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68)
EP.268 먼 곳의 이야기. 무대의 뒤편
도축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심정은 어떨까?
인간은 양이 아니기에 모른다. 그러나 조금 전 간신히 살아난 연금강 제련소의 노역자들은 아마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제련소가 선보이는 죽음은 목을 겨냥하고 느릿하게 다가오는 칼날과 같았다. 느리고 알기 쉽다는 점에서.
팔을 파고든 갈고리가 인간을 끌어당긴다. 그에 딸려간 사람이 시뻘건 열기를 토해내는 고로 너머로 사라지면, 저 너머에서 피거품 섞인 비명이 들끓어 오르다 거품 터지듯 폭, 하고 사라진다. 인간 하나를 집어삼킨 연금강 고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갈고리를 당겨 다음 희생자를 입에 넣는다.
알기 쉽고 단서도 많았으며 해석할 시간 역시 충분했다. 고난이도의 지적활동을 할 필요도 없이 노역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연금강 제련소에서 고통받느니 차라리 죽여달라 울부짖었던 이들도 이런 죽음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자기가 상상한 방식 이외의 죽음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 성향 때문일까? 혹은 말만 그랬고 아직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쨌건, 제련소는 그 끔찍한 비밀을 밝히며 징벌기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 평가받는 살인범에게서 그 두 개를 전부 끌어냈으며, 평생 기도 따위 하지 않은 불신자가 두손을 모으고 참회했고, 생의 의지를 잃고 자포자기로 죄를 저지른 사람조차도 삶의 의지를 갖게 했으니까.
그렇게, 노역자들이 느리고 차분한 몰살을 당하던 때.
하늘에 기도가 닿았는지, 천장을 부수고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셰이는 새까만 몽둥이로 고로를 겨냥했다. 강철조차 녹이는 열기와 붉게 녹아내린 철을 앞두고, 셰이는 기공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지잔을 내리그었다.
지곤류, 홍해 가르기.
검은 참격이 붉은 파도를 만든다. 새빨갛게 녹아내린 쇳물이 양옆으로 갈라진다. 묵직한 쇳물이 파도치며 다시 빈틈을 메우려고 하나, 진짜 바다도 아닌데 지잔의 반발력을 거스를 순 없다. 쇳물이 겁 먹은 아이처럼 양쪽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후끈한 열기 속에서 셰이는 땀에 젖은 옷을 떼어내며 바닥을 살폈다. 장교가 일러준 대로 고로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열기는 곧 변화시키는 힘. 녹은 쇳물에서 열기를 빼내면 단단한 금속이 된다. 저 마법진은 그렇게 빼낸 열기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종류였다. 그 열기는 연금물질을 녹이는 데에 쓰일 것이다.
“마법진을 바닥에 만들어놓다니…. 칫, 더럽게 잘 만들었네.”
셰이는 그 악독한 설계에 혀를 내둘렀다.
마법진의 약점은 마법진 그 자체. 마법진의 물리적인 내구성도 문제지만, 그 구조를 해석한다면 손쉽게 파훼할 수 있는 건 물론 역이용될 가능성까지 있다.
그러나 연금강 고로의 마법진을 보기 위해서는 녹은 강철이 둔하게 찰랑거리는 고로를 비워야 한다.
그런데 고로를 비운다면 마법진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 파훼할 필요는 물론, 역이용할 가치가 사라지기에.
군국답다면 군국다운, 참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지잔!”
그래도 수십 번의 회귀를 통해 모든 것을 공략해온 회귀자, 셰이에겐 이 정도는 손쉽다. 셰이는 간단히 마법진을 부수었다. 열기가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진 고로가 요동친다. 셰이는 쇳물이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몸을 빼내려고 했다.
그때, 셰이는 부서진 마법진 안쪽에서 숨겨진 작은 마법진을 발견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하고 꺼림칙한… 고대의 문자열로 이루어진 큰 원이, 작은 원의 테두리를 부수고 집어삼키는 문양.
금기개진, 탐식.
