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47)
EP.247 말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천사의 폭발은 희생. 그것은 온갖 삿된 것을 몰아내는 정화의 빛이다. 폭발하는 빛이 티르의 어둠을 갉아먹으며 흡혈귀의 어둠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 순간 회귀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급하게 천앵을 떨치며 빛이 폭발하기 직전 그 주변을 둥그렇게 베어냈다.
천검기, 천경.
모든 방향으로 뻗어 나가야 할 빛무리가 무언가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회귀자가 베어낸 공간에 이리저리 튕기던 빛은 하나 남은 틈을 비집고 솟았다. 빛의 기둥은 다른 곳은 침범하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자기가 왔던 하늘로 되돌아갔다.
빛무리가 잔상처럼 깜빡거린다. 티르는 어둠으로 그것을 집어삼키고는, 맛없는 무언가를 먹은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는 짓거리까지. 천사와 꼭 판박이로구나. 군국이라는 나라는 천사가 지키고 있는 것이더냐.]“천사는 아니야. 정확히는, 군국이 천사를 흉내내어 만든 무언가지.”
회귀자가 천앵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천사를 흉내 내어 만들었다고? 그것이 가능한 것이냐?]“알다시피, 천사는 성황청의 신관들이 무언가를 제물로 바쳐서 불러온 격상의 존재. 하지만 군국의 천사는 조금 달라.”
이전 회차, 회귀자는 군국의 육장성 모두를 상대해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존재는 신비 그 자체인 천통이었다.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레지스탕스와 함께 전멸당했던 그녀는 비밀을 풀기 위해 성황청에 찾아갔었다.
이천 년 동안 온갖 신비를 보관하고 관찰해온 성황청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다른 신앙을 극도로 억제하고, 군인이라는 존재를 군국의 신도로 삼았어. 그 뒤 호국과 수호라는 의지 하나만으로 달리 빚어냈지. 인공정령, 혹은 인공 수호천사라고 할까.”
[인공 수호천사라.]“그래. 천사라는 존재마저도, 그 원리를 하나하나 분해하고 해체한 뒤 군국에서 인공적으로 재현한 거야. 물론 수호천사이기 때문에 활동 범위에 한계가 있어. 개념적으로 쳐들어오는 존재밖에 막지 못해. 그래서 지금 처음 나타난 거고.”
지금까지 군국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는 메타컨베이어 벨트, 혹은 그 바깥에 있는 땅. 군국은 공격받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에이메데르의 출격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너서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금. 에이메데르는 군국을 지키는 수호천사로서 강림했다. 육장성인 과병을 보호하기 위해.
“천통, 에이메데르는 그 천사를 총칭하는 말이야. 혹은 그 천사의 원본이 된 어떤 존재이든가. 사실 그 본체를 본 적은 없어서 모르지만, 사령부를 공격하면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성황청과는 무관한 존재이냐?]“100% 확신은 못하지만, 성황청은 무관하지 않을까. 아니라면 군국이 천신교에 세금을 매길 리 없으니.”
[오호라.]납득한 티르는 천사가 소멸한 흔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복잡한 기분이 드는구나. 성황청이 자랑하는 천사가 실은 얼마든지 베낄 수 있는 잡것이라는 건 대단히 기꺼운 일이나. 그것이 막상 나의 눈앞에서 설치고 있으니 거슬린다.]“뭐. 그래도 천앵을 가진 나와 너의 어둠이 있다면 쉽게 무찌를 수 있으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겠지. 천사란 그런 존재니.]티르는 성황청과 몇백 년에 걸쳐서 전쟁을 벌였던 전설적인 존재다. 그러나 성황청과 흡혈귀의 전투는, 서로의 강점과 약점이 너무 확연하기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귀결되고는 말았다.
밤에 최대한 진격해야 하는 흡혈귀에게는, 최후미에서 그들의 발목을 잡다가 희생의 빛을 터뜨리며 소멸하는 천사는 혐오를 넘어 공포스러울 정도로 귀찮은 존재였다.
