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RAW novel - Chapter (281)
EP.282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5
그란디오모르 왕가가 지배하는 축복받은 나라, 왕과 기사의 나라인 왕국.
천 년의 영광이 가득한 이 나라에 군웅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민중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평민 출신이면서도 높은 전공을 세워 자유기사로 임명받았고, 잘생긴 외모에 성격도 좋아서 내로라하는 이들과 막역한 관계를 맺었으며, 스무 명의 구혼자를 물리치고 아리따운 영애와 결혼했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행보에 민중은 꼭 자기 일처럼 열광했다.
드높은 명예. 호화로운 무도회. 부와 권력. 평민들이 꿈에도 그릴 수 없는 것들이 전부 그의 것이었다. 목마른 평민들은 그를 보며 갈증 가득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조금 삐뚤어지긴 했어도 그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군웅이 그 모든 영광을 마다하고 하찮은 군인들을 위해 일하기로 했을 때, 그는 모두의 우상이 되었다. 평민들은 그와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왕가의 계획대로.
군웅은 민중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얼굴마담이었다. 원성이 날이 갈수록 커지니, 왕가는 민중의 관심을 모을 대표를 만들기로 했다.
그 비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제법 강하고 인물이 좋은 군웅이 발탁되었다.
군웅에게는 왕가와 기사귀족들의 명령에 따르는 대가로 모든 것이 주어졌다. 드높은 명성, 사랑하는 여인, 안락한 저택까지.
하지만 그는 주어진 모든 게 부담스러웠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감각이 그를 붙잡았다. 아무리 씻어도, 옷을 갈아입어도, 환호하는 시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도 그는 갑갑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를 지켜보는 것은 가난하고 치열하던 시절의 그였으니까. 어디에서도 그는 편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최소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기사가 전장의 주인공인 무대에서 병사들의 역할은 잡부 그 이하였다.
짐꾼이었고, 목수였으며, 노동자다. 미끼이기도, 혹은 서사시를 장식할 몇 마디 글자이기도 했다.
심심해진 기사가 사냥을 나가면 병사들은 냄비와 이불을 들고는 짐승을 쫓았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몸을 찢어발겨도 반격해선 안 되었다. 짐승의 목에 창을 찔러넣는 영광은 오로지 기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사가 짐승을 창으로 꿰면, 죽어간 병사들은 기사들의 무훈을 기리는 노래에나 등장한다.
그런 처지에 놓인 병사들을 안타깝게 여긴 군웅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굶주린 병사를 위해 먹을 것을 마련했고, 악습을 폐지하고, 편제를 조직하고, 물자를 공급했다.
기사의 꽁무니를 쫓는 대신, 기지를 정비하고 길을 닦았으며 수로를 팠다. 대민지원도 꾸준히 나갔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군인이라는 존재가 유명무실해지지 않도록 훈련도 시켰다. 최소한의 무력을 갖추면 손쉽게 소모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전일 근무 가능한 만능 무보수 하인을 민중에게 빼앗긴 기사 귀족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군웅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무마했다. 특히, 거기에는 절친한 친구였던 절창 파트락시온의 덕이 컸다. 군웅의 무력은 빼어났으나 최강은 아니었으니, 절창이 아니었다면 결투당했으리라.
어찌 되었든, 그렇게 군웅은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에게 충실했다. 왕가에게도, 군인들에게도. 그저 성실했을 뿐이다.
후세의 평가와는 달리, 그에게는 왕가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도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책임감뿐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너무 충실했던 나머지, 반란 모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군웅은 왕가를 멸망시키고야 말았다.
잿더미가 된 왕성에서 모두가 환호했다. 부상을 당해 버려진 몰락기사들, 파트락시온을 따르던 기사들, 억압받던 군중과 병사들. 그들은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기뻐했다.
그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군웅은 어두운 생각에 잠겼다.
엉겁결에 일을 저절렀지만, 군웅에게는 나라를 이끌 능력이 없었다.
사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나라를 이끌 능력은 없다. 군웅이 왕보다 조금 더 나은 점은,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군웅은 빠르게 제 주제를 파악했고, 결론을 내렸다. 나라를 이끌 능력이 없다면 잠깐 빌리기로.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속세의 권력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군림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길이 보이리라.
최소한의 혼란을 수습한 군웅은 부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는 길을 떠났다.