인간을 재료로 쓰는 고대의 주술. 야만의 상징.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뒤 금기로 정해진 것. 가장 흔하기에 가장 끔찍한 탐식의 문양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접하지도 못하는 금기다. 그러나 수차례 멸망의 위협에 맞서 싸웠던 셰이에게 탐식의 금기개진은 너무 자주 접해서 이제 슬슬 정이 들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군국은 이걸 갖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네.”
매 회차 군국은 많은 위기를 겪었다. 회귀자의 지식과 레지스탕스의 공작으로 사령부가 붕괴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일도 있었고, 전쟁을 벌였다가 반대편에 회귀자가 가세해서 멸망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회귀자는 공주를 지도자로 삼은 공화국이나, 혹은 공주를 왕으로 추대한 신왕국에 이것저것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말살 장치로 노역자들을 탐식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 장치가 있구나, 하는 정보만 접했을 뿐.
그마저도 괴담처럼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뭐, 좋은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거겠지.”
연금강 제련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배를 가르면 당장 저주받은 혈철 같은 고코스트의 연금강이 튀어나올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군국의 전쟁수행능력이 떨어진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굳이 죽여가며 철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왜… 군국은, 말살 장치 같은 걸 만든 거지?”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고로에서 나오고서도, 살아남은 노역자들의 환호를 들으면서도 셰이는 생각을 계속했다.
도대체 왜, 군국은 쓰지도 않을 말살 장치를 만들어놓았단 말인가?
“꺼져, 이 짐승같은 놈들! 퉷. 내가 이딴 놈들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뛰어야 한다니…!”
토루크 대장이 노역자를 사정없이 밀어젖히며 다가왔다. 노역자들은 비명과 욕설을 퍼부으며 좌우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셰이에게 다가온 토루크 대장은 대단히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어이, 꼬마!”
“누가 꼬마야?!”
“그러면 어른이라고 할까! 어쨌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셰이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녀는 장교들 몰래 시설을 좀 과하게 때려 부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강 제련소를 없애면 군국의 전쟁수행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따라서 토루크 대장과 셰이는 파괴를 지양하고 노역자를 구출하는 데 집중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물론, 셰이는 그걸 지킬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시설물 파괴에 가장 능한 사람은 지잔을 가진 셰이다. 그녀가 힘이 좀 더 들어갔다고 변명하면 저들이 어쩔 건가? 어차피 싸우면 그녀가 이기는데.
셰이는 조금 더 뻔뻔하게 나서기로 했다.
“고로를 부쉈는데, 왜? 거기까진 합의된 거잖아?”
마법진까지 때려 부순 건 확인할 수 없을 거다. 셰이는 그런 계산으로 대답했다.
“그거 말고!”
하나 토루크 대장의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지금 제련소 안쪽의 기척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건 비단 이곳의 일만이 아니야! 제련소 전역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죽어가는 인간을 구하는데,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네가 이들을 밖으로 빼돌리고 있나?”
다른 용건이다. 문의를 접수한 셰이는 잠깐 자기 행동을 되새겼다.
그녀가 노역자를 밖으로 빼돌리고 있나? 아니오.
그럴 생각이 있었나? 아니오.
되새김이 끝났다. 셰이는 시원스레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럼 누구냐? 이 사회의 쓰레기들을 밖에 풀어놓는 것이!”
물어봐야 셰이도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죽어가는 인간 하나하나를 구하는 건 티르칸쟈카에게 일임했다. 흑기사를 손발처럼 운용하는 시조 티르칸쟈카가 도리어 인명 구조에는 더 적합하니까.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을 고르라면 첫 손가락에 꼽히는 그녀가 사람을 구하는 일에 최적화되었다니, 아이러니지만. 어쩌면 생과 사는 동전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민을 끝내 셰이는 손을 휘휘 저었다.
“티르칸쟈카에게 말하든가.”
“…음!”
그러나 토루크 대장은 셰이에게 다 드러날 정도로 확연하게 난색을 표했다. 셰이는 머뭇거리는 그를 보고 의아해했다.
“왜? 티르칸쟈카가 무섭기라도 해?”
“…큼!”
“응? 정말이야?”
셰이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그에 토루크 대장은 뭐라 확답하지 않고는 시선을 피했다.
