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74)
EP.275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16
오랜만에 만난 에이비 대위는 예전만도 못해 보였다. 인간미 하나 없이 딱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내가 봐왔던 골렘만큼의 생동감도 없었다.
에이비 대위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본관은 군국 통신병 아이비 대위입니다.』
‘네. 저도.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말은 딱딱하게 했지만 정작 그녀의 생각으로 들려오는 말은 다르다. 고유마도 때문인가 보다.
물론 생각을 읽는 나에게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비? 뭔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되었어요?”
『정신오염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이너서클 사령부로 호출받았습니다. 도중 휴즈,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 불리는 귀하의 테러가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통신병의 판단을 방해하여 이름을 빼앗기고 임시로 이너서클 통신본부로 배속되었습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본관은 이미 각오한 일이나, 귀하는 어떤 생각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하멜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 그대로 도망치지 않고 다시 이너서클까지 들어온 것입니까? 도망치는 와중에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잠깐 떠난 동안 다사다난했네요.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였네요, 에이비 대위… 아니, 아이비 대위였나? 그때 말을 건 것도 대위였죠?”
『긍정.』
“왠지, 비슷하더라. 이름은 왜 바꾼 거예요?”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에이비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저를 에이비로 기억하기에.’
대위의 생각이 먼저 들려오고, 메아리처럼 소리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짐작하셨다시피, 통신병의 호칭은 식별명이기 때문입니다. 본관의 이름에는 구별 이외의 의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안에서 에이비로 기억됩니다. 만일 제가 골렘을 통해 귀하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때 저는 반드시 에이비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귀하는 제가 누군지 알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제가 삐 대위라고 부르는 건 상관없죠? 제가 부르기 나름이니까.”
『…!』
군국은 모든 인간을 통제하려고 한다. 군국의 명령에만 따른다면 모두 행복하진 않겠지만 아무런 죄도 책임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군국에는 여전히 범법자가 존재한다. 타국에 비하면야 귀여운 정도지만, 군국의 가혹함에 비해서는 많다. 심지어 그들 중 대다수가 잡범이다. 모여서 비행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군국의 두려움을 알면서도 굳이 할 필요 없는 범죄를 저지른다.
한마디로 말해, 군국도 완벽하지 않다.
당연하겠지. 이 군국을 만든 사람도 인간일 테니까.
내 앞에 있는 이 통신병이, 자기 이름에 애착을 갖게 된 에이비 대위가 그것을 증명한다.
“삐 대위.”
『본관은….』
에이비 대위가 고장 난 듯이 버벅거렸다. 나는 손을 뻗었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나팔꽃 덩굴. 나는 덩굴이 보이지 않는 척, 다정하게 대위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
“어깨 딱딱한 거 봐. 운동 안 했죠?”
어깨를 휘감고 있던 나팔꽃 덩굴에 내 손이 닿자, 수십 년 동안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에이비 대위는 말을 더듬었다.
『그, 긍정.』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예요? 방구석에 처박혀서 일할 거라면 자기 몸관리라도 똑바로 해야지.”
『본관은 골렘을 통하여 업무를 봅니다. 그러한 정비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체 동조형이잖아요. 몸정비가 곧 골렘정비지. 삐 대위 몸이 유연해지는 만큼 골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진다니까요?”
『…귀하에게 그런 지적을 들을 이유는 없으며, 따를 의무 역시 없습니다!』
모두와 같아야 동조를 이룰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다름을 얻는다면 동조는 깨진다. 나는 에이비 대위와 함께했던 며칠 동안 삶을 느낄 수 있게 온갖 자극을 준비했었다.
군국이 하나의 육체라면, 통신병은 신경이지.
그리고 가장 적은 양으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건 바로 신경독이다.
“무용한 시도입니다. 그녀는 통신병이자 군국에 충성하는 군인입니다. 또한, 그녀는 현 모듈의 제어를 받고 있습니다. 귀하와 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 제한적입니다.”
IA가 끼어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원인 모를 불안함을 느끼고 있네. 내가 독을 흘려 넣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끼어들지 마세요. 저는 제 방식대로 통신병을 망가뜨릴 거니까.”
“군국을 향한 복수입니까? 하나, 귀하가 직접 언급했듯 통신병을 향한 공격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그녀는 하멜른의 사건 이후 임관하였으며, 애초에 통신병은 하멜른의 사건에 정보관제 이외에는 관여한 바 없습니다!”
나는 IA의 말을 무시한 채 에이비 대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금발을 장식하듯 둘러싸고 있던 덩굴이 손가락에 걸렸다. 물론, 내 손가락은 안개처럼 덩굴을 통과했다. 심상에 물질이 관여할 수는 없었으니까.