군림하나 지배하지는 않는, 신앙의 이름으로 모두를 이끄는 곳.
성황청을 향해.
“…그가, 찾아오고 있어요.”
-그리고, 원견(遠見)의 성녀 유엘은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성황청의 가장 깊은 곳. 오직 성녀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공간. 회색 벽돌 틈으로 갈라진 빛이 스며들고, 처음의 성녀를 기리는 성상이 모두를 축복하는 땅에서.
원견의 성녀는 그를 지켜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진정한 예언자인 처음의 성녀가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 천신교에는 성녀가 나타났다. 출신도, 나이도, 외모도, 능력도 다른 성녀들이었지만 그들에겐 딱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여자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들의 능력이 예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지금 그가 성황청에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건대, 도움을 바라고 성황청에 손을 뻗고자 하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원견의 성녀 유엘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천리안.
앉은 자리에서 세상 모든 것을 보는 힘. 아직 이곳에 도달하지 못한 미래를 보는 눈.
속세에 드러난다면 나라가 요동치고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권능이, 그 작은 몸에 깃들었다. 아직 어린 성녀지만 어쨌든.
대답을 기다리던 유엘은 침묵이 계속되자 의아해하며 시선을 이곳으로 돌렸다. 천 리 밖 대신 아름다운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성상에서 흘러나온 물이 대지를 은혜롭게 적시고, 풀꽃과 덩굴이 아름답게 뛰노는 곳. 성스러우며 거룩하고 경건하기까지 한 비경.
그리고 그곳에, 흑단 같은 머릿결을 가진 소녀가 흔들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화가도 이 풍광을 담아내지 못하리라. 그가 그린 그림에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성스러움이 빠져있을 테니.
정녕 그 자체로 신을 증명하는 듯하다. 천신을 믿지 않는 이라도 절로 무릎을 꿇을 것만 같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건함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태가 예스럽다.
신앙과 믿음이 현현한 광경. 잠깐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불렀다.
“하늘의 성녀시여?”
재차 되묻자, 눈을 감은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절했어요, 유엘.”
하늘의 성녀, 메이엘.
그리 된 이.
잠 든 예언자.
성황청에서도 가장 드높은 그녀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엘에게 험한 꼴을 너무 오래 보였죠?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라서 유엘의 힘을 빌렸어요. 사태는 끝났으니 이제 그에게는 관심을 거두세요. 오로라가 아름다울 계절이니, 북해의 빙해를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
유엘이 그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는 되물었다.
“네? 부, 북해요? 휴식?”
“앗, ‘지금’은 오로라가 생기는 계절이 아니었던가?”
꿈을 꾸는 듯 현실에서 괴리된 말투다.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누군가 들었다면 아직 잠에서 덜 깼나 생각하고 미소를 지으리라.
하나, 상대가 하늘의 성녀라는 상식 밖의 존재라면. 판단의 기준이 바뀐다. 내 상식을 의심하고 그녀를 맹목적으로 믿어야 한다.
왜냐면, 그녀가 본 건 꿈속의 풍경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일 테니까.
“괜찮아요, 유엘. 몇 개월 지나니 유엘도 제 화법에 익숙해졌으니까요. 어찌나 익숙해졌는지, 제게 면박을 다 주지 뭐예요? 그러니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세요.”
“네, 네에….”
아직 어린 유엘은 메이엘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대답했다.
“그러면, 그는 어쩌죠…?”
군웅에 대해 유엘이 우물쭈물 묻자, 메이엘은 싱긋 웃었다. 마치 유엘을 다독이는 듯,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그는 제가 맡아서 처리했어요. 걱정할 문제는 하나도 없어요. 모두, 처음의 성녀께서 점지하신 대로 흘러가니까요.”
자기 의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서 보고 온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형으로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메이엘의 시점에서 과거니까.
달리 말하면, 군웅의 부탁은 이미 ‘거절되었다’. 그가 찾아오는 건 앞으로 일주일 뒤이나, 성황청의 대답은 이미 정해졌다.
“알겠죠, 유엘? 이제 가능한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세요. 필요해서 했지만, 저는 많이 후회했어요. 유엘의 나이를 헷갈려 해서 왕국의 멸망과 왕의 죽음을 지켜보도록 했네요. 아직 어린 유엘에게는 너무 자극적이었을 수도 있어요.”