[하물며 이것은 예전에 보았던 천사보다 조금 더 강력하고 귀찮구나. 성녀가 불러내는 치천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그 정도야? 나는 천사와 싸워본 적은 없어서 잘 몰라.”
[천사를 모른다니. 하긴, 셰이 너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처럼 보여도 아직 어리지. 천사를 모를 수 있…. 잠깐.]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언가를 감지한 티르가 몸을 홱 돌렸다. 붉은 눈빛이 어둠을 꿰뚫어보며, 어둠 저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에 담았다.
[휴?]히스토리아가 낙마한 직후, 백마 위에 타고 있던 공주는 홀로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있다고 딱히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적의를 피해 가는 능력. 상황에 따라서는 무적에 가까운 힘. 그녀는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가 닥치거나 폭주한 마차가 달려들면 모를까.
공주는 인간의 가장 큰 적인, 다른 인간의 적의로부터 안전했다.
그래서일까.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공주는 너무 안일한 위치에서 멈추어 있었다.
히히히히힝!
셀피가 무언가에 쏘인 듯이 앞다리를 들었다. 위에 탄 공주가 휘청일 정도로 위험한 움직임이었다. 공주는 셀피가 시조 티르칸자캬의 어둠 때문에 놀란 줄 알고 다독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셀피의 뒷다리가 풀썩 주저앉고, 그녀의 눈높이가 아래로 훅 내려간 순간. 공주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공주는 세상으로 끌려 나왔다.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리적인 충격에 더해, 정신적인 충격까지 그녀를 뒤흔들었다.
셀피의 따뜻하고 포근한 몸은 푹신하다. 백마에 깔린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온다. 흰 갈기가 붉게 가라앉는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나, 그녀의 이성은 담담하게 이 상황을 설명할 대답을 내놓았다.
‘아, 셀피가 죽었구나.’
공주는 반 박자 늦게 상황을 인식했다. 누군가가 공격했고, 셀피는 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 아직 살아는 있지만 그건 머지않아 끊어질 목숨이었다.
짐승은 보통 인간보다 강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가 ‘보통’ 인간일 때나 가능한 일.
“그란디오모르 공주인가? 자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네. 하지만 죽어줘야겠어.”
상대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육장성, 과병 막시밀리앵. 그는 도망치는 척 움직여놓고는, 어둠이 주위를 집어삼킨 틈을 타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육장성과 독대하게 된 공주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에?”
“개의 왕이 헷갈려하는 모양이야. 고작 망국의 공주 따위에게 잠깐 한눈을 팔 정도면. 하긴, 왕가의 핏줄이니 그럴 수 있지. 인간의 왕을 참살하고 그 권능을 빼앗은 다섯 배신자의 핏줄 아닌가?”
“네, 네.”
“인간의 왕이 필요하지 않다는 상징. 왕이 없더라도 인간을 대표할 수 있다는 오만. 자기 핏줄들은 영원히 위대하리라는 아집. 그것을 짊어진 자네들이 전부 사라져야… 인간의 왕이 진정으로 돌아오실 것 아닌가.”
막시밀리앵은 공주를 향해 빠르게 설명하고는 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역시, 영민하군. 최소한 군주의 피를 이은 후예다워.”
공주는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셀피의 몸 아래 깔린 채, 육장성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만 할 뿐.
막시밀리앵은 보고를 끝마친 사무원처럼 단정지어 말했다.
“그러면 죽이겠네.”
막시밀리앵이 회전하는 톱날을 지닌 칼을 들이밀었다. 강철조차 저미는 힘이 공주의 부드러운 살갗을 파헤치고 피부 안쪽의 것을 탐하려고 다가왔다. 죽음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서야 공주는 드디어 그녀의 처지를 자각했다.
‘어라, 저, 죽는 건가요?’