토루크 대장은 하고픈 말이 많았다. 왕국 시절, 신전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모든 이들이 천신에 경배할 때. 시조 티르칸쟈카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기사살해자. 일인국가. 밤과 그림자의 여왕.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저주받은 몸을 이끌고 신전을 파괴하곤 했다.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사제를 죽이고 신전을 짓이기고 신앙을 저주하며 죄 많은 몸을 이끌었다.
수도 없이 많은 영웅들이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그들의 영웅적인 시도는 시조 티르칸쟈카의 역사에 피로 된 한 획만 더했을 뿐이다. 시조는 피의 군세와 함께 진군하며 피와 죽음을 흩뿌렸다.
만일 축복받은 엔버 대평야가 없었다면. 가로지르는 데 사흘이 걸리는 그림자 없는 땅이 없었다면… 성황청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시조의 진군에 한 번쯤은 거꾸러졌을지도 모른다.
왕국이 무너지고 군국이 세워졌지만, 거기를 채우는 인간이 바뀐 건 아니다. 아직도 흡혈귀에 대한 공포는…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그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 그들은 빛으로 만든 함정 속에 시조를 가두려고 하지 않았나. 옛날 사람인 토루크 대장에 있어서, 그 행동은 혈관에 구멍을 뚫은 뒤 거꾸로 매달리는 방혈형에 처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물론 군국이 세워진 이후 태어나, 그런 종류의 두려움을 학습하지 않은 셰이에겐 그 정도까진 아니다. 셰이가 물었다.
“설마, 무서우니까 나보고 대신 물어보라는 뜻은 아니지?”
“크흠!”
“참나. 한시가 바쁜 시간에….”
셰이는 솔직한 요구에는 일단 응해주는 편이다. 딱히 해선 안 될 이유가 없다면 일단 하고 본다. 답 없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언제나 낫기 때문이다.
어쨌건 경과를 물어보는 건 필요한 일. 일단 토루크 대장에게 빚을 지워두기로 한 셰이는 심호흡을 하고 그 이름을 불렀다.
“티르칸쟈카!”
[불렀느냐?]그림자에서 어둠이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중에 나타났다. 복도 저편, 벽에 비친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듯 나타난 티르칸쟈카는 천천히 셰이와 토루크 대장에게로 다가왔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무표정이었다. 자신을 빛으로 된 함정에 몰아넣었던 군국에게도, 그들을 몰아붙이려고 했던 토루크 대장에게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여전히 기품 어린 모습으로 이야기를 들으러 친히 왕림했으니, 누가 그녀를 피에 미친 괴물로 볼까.
“노역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뭐 아는 거 없어?”
[글쎄다. 잘 모르겠구나. 끔찍한 비극을 앞두고 잔뜩 겁을 먹어, 어딘가에 꼭, 꼭 숨어있는 것 아니겠느냐?]명백한 딴청이다. 태도로 보나, 말투로 보나 무언가를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거짓말은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티르칸쟈카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의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발끈한 토루크 대장은 전신에 힘을 잔뜩 끌어모으며.
“…두고 보지!”
라고 말하곤 돌아갔다.
티르칸쟈카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토루크 대장을 보며 옅은 조소를 머금었다.
[가엽고 딱한 자로구나. 두려움과 체면 속에서 갈등하는 이의 뒷모습은 어찌 저리 우스꽝스럽더냐. 마음에 들었다.]“마음에 들어? 왜?”
[너와는 달리, 나를 겁내는 이들은 나를 귀찮게 굴지 않으니 편하지 않느냐. 그런 이들은 오래 살려두는 편이다.]“으흠. 그렇구나…. 응? 그러면 나는?”
티르칸쟈카는 살포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세상이 어찌 한 색이겠느냐. 나를 겁내지 않는 이들은 나를 적적하게 두지 않으니 역시 필요로 하지.]“거참, 고맙네…. 그런데 노역자들은 왜 탈출시키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아니, 없어. 오히려 좋지. 군국이 이 일을 수습하려면 한참 걸릴 거니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래.”
[그건….]그가 비밀스레 부탁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숨길 수도 없는 일. 어차피 밝혀질 비밀은 억지로 숨기지 않는 게 낫다. 티르칸쟈카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마침 그녀에게 그 일을 부탁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