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5)
EP.25 레지스탕스
가죽으로 만든 공이 하늘을 난다. 즐거운 울부짖음과 함께 달음박질치는 소리가 들린다. 타닥. 발톱 달린 발이 딱딱한 콘크리트를 박차면 둘씩 나눈 엇박자로 힘찬 소리가 난다. 콘크리트는 흙과 달리 진동을 흡수하지 못하는 탓에 충격은 온전히 소리로 바뀌어 나에게 다가온다.
“멍! 멍!”
짧은 휴식이 끝나간다. 아지는 어느새 공을 물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나는 초점없는 눈으로 다가오는 작은 재앙을 마주 보았다.
나의 휴식시간은 공의 비거리에 비례한다.
높게 던져야 아지가 늦게 잡는다.
멀리 던져야 아지가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멀리 던졌다. 아지가 저 멀리 뛰어가서 공을 물고 달려올 때까지 쉴 수 있도록.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아지의 체력 빼고.
나는 그것을 공을 던지며 알았다.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비거리는 점점 짧아졌다. 하늘 높이 솟았던 가죽 공은 내 머리 살짝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기만 했다. 이제 날아가는 거리보다 굴러가는 거리가 더 길 지경이었다.
이제 아지도 달려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공이 굴러가면 물고 내 곁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공을 들어서, 아직 괜찮은 손목만 써서 톡 던지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그 순간은 찾아오고 말았다.
“잠깐.”
인간도 본디 짐승이라, 짐승적인 직감이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내 마음 속 짐승의 감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이상 던지면, 네 어깨 아작난다고.
“멍?”
나는 공을 던지려다 말고 손을 들었다. 어깨가 삐걱거리는 기이한 느낌이 든다. 마치 연필깎이를 돌릴 때, 축이 어긋나서 손잡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다. 뭔가 익숙하지만 절대 내 팔에서 들려선 안 될 느낌이다.
공을 던지는 것을 멈추고 손을 늘어뜨렸다. 아지가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팔을 늘어뜨리고는 선언했다.
“오늘 공놀이는 여기까지야.”
“멍멍! 더! 더!”
“더 던질 수야 있어. 하지만.”
입고 있던 의복 패킷을 해제했다. 땀에 젖은 보급형 셔츠가 낱낱이 흩어지고 그 아래 숨어있던 나의 비루한 몸이 드러났다.
도주와 생존 특화의 마르고 날렵한 몸. 지금까지 내 몸뚱아리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내구성이 시험받는 지금은 예전에 게으름으로 보냈던 시간이 아까웠다. 탄탈로스에 갇혀서 공 던지는 기계가 될 거라 예상했다면 누가 권했을 때 운동이라도 할걸….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다. 미래의 내가 오늘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야 할뿐.
아쉬움은 뒤로 한 채,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는 아지에게 붉게 달아오른 내 어깨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내 어깨는 고장난다. 그래도 상관없어?”
“멍!”
“죽을래?”
“끼잉.”
그래도 아지는 더 못 노는 게 못내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흘겨보기 시작했다.
흥. 어림도 없지.
“어쩔건데? 지금 나에게 공 던지기를 시켰다가는 봐라. 나는 더 이상 팔을 들지 못하는 몸이 될 거고, 후유증에 골골거리다가 결국 어느 순간 돌연사하고 말겠지.”
“멍!”
“뭐? 팔이 없다고 죽지 않는다고? 무슨 소리를. 계단에서 넘어지는데 팔이 안 올라가서 난간을 못 잡고 죽을 수도, 테러리스트가 쳐들어와서 손을 들라고 위협하는데 팔이 안 올라가서 사살당할 수도 있어! 신체 중 하나가 불편하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위협이라는 말이다!”
“멍멍….”
“내가 죽으면 봐. 이 무저갱에서 나처럼 고분고분하게 공을 던져줄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셈이야! 너는 잠깐의 이득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아니, 공을 던져주는 기계를 영영 못쓰게 만들 셈이냐?”
“멍…. 그건, 싫어.”
“하하! 알겠냐? 내가 부서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휴식시간을 보장해주시지!”
이 지성이 부족한 짐승에게 노동효율과 피로 한계, 휴식에 대한 기본 개념을 가르쳐줄 때였다. 아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내 팔을 양팔로 껴안고는 입을 가져다댔다.
뭐지?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가? 황금알을 못 낳으니 이제 거위고기라도 되라는 건가? 설마 그렇게 멍청할 리가.
아차. 개라면 먹지도 못할 황금알보다는 거위고기를 더 쳐주겠지?
어라. 잠깐만.
“사장님, 죄송합니다! 공 던질 테니까 제발 목숨만은!”
내가 팔을 빼려고 할 때, 그보다 빨리 아지의 주둥이가 다가왔다. 나는 끔찍한 고통을 예견하고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할짝하는 소리와 함께, 축축하고 부드러운 게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실눈을 떠보니, 아지가 붉게 달아오른 어깨를 정성스레 핥는 중이었다.