적의를 피해 가는 능력을 지닌 공주는 언제나 호의 속에서 자라왔다. 머리에 꽃밭이 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머릿속에 가장 아름다운 화단을 꾸미고도 안전한 힘을 지닌 이가 예리엔 그란디오모르다.
타고난 여유, 상처받지 않기에 가질 수 있는 인자함. 그란디오모르 왕가는 볼품없는 그런 능력으로도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하지만 생각의 일부를 톱니바퀴에 맡긴 과병은… 아무런 적의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다.
히히잉….
죽어가는 말이 마지막 발악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안쓰러운 충성심이다. 퍽, 하고 고기가 잘려나가며, 톱날검 아래 뜯겨나간 앞다리가 어지러이 흩날린다. 셀피의 피가 묻은 톱날검이 공주의 머리까지 다가왔다.
시체가 온전히 남는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칼날이 가슴을 헤집거나, 목을 깔끔하게 베어 실혈을 일으키는 죽음이란 사치와 같은 것.
공주는 죽을 것이다. 날뛰는 톱날이 머리를 부수어, 그 안쪽의 모든 체액을 쏟아내며. 모독적으로 죽을 것이다.
그때였다.
뚜둑.
막시밀리앵의 팔이 바깥쪽으로 꺾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아티의 흑마술이 발동되고, 그의 팔은 또 기이한 각도로 뒤틀렸다. 톱날이 바깥쪽으로 꺾였다.
“이, 빌어먹을. 노이즈.”
막시밀리앵이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그가 시선을 홱 돌렸다. 그곳에는 이제 중지까지 새카맣게 물든 시아티의 왼손이 있었다.
시아티는 부상의 여파에 신음하면서도 천천히 오른손의 의수를 들어올려 남은 손가락을 잡았다. 그래 봐야 엄지와 검지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오기가 가득했다.
“…꼼짝 마, 육장성. 아직 두 번 남았어.”
“노이즈 따위가. 나를 두 번이나 방해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다니.”
“죽음은 두렵지 않아. 오히려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는데? 해보지 그래?”
코웃음을 친 막시밀리앵은 꺾인 팔을 다시 맞추었다. 아까와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팔은 꺾였다고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는 멀쩡해진 팔로 톱날검을 들어올렸다.
시아티는 헐떡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팔이 꺾여도 아무렇지 않아. 이쯤되면 비겁하다거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조차 안 들어. 괴물…같으니.’
하지만 시아티에게는 아직 마지막 수단이 남았다. 모든 제물을 다 소모했을 때, 새로이 갱신되는 마지막 계약.
그녀의 목숨을 대가로 목을 꺾으면, 상대방에게 같은 필멸을 강요하는 최후의 주술. 시아티는 여차하면 그것을 쓸 각오를 하고서는 막시밀리앵과 대치했다.
“흑마술을 아는 사람이 너뿐이라 생각하는가? 오만하군. 그럴 힘도 자격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자기 하찮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작태. 지긋지긋해.”
“알아서 다행이야. 모르면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그래. 흑마술로 네 목을 꺾는다고 내가 죽을 것 같나?”
마지막 주술을 간파당한 시아티가 흠칫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막시밀리앵은 경멸에 찬 냉소를 내뱉었다.
“어이가 없군.”
막시밀리앵은 가만히 선 채로 어딘가의 톱니바퀴를 돌렸다. 뚝, 뚝, 뚝. 색다른 맞물림이 들렸다.
막시밀리앵의 목이 꺾여서는 안 될 각도까지 꺾였다.
분명, 평범한 인간이라면 목이 그 위치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죽으리라. 목이란 머리와 전신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급소니까.
그러나 막시밀리앵에게는 급소가 아니다.
“하찮아. 죽음이 두렵다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하찮은 것의 죽음은 역시 하찮기 마련인데,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 하나로 맞먹을 것처럼 구는 게… 정말, 가당찮아.”
