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69)
EP.269 먼 곳의 이야기. 무대의 바깥
기공의 달인은 걸을 때도 기공을 사용한다. 발이 땅에 붙으면 그것을 끌어당기며 자기 몸을 앞으로 움직인다. 기공으로 땅을 붙잡아야 자기 몸을 더욱 빠르고 강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휴즈는 기공의 달인답지는 않았다.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고 태도는 경박하다. 경계할 정도로 강한 기운은 내보이지 않아서 여차하면 존재감을 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만이 내보이는 특유의 묘한 여유가 그마저 강자의 일탈로 꾸며준다.
도무지 알기 힘든, 휴즈라고 불리는 사나이는 티르칸쟈카를 발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티르!”
티르칸쟈카가 의아해져서 그를 불렀다.
[휴? 어찌하여 그곳에 있지 않고 여기까지 왔느냐?]“티르 보러 왔죠.”
[음?!]살짝 당황하는 티르칸쟈카에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인 뒤, 그는 경박한 태도로 셰이를 돌아보았다.
“티르에게는 제가 부탁했어요. 이곳의 노역자들을 밖으로 빼내 달라고. 노역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이리저리 도망치면, 중간에 우리가 몰래 밖에 빠져나갔을 때 추적을 뿌리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칭찬이 고픈 아이처럼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셰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얼굴도, 행동도, 말투도, 행동거지도 분명 그와 같다. 그런데 다르다.
툭, 툭. 가슴에 자그마한 쇠구슬이 톡 부딪히는 느낌. 십수 번의 죽음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기이한 육감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셰이는 갑자기 찾아온 직감을 따라 움직였다.
“셰이 씨!”
셰이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퍼뜩 대답했다.
“어, 응.”
“왜 칼을 꺼내고 계신 거죠…?”
“응?”
셰이는 반쯤 내밀다 만 천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려고 했던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천앵을 휘둘러 오른팔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예전 기억이 났다. 오른팔을 자르려고 했다가 며칠 동안 두고두고 우려먹었지. 그때 기억에 셰이는 아닌 척 천앵을 갈무리했다.
“아, 이거. 신경쓰지 마. 버릇 같은 거니까.”
“참 특이한 버릇이네요. 하긴, 칼을 잡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셰이의 말을 넘겨받았다.
역시, 뭔가가 다르다. 직감적으로 깨달았음에도 셰이는 애써 위화감을 가라앉혔다. 애초에 휴즈는 처음 만날 때부터 끔찍할 정도로 수상했고, 알고 지낸 이후에도 수상함이 가시지 않았으니.
어떤 이상한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휴즈다. 그럴 일 없겠지만 만일 육장성이 갑자기 투항하겠다고 나타난다면, 세이는 일단 그가 뭘 했는지 의심할 거다. 신경 쓰면 지는 거다….
[…기이하구나.]그리고 티르칸쟈카 역시, 비슷한 위화감을 느끼며 자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얇은 피부 위로 은은히 느껴지는 가느다란 박동. 평소에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들떠서는 반갑게 뛰던 것이, 오늘따라 소식이 없었다.
혹시나 감정이 그새 변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이란 갈대 같으니.
아쉬움을 감춘 채 티르칸쟈카는 그를 불렀다.
[휴. 나를 부르지 그랬느냐. 그렇다면 내가 찾아갔을 텐데.]“제가 감히 시조를 오라 가라 할까요.”
[평소에는 잘도 그리하였으면서.]“오늘은 마중 나가고 싶은 기분이네요.”
분명히 이상하다. 목소리나 몸짓, 얼굴은 분명 그이나, 하는 행동거지에 위화감이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것과 싸워온 티르칸쟈카자는 자신의 직감을 꽤 잘 믿는 편이었다.
티르칸쟈카가 은근히 운을 띄웠다.
[맞다, 휴. 너에게 받은 카드를 슬슬 돌려줄 때가 되지 않았더냐?]“제 카드? 어떤 카드요?”
[네가 준 카드도 기억하지 못하느냐.]“카드가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종류가 워낙 많아야지.”
하트 1. 심장, 피, 혹은 생명. 티르는 잊지 않았고, 그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가 티르칸쟈카 의심은 점차 형태를 갖춰나갔다. 이제는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로 손가락을 들었다.
[되었다. 알아서 가져가보거라.]“어디에 두셨는데요?”
다름 아닌, 그녀의 몸 속에.
순진한 미소로 되묻는 그. 티 없이 맑고 부드러운 미소가 끔찍하게도 역겹게 느껴진다. 티르칸쟈카는 주먹을 쥐었다. 주인의 감정에 동조한 어둠이 미친 듯이 일렁거렸다.
명백한 적의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는. 아니, 휴즈로 위장했던 힐데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며 나긋하게 읊조렸다.
“으흠. 잘 안 되네요~. 하긴, 완벽하게 따라 했다고 하기엔, 제가 그분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죠.”
얼굴은 분명 그와 같은데, 몸짓이 점차 부드럽고 나긋해진다. 조그만 행동 하나에도 일반인은 눈치채기조차 힘든 기교가 섞여 있다.
익숙한 얼굴이 낯선 행동을 취하자, 티르칸쟈카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려는 듯 흑기사들이 흉흉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 숨은 그녀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휴를 어떻게 했느냐.]“네에? 어떻게 했냐니요? 질문이 거꾸로 되었어요. 그분이 저를 어떻게 했냐, 가 더 적합한 질문이겠죠.”