“뭐야. 아프다고 하니까 기름칠이라도 해주는 거냐?”
“멍.”
그럼 그렇지. 개의 왕이 살아있는 인간을 먹을 리가 없지.
아니, 이게. 생각을 읽을 수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게 되더라고. 어쩔 수 없잖아. 자기 보호 본능이라니까.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정성스레 핥는 아지를 빤히 보았다.
다루는 게 완전 악덕 사장이네. 잘 안 굴러가니까 일단 기름칠부터 하고.
“야. 아무리 짐승의 왕이 핥으면 상처가 낫는다고 한들 이게 낫겠냐. 이건 상처가 아니라 너무 많이 써서 닳아버린 몸뚱아리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어깨 즈음에서 묘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꼭 몸에 창을 내어 바람이 통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시리지 않고 상쾌한 기분이 들어 반가운 기분이다.
침 때문인가, 하기에는 그 축축한 것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팔을 들어올렸다.
약간 뻐근하기는 했지만, 팔은 아까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움직였다. 아니, 오히려 공 던지기 전보다 더 매끄러울지도.
“이게 되네?”
짐승의 왕이 핥는 행위가 성수 급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이 정도였다고? 아니면 아지가 특별한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 아지가 내 어깨를 요모조모 살피고는 다 끝났다는 듯이 짖었다.
“멍! 나았어!”
“AS는 확실하구나. 팔이 나갈 일은 없겠네. 그래도 방금 나았는데 조금 쉬었다가 하자.”
“멍멍!”
아지는 그대로 내 허벅지에 상체를 얹고 엎드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지의 머리털을 헤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렘의 말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서 보급 물자가 도착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온다는 거지?
상식적으로는 투하하는 방식이 맞을 텐데. 무저갱 밑바닥에 평범한 수단으로 도착할 수 있나? 만일 도착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받지? 몸으로 받으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래봤자 햄버거 패티가 되어 흡혈귀만 좋아할 텐데.
아, 생각해보니, 흡혈귀도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돌려서 저 멀리 있는 지하 무기고를 바라보았다. 심연으로 향하는 문처럼 불길하게 자리한 지하 무기고의 입구는 오늘도 굳게 닫혀있었다.
“요새 통 일어나지를 못하시네.”
원래 나이가 많으면 잠이 많아진다고들 한다. 나이와 수면 시간 사이의 상관관계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1할이라도 있다면, 흡혈귀의 일일 평균 수면 시간이 24시간에 수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기립성 저혈압도 있으셔서 휠체어, 아니, 관짝에서 쉬이 나오지도 못하시고. 그런데도 사승관계를 맺었다고 무리해서 아까운 진혈을 쾌척하시고. 이제는 피를 공급받을 수도 없는데 말이야.
쯧쯧. 혀를 차고 있던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피, 공급.
“잠깐. 흡혈귀에게 피가 부족해지면 내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만일 흡혈귀가 치매로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먹어버리거나, 잠결에 출출해서 무심코 간식 하나 꺼내먹으려고 한다면 가장 먼저 내가 죽지 않을까. 나에게는 저항할 능력이 없으니까, 그냥 봉투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음식 먹는 기분으로 피를 취할 것이다.
“보급품 목록에 피는… 없겠지?”
섬뜩해졌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혈액팩은… 이런 식으로 보급할 만한 물품이 아니고. 대신 사형수라도 안 보내주나?
“아니, 와도 문제구나. 내가 사형수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여기 있는 넷의 3일 치 식량이 90일 치가 되었다, 라고 한다면 원래 여기 살던 사람은 최소한 100명이 넘었다는 뜻이다. 탈옥한 사람은 빼도 꽤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
그런데 내가 여기 내려왔을 때, 정작 시신이나 혈흔이 보이지 않았다. 군국에서 청소부대를 파견했을 리는 없으니 가능성은 하나. 흡혈귀가 다 먹어치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불결하네. 인간 하수구도 아니고….
어쨌든 그만큼의 피를 빨아들였다면 당분간 더 탐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또 모른다. 시동이 걸린 엔진에는 지속해서 연료를 넣어줘야 하니, 흡혈귀는 앞으로도 꾸준히 피를 필요로 할지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피 공급처가 필요한데…. 어디 피를 계속 짜내는 가축 비슷한 거 없나?
잠깐. 있다.
방금 전 찾아내지 않았나.
“불사종족, 그래. 불사종족이라고 했지”
머릿속에 떠오른 천재적인 발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두뇌에 찬사를 보냈다. 자화자찬이 추하고 부끄러운 일이라지만 이번에는 나 스스로를 ‘천재’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불사종족은 팔이 잘려도 죽지 않는다. 비슷하게 피 좀 뽑아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음식을 먹어가며 재생할 테니, 보급만 충분하다면 피를 무한대에 가까이 공급할 수 있겠지.