흑마술로 그의 목을 꺾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몸의 일부를 개조한 막시밀리앵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시아티가 두려움과 무력감에 휩싸일 무렵, 막시밀리앵은 천천히 그의 목을 원래 위치까지 돌려놓았다.
“어디, 그 비루한 힘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보게나.”
막시밀리앵은 공주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짧게 덧붙였다.
“불가능하겠지만.”
무력하다. 시아티가 평생을 걸쳐 벼린 한 자루 칼은, 육장성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하지만 절망을 느꼈다고 멈출 수는 없다. 죽든, 살든. 악에 받친 채로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공주가 죽으니까….
그리고, 시아티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시아티는 왼손의 검지를 쥔 채, 잔뜩 긴장한 채로 막시밀리앵의 움직임을 살폈다.
막시밀리앵이 움직이기 전에 시아티가 미리 손가락을 꺾을 순 없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그녀의 흑마술은 상대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리 흑마술을 쓴다면 상대는 우습게 팔을 되돌리고는 공주를 죽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아티는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막시밀리앵이 움직인 직후를 노려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군. 하찮은 것들의 생각은 너무 읽기 쉬워. 그래서 지루하고, 단조롭지.’
막시밀리앵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무기가 홀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철컥. 한구석에 있던 톱니바퀴가 움직였다. 왼팔과 톱날을 잇는 구조체, 그 사이를 미끄러뜨리며 몸을 늘린다.
오직 막시밀리앵만이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조화가 일어나고, 기계장치가 그들만의 공식을 따라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전조도 없이 톱날이 주욱 늘어났다.
“예리엔!”
시아티가 검지를 급히 잡았으나, 흑마술이 작동하지 않았다.
흑마술은 같은 것에 같은 일을 강제하는 행위다. 손가락을 꺾으면 가늘고 길며 마디가 존재하는 것을 부러뜨릴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오직 그것만 부러뜨릴 수 있다.
막시밀리앵의 톱날은 손가락과 닮지 않았다. 그 복잡한 구조체는 가늘고 길지도 않았으며 무엇이 마디인지도 확실치 않다. 따라서, 시아티의 흑마술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시아티가 시간을 끈 덕분에 내가 도착했으니까.
“뭐, 내가 와서 뭘 하겠냐만.”
시아티랑 마찬가지지, 뭐. 일격 정도 막아내는 거.
나는 새삼스레 내 무력함을 한탄하며 그의 톱날검 이음매에 꼬챙이를 찔러넣었다.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잡음이 끼어들었다.
끄그극. 갑작스레 침범한 이물질에 톱니바퀴의 움직임이 멈췄다.
“흠? 기척도 없이 다가오다니. 시조… 아니군. 자네인가?”
“네. 접니다.”
티르의 어둠은 사방을 가득 메우고는 점차 뻗어나가고 있다. 그 속에 숨어서 다가왔던 나는, 불의의 일격으로 막시밀리앵의 톱날에 약간의 기능장애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공주는 목숨을 한 번 더 부지했다. 후우, 슈퍼세이브.
“잠시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일격을 성공시킨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꼬챙이를 빼내며 몸을 뒤로 던졌다.
상대는 육장성, 톱니바퀴가 없어도 순수 힘으로 나를 찢을 수 있는 괴물이다. 잠시라도 주저해서는 몸이 갈갈이 찢긴다.
냅다 도망치는 내 뒤로 막시밀리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두르고 기척을 숨겼군! 시조의 존재감 속에 쏙 숨어들었어! 자네, 실력이 대단하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자네라면 그냥 건드리기만 한 건 아니겠지! 어디, 무엇을 했나 확인해볼까!”
막시밀리앵이 톱날검을 크게 휘둘렀다. 톱날검은 순식간에 두 배 정도 길어지며 내 등을 찢어발기려고 들었다.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전력으로 뛰고 있는데 톱날이 벌써 지척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막시밀리앵은 제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 다행이다.
상대가 톱니바퀴를 써서.