시조의 분노를 앞두고도 힐데는 두려움 하나 없이 태연했다. 아닌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지식이 부족한가?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상대의 기량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감정이 부족한가? 그렇지도 않다. 연기자에게 필요한 건 누구보다도 풍부한 감정이니.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연기를 할 수 없다.
그런데도 태연할 수 있는 건, 자신을 잃어버렸던 이의 특권이다. 오직 운명에게 버림받고 자신을 잃어버린 이만이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가 된다.
티르칸쟈카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시조를 앞에 두고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저 태도가 익숙했던 것이다.
[성검대(聖劍隊)…?]그러나 잡념도 잠시, 티르칸쟈카는 자신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 다르다. 그 잡것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딱딱하나, 너는 좀 다르구나.]“고마워요. 칭찬해주셔서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기분 나쁠 정도로 느글느글하다는 뜻이다.]티르칸쟈카가 팔을 홱 뿌리치며 다가갔다. 어느새 힐데는 어둠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여기서 티르칸쟈카가 그럴 의지만 가진다면, 그녀는 능력과는 무관하게 어둠에 휩쓸려서 익사할 것이다.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천민, 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친히 죽여주마. 피를 다 빼내고 한 줌만 남긴 다음, 그 티끌만 한 피로 영원히 고통받게 할 것이야.]“그럴 수 있겠어요?”
힐데는 손으로 그의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얼굴을, 그토록 가혹하게 대할 수 있어요?”
물론이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티르칸쟈카는 감성에 휩싸이지 않는다. 얼굴이 같아도 다른 존재라는 걸 인식했다면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렇게 해왔고 이번에도 그러리라 확신했으나, 티르칸쟈카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자신을 발견했다. 턱, 하고 마음의 방지턱에 적의가 걸렸다.
“주저하시네요~. 귀여우시네. 역시, 당신도 그에게 무언가를 받았군요?”
그리고 힐데는 그 찰나의 감정을 포착했다. 그녀의 눈가도 가라앉는다.
“시조 티르칸쟈카가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 정치적인 행보는 아니다. 정치적인 행보였다면 서로 알 수 있도록 의도를 비추어야 했으니까. 개인적인 복수? 그것도 아니다. 대상이 명확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나머지 가능성. 순수하게, 명확한 목적 없이 그저 따라온 것일 가능성. 어디까지나 가설 수준이었는데, 그게 정답이었어. 그러면 군국 침략은 순전히 그의 발상이었다는 게 결론.”
적에게 정보와 약점을 건넸다는 사실에 분노한 티르가 손을 내뻗었다. 흑기사들이 전면으로 나서며, 그림자로 된 칼과 창이 들이밀어졌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구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그렇디만 힐데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녀의 목을 겨냥한 그림자의 창을 톡 건드리며 그녀는 사특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공격을 실제로 감행하진 않으시네요~. 이 얼굴을 공격하기 힘드신가요? 도대체 얼마나 귀중한 것을 받으셨기에?”
[큭….]“후후. 뻔하네요. 역시, 여기 있는 모두, 그에게 무언가를 받고 그를 따라 군국까지 온….”
무언가 기척을 눈치챈 힐데는 말을 하다 말고는 땅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낙하보다는 바닥을 붙잡아 당기는 듯한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직후, 그녀가 방금 있었던 장소에 보이지 않는 검의 참격이 몰아쳤다.
“쳇.”
공기가 일렁거리고 신기루에 가려진 셰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회심의 기습이 실패한 셰이는 혀를 찼다.
바닥에 몸을 붙인 뒤 튕기듯 몸을 일으킨 힐데가 말했다.
“어머? 그쪽은 손속에 거침이 없네요? 동료의 얼굴을 보고도?”
“얼굴? 칫, 그게 뭔 대수라고.”
“…흐음. 진심? 경험이 많은 걸까요, 아니면 태생적으로 정이 없는 걸까요? 나이를 생각하면 아마 후자겠…죠? 의문이네요~.”
“내 성격을 멋대로 정하지 말아 줄래?”
셰이는 투덜거렸다.
셰이는 몇 번의 회차 속에서 온갖 일을 겪었다.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 적도 있었다. 배신도 수도 없이 당했다. 혹은, 한때 둘도 없는 동료였으나, 고작 한 회차 뒤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죽이려고 달려든 기억도 있다.
같은 인물을 몇 번이고 죽인 적 있는 셰이에게 고작 얼굴이 같은 타인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상대의 강함을 대강 파악한 셰이는 천앵과 지잔을 들고는 명백한 적의를 표했다.
“유언을 남기고 싶다면 어서 말해. 나나, 티르칸쟈카나. 지금 좀 바쁘거든?”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지인이 소개해서 왔죠. 그분께서 저보고 당신을 만나라지 뭐예요?”
“그? 휴즈 말하는 거야?”
“네에. 셰이, 당신이라면 제가 잊어버린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잃어버린 거 있으면 장물아비나 찾아가. 아니면 기부했다고 생각하고 잊든가.”
“이미 했어요. 그 바람에 지금 제가 이꼴이 나서.”
힐데는 쿡쿡 웃었다.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태도에 셰이가 안색을 찌푸리던 차, 힐데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얼굴을 바꾸었다. 휴즈의 얼굴과 목소리가 조금씩 사라지며 점차 여성적으로 바뀌었다.
“제 이름은 힐데. 그리 이름 지어진 자.”
휴즈의 겉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한 힐데가 셰이를 향해 말했다.
“셰이.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만일 제 부탁을 들어준다면, 저도 당신이 알고자 하는 정보를 하나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