“큭큭큭. 좋아. 완벽해. 이게 꼭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멍?”
“아지야. 방금 내가 개쩌는 생각 하나 했는데 들려줄까?”
“멍멍?”
“알아. 너 멍청해서 이해 못하는 거. 그래서 말하는 거니까 그냥 들어 봐. 내가 말이야. 방금 역사상 최고의 천재도 이마를 탁 칠 법한 생각을 해냈거든?”
“멍? 멍청, 해? 내가?”
“크크크. 원래는 먹다 남은 음식 짬처리를 너한테 하려고 했지만, 우리끼리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 우리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고. 남은 음식, 탄 음식, 상한 음식은 불사종족에게 주는 거야.”
“멍! 나, 안 멍청해!”
“상한 음식이니까 상한 사람한테 줘야지. 심지어 불사종족은 그거 잘못 먹어도 안 죽을걸? 대신 알아서 해독해서 피를 만들어내겠지. 그러면 말이다. 피를 짜내가지고 흡혈귀에게 팔아먹어야지. 흡혈귀는 개털이지만 그 제자를 자처하는 녀석이 부자라서 돈을 대신 지불해 줄 거야. 그러니….”
툭.
아지의 앞발이 내 뺨을 치고 지나갔다. 난데없는 충격에 내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얼떨떨하다. 에이, 설마. 살짝 발끈해서 아지를 노려보는데, 내 다리를 베고 누운 아지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와중에 다리를 베고 있어? 자기가 뭘 했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걸까?
감히 축생 주제에 인간의 뺨을 때리다니?
선을 넘었다.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제 슬슬 된장 바르기 프로토콜을 준비해야겠어.
내가 그렇게 결심하고는, 아지를 털어내기 위해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아지가 내 허벅지에서 미끄러지는 걸 기대했지만, 그보다 아지가 먼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뭔데. 위에 뭐가 있어서. 나도 고개를 들어 위쪽을 확인해보았지만 언제나 보인 칠흑 같은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나를 낚은 거야?
아니, 아지한테는 그럴 지능이 없는데.
다시 고개를 들고 오만상을 찡그리며 노려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새까만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구멍으로 보이는 하늘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빛은 이쪽으로 다가오기라도 하듯 점점 커지고 있다.
자비로우신 대지모신께선 가끔 우리에게 다가오고는 하지만, 고상하신 천신께선 쉬이 가까이 오는 법이 없다. 인간이 신에 다가가고 싶어 높이 올라가면 바람과 번개로 징벌을 내리곤 하는 것이 천신이다.
그러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건 하늘이 아니다. 아마도.
“골렘이 말했던 보급품이겠지.”
그 직후,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무저갱은 바람이 불지 않아 고요하다. 그런 이곳에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도착할 거다. 차분히 기다렸다. 멀리서 일렁거리는 어둠과, 주기적으로 반짝이는 빛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것들이 빛이 번지는 범위에 다다르자, 그 모습이 한결 뚜렷하게 보였다.
방수포로 포장된 네모난 상자가 커다란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지고 있다. 상자 옆면에는 조그만 지시등이 붙어서 반짝거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상자를 못 보고 깔릴까 봐 취한 조치다. 90일 치 식량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지, 상자는 안에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크다. 저 안에는 식량이 가득 들어있겠지.
바람이 없어서인지, 보급상자는 미동도 않고 정자세로 콘크리트 위에 안착했다. 쿵, 하고 묵직한 진동이 콘크리트를 타고 흐른다.
“멍!”
아지가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나도 아지를 따라 낙하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무저갱이라고 저렇게 낙하산을 매달아 떨어뜨리나 보네. 아마 나도 저런 식으로 떨어뜨렸겠지. 군국 녀석들, 그래도 부서지지 않도록 낙하산은 써주는구나.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긴 한데, 군국이 상식을 지켜줘서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천이 휘말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낙하산이 작은 패킷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낙하산도 의복 패킷으로 만든 것이었다. 저걸 저렇게 쓰면 다시 말아넣을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참 기발하게 잘 써먹는다니까.
내가 싱글벙글 상자의 뚜껑을 열려고 할 때였다.
어라.
왜 미개봉 스티커가 뜯겨 있지? 누가 배달하다가 뜯어서 먹기라고 했나?
‘잠입 성공. 오랜 기다림이었다, 동지들. 이제 침투하자.’
그때 안에서 한 줄기 생각이 들려왔다.
동지? 침투?
식량 보급상자에서 들려서는 안 될 생각인데.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안쪽에서 급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급 상자가 불길하게 덜컥이고, 웅크렸던 무언가가 기지개를 켠다.
‘목숨을 쓰자, 동지들이여! 압제자 군국을 무찌르기 위해!’
빌어먹을 군국. 도대체 뭘 보급한 거야?
뭘 대비할 틈도 없이, 보급 상자의 옆면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