‘동조를 깨뜨리기 위해? 하나, 고유마도는 심상의 구현입니다. 타인의 심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같은 동조가 아니면 불가능하며, 그조차도 기억이나 정보를 건네받는 것에 불과한데….’
맞아. 물질은 심상에 관여할 수 없어.
하지만 내 손은 에이비 대위의 마음에는 닿을 수 있다.
덩굴이 끊어진다. 잎사귀가 마른다. 꽃이 시든다.
대화를 나누거나, 몸이 조금씩 닿을 때마다 나팔꽃이 으스러졌다. 가련한 보랏빛을 뽐내던 꽃잎이 시들어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에 기대야만 위를 향할 수 있는 연약한 줄기가 투둑 끊어진다.
‘고유마도가?!’
IA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억을 전해 받기로는, 아이비가 피리 부는 사나이와 접촉한 건 고작 일주일! 그동안 고유마도를 깨뜨린다니?!’
내 행동이 에이비 대위의 주박을 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IA는 다급히 외쳤다.
“이게 귀하가 생각한 복수입니까? 의미 없습니다!”
“뭐 어때요. 어차피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행동이든 의미는 인간이 부여했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해도 된다.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지는 나름이니.
자, 관객은 다 모였나?
방 안에 갇혀있던 통신병들이 거의 다 나왔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퀭한 눈과 오래 누워있던 사람처럼 어색한 걸음, 그리고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것처럼 하얗게 뜬 피부는 모두 똑같았다.
자유를 얻었지만 저들은 고마워하지 않는다. 도리어 눈을 반항적으로 치켜뜬 것이, 왜 자기를 밖으로 불러냈냐고 힐난하는 투다.
통신병은 갇혀있는 게 당연하니까.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아야 하니까. 그것이 의무이니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와 동조하여 기세등등해진 IA는 더욱 날카롭게 외쳤다.
“통신병은 정신오염시킬 작정이라면 단념하십시오. 경고합니다. 정신오염 혹은 타 사유로 업무를 볼 수 없는 경우. 그 통신병은 폐기됩니다! 귀하의 행동은 그녀를 더 위험하게 만들 뿐….”
“더 못 들어주겠군!”
나는 성큼성큼 IA에게로 걸어가서 뺨을 후려쳤다. 짝,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IA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엄청나게 아프지만 얼굴이 상하지는 않게, 손바닥을 펼치고 접촉면을 최대한 넓혀서 가한 일격. 거기다 기습까지 했으니 효과는 두 배.
심리적인 충격을 주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물리적으로 충격을 주는 거지.
“어떻게…! 폐기같은 말을 할 수 있어?!”
다시 한번. 아까는 왼쪽을 때렸으니까 이번에도 왼쪽을 한 번 더.
뺨 때리기만으로 기어코 IA를 넘어뜨린 나는 그녀의 앞에 서서는 씩씩거리며 외쳤다.
“동료잖아?! 비록 며칠 안 되었지만,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계급을 하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잖아! 너희들 멋대로 폐기를 명령하지 마!”
“…?! 그게 무슨?”
생각하게 두지 마. 저쪽은 IA가 대표로 말하고 있지만 25명이 함께이고, 또 500명에 가까운 통신병의 백업을 받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혼자.
이 모두를 정신오염 시키려면….
“에이비 대위가 죽었으면 좋겠어?! 너는 그걸 원하는 거야?”
IA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재능은 통신병 중에서도 굉장히 드문 것. 그녀를 폐기하는 건 군국의 입장에서도 상당한 손실입니다.”
“그게 다야? 동료라고! 결국, 너희 마음대로 동료를 폐기한다는데, 그게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야? 슬픔, 상실감, 혹은 안타까움! 그런 감정이 너희에게는 없어?”
“통신병에게 그러한 감정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허락이고 자시고…!”
내가 격노한 것처럼 외칠 때.
마침 마지막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던 히스토리아가 굳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휴이. 여기….”
“왜?”
“통신병이….”
무엇을 보고 나왔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히스토리아. 나는 짐짓 표정을 굳히고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
“…통신병이 쓰러져 있어.”
“뭐? 일단 밖으로 빼내 줘!”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으로 간이침대를 통째로 끌고 나왔다. 철제 프레임이 벽에 긁혀서 거센소리를 냈다.
어,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히스토리아가 통신병을 멋있게 안고 나오는 모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쨌든 빼내기는 했으니까. 나는 그 위에 누워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는 통신병을 향해 다가갔다. 마지막 방의 통신병, Z는 의식조차 없이 혼절한 채였다.
히스토리아는 누운 통신병의 상태를 보고는 말했다.
“열이 나고 호흡이 가빠. 감기일까?”
“아니. 증상을 보아하니 이건 신내림이야. 군국의 천사를 불러낼 제물이 되는 바람에 앓게 된 거지.”
“신내림? 제물…?”