“이런, 들켰네.”
그러나 그보다 더 길어지려는 순간, 톱날검이 크게 덜컥이며 톱니바퀴가 세차게 헛돌았다. 막시밀리앵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멀찍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나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폈다. 후두둑, 하고 내가 방금 빼낸 톱니바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물건을 잘 흘리시네요. 앞으로는 주의하세요. 이런 쓰레기 하나하나가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준단 말이에요.”
톱니바퀴의 약점. 빠지면 언제든지 갈아끼울 수는 있지만, 갈아끼우기 전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
맞물리지 않으면 힘을 전달할 수 없다. 아무리 강해도 공회전을 한다면 그저 성능 나쁜 부채에 불과하다. 나는 그 점을 노리고 톱니바퀴 소매치기를 시도했고, 성공하고야 말았다.
물론, 가치 있는 톱니바퀴를 소매치기 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내 톱니바퀴의 구조를 파악하다니! 어떻게 알았나?”
독심술로 알았지. 막시밀리앵의 머리 안에는 톱니바퀴 설계도가 있으니, 나는 거기에서 진짜 중요한 톱니만 골라서 뺐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대충 둘러댔다.
“자동마차, 아래쪽에서 위로 쳐올리니까 구조가 무너지던데요. 거기서 배운 것을 당신 무기에다 써먹은 거예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거.”
자동마차는 톱니바퀴의 맞물림으로 형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구조 때문에 아래서 쳐올리는 충격에 약하다.
그건 막시밀리앵의 무기도 마찬가지.
외부의 충격에 강하지만, 애초에 막시밀리앵의 톱니바퀴는 쉽게 조립하고 쉽게 해체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무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힘을 가하면 손쉽게 빠져나온다.
나는 그 구조를 파악했고, 꼬챙이 끝을 휘게 만든 뒤 톱니바퀴를 당겨서 빼냈다. 덕분에 육장성을 공격하고도 이렇게 살아서 말도 하고 있다.
글쎄, 아마 두 번의 기회는 없겠지만. 이게 어디냐.
“그것을 단번에 이해했다는 말인가! 대단해! 정말, 또 다른 종류의 인재로군!”
막시밀리앵은 침을 튀기며 극찬했다. 시아티에게 방해받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화 안 내세요?”
“내가 왜 화를 내겠나? 그걸 파악한 직관에, 이해한 것을 곧바로 실현해내는 추진력. 그리고 해내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 과단성까지! 자네는, 분명 자격이 있네! 아니, 인간의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해도! 자네는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어!”
방해받은 주제에 막시밀리앵은 더욱 만족스럽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참 웃음도 헤퍼.
나는 떨어뜨린 톱니바퀴를 다시 그의 발치로 굴려주었다. 그의 발치에 도착한 톱니바퀴는 저절로 그의 몸을 기어올라 망토 안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티르와 회귀자가 천사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이제 살았다. 나는 여유를 되찾고는 평온하게 말했다.
“질척이는 사람은 추하다고 했어요. 우리, 이제 슬슬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않을래요? 어둠은 티르의 몸 안이나 마찬가지에요. 여기 계속 머물면 당신도 위험할걸요?”
“확실히, 그렇군.”
막시밀리앵은 간단하게 수긍하고는 성큼 물러났다. 사방을 가득 메운 어둠 탓에, 몇 걸음 멀어졌음에도 그의 몸이 다 흐릿하게 보였다.
“내 생각에는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네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로 물러나겠네. 인간의 왕일지도 모르는 자네를 위해.”
“참나. 세금도 안 내면서 왕이랍시고 겁나 띄워 주네. 도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인간의 왕이 있다면 댁은 좀 공손하게 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아직 후보 아닌가! 누군가 한 명으로 확실해지면 남은 경의를 전부 표해주겠네!”
껄껄거리는 그의 웃음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생각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뒤, 나는 전신에서 힘을 빼며 중얼거렸다.
“여기 빡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