 나서는 외쳤다.
“잡음 좀 지우겠다는데 하나같이 시비들이야아아!!!”
“잡음 아니고, 설사 잡음이라고 해도 우리 잡음이야!”
회귀자도 격하게 반응하며 천앵을 떨쳤다.
천검기, 도룡참.
천앵을 백 배 키운 듯한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막시밀리앵을 짓눌렀다. 아직 휘두르기 전인데도 거센 바람이 세상을 짓누른다. 천신이 휘두르는 거인의 검에 맞서 막시밀리앵은 그의 톱니검을 꺼내들었다.
끼기기기기긱. 날카로운 톱니가 쇳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휘두르지 않더라도 강철 따위는 간단하게 짓이길 수 있는, 날이 스스로 돌아가는 검. 그의 걸작 중 하나였다. 막시밀리앵이 천앵에 검날을 맞대려는 차였다.
막시밀리앵의 팔이 거꾸로 꺾였다.
“…죽어어어!”
시아티가 막시밀리앵의 팔을 시야에 넣고 손가락을 꺾었던 것이다. 분노로 인해 시아티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고, 그녀의 약지손가락은 보기에도 끔찍할 모습이 되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오늘 이후로도 다시는 꺾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흑마법은 공평하다. 같은 현상을 그녀의 손가락과 저주의 대상에게 강요한다. 그녀의 희생 덕분에, 막시밀리앵의 팔이 시아티의 손가락처럼, 관절 반대방향으로 크게 꺾었다….
“노이즈으으으으!”
하지만 같은 현상이 꼭 같은 가치를 지닌 건 아니다. 사람에게는 발을 담글 만한 시원한 물줄기가 개미에게는 범람하는 홍수가 될 수 있다. 막시밀리앵은 팔이 꺾이고도 멀쩡했다.
곤기공을 대성한 사람은 신체에 기공을 불어넣을 수 있다. 뼈와 근육을 강하게 하는 게 보통 곤기공의 사용법이지만, 경지에 이른 기공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통달했다.
흑마법에 당한 순간 막시밀리앵은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뼈와 근육이 잠깐 부드러워진다. 그의 팔은 뒤로 꺾였음에도 아무런 이상 없이 되돌아왔다.
시아티의 약지를 희생한 대가는, 한순간의 틈에 불과했다. 더 이를 데 없이 격노한 막시밀리앵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노이즈가 주제도 모르고!!!”
“그 정도면 충분해!”
다만, 그 노이즈는 천앵과 톱니검의 맞물림을 방해했다. 막시밀리앵의 몸 위로 천앵이 떨어졌다.
부서진 톱니바퀴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시아티의 가슴팍으로 손바닥만 한 강철 톱니바퀴가 빨려들어가듯 솟구쳤다. 격노한 막시밀리앵이 도로 위로 굴린 강철 톱니 트랩이었다.
중간까지 그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던 그녀는 톱니바퀴를 맞고는 자동마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히스토리아를 들고 따라붙던 아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고꾸라졌으리라.
“멍! 멍멍!”
아지는 고마워하라는 듯이 짖었으나, 시아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막시밀리앵을 지켜볼 뿐이었다. 남은 손가락 세 손가락 중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도룡참이 막시밀리앵을 찢어버리기 직전, 막시밀리앵의 바퀴가 불꽃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회전했다. 요철이 도로를 파고들며 막시밀리앵의 몸이 치달렸다.
톱니바퀴를 조종하는 그의 힘은 무릎을 굽히거나 무게중심을 낮추는 준비 동작 없이도 급격한 가속을 가능하게 한다. 어지간한 공격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도룡참, 역린!”
그러나 회귀자의 공격은 과병의 능력을 상정한 것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규모의 공격이 막시밀리앵을 덮쳤다.
끼릭끼릭. 그의 어깨에서 톱니바퀴가 움직였다. 막시밀리앵의 망토가 휙 뒤집어지더니 방패처럼 그를 감쌌다. 이윽고 벌어진 폭발.
막시밀리앵의 망토가 찢겨나가며, 주름 하나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미세한 톱니바퀴가 마른 바람을 만난 먼지처럼 흩날렸다.
“쳇! 톱니바퀴 망토…!”
‘계속 돌아가는 맞물림으로 공간을 흐트러뜨리는 천앵 대응 무기. 이 짧은 시간에 저걸 결국 만들었네. 골치 아파지는데.’
회귀자는 아쉬운 듯이 혀를 찼다.
그녀는 아쉬울 뿐이지만, 막시밀리앵은 머리가 터질 듯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흐트러지는 톱니바퀴는 제 쓰임을 다했으나 차분한 질서를 잃고 다시 혼돈 속으로 돌아갔다. 그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쳤다.
“나의 걸작, 무한한 맞물림을 망가뜨리다니…! 정녕, 정녕 나와 마찰을 빚겠다는 뜻이겠지!!”
회귀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공격은 네가 먼저 했거든?!”
“이젠 누명까지 씌우는구나! 그래, 지성과 질서로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던 나의 실책이다! 시끄러운 놈들에겐 그에 맞는 대화법이 있는데!”
과병이 자세를 낮추며 양손을 땅에 박아넣었다. 그의 팔꿈치에서 시작된, 피부에 새겨진 얇은 금속 선에 빛무리가 번쩍였다.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는 그의 손끝에서 도로의 표면이 두부처럼 갈려 나갔다.
“전투연금. 마단조.”
그리고 갈려나간 도로는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대신, 과병의 손끝에서 어떤 형체를 이루었다. 도로의 잔해가 순식간에 강철로 탈바꿈했다.
말랑말랑한 푸딩 표면을 숟가락으로 살짝 파헤친 뒤, 쟁기를 끌듯 수평으로 움직이면 곡면을 따라 동그랗게 말린다. 그것과 비슷한 현상이 막시밀리앵의 손끝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단지 재료가 도로의 반석이며, 그것을 파헤치는 게 막시밀리앵의 손가락이라는 사실만이 다를 뿐.
도로 위로 두 줄기 기다란 선이 그어진다. 파헤쳐진 땅은 순식간에 강철로 된 거대한 바퀴가 되었다. 안쪽, 바깥쪽이 분리되어 따로 도는 복잡한 구조의 톱니바퀴는 땅을 세차게 긁으며 거세게 울부짖었다.
자동마차만큼이나 커다란 철륜이 순식간에 연성되었다. 막시밀리앵이 안쪽 톱니를 극한까지 빠르게 회전시켰다. 힘을 축적하는 안쪽 바퀴가 마찰로 붉게 달아올랐다.
“강철의 신생아! 가라아아! 저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뭉개버려라아아아!”
퉁. 막시밀리앵이 손을 놓으니, 철륜이 땅을 긁으며 다가온다. 갈려나간 도로가 새빨간 빛무리로 바뀐다. 평탄한 도로에 거대한 상흔을 만들며 강철의 톱니바퀴가 우리를 짓이길 듯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