“그래. 에이메데르. 군국의 수호천사. 육장성 급으로 강력한 존재가 아무런 대가 없이 불러낼 만한 건 아니잖아? 당연히 제물이 필요하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X와 Y를 흘겨보았다. 다른 통신병과는 달리, 그들의 안색은 특별히 창백했다.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잠깐만. 제물이라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이야…?”
“보통 그렇게 되는데, 군국은 또 아주 효율적인 방식을 개발한 모양이야. 목숨까지 끊을 필요는 없는.”
으음. 이걸 쓸 때가 온 건가. 나한테 쓰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귀중한 거지만, 어쩔 수 없지.
손을 팔락여서 카드를 펼쳤다. 이번에 꺼낼 카드는 하트.
마법이 깃든 클로버와 무기로 변하는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하트는 오로지 1회용.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써서는 안 되는 귀중품이다.
하지만 아끼다가는 똥밖에 더 되겠어? 지금이 지를 때야. 나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필요한 하트 카드를 끼웠다.
“동조 마법으로 리스크를 분산한 모양이야. 이들은 여럿이서 하나. 천사를 불러낼 대가마저도 분산한 거야… 다만, 그게 ”
하트는 인간의 육체에 직접 작용하는 것들. 일시적으로 육신을 바꾸는 약물.
하트 1은 피…지만, Z는 빈혈이 있는 건 아니니까 필요 없고. 흠. 지금은 오히려.
9을 꺼내 한쪽 끝을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흔들렸으나, 인내심을 갖고 흔드니 점차 반응이 왔다.
심장을 본뜬 붉은 하트.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야 할 빨간 물감이 내 손길을 따라 점차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림보다는 작은 병에 담긴 액체처럼 보였다.
뭐, 그거지만.
하트 9를 가운데가 살짝 구겨지게 접는다. 그 세로선을 따라, 갈라진 하트에서 새어 나온 빨간 액체가 흐른다. 나는 끄트머리를 살짝 접어 액체를 고이게 한 뒤, 그걸 모두의 앞에 보여주었다.
“이 약이면 이분을 구할 수 있어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지 않나요?”
당연히, 수상쩍은 인물이 건넨 약 따위를 받을 사람은 없다. 그가 조금 전까지 군국을 부수겠다고 공언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Z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Y가 날카롭게 물었다.
“통신병 아이젯은 현재 무력한 상태입니다. 그녀에게 용건이 있다면 대신 본관이 떠맡겠습니다.”
“저는 이분을 치료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대신하시려고요?”
“치료, 말입니까? 그 약이 아이젯을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보장 같은 건 없지만, 이거 하나는 보증해요. 여기 있는 모든 약은 제가 직접 쓰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서 들고 다닐 리 없잖아요?”
팔랑팔랑. Y의 눈이 카드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나를 관찰하는 다른 통신병과는 다르게, Y는 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자. 결정하세요. 어차피 보니까 약을 안 쓰면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은데. 이대로 죽게 두실래요, 아니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 약을 먹일래요?”
통신병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Z가 위험한 상태임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어차피 약을 안 쓰면 죽는다.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약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게 통신병의 공통된 판단.
…그러나 단 두 명. X와 Y만은 순수하게 Z를 구하고 싶었다.
왜냐면 여기서 가장 서열이 낮은 둘 역시, 아이메데르를 소환하기 위해 ‘사용된’ 제물이었으니까. Z에 비하면 타격이 덜하지만, 같은 고통을 느꼈던 제물로써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잘됐네요. 사람이 한 명 필요했는데. 당신, 이 약을 입에 머금어서 환자에게 먹여주시겠어요?”
“…본관이, 말입니까?”
“네. 지금 보니까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라, 자칫하면 기도로 들어갈 것 같거든요. 생각보다 끈적하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기도를 막아버릴 거예요.”
고민은 짧았다. 그게 방법이라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통신병 Y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건네는 카드를 집었다. 나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 맞다. 우리가 천사를 만난 횟수는 총 세 번인데. 다른 두 명의 제물은 누구였죠?”
잠시 움찔한 Y가 주저하며 말했다.
“…본관과, 통신병 아이엑스입니다.”
“신기한 우연이네요? 하필 맨 뒤의 세 명이 나란히 제물이 될 줄이야.”
흘러가듯 말했지만, 나는 은근히 이들의 균열을 짚었다.
통신병에도 서열이 있다. 동조적합성이 높을수록 A에 가까워지고, 그에 비해 손색이 있으면 점차 하위 식별번호를 부여받는다. 더 귀중한 통신병이 가장 나중에 소모된다.
물론, 거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서열이 높은 통신병의 동조능력이 강하니, 하위 서열 통신병의 대가를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 만일 그게 고통을 수반한다면 더더욱.
“그것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IA가 끼어들려는 그 순간, 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환자가 있잖아!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