“어, 하늘의 성녀시여….”
“일주일? 거기서 여기 오는데 더럽게도 오래 걸리네요. 제 귀중한 수명을 일주일이나 쓰게 하다니. 아이 아까워. 그러니 유엘도 자러 가요. 깨워줘서 고맙고요…. 아, 이건 미리 인사한 거예요!”
메이엘은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호의적인 축객령이다. 하늘의 성녀가 취하는 잠을 방해해서는 안 되기에 유엘은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유엘은 정원을 지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늑하고 따뜻하며 풍족한 그녀의 방으로.
방은 총 세 칸이었는데, 가장 넓은 방에는 쓰임새를 추측하기 힘든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보통 같으면 존재 자체를 짐작지도 못할 장난감이나, 유엘이 천리안으로 발견해낸 것들이다. 호기심이 왕성한 유엘은 그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졸랐고, 성황청은 성녀의 요구에 충실히 답했다.
두 번째 방은 책상과 의자가 있는 거실. 물론 그곳에도 오래된 화병이나 기괴하게 생긴 식물, 그리고 세상 곳곳에서 온 귀중한 책이 가득했다. 그나마도 방이 비좁아 유엘이 고르고 고른 것들이고, 나머지는 라키온 대도서관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세 번째 방은 유엘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장소였다. 침실. 그것도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침대가 있는 포근한 방이다. 유엘은 언제나처럼 그 침대에 누웠다.
그 침대는 유엘에게 있어서 작은 세상. 천리안을 가진 유엘은 침대에 누워 삼라만상을 관조한다. 유엘은 천리안의 권능으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엘은 북해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건, 무너진 왕국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과… 이곳으로 박차를 가하던 군웅의 모습이었다. 유엘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거절했어요.’
문득 하늘의 성녀가 했던 말이 유엘의 머리에 떠오르고,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흐려졌다.
“귀하?”
파문이 인다. 에이비 대위의 목소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날 때와 비슷한 기분으로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아아. 깜빡 잠들었나 보네요. 도착했나요?”
“긍정. 단, 귀하가 착지한 뒤에도 반응이 없어 걱정했습니다. 착지의 충격이 컸습니까?”
“그랬나 봐요.”
“기절할 정도였습니까? 혹, 본관이 무거워서…?”
“네.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열심히 하세요. 방에 콕 박혀서 관음만 하니까 살이 찌죠.”
에이비 대위의 건강관리를 위해 피가 되고 살은 안 되는 엄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풀죽은 에이비 대위를 뒤로하고 나는 좌우를 살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빛이 필요하겠다.
“세트, 리. 럭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빛이 나와 통로를 비추었다. 어둡고 비좁은 통로 끝에 돌로 된 문이 보인다.
“저곳이죠?”
“…긍정. 이 광경을, 본관은 통신병 유엘의 기억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분명 이곳이 맞습니다.”
“흠. 딱히 함정은 없어 보이네요.”
하긴, 사령부에 쳐들어와서 이곳까지 뒤져볼 정도면 어중간한 함정은 의미 없겠지. 이런 지하에 함정이 있으면 자기가 더 위험하기도 하고.
어쨌든 체크메이트. 이토록 깊숙한 곳에서는 더 도망칠 곳도 없다. 나든, 군국이든.
나는 돌로 된 문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자자.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으니 문 엽시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독심술로 마음은 읽히는데, 저 사람의 의지는 이곳에 있지 않다. 천사를 조종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독심술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상대의 신경을 나에게로 돌려야 한다. 가만히 두면 히스토리아가 위험하기도 하니, 일단 쳐들어가서 뺨이라도 때려야겠다.
“실력행사합니다. 에이비 대위, 잠깐 비켜 있으세요.”
땅 밑에, 돌로 된 문. 대지술을 쓰기 딱 좋은 조건이지. 양손을 벌려 모퉁이 가까이에 대고 대지술을 썼다. 그것이 대지에 속한 것이라면 가라앉히거나 부상시킬 수 있는 기술. 내 힘이 약해서 싸울 때 쓰기에는 영 느리지만, 무거운 물건을 움직일 때는 이만한 게 없다.
구구궁. 둔중한 진동이 느껴지며, 돌문이 천천히 열